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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Prince) 편
김경진



2016년 4월 21일, 이 시대의 천재 뮤지션 프린스가 57세라는 안타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져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그의 사망이 발표된 직후 하루도 되지 않아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에는 프린스 관련 포스트가 1억 건 이상 올라왔습니다.



프린스를 기억하는 몇 가지 이야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페이스북을 통해 그를 추모했는데, 오바마의 포스트는 프린스에 대한 정확하고 간결한 평가이자 멋진 애도였습니다.


“오늘, 세상은 창조의 아이콘을 잃었습니다. 미셸과 나는 프린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팬들에 동참합니다. 대중음악에 뚜렷하게 궤적을 남기고 사운드에 영향을 주거나 뛰어난 재능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아티스트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낸 뮤지션으로서, 프린스는 펑크(funk)와 R&B, 로큰롤 등 모든 걸 했습니다. 그는 고도의 기교를 지닌 연주자였고 훌륭한 밴드 리더였으며 관객을 열광시키는 공연자였습니다. 프린스는 전에 ‘강한 영혼은 규칙을 초월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정신도 그보다 더 강하고 대담하거나 창조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기도가 그의 가족, 밴드와 그를 사랑했던 모든 이들과 함께 합니다.”


세상의 모든 규칙과 도덕과 상식을 초월했던 강력한 영혼. ‘프린스는 섹스에 대한 노래를 쓰지 않았다. 그는 섹스 그 자체였다.(Prince didn’t write songs about sex. He was sex.)’라는 촌철살인으로 시작하는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Guardian)’의 4월 22일자 기사는 프린스라는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이루던 중요한 요소를 짚어주고 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프린스는 자신만의 ‘네버랜드’를 간직한 뮤지션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늙지 않는 피터팬과 어린이 친구들이 즐거운 모험을 펼치는 나라가 아니라 흥겹고 아름다운 선율과 생명력 가득한 리듬, 때로 퇴폐적인 숨결과 향취로 뒤덮인, 관능적 사랑을 노래하는 시(詩)와 육체에 깃든 원초적 서정으로 가득한 음악의 세계입니다. 그의 네버랜드에서는 화수분처럼 한계를 모르는 멋진 음악이 끊임없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러운 열매를 툭 따듯 그저 원하는 대로 풍요롭고 향기로운 음악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시간의 흐름과 트렌드의 변화라는 강력한 독성에 쇠약해지거나 무릎을 꿇지 않은 채 ‘변치 않은 젊음’을 표출해온 몇 안 되는 뮤지션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평가는 ‘프린스’ 하면 ‘Purple Rain’을 떠올리고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자웅을 겨루었던 팝 스타라는 인식을 지닌 우리나라의 팝 음악 팬들에게는 조금은 낯선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1980년대를 상징하는 인물이고 그건 이미 한 세대 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2004년 ‘Musicology’ 앨범으로 그래미 어워드에서 2개 부문을 수상하고, 2006년에 ‘3121’로 빌보드 앨범 1위를 차지할 만큼 꾸준한 인기와 왕성한 인기를 누려왔습니다. 엄청난 폭우 속에서 펼쳐진 2007년 슈퍼볼의 하프타임쇼는 그가 21세기에도 건재한 스타임을 보여주는 공연이었습니다.


|Prince – Live 2007 | Super Bowl XLI Halftime Show



지루한 평화보다는 끊임없는 혁명으로 완성한 그의 음악


팝과 록의 역사에서 프린스만큼 다채로운 음악 장르로부터 고른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면에 쌓여온 숱한 소리들을, 그 원형을 흩뜨리지 않은 채 자신만의 틀에서 뒤섞고 버무려 고유한 스타일로 거듭나게 한 아티스트는 더욱 드뭅니다. 기본적으로 R&B의 멜로디 전개와 펑크(funk)의 그루브 및 가창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여기에 더해 록과 팝, 힙합, 재즈와 블루스, 포크, 뉴웨이브와 신스팝, 디스코, 일렉트로니카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요소들이 그가 만들어낸 풍성한 사운드의 골격을 이루어왔습니다. 여기에 지속적인 하이브리드 실험을 통해 소위 ‘미니애폴리스 사운드(Minneapolis Sound)’라는 독창적 스타일로 정립된 프린스 식 펑크(funk)는 80년대에 들어서며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합니다.


펑키한 팝 사운드와 달콤한 소울 발라드, 수려한 멜로디의 기타 팝으로 특징되는 초기의 사운드는 걸작으로 평가되는 세 번째 앨범 [Dirty Mind](1980)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이후 [Controversy](1991)와 첫 빌보드 탑 텐 앨범 [1999](1982)을 통해 그만의 사운드 미학을 완성했습니다. 1984년 앨버트 매그놀리(Albert Magnoli)의 영화 ‘퍼플 레인’의 사운드트랙과 함께 그는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합니다. 영화 속의 프린스의 모습은 숱한 이들을 설레게 했고 그의 밴드 레볼루션(Revolution)과 함께 한 록 성향의 음악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불러왔습니다. 연속 24주 빌보드 1위라는 기록을 세운 이 앨범은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2,000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고 여러 매체에서 선정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과 같은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그만의 음악적 역량을 결집한 다양한 음악을 통해 뮤지션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R.I.P(Rest In Peace) Prince – Purple Rain



프린스를 기억하다


프린스는 생전 그의 음악을 둘러싼 외설과 선정성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는 방법 또한 그의 음악 속 노골적인 가사와 퍼포먼스일지 모릅니다. 실제로 프린스는 두 번을 결혼했지만 결혼생활 외에 영화배우 킴 베이싱어(Kim Basinger)와 셔릴린 펜(Sherilyn Fenn)을 비롯하여 모델 카멘 엘렉트라(Carmen Electra), 그리고 마돈나(Madonna), 시나 이스던(Sheena Easton), 실라 이(Sheila E.), 뱅글스(Bangles)의 수잔나 호프스(Susanna Hoffs) 등 연예계의 수많은 여인들과 사귀거나 염문을 뿌려왔습니다. 더불어 그는 2001년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되어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펼치기 이전까지 자신의 숱한 노래를 통해 ‘섹스’와 그와 관련된 선정적인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모든 논란과 이슈는 ‘뮤지션’으로서 프린스라는 정체성 아래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탁월한 작곡 역량은 물론이거니와 싱어로서, 누구보다 빼어난 실력을 지닌 기타리스트로서, 그리고 기타와 베이스는 물론 다양한 타악기와 색소폰, 키보드 및 신서사이저에 이르는 거의 모든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자신이 의도한 사운드로 그림을 그려가는 뛰어난 프로듀서로서 그는 독창성과 우월한 재능의 측면에서 거의 독보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비욘세(Beyoncé)와 프랭크 오션(Frank Ocean), 벡(Beck), 세인트 빈센트(St. Vincent), 켈리 클락슨(Kelly Clarkson), 레이디 가가(Lady Gaga), 위켄드(The Weeknd),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 디안젤로(D’Angelo), 레니 크라비츠(Lenny Kravitz) 등 프린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 시대 최고의 뮤지션들의 면면만으로도 그가 음악계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짜릿한 흥분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그의 여러 명곡들과 함께 프린스는 영원한 젊음으로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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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보위(David Bowie) 편

데이빗 보위, 화성에서 온 남자 별이 되어 떠나다…




2000년, 영국의 음악지 NME는 20세기 음악인 중 현재의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가 누구인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현직 음악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는데요. 데이빗 보위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의 인생과 위상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입니다. 온갖 장르를 섭렵하되 특정한 스타일과 이미지에 함몰된 적 없는 데이빗 보위의 영향력은 그저 음악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2016년 1월 10일, 그의 부고가 전해진 후 세상의 모든 곳에서 추모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미술, 영화, 패션, 그리고 IT계까지. 그 내용은 그저 한 위대한 록 스타의 죽음을 기리는 것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가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영역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를 설명하고 기렸습니다.


첫 번째 화성인 지구에 상륙하다



|David Bowie – Space Oddity


1966년 포크 록 성향의 셀프 타이틀 앨범으로 데뷔한 그에게 첫 성공을 안겨준 앨범은 1969년 ‘Space Oddity’였습니다. 이 앨범에 실린 동명의 타이틀 곡은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으로 달이 전설에서 현실로 착륙한 직후에 싱글로 나왔습니다. 노래는 자연스럽게 시대의 주제곡처럼 영국 차트 1위, 빌보드 15위에 올랐습니다. 그 후 두 장의 앨범을 더 발표했지만 반응은 기대에 못미쳤습니다.


데이빗 보위는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습니다. 티렉스가 시도한 글램 록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고 이기 팝의 파격을 도입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1972년,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이 앨범은 향후 데이빗 보위가 일생에 걸쳐 선보이는 삶으로부터의 예술과 표현의 토대가 됩니다. 다른 글램 록 뮤지션들이 고작 스모키 메이크업으로 파격을 도모할 때 그는 화성에서 온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페르소나를 내세워 음반의 화자로 삼았습니다. 또한 무대 위에서도 이러한 페르소나로 변신했습니다. 그것은 음악 역사상 전례없던 파격이었습니다. 일찍이 마임을 하기도 했던 보위는 일종의 메소드 연기로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페르소나를 완성한 것입니다. 뮤직 비디오도 없던 시대, 그는 들리는 것 못지 않게 보이는 것 역시 음악의 중요한 요소라는 걸 알고 이를 극대화했던 셈입니다.


창조적 파괴로 소수자를 대표하다




|David Bowie – Starman


이 시도가 그저 시대를 앞서가기만 했다면, 보위는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데이빗 보위는 이러한 시도 속에서 자신의 편에 설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과 통제에 대한 본능이 부딪히던 그 때, 보위를 자신들의 대의자로 받아들인 건 당대의 소수자와 삐딱이들이었습니다. 이 앨범의 대표곡이자 영화 <마션>의 삽입곡으로도 쓰인 ‘Starman’은 그래서 상징적입니다. 모호한 가사지만 보위의 불안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와 구체적인 편곡을 통해 이 노래는 어떤 메시지를 전합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들리는 우주의 목소리,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는 스타맨,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지만 소문은 내지 말 것, 같은 내용들은 사운드와 지기 스타더스트의 비주얼과 맞물려 어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진 아이들의 심리를 자극합니다.


생각해봅시다. 당시의 동성애자 아이들 중 부모에게 커밍아웃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됐을까요? 그들의 억압은 종종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처럼 상상 속의 대화 친구를 만들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병자로 정의하는 결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양성애적 외모로 노래하는 보위의 ‘Starman’은 외계로부터 오는 구원의 사인에 다름 아니었을 것입니다. 설령 동성애자가 아니더라도 학교와 집에서 주입된 성정체성, 예술에 대한 고정 관념 등을 깨부수는 데 충분했습니다. 보위는 그렇게 기존의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 아름답지 않았던 것을 자신의 모든 상상력과 표현력을 동원해서 일반성과 아름다움의 영역으로 한 발자국 끌어들였습니다. 창조적 파괴였던 셈입니다.



|David Bowie – Heroes (A Reality Tour)


그의 창조적 파괴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약물을 끊고 베를린으로 날아가 70년대 독일의 진보적 음악이었던 크라우트 록을 대중적으로 승화시켜 ‘Heroes’같은 명곡을 만들기도 했고 80년대의 화두였던 뉴 웨이브를 받아들여 ‘Let’s Dance’같은 인기곡을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10년의 오랜 침묵을 깨고 조용히 내놓았던 2013년작 ‘The Next Day’는 차트에서의 높은 성적과 비평적 찬사를 모두 거머쥐며 ‘전설의 귀환’이란 문장을 상투적 수식어 이상의 의미로 증명해냈습니다.


Look up here, I’m in heaven



|David Bowie – Blackstar


그의 유작은 ‘Black Star’, 생일이자 죽음을 이틀 남긴 1월 8일 발매됐습니다. 하지만 이 앨범에는 석양이 없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한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체념과 정리, 그로 인한 담담함이 없습니다. 프리 재즈와 아트 팝 등을 통해 그는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음악을 들려줍니다. 죽음을 얼마 안 남겨둔 음악인들의 앨범에서 느껴지는, 마지막 남은 생명을 쥐어짜는 듯한 절박함 비슷한 것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숙의 정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의지로 빛납니다. 그래서 이 앨범의 음악과 그 형식은 유서와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이 시점에서 보자면 삶의 마지막을 받아들인 데이빗 보위가 숨겨둔 데드 메시지들이 담겨 있습니다. 의미심장한 가사들이 그렇습니다.



|David Bowie – Lazarus


마지막 싱글이 된 ‘Lazarus’는 그 정점입니다. 그는 두 눈 부위에 점이 찍힌 안대를 차고 병상 침대에 누워 노래합니다. 기괴한 마임과 이미지들의 시간이 흐릅니다. 곡의 종결부, 보위는 옷장으로 들어가 스스로 문을 닫습니다. 결연한 눈빛으로. 스스로 뚜껑을 닫고 관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그의 부고를 접한 뒤, 뮤직비디오를 돌려보며 영상 속 데이빗 보위의 모습을 떠올려봤습니다. 어떤 숭고함이 느껴지는 장면들입니다. 픽션이 아닌 현실에서 이 경지를 이뤄낸 그의 죽음은, 그래서 여느 록 스타의 그것과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장엄한 비극과 씁쓸한 깨달음 이상의 경외가 듭니다. 언젠가는 떠나갈 이들의 부고에서도 이런 경외는 좀처럼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그가 잠시 머물다 간 이 세계는 그를 그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온 지구의 애도가 있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아이튠즈 차트에 데이빗 보위의 노래들이 대거 진입했습니다. 미국에서 21곡, 영국에서 39곡. 영미 모두 신기록이었습니다. 생전에 한 번도 못해봤던 빌보드 앨범차트 1위는 인류가 바치는 작은 선물이었습니다. 현지시간 11일 저녁, 부고가 전해진지 하루가 지났습니다. 런던 브릭스톤에 만여명의 군중이 모여 들었습니다. 데이빗 보위가 태어나 자란 동네입니다. 그의 생가 근처에 있는 릿지 시네마 간판에는 상영작 대신 ‘David Bowie /Our Brixton Boy/ RIP’라는 문구가 걸렸습니다. 이 극장 벽에 추모객들은 꽃과 애도 메시지를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파티가 시작됐습니다. 극장 안에서, 극장 밖의 거리에서, 그리고 브릭스톤 일대의 펍과 카페에서. 거리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Starman’ ‘Change’ ‘Let’s Dance’같은 노래를 드높이 불렀습니다. DJ가 트는 음악에 맞춰 환호하며 온 몸이 터져라 춤을 췄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랑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 루 리드 등 먼저 떠난 절친들을 만났을 데이빗 보위가 그들에게 더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풍경처럼 보였습니다.


지구는 매년 1월 10일이 되면 밤하늘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가 남긴 음악과 영화를 곱씹으며 한 때 지구에 떨어졌다가 자신의 별로 돌아간 남자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가 남긴 유산과 영감을 계속 발전시켜갈 것입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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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편
최민우


일렉트릭 기타의 모든 것, 지미 헨드릭스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1960년대는 ‘록의 시대’라 일컬어집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비치 보이스 등의 밴드들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록 음악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얻으며 대중음악의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사랑과 평화를 주창하는 히피들이 등장했고,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반전(反戰)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입니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세계관에 반대하고 체제에 반항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그들에게 록 음악은 자신들의 저항의식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습니다. 이른바 ‘록 = 젊음과 저항의 음악’이라는 등식은 이때 나온 것입니다. 오늘 소개할 지미 헨드릭스는 이 록의 시대를 누비며 지울 수 없는 업적을 남긴 천재적 뮤지션입니다.  




가난한 기타 천재의 성공, 혹은 운명

지미 헨드릭스는 1942년 미국 시애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기타가 없던 시절에는 매일같이 빗자루로 상상의 연주를 하곤 했다고 합니다. 14살 때 쓰레기통에서 주운 한 줄짜리 우쿨렐레는 그의 첫 악기였습니다. 다음 해 지미의 아버지는 5달러짜리 어쿠스틱 기타를 선물하였고, 조금 과장하면 이는 일렉트릭 기타의 모든 것을 만들어낸 천재 뮤지션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지독한 연습 벌레이기도 합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머디 워터스와 하울링 울프의 음악을 들으며 기타를 독학했고, 공수부대에서 제대한 뒤에는 여러 뮤지션들의 백 밴드에서 기타를 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군 부대에서도 연습을 너무 많이 해 ‘그만 좀 하라!’는 빈정을 살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에게 기타를 치는 것은 연습이 아닌 그저 즐거움이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했고, 빵 사이 조금의 고기가 있기만을 바라는 힘든 삶이었습니다.


그에게 한 가지 꿈이 있었다면 누군가의 뒤에 선 세션맨이 아닌 자신의 음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재능있는 기타리스트에게 지미 헨드릭스에게 꿈에 다가설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로 그의 재능을 알아본 친구가 영국에서 활동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것입니다. 급조한 록 밴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Jimi Hendrix Experience)’가 결성된 것입니다. 이후, 런던에서 결성된 밴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에서 지미의 재능은 꽃피게 되고, 그가 간절히 원하던 성공을 거머쥡니다. 2년이라는 짧은 밴드 활동 기간 동안 지미 헨드릭스의 명곡은 거의 다 탄생했으니 말입니다. 발표한 싱글들이 잇달아 차트에 진입하고, 데뷔 음반 [Are You Experienced?](1967)기 영국 음반 차트 2위까지 오르는 대히트를 칩니다. [Are You Experienced?] 앨범의 대표곡을 실제로 들어보시죠.



|“Foxey Lady” ([Are You Experienced?])


|“Purple Haze” ([Are You Experienced?])


|“Hey Joe” ([Are You Experienced?])



팝의 야만인, 전설이 되다
밴드의 성공에 큰 몫을 한 것은 지미의 과격한 무대매너와 화려한 패션이었습니다. 세션맨 시절 지미는 밴드의 리더보다 옷을 잘 입는다는 이유로 해고되기도 할 정도로 패션에 남다른 감각을 보였습니다. 언론은 그를 ‘팝계의 야만인’이라 칭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영국 성공을 발판으로 몬테리이 팝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다시 미국으로 입성합니다.
이 공연이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공연 막바지에 기타에 불을 지르는 충격적인 퍼포먼스가 벌어진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미국 대중의 뇌리에 자신의 모습을 선명하게 각인시킨 사건이었습니다. 밴드가 아닌 솔로로서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발에 참가한 지미 헨드릭스는 그의 팬이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파격의 연주를 선보입니다. 미국 국가를 ‘괴상망측하게’ 비틀어 연주한 우드스탁 공연 현장은 그가 전설의 반열로 걸어들어감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입니다.


|Jimi Hendrix – The Star Spangled Banner[American Anthem](Live at Woodstock 1969)


1년 뒤인 1970년 9월, 그는 석 장의 정규 음반을 남긴 채 스물일곱의 나이로 급작스레 세상을 떠납니다. 사망원인은 약물과 알코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무대에서 불태워 쓸 수 없게 된 1965년 형 스트라토캐스터는 2008년 런던 경매 시장에 나와서 무려 24만 파운드(4억1천 만원)에 팔리며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기타의 역사를 새로 쓰다, 파격의 일렉트릭 블루스 록
지미 헨드릭스는 일렉트릭 기타의 영역에서 그 이전까지 누구도 가본 적 없던 길을 걸었던 뮤지션입니다. 생전에 그는 파격적인 무대 매너, 이를테면 기타에 불을 붙이거나 기타 줄을 이빨로 잡아 뜯는 등의 퍼포먼스로 유명(또는 악명)을 떨쳤지요. 하지만 그저 그뿐이라면 그를 ‘기인’이라 부를지언정 ‘천재’라 일컫지는 못하겠지요. 지미 헨드릭스는 블루스와 재즈의 영향이 짙게 밴 독특하고 개성적인 기타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그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놀랍도록 다채로우면서도 종종 몽환적이었고, 즉흥적이고 자유로웠습니다(그는 자신의 연주를 설명할 때 늘 ‘느낌대로 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곤 했습니다). 블루스의 끈적함과 싸이키델릭의 환각, 소울의 그루브를 고루 갖춘 음악이었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음악이 ‘흑인 음악 같지 않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지만, 사실 헨드릭스의 음악은 흑백이라는 경계와 구분을 넘어선 소리였습니다.

|“Little Wing” ([Axis: Bold As Love])


또한 헨드릭스는 록 기타 사운드의 한계를 시험한 뮤지션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피드백(feedback)’이라는 독특한 주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기타와 앰프를 마주보게 하면서 소리를 왜곡시키고 증폭시키는 기법입니다. 헨드릭스의 연주를 들으면서 후대의 록 뮤지션들은 일렉트릭 기타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것을, 마음만 먹으면 이 악기로 온갖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헨드릭스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이펙터를 제작하는데 참여하기도 했고, 오르간용 스피커에 기타를 연결하는 등 해볼 수 있는 건 무엇이건 다 해보려 했지요.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악적으로 ‘죽여주는’ 소리를 들려준다는 건 틀린 음을 연주하는 것과 거의 같다. 맞는 음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음과 정 반대의 음을 연주한다는 얘기다. 피드백을 듬뿍 먹여서 제대로 칠 경우 아주 멋진 소리가 난다. 틀린 음을 아주 진지하게 연주하는 셈이다. 그건 진짜로 재미있다.” 우리가 헨드릭스를 ‘천재’라 부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도전정신 때문일 겁니다. 그는 새로운 걸, ‘틀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자유와 저항의 시대였던 1960년대에, 헨드릭스 역시 자기 음악에서 그 이상을 실현한 셈입니다.


|“Crosstown Traffic” ([Electric Ladyland])


세상을 뜨기 전에 가졌던 한 인터뷰에서, 지미 헨드릭스는 ‘음악 학교에 가고 싶다’는 바람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머릿 속에 굉장히 많은 음악적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데,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아서 그 아이디어를 실현시켜보고 싶다는 것이었죠. 과연 그가 새롭게 펼쳤을 음악은 어땠을까요. 분명한 점은 그가 만들고 싶었던 음악이 어떤 것이었건 간에, 일렉트릭 기타의 역사에서 그가 남긴 음악과 정신은 언제까지고 남아 있으리라는 사실일 겁니다.



지미 헨드릭스의 대표곡 5


1. “Foxey Lady” ([Are You Experienced?]) 

2. “Purple Haze” ([Are You Experienced?]) 

3. “Hey Joe” ([Are You Experienced?]) 

4. “Little Wing” ([Axis: Bold As Love])

5. “Crosstown Traffic” ([Electric Lady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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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G블로그 에디터가 추천하는 ‘천재음악가’
[SSG 음악] 글렌 굴드(Glenn Gould)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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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Glenn Gould, 1932-1982)가 50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글렌 굴드에 대한 관심과 찬사는 굴드의 사후에도 끊이질 않고 있는데요, 많은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피아니스트로 표현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실제로 옥스퍼드의 음악가 사전(Musician Dictionary)에서는 그를 ‘캐나다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작가’로 소개하고 있기도 하죠. 유난히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넘쳐났던 20세기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글렌 굴드를 소개합니다!

 

 

기행과 천재성의 기묘한 관계





우리가 ‘천재’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몇 가지 단상이 있습니다. 사회와 자신을 격리하는 배타성, 편집증에 가까운 괴팍함, 그리고 기존의 틀을 깨는 창의 등. 글렌 굴드의 삶은 마치 이러한 천재의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해 살아왔나 싶을 정도로 영화 속 천재의 삶을 녹여낸 듯한 특이한 일화가 유독 많습니다.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죠.

 

글렌 굴드는 세균 공포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병원에 출입하지 않았고, 스스로 자신의 체온과 수면패턴, 몸의 상태 등을 모두 기록하였죠. 목욕할 때도 장갑을 끼고, 사람들과 악수하는 것을 꺼리고, 한여름에도 두꺼운 코트를 입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세게 악수를 한 사람을 고소하고, 건강상의 이유로 공연을 취소한 적도 많습니다. 항상 수많은 신경 안정제와 항생제를 먹었고, 음식물은 오렌지주스와 비스킷 정도만 섭취했죠. 자신의 최고 전성기였던 32세에 이후 무대에는 단 차례도 오르지 않고, 밀폐된 공간에서 녹음만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기행을 단순히 천재의 이상행동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음악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모든 삶을 통제해 온 굴드의 모습은 음악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성기 때 모든 공연을 중단한 것 역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청중 속에서 완벽한 음악을 전달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음반 속에는 글렌 굴드의 피아니즘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해석과 이를 표현하는 명료한 음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아래 바흐를 연주하는 굴드의 모습에서 황홀경에 빠져 자신만의 피아니즘을 완성해가는 굴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Glenn Gould plays Bach

 

 

글렌 굴드와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 BWV 988)

글렌 굴드를 상징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준 고무의자, 그 앞에 놓인 스타인웨이의 오래된 피아노, 낮은 고무의자에 앉아 기괴한 자세로 피아노를 치는 그의 모습, 자신만의 템포와 해석 방식으로 재탄생 시킨 음악, 그리고 그의 레코딩에 담긴 그의 흥얼거림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러한 굴드의 상징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입니다. 기존의 해석과 연주 방식을 모두 무시하고, 자신만의 템포로 연주하는 글렌 굴드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은 그의 시작과 끝이었지요.

 

괴팍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굴드가 가진 수많은 철칙 중 하나가 한 번 녹음한 음악은 절대 다시 녹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철칙을 깨고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두 번 녹음하죠. 첫 녹음은 1955년 굴드의 데뷔 녹음이었습니다. 1981년 그는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녹음하였고 이는 그의 마지막 레코딩이 되었습니다. 두 음악을 한 번 비교해서 들어보시죠.




 

|JS Bach – Original Handwritten Scores – Goldberg Variations (by Glenn Gould 1955)

 


 


굴드가 1955년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출시했을 때 대부분의 음악평론가들은 ‘미친놈의 연주’라고 혹평했다고 합니다. 굴드가 재해석한 음악은 기존의 모든 해석과 전통을 모두 무시하고, 빠른 템포로 일관되게 연주해 나가기 때문이죠. 20대의 천재 음악가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다른 의미로 ‘미친놈의 연주’가 맞을지도 모릅니다. 현란한 테크닉과 기존의 파괴하는 그의 연주 방식은 엄청난 매혹으로 다가오죠. 26년 뒤, 그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어떤 차이를 느끼셨나요? 우선은 2배 가까이 느려진 템포가 눈에 띕니다. 비범함으로 가득했던 천재가 거장이 되어 비움의 미학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불멸의 거장으로서 남다

글렌 굴드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았고, 생전에 모든 명성을 손에 거머쥔 축복받은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13살에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하며 데뷔하였고, 소개해드린 1955년의 골드베르크 연주곡으로 인기와 명성을 모두 획득했지요, 유럽과 미국 등 가장 명성 높은 음악의 고장에서 한 번도 공부한 적이 없었다는 점은 오히려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해석을 가능케 한 음악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50년의 삶 동안 그는 우울증, 고독, 광기 속에서 살아왔고, 뇌졸중으로 이른 나이에 급작스럽게 사망하였죠. 글렌 굴드의 오랜 친구였던 피터 오스왈드가 쓴 글렌 굴드에 대한 책에는 그가 얼마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는지에 대한 일화가 나옵니다. 무대에 서길 꺼렸던 그였지만, 대화가 통하는 상대와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고, 즉흥으로 연주를 제안하는 그는 생각만큼 괴팍한 예술가인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가 보였던 철저한 삶의 통제는 오히려 음악을 위한 희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굴드가 보여줬던 음악과 삶의 방식은 옳고 그름의 문제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결코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엄청난 열정과 헌신이지요. 이미 생전에 모든 명성을 얻었던 글렌 굴드에 대한 연구가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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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G블로그 에디터가 추천하는 ‘천재음악가’
[SSG 음악] 키스 자렛(Keith Jarrett) 편
#ssg 음악







지난 5월 8일은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Keith Jarrett)이 칠순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제는 전설의 반열에 오른 그이지만 얼마 전 스위스에서 솔로 콘서트를 진행할 정도로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데요. 20세기 재즈음악의 증인이자, 역사가 될 키스 자렛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 큰 영광으로 여겨집니다. 클래식, 재즈, 팝송 등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과 독창적인 연주 세계, 그는 의심할 여지 없는 현존하는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입니다. 하나의 길을 오랫동안 걸어온 거장을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묘한 감흥을 주는데요. SSG블로그가 두 번째로 준비한 천재 음악가 키스 자렛과 함께 재즈의 매력에 빠져보면 어떨까요?

 

키스 자렛, 천재성으로 그의 음악세계를 열다

1945년 필라델피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키스 자렛은 음악 영재였지요. 절대 음악을 가진 그는 일곱 살 때 클래식 연주로 리사이틀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가 재즈에 심취한 것은 고등학생 무렵인데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의 연주를 들은 이후입니다. 이후, 보스턴의 버클리 음대에 진학하며 뉴욕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때 그는 찰스 로이드(Charles Lloyd) 밴드에 영입하게 되는데요. 1968년 찰스 로이드 밴드는 해체하면서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에게 함께 연주할 것을 제의 받습니다. 그의 음악적 천재성이 만들어낸 자연스런 흐름이었지요. 그가 장학생으로 입학한 버클리 음대를 1년 만에 관둔 이유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에게 진짜 교육은 주는 곳은 학교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고, 자신이 몸담고 만나고 있는 당대 음악가와의 교감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1971년 ECM 레이블에서 첫 스튜디오 솔로 앨범 <페이싱 유(Facing You)>를 선보였습니다. 부드럽고 로맨틱한 피아노 선율로 이루어진 그의 데뷔 앨범은 키스 자렛 열풍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렛의 신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최고 앨범으로 회자되는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75년 1월 24일, 쾰른 오페라 하우스에서 피아노 솔로 콘서트를 녹음한 음반 말이지요.

 


퀄른 콘서트, 전설의 반열에 들어서다





추운 겨울, 스위스 취리히의 공연을 마친 후 바로 쾰른에 도착한 자렛은 몸 상태가 꽤 좋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허리가 좋지 않아서 교정기를 착용할 정도였지요. 레스토랑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은 그나마 애교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요? 자렛이 도착한 공연장에는 자렛이 요청한 뵈젠도르프 피아노가 아닌 다른 모델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자렛이 요청한 모델은 뵈젠도르퍼 290 임페리얼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Bösendorfer 290 Imperial concert grand piano)였습니다. 하지만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는 요청한 것보다 훨씬 작은 뵈젠도르퍼 피아노였지요. 자렛이 요청한 것보다 상단부는 작고 얇고, 하단부는 약한 음을 내서 키스 자렛이 추구하는 고음부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율은커녕 페달조차 작동하지 않는 상태였지요. 그가 무대에 오른 것은 피아노 조율을 힘겹게 마친 늦은 밤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즉흥 연주를 시작으로 음반사에 남을 명 연주를 선사했습니다. 최악의 환경에서 그는 고음부를 포기하고, 중저음 중심으로 즉흥연주로 선보인 기념비적인 앨범이지요.

 

 


|Keith Jarrett – THE KÖLN CONCERT

 


오늘날 이 음반을 다시 반복해 들어 봐도, 이토록 아름답고 서정적인 음악이 그렇게 최악의 상황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피아노 즉흥 연주로 무대를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집중력과 힘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과 헌신 없이는 감히 시도하기 힘든 일이지요. 그는 이렇게 용감한 시도를 통해 음악적 성과와 상업적 성공 모두를 거머쥐었습니다.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600만 장 판매량을 올리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피아노 앨범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재즈 초심자가 꼭 거쳐야 하는 하나의 관문이기도 합니다.

 


초지일관, 자신의 길을 걷다

 

 


|Keith Jarrett – Summertime

 


사람들은 왜 이토록 키스 자렛의 피아노에 열광하는 것일까요? 영상은 1984년 도쿄에서의 공연 모습입니다.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곡 <섬머 타임(Summer Time)>인데요. 잘 아는 곡인 만큼 키스 자렛 피아노의 힘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피아노는 재즈를 잘 모르는 사람조차 빠지게 하는 감성과 이미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입증하는 열정을 담고 있습니다. 리듬에 스스로를 맞기며 흥겹게 연주하는 키스 자렛. 분명 그는 <섬머 타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음악가에게 자신의 음악은 음악가 그 자체입니다. 그가 현존하는 전설로 자리매김했다면, 그 비밀은 그의 삶 속에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은 디스코와 록의 시대였습니다. 당시 재즈계도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나 허비 행콕(Herbie Hancock)의 퓨전 밴드가 유행할 정도로 재즈-록 퓨전이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과 무관하게, 일렉트릭 키보드의 시대에 오로지 어쿠스틱 피아노만을 고집했던 인물이 자렛입니다. 어찌 보면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는 음악 트렌드를 거스르는 정반대의 길이었지요. 그는 순수하고 정열적으로 한결같이 피아노만을 탐닉했습니다. 그 속에서 상업적인 음악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감수성과 미묘한 뉘앙스를 포착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음악에만 집중했던 고집이 만들어낸 성과입니다.

 

그의 음악에는 늘 신선하면서도 정직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듣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자유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손길 가는 대로 연주하면 누군가의 방식이 아니라 그만의 독특한 세계가 열립니다. 순간적인 감흥에 따라 다양한 음악 장르를 넘나들지만 피아노와 고독하게 대화하는 법을 잊지 않는 것도 그의 미덕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자렛은 “독창적인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그때부터가 출발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개인적인 감정을 얼마나 잘 표현해낼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에서 그가 평생 추구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와의 아름다운 우정

키스 자렛을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독일의 음반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입니다.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인 1969년 ECM(‘에디션 오브 컨템포러리 뮤직’의 약자) 레이블을 설립한 기념비적인 인물이지요. 그는 기존의 재즈 음악을 클래식처럼 섬세하게 담는 새로운 방식을 추구했습니다. 아이허의 진가는 무엇보다 키스 자렛의 음악에서 ECM뿐만 아니라 재즈의 미래를 봤다는 사실입니다.





아이허는 애틀란틱 레코드에서 재즈 트리오 앨범을 낼 정도로 상한가를 치던 자렛에게 자신의 레이블인 ECM과의 앨범 작업을 수 차례 부탁합니다. 그리고 노르웨이 출신의 색소폰 연주자 얀 가바렉(Jan Garbarek)의 ECM 앨범 <아프릭 페퍼버드(Afric Pepperbird)>(1979)를 자렛에게 보냅니다. 자렛은 이 앨범을 듣고 당시로서는 신생 레이블인 ECM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아이허는 일종의 삼고초려를 통해 자렛을 얻었고, 그에게 게리 피콕(Gary Peacock)과 잭 디조넷(Jack DeJohnette)과의 트리오 앨범을 권했습니다. 이들은 훗날 키스 자렛 트리오의 멤버가 될 멤버들이죠. 하지만 완벽주의자이자 고집쟁이(?)인 자렛은 이를 거부하고 첫 앨범으로 <페이싱 유(Facing You)>를 선택했죠. 그 후, 자렛은 얀 가바렉과 함께 <비롱잉(belonging>(1974)에서 호흡을 맞추었고, 가바렉과 함께 한 두 번째 앨범 <마이 송(My Song)>(1978)으로 히트를 쳤습니다. 프로듀로서의 아이허의 역량이 키스 자렛의 커리어에 미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Keith Jarrett – Questar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 앨범 역시 아이허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습니다. 물론, 이 공연은 자렛의 솔로 즉흥 연주에 대한 고집 덕분에 탄생하였습니다. 이때 유럽 연주 여행을 동행한 것이 아이허였지요. 당시 빡빡하고 무리한 일정은 자렛의 건강을 나쁘게 만든 원인이었지만, 쾰른 오페라 하우스에서 기적의 공연을 놓치지 않고 녹음한 것 역시 아이허이니 말입니다.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 앨범의 성공은 당시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ECM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음악적 동지로서 자렛과 아이허가 이어온 45년의 시간의 시작점입니다. 자렛은 아이허가 소개한 뮤지션과의 작업이나 프로젝트에는 시간이 걸려도 꼭 참여해 연주합니다. 그리고 아이허는 ECM이 추구하는 풍부하고 생생한 사운드로 자렛을 응원합니다. 아이허는 그 누구보다 자렛의 음악을 잘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키스 자렛과 ECM이 오늘날 재즈의 신화로 불리는 것만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요. 자렛 없는 아이허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아이허 없는 자렛도 꿈꿀 수 없습니다.

 


현재진행형의 뮤지션을 위한 찬가





키스 자렛의 칠순을 맞이해 그의 영원한 동지 ECM에서 두 장의 앨범을 선보였습니다. 하나는 2014년 4월부터 7월까지 도쿄, 토론토, 파리, 로마에서 가진 6차례의 피아노 솔로 공연 중 가장 감동적인 연주를 담아낸 <크리에이션(Creation)>입니다. 제목처럼 또 다른 ‘창조’를 꿈꾸는 이 솔로 콘서트 앨범은 2005년 <카네기홀 콘서트(The Carnegie Hall Concert)>나 2011년 <리오(RIO)> 앨범처럼 비교적 짧은 호흡의 연주를 선사합니다.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의 26분짜리 첫 곡 ‘파트 1(Part 1)’처럼 반복적이고 실험적인 테마를 사용하는 긴 음악은 이제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전보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한층 여유가 느껴지니 말이지요. 여전히 사색적이고 깊이 있는 호흡이 생생히 전해집니다. 또 하나는 클래식 앨범 <바버, 바르톡 피아노 협주곡(Barber, Bartok: Piano Concertos)>입니다. 1980년대 중반에 녹음된 곡들은 그가 재즈뿐만 아니라 클래식에 얼마나 심취해 있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가 재즈나 클래식이라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한 뮤지션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두 장의 앨범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이것이 키스 자렛의 음악세계를 제대로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그는 다양한 음악을 마음껏 혼용하기에 단순히 재즈라는 틀로 한정하는 것이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재즈 앨범에서 클래식의 우아함을, 클래식 앨범에서 재즈의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음의 향연을 원하신다면 시쳇말로 ‘완전체’ 키스 자렛을 경험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의 음악을 통해 음악으로 만나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리라는 것만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