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핫 플레이스 ‘인왕산’
1편. 인왕산, 한양의 ‘랜드 마크’가 되다
김 석
#김석기자
높이 338미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과 서대문구 현저동, 홍제동에 걸쳐 있는 산. 온몸이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위산이 훤한 이마를 드러내고, 기이한 모습을 한 갖가지 바위가 곳곳에 숨어 있는 자연 돌조각 공원.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한양 도성을 품 안에 가만히 끌어안은 산.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철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산. 경복궁 서쪽 마을 서촌에 깃든 화가와 문인, 건축가들에게 지금도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상상의 샘. 이름에 임금 왕(王) 자를 품은 몇 안 되는 산. 경복궁 근처에 가면 어디서도 얼굴을 볼 수 있는 바로 그 산.
임채욱, <인왕 1607>, 66.7×100cm, 한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6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 인왕산을 담다
조선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산은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림으로만 보자면 단연 1위는 금강산입니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던 2007년에 저도 방송뉴스 취재를 위해 네 차례 금강산에 다녀온 기억이 있는데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하는 노래가사가 왜 나왔는지 알만하더군요. 그 명성에 걸맞게 가는 곳마다 절경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조선 시대에 금강산 유람은 풍류를 아는 이라면 평생에 꼭 해야 할, 요즘 말로 하면 ‘버킷 리스트’의 맨 꼭대기를 차지했다지요. 그래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같은 조선 최고 화가들의 그림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거고요.
그렇다면 금강산 다음으로 많이 그려진 산은 어디일까요? 네, 바로 인왕산입니다. 사실 궁금했어요. 금강산이야 원체 이름난 명산이니 그렇다 쳐도, 그다음 자리가 어째서 인왕산인가 하는 싶었거든요. 거리가 가까워서? 거리로만 따지면 경복궁 뒤편에 늠름하게 서 있는 북악산도 있고 남산도 있고, 좀 멀게는 관악산, 낙산, 북한산, 도봉산도 있잖아요. 도성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이렇게도 좋은 산이 많은데 왜 유독 인왕산 그림만 많은 걸까요. 전국 팔도강산에 하고많은 명산이 즐비한데 어째서 화가들은 줄기차게 인왕산을 그렸을까요. 궁금증을 풀어줄 첫 단추는 아래에 소개해드릴 그림 한 점입니다.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비단에 엷은 채색, 79.2×138.2cm, 국보 제216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너무나도 유명한 걸작 <인왕제색도>입니다. 서울 살면서 인왕산 한 번 안 가본 사람은 많아도, 이 그림을 한 번도 못 본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인왕산을 넘어 조선 시대, 아니 우리 미술의 역사를 대표하는 산 그림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보시다시피 인왕산입니다. 겸재 이전에는 인왕산을 이렇게 화면 중심에 세워놓고 그린 화가가 없었습니다. 작게나마 인왕산을 산수화 귀퉁이 어디쯤에 그려 넣은 화가도 없었고요. 겸재 이전의 화가들은 우리 산천을 그리겠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찾아가서 직접 보고 그리는 사생(寫生)의 전통도 물론 없었고요. 당시만 해도 화가들은 대부분 중국의 유명 화보집을 보고 베끼면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좋은 그림의 모범 사례가 모두 그 안에 있었으니, 구태여 조선의 산을 그릴 필요조차 없었던 게지요. 그래서 화가들이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린 산은 다르게 말하면 ‘천상계의 산’이었습니다.
그걸 ‘지상계’로 끌어내린 조선 최초의 화가가 바로 겸재 정선이었습니다. 흔히 겸재를 진경산수화의 창시자라고 하지요.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實景)를 바탕으로 가장 참된 풍경(眞景)을 그려낸 걸 말합니다. 실제와 똑같이 그린 게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보듯 산의 진정한 모습을 그렸다는 뜻입니다. 다른 화가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대 혁신을 이룬 겁니다. 오늘날 <인왕제색도>가 당당히 국가의 보물로 대접받는 이유는 우리 산을 독자적인 진경산수 화풍으로 더없이 아름답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 하나로 인왕산은 명실상부 한양의 ‘랜드 마크’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인왕제색도>의 인왕산 주봉 부분. 봉우리 윗부분이 잘려 답답한 모습입니다.
원래 그림에 당연히 여백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면, 후대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그림 윗부분이 잘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인왕제색도>를 더 유명하게 만든 건 그림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겸재가 76살 되던 1751년 둘도 없는 벗이었던 시인(詩人) 사천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지요. 그림과 시로 한평생 우정을 나눈 ‘절친’이었으니, 만년의 겸재에겐 얼마나 큰 슬픔으로 다가왔을까요. 그 애통한 마음을 담아 비 갠 직후의 인왕산을 그리는 데 모든 것을 쏟아부어 <인왕제색도>라는 불멸의 걸작을 완성했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극적인 명작 탄생의 비화입니까. 한 편 드라마 같은 이야기 덕분에 <인왕제색도>는 ‘신화’가 됩니다.
스토리텔링을 무척이나 강조하는 시대이지요. 불세출의 걸작에 그럴듯한 이야기까지 곁들여졌으니 더 귀하게 느껴질 밖에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이야기는 ‘오해’가 낳은 산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인왕제색도>가 그려진 시기는 1751년 윤5월 하순입니다. 양력으로 7월, 장마철에 해당하지요. 사천이 그 무렵에 죽었다면 이야기가 들어맞습니다. 그런데 미술사학자 한 분이 한산 이 씨 족보를 뒤져보니 사천 이병연의 사망일은 그보다 훨씬 이른 1월 4일이었습니다. 사천이 죽은 시기와 겸재가 그림을 완성한 시기에 차이가 있다는 얘기지요. 그렇다고 해서 <인왕제색도>의 예술적 가치가 퇴색되는 건 아닐 겁니다.
인왕산, 그 이름에 담긴 역사
겸재 정선 필(筆), <인왕산도>, 18세기, 종이에 엷은 채색, 62×104cm, 개인 소장
이 그림을 혹시 보신 적 있으신가요?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전하는 <인왕산도>입니다. 개인 소장품으로 지금까지 공개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더군요. 인터넷을 뒤지면 사진이 한두 장 보입니다. 비단 아닌 종이에 인왕산 일대를 조금 더 넓은 시야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리기 훨씬 전인 오십 대에 이 그림을 그렸을 걸로 봅니다. 두 그림을 통해 겸재가 어떻게 자신의 화풍을 완성시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건데요. 아무래도 원작을 직접 보지 않고는 판단하기 어렵겠지요. 다만 이상한 건 왼쪽 상단의 그림 제목에 인왕산의 왕 자가 임금 왕(王)이 아닌 왕성할 왕(旺)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인왕산도>보다 훨씬 뒤에 그려진 <인왕제색도>는 임금 왕(王)을 썼습니다.
여기서 인왕산이란 이름의 유래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경복궁 서쪽에 있는 산이라 해서 서봉(西峯) 또는 서산(西山)으로 불렸다고 해요. 그러다가 세종 때 처음 인왕산이란 이름을 짓습니다. 인왕(仁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다른 이름입니다. 궁궐 바로 옆 산에 인왕사(仁王寺)를 짓고 산 이름도 인왕으로 바꿔 조선왕실을 수호하려는 깊은 뜻을 담은 거지요. 그 뒤 조선 중종 때는 필운산(弼雲山)이란 이름도 나타납니다. 중종 32년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조선을 방문하자 중종은 인왕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때 명의 사신이 제안한 이름이 필운산입니다. 조선왕실을 돕는 좋은 구름이 피어나는 산이라는 뜻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김탁환의 소설 <허균, 최후의 19일>을 보면 인왕산이 아닌 필운산이란 이름만 씁니다. 왕이 부탁해서 명나라 사신에게 받아낸 이름이니 아마도 공식적으로는 ‘필운산’이란 이름을 주로 쓰지 않았나 합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주로 인왕산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임금 왕(王) 대신 왕성할 왕(旺)으로 표기가 바뀝니다. 왕(旺) 자는 임금 왕(王) 옆에 날 일(日)이 붙은 모습이지요. 일제(日)가 조선 왕실(王)을 짓누르는 상징으로 삼으려 대놓고 글자를 바꾼 겁니다. 산 이름도 창씨개명을 당한 거지요. 이런 글자가 <인왕산도>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인왕산도>는 정녕 겸재의 그림이 맞는 걸까요?
정선, <수성구지>, 종이에 수묵, 52.9×87.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어찌 됐건 겸재 정선이 그린 걸로 전해지는 인왕산 전경 그림은 <인왕산도>와 <인왕제색도> 두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겸재는 인왕산 전경뿐 아니라 마치 카메라로 클로즈업하듯 인왕산의 숨은 비경들을 그림으로 남깁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장동팔경첩>이라는 그림 모음집인데요. 장동(壯洞)이란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효자동, 청운동 등을 포함하는 옛 이름입니다. 지리적으로 북악산 계곡부터 인왕산 남쪽 기슭까지인데요. 조선 후기에 이름난 세도가들이 모여 살던 곳이자 겸재 자신의 살던 곳이기도 하지요. <장동팔경첩>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에 각각 한 부씩 소장돼 있습니다.
더 가까이서 인왕산을 보다
(좌) 정선, <청풍계>, 1730년, 종이에 채색, 96.2×36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우) 정선, <청풍계>, 1739년, 종이에 엷은 채색, 153.6×59cm, 간송미술관 소장
위 그림은 인왕산 계곡의 하나였던 청풍계(淸風溪)를 그린 겁니다. 간송미술관 소장본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 같은 제목의 그림이 수록돼 있는데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도 <청풍계>란 작품이 소장돼 있습니다. 위의 왼쪽이 1730년에 그려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본이고, 오른쪽이 그보다 늦은 1739년에 완성된 간송미술관 소장본입니다.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나무나 바위의 위치가 거의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른쪽 간송본은 겸재의 장동팔경 그림 가운데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큰 작품입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인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은 어느 글에서 이 그림에 대한 감회를 다음과 같이 써 놓았습니다.
온 폭에 거의 하늘의 공간을 남기지 않은 대담한 화면 포치법과
스산스러우면서도 어딘가 호연한 시심이 넘나드는 독특한 분위기가
뭉클한 감명을 안겨 주는 것은 아마도 정을 다해서 길들인
우리 산하의 실감에서 오는 감상인지도 모른다.
(좌) 정선, <필운대상춘>, 1740~1750, 비단에 엷은 채색, 27.5×33.5cm, 개인 소장
(우) 정선, <필운대>, 1751년경, 종이에 엷은 채색, 29.5×33.7cm, 간송미술관 소장
물론 화첩으로 묶이지 않은 것들 중에도 겸재의 인왕산 그림은 꽤 많습니다. 인왕산 남쪽 자락의 필운대(弼雲臺)는 장안에서 손꼽히는 꽃놀이 명소였다고 하지요. 벚꽃 핀 것만 봐도 괜히 가슴이 설레는 게 사람 마음이니, 그 시절에 풍류하면 지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경치 놓은 필운대 바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따사로운 햇살에 취하고 봄꽃 향기에 취합니다. 남쪽으로는 저만치 남산과 꼭대기 소나무 한 그루까지 그렸습니다. 애국가 2절의 바로 그 ‘남산 위의 저 소나무’입니다. 오른쪽 작품 역시 필운대 그림입니다. 왼쪽 것과는 반대로 남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위에서 내려다보듯 바위를 묘사해 놓은 작품이지요.
겸재의 그림, 인왕산의 과거와 현재를 잇다
사직단 부근에서 서촌과 인왕산 일대 답사를 시작한다면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 중 하나가 바로 필운대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잘 아는 ‘오성과 한음’의 바로 그 오성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집터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원래 임진왜란 때의 명장 권율 장군의 집터였는데, 사위인 이항복이 물려받았다고 해요. 필운(弼雲)은 이항복이 호(號)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도, 집터도 살필 수가 없습니다. 필운대의 흔적 역시 누추하게 귀퉁이만 남은 바위뿐이고요. 그나마 바위에 새겨진 필운대 세 글자가 남아 옛 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게 해줍니다. 겸재가 필운대를 그리지 않았다면 옛 모습은 영영 알 길이 없었을 겁니다.
필운대로 들어가는 진입로 왼쪽에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안내판의 그림은 오래돼서 그런지 지워져 있더군요. 그 자리에 있던 그림이 바로 앞에서 소개한 겸재의 <필운대>입니다. 문화재 안내판에 특정 화가의 그림을 함께 넣는 건 퍽 이례적인 일이지요. 사진이 없던 시절에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을 담아내는 유일무이한 시각 매체였습니다. 겸재가 그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림에 묘사된 옛 장소들을 까맣게 모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겸재를 기점으로 인왕산은 비로소 의미 있는 역사의 무대가 되었고, 지금도 수많은 답사객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으니까요. 인왕산 일대 답사를 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겸재의 그림을 붙여 놓은 안내판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좌) 옥인시범아파트 (우) 복원된 수성동 계곡
안내판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왕산 기슭에서 인왕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어요. 바로 수성동 계곡입니다. 서울 중심가에 이토록 호젓한 계곡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름난 명소가 됐지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인왕산 아랫마을의 경관은 한 마디로 엉망이 됐습니다. 수성동 계곡 역시 예외는 아니었겠지요. 1971년에 계곡 좌우로 옥인시범아파트 9개 동이 들어서면서 수려했던 풍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40년 세월이 지난 2012년에야 난개발의 상징이었던 아파트를 철거하고 계곡 일대를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옛 모습을 되살립니다.
수성동 계곡에는 우리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의 숨결이 서려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입니다. 안평이 누군가요. 무릉도원을 다녀오는 기이한 꿈을 꾸고 나서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安堅, ?~?)으로 하여금 조선 회화 사상 불멸의 걸작으로 꼽히는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장본인입니다. 문화 예술에 뛰어난 안목을 가진 풍류객으로도 명성이 높았지요. 왕이 될 수 없었던 안평은 바로 이곳 수성동 계곡 위쪽에 집을 짓고 아버지 세종이 지어준 비해당(匪懈堂)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계곡 입구에서 서 있는 안내판만이 먼 옛날 이곳 어디쯤에 안평의 거처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지요.
(좌) 정선, <수성동>, 1751년, 비단에 엷은 채색, 33.7×29.5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복원된 기린교
수성동 계곡을 복원한 1차 근거는 바로 겸재의 그림입니다. 수성동 계곡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에도 겸재의 그림이 붙어 있고요. 그림 왼쪽 아래에 작은 돌다리가 놓여 있는 것이 보이지요. 기린교(麒麟橋)라는 이름을 가진 이 다리는 수성동 계곡과 함께 복원돼 옛사람이 남긴 흔적을 더듬어보게 합니다. 고작 작은 돌다리일 뿐인데도 그것이 주는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역사와 문화와 예술이 깃든 수성동 계곡은 이렇게 호젓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만일 겸재가 없었다면 수성동 계곡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요. 선구적인 화가 한 사람이 남긴 그림이 260여 년이 흐른 뒤에 이토록 의미 있는 변화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는 점. 이것이 바로 시대를 초월한 예술의 힘 아닐까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