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1일, 이 시대의 천재 뮤지션 프린스가 57세라는 안타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져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그의 사망이 발표된 직후 하루도 되지 않아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에는 프린스 관련 포스트가 1억 건 이상 올라왔습니다.
프린스를 기억하는 몇 가지 이야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페이스북을 통해 그를 추모했는데, 오바마의 포스트는 프린스에 대한 정확하고 간결한 평가이자 멋진 애도였습니다.
“오늘, 세상은 창조의 아이콘을 잃었습니다. 미셸과 나는 프린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팬들에 동참합니다. 대중음악에 뚜렷하게 궤적을 남기고 사운드에 영향을 주거나 뛰어난 재능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아티스트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낸 뮤지션으로서, 프린스는 펑크(funk)와 R&B, 로큰롤 등 모든 걸 했습니다. 그는 고도의 기교를 지닌 연주자였고 훌륭한 밴드 리더였으며 관객을 열광시키는 공연자였습니다. 프린스는 전에 ‘강한 영혼은 규칙을 초월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정신도 그보다 더 강하고 대담하거나 창조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기도가 그의 가족, 밴드와 그를 사랑했던 모든 이들과 함께 합니다.”
세상의 모든 규칙과 도덕과 상식을 초월했던 강력한 영혼. ‘프린스는 섹스에 대한 노래를 쓰지 않았다. 그는 섹스 그 자체였다.(Prince didn’t write songs about sex. He was sex.)’라는 촌철살인으로 시작하는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Guardian)’의 4월 22일자 기사는 프린스라는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이루던 중요한 요소를 짚어주고 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프린스는 자신만의 ‘네버랜드’를 간직한 뮤지션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늙지 않는 피터팬과 어린이 친구들이 즐거운 모험을 펼치는 나라가 아니라 흥겹고 아름다운 선율과 생명력 가득한 리듬, 때로 퇴폐적인 숨결과 향취로 뒤덮인, 관능적 사랑을 노래하는 시(詩)와 육체에 깃든 원초적 서정으로 가득한 음악의 세계입니다. 그의 네버랜드에서는 화수분처럼 한계를 모르는 멋진 음악이 끊임없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러운 열매를 툭 따듯 그저 원하는 대로 풍요롭고 향기로운 음악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시간의 흐름과 트렌드의 변화라는 강력한 독성에 쇠약해지거나 무릎을 꿇지 않은 채 ‘변치 않은 젊음’을 표출해온 몇 안 되는 뮤지션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평가는 ‘프린스’ 하면 ‘Purple Rain’을 떠올리고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자웅을 겨루었던 팝 스타라는 인식을 지닌 우리나라의 팝 음악 팬들에게는 조금은 낯선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1980년대를 상징하는 인물이고 그건 이미 한 세대 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2004년 ‘Musicology’ 앨범으로 그래미 어워드에서 2개 부문을 수상하고, 2006년에 ‘3121’로 빌보드 앨범 1위를 차지할 만큼 꾸준한 인기와 왕성한 인기를 누려왔습니다. 엄청난 폭우 속에서 펼쳐진 2007년 슈퍼볼의 하프타임쇼는 그가 21세기에도 건재한 스타임을 보여주는 공연이었습니다.
|Prince – Live 2007 | Super Bowl XLI Halftime Show
지루한 평화보다는 끊임없는 혁명으로 완성한 그의 음악
팝과 록의 역사에서 프린스만큼 다채로운 음악 장르로부터 고른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면에 쌓여온 숱한 소리들을, 그 원형을 흩뜨리지 않은 채 자신만의 틀에서 뒤섞고 버무려 고유한 스타일로 거듭나게 한 아티스트는 더욱 드뭅니다. 기본적으로 R&B의 멜로디 전개와 펑크(funk)의 그루브 및 가창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여기에 더해 록과 팝, 힙합, 재즈와 블루스, 포크, 뉴웨이브와 신스팝, 디스코, 일렉트로니카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요소들이 그가 만들어낸 풍성한 사운드의 골격을 이루어왔습니다. 여기에 지속적인 하이브리드 실험을 통해 소위 ‘미니애폴리스 사운드(Minneapolis Sound)’라는 독창적 스타일로 정립된 프린스 식 펑크(funk)는 80년대에 들어서며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합니다.
펑키한 팝 사운드와 달콤한 소울 발라드, 수려한 멜로디의 기타 팝으로 특징되는 초기의 사운드는 걸작으로 평가되는 세 번째 앨범 [Dirty Mind](1980)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이후 [Controversy](1991)와 첫 빌보드 탑 텐 앨범 [1999](1982)을 통해 그만의 사운드 미학을 완성했습니다. 1984년 앨버트 매그놀리(Albert Magnoli)의 영화 ‘퍼플 레인’의 사운드트랙과 함께 그는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합니다. 영화 속의 프린스의 모습은 숱한 이들을 설레게 했고 그의 밴드 레볼루션(Revolution)과 함께 한 록 성향의 음악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불러왔습니다. 연속 24주 빌보드 1위라는 기록을 세운 이 앨범은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2,000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고 여러 매체에서 선정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과 같은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그만의 음악적 역량을 결집한 다양한 음악을 통해 뮤지션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R.I.P(Rest In Peace) Prince – Purple Rain
프린스를 기억하다
프린스는 생전 그의 음악을 둘러싼 외설과 선정성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는 방법 또한 그의 음악 속 노골적인 가사와 퍼포먼스일지 모릅니다. 실제로 프린스는 두 번을 결혼했지만 결혼생활 외에 영화배우 킴 베이싱어(Kim Basinger)와 셔릴린 펜(Sherilyn Fenn)을 비롯하여 모델 카멘 엘렉트라(Carmen Electra), 그리고 마돈나(Madonna), 시나 이스던(Sheena Easton), 실라 이(Sheila E.), 뱅글스(Bangles)의 수잔나 호프스(Susanna Hoffs) 등 연예계의 수많은 여인들과 사귀거나 염문을 뿌려왔습니다. 더불어 그는 2001년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되어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펼치기 이전까지 자신의 숱한 노래를 통해 ‘섹스’와 그와 관련된 선정적인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모든 논란과 이슈는 ‘뮤지션’으로서 프린스라는 정체성 아래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탁월한 작곡 역량은 물론이거니와 싱어로서, 누구보다 빼어난 실력을 지닌 기타리스트로서, 그리고 기타와 베이스는 물론 다양한 타악기와 색소폰, 키보드 및 신서사이저에 이르는 거의 모든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자신이 의도한 사운드로 그림을 그려가는 뛰어난 프로듀서로서 그는 독창성과 우월한 재능의 측면에서 거의 독보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비욘세(Beyoncé)와 프랭크 오션(Frank Ocean), 벡(Beck), 세인트 빈센트(St. Vincent), 켈리 클락슨(Kelly Clarkson), 레이디 가가(Lady Gaga), 위켄드(The Weeknd),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 디안젤로(D’Angelo), 레니 크라비츠(Lenny Kravitz) 등 프린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 시대 최고의 뮤지션들의 면면만으로도 그가 음악계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짜릿한 흥분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그의 여러 명곡들과 함께 프린스는 영원한 젊음으로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