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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김 석
#김석기자


2018년 3월 7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평창동 서울옥션 경매장. 근래 보기 드물게 경매 현장은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국내를 대표하는 미술품 경매회사 서울옥션의 새해 첫 메이저 경매였던 만큼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지요. 올 한 해 미술 시장의 경향과 판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날 경매는 다른 때와 달리 조금 더 특별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그림 한 점이 있었거든요. 8년 만에 경매에 등장한 이중섭의 소 그림입니다.


2018년 3월 경매에 출품된 이중섭의 <소>


우리나라에서 소 그림 하면 대번에 이중섭을 떠올릴 정도로 소는 이중섭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소재입니다. 대부분 종이에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 것들로,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아 희소성도 아주 높지요. 이중섭은 짧은 생애 동안 다양한 소 그림을 남겼는데, 소의 자세를 보면 머리가 화면 왼쪽을 향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위 작품은 드물게 소의 머리가 화면 오른쪽에 놓여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앞으로 돌진할 듯 솟아오른 어깨와 쫙 벌어진 다리, 솟아 말린 꼬리 등을 보면 영락없는 싸움소의 모습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소의 머리와 몸통, 바닥에 채색된 붉은 물감은 바로 격렬한 싸움의 흔적, 다시 말해 피 흘린 자국입니다. 이중섭의 소 그림으로는 이례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가장 최근에 이 작품이 공개된 건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이중섭, 백년의 신화> 특별전이었습니다.


그때 선보인 작품이 경매에 나왔으니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요. 더구나 근 8년 만에 경매에 등장한 이중섭의 주요 작품이었으니까요. 경매 순서는 31번. 경매 현장의 열기가 서서히 고조될 무렵 드디어 이날의 주인공이 경매 현황판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팽팽한 긴장감과 술렁거림이 교차하는 순간, 18억 원에서 경매가 시작됩니다. 모두들 숨을 죽인 채 경매 진행 상황을 예의주시했습니다.



2018년 3월 7일에 진행된 이중섭 <소> 경매 영상 (서울옥션 제공)



이중섭의 <소>가 세운 두 가지 기록


막판까지 예측할 수 없는 치열한 주고받기 끝에 최종 낙찰 가격은 47억 원. 이중섭의 작품 가운데 역대 최고가 기록을 다시 쓴 순간이었습니다. 이옥경 서울옥션 대표는 “한국 근대 미술의 저력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경매로, 근대 작가들의 위상이 다시금 재평가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47억 원 낙찰이라는 기록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됩니다. 8년 전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됐던 이중섭의 <황소>는 35억 6,000만 원에 낙찰되며 당시 작가 최고가 기록을 세웠지요. 이 기록이 8년여 만에 깨졌습니다. 당시보다 12억여 원 높은 가격에 말이에요.


작가의 새로운 기록을 만든다는 것, 그것은 금전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작가와 작품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재조명하는 기회를 만듭니다. 작가의 새로운 가격 기록이 세워지는 데는 5년이 걸릴 수도, 10년이 걸릴 수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중섭의 이번 작품은 2010년 이후 8년 만에 세워진 기록이었고, 아주 오랜만에 이중섭의 좋은 작품을 소개한 좋은 기회였기에 경매 준비부터 기대가 컸습니다.


이번 작품은 추정가가 20억에서 40억 원 사이로 책정되어 있고, 이전 <황소>의 기록이 있었던 터라 추정가 내에서 낙찰될 것으로 예상을 하고 경매를 진행했습니다. 시작가가 높았던 터라 호가를 1억 원씩 진행했는데, 생각보다 치열한 경합에 금액은 순식간에 30억까지 올라갔고, 그 뒤부터 1억씩 올라가면서 정말 새로운 기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올라가는 기분이었습니다. 36억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제가 부르는 호가 하나하나가 새로운 기록을 쓰고 있었습니다.


관객들도 직원들도 모두 숨죽이며 상황을 지켜보았고, 경매를 진행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제 손끝으로 한국 미술시장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설레었습니다. 여러 명의 응찰자가 치열한 경합을 벌이며, 때로는 높은 금액에 고민하고 망설이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다시 패들이 올라갈 때 관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지고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었습니다.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던 시간은 결국 47억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작품, 그 가치를 매기는 것은 결국 그 작품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경매사를 하면서 경매의 순간을 즐기게 되는 이유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작품의 가치는 작가와 작품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번 결과를 통해 이중섭이라는 작가와 작품을 많은 이가 다시금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작가의 새로운 기록을 만든다는 것, 그것은 금전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작가와 작품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재조명하는 기회를 만듭니다. 작가의 새로운 가격 기록이 세워지는 데는 5년이 걸릴 수도, 10년이 걸릴 수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중섭의 이번 작품은 2010년 이후 8년 만에 세워진 기록이었고, 아주 오랜만에 이중섭의 좋은 작품을 소개한 좋은 기회였기에 경매 준비부터 기대가 컸습니다.

이번 작품은 추정가가 20억에서 40억 원 사이로 책정되어 있고, 이전 <황소> 의 기록이 있었던 터라 추정가 내에서 낙찰될 것으로 예상을 하고 경매를 진행 했습니다. 시작가가 높았던 터라 호가를 1억 원씩 진행했는데, 생각보다 치열한 경합에 금액은 순식간에 30억까지 올라 갔고, 그 뒤부터 1억씩 올라가면서 정말 새로운 기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고 올라가는 기분이었습니다. 36억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제가 부르는 호가 하나하나가 새로운 기록을 쓰고 있었습 니다.

관객들도 직원들도 모두 숨죽이며 상황 을 지켜보았고, 경매를 진행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제 손끝으로 한국 미술시장 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설레었습니다. 여러 명의 응찰 자가 치열한 경합을 벌이며, 때로는 높은 금액에 고민하고 망설이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다시 패들이 올라갈 때 관객 석에서는 탄성이 터지고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었습니다.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던 시간 은 결국 47억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작품, 그 가치 를 매기는 것은 결국 그 작품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경매사를 하면서 경매의 순간을 즐기게 되는 이유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작품의 가치는 작가 와 작품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번 결과를 통해 이중섭이라는 작가와 작품을 많은 이가 다시금 돌아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위) 종전에 작가 최고가 작품이었던 이중섭의 <황소>

(아래) 2010년 <황소> 경매 기록



11년 만에 박수근의 <빨래터> 넘어섰다


또 하나는 이중섭의 그림이 이번 경매를 통해 박수근의 기록을 뛰어넘었다는 점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2007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박수근의 <빨래터>가 45억 2,000만 원에 낙찰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나 엄청난 화제가 됐습니다. 당시 유례없는 경기 호황은 미술계에도 큰 호재로 작용했지요. 유명 화가들의 작품 가격이 나날이 치솟으면서 과열 양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 정점을 찍은 ‘사건’이 바로 박수근의 <빨래터>가 경매에서 세운 사상 최고가 낙찰 기록이었고요.


2007년 경매에서 국내 최고가를 기록한 박수근의 <빨래터>


하지만 그때를 정점으로 미술시장은 다시 긴 불황에 빠져듭니다. 2010년 이중섭의 <황소>가 경매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적잖은 기대감을 품었습니다. 이중섭의 <황소>라면 혹시 박수근의 <빨래터>를 넘어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침체에 빠진 미술시장에 반전의 계기가 마련되지 않을까. 하지만 불황의 늪은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황소>는 <빨래터>보다 10억 원 가까이 낮은 금액에 낙찰됐지요. 그 이후로 이중섭의 작품이 박수근의 기록을 넘어서는 데만 무려 1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만약 이중섭의 <황소>가 2010년이 아닌 지금 경매에 나온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이중섭과 박수근. 우리는 이분들을 ‘국민화가’라 부릅니다. 그만큼 두 화가의 그림들은 우리 국민에게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아 왔어요. 예술품의 가치를 무작정 돈으로만 환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림이 ‘국민화가’란 이름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 건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적어도 국내에서는요. 더구나 두 화가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주요 작품들은 이미 미술관이든 어디에든 죄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만한 수준의 새 작품이 나타나길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최근 이중섭의 <소>가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한 요인은 무엇입니까?


이중섭의 걸작인 소 시리즈 중 하나라는 미술사적 가치와 희소성, 2015년부터 17년까지 3년간 경매시장이 1,700억~1,900억 원대로 회복되어 시장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점, 최고가의 기준이 높아졌고 김환기 작품이 65억 원을 넘어 고가 시장이 열려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침체됐던 우리 미술시장이 성장세로 돌아섰다는 신호로 봐도 될까요?


단색화, 김환기에 대한 수요 증가와 포스트 단색화 및 민중미술에 대한 관심까지 커지며 이미 호조세로 전환 되어 있습니다. 미술사적 가치와 투자 가치가 있는 작가의 작품에 대해 시장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것이죠.

올해 우리나라 미술시장 전망, 어떻게 보십니까?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화랑 시장, 아트페어 시장, 경매시장은 2017년과 비슷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장르별, 작가별, 지역별 차이는 클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이중섭의 <소>가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한 요인은
무엇입니까?

이중섭의 걸작인 소 시리즈 중 하나라는 미술사적 가치와 희소성, 2015년부터 17년까지 3년간 경매시장이 1,700억~1,900억 원대로 회복되어 시장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점, 최고가의 기준이 높아졌고 김환기 작품이 65억 원을 넘어 고가 시장이 열려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침체됐던 우리 미술시장이 성장세로 돌아섰다는 신호로 봐도 될까요?

단색화, 김환기에 대한 수요 증가와 포스트 단색화 및 민중미술에 대한 관심까지 커지며 이미 호조세로 전환 되어 있습니다. 미술사적 가치와 투자 가치가 있는 작가의 작품에 대해 시장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것이죠.

올해 우리나라 미술시장 전망, 어떻게 보십니까?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화랑 시장, 아트페어 시장, 경매시장은 2017년과 비슷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장르별, 작가별, 지역별 차이는 클 것으로 보입니다.



2017년 K옥션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의 작품


2017년 K옥션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의 작품 <고요>


2017년 4월 서울 강남구 K옥션 경매에서 단연 화제가 된 그림은 김환기의 <고요(Tranquillity) 5-IV-73 #310>이란 작품이었습니다. 김환기 화백이 세상을 떠나기 꼭 1년 전인 1973년 미국 뉴욕 체류 시절에 그린 이 대형 전면 점화의 낙찰가는 무려 65억 5,000만 원. 역대 한국 미술품 사상 경매 최고가 기록을 다시 쓰는 순간이었습니다. 가로 205㎝, 세로 261㎝ 크기로 밤하늘의 은하수를 연상시키는 푸른 점과 직사각형 흰색 띠가 특징이지요. 더구나 파랑은 김환기를 대표하는 색상이기도 합니다.


2016년 11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역대 최고가에 낙찰된 김환기의 작품 <노랑>


그로부터 불과 6개월 전, 홍콩에서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 등장한 김환기의 작품 역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지요. <12-V-70 #172>란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화면 전체가 노란색으로 가득 채워진 전면 점화입니다. 세로 2.36m, 가로 1.73m에 이르는 대작으로 1970년에 김환기 화백이 뉴욕에서 그린 그림인데요. 유화물감을 썼으면서도 먹이 번진 것 같은 고유의 미감이 살아 있는 작은 점들이 화폭을 빼곡하게 채운 작품입니다. 앞에서도 설명 드렸듯이 파랑을 주조로 하는 김환기의 다른 점화와 달리 노랑은 희소성이 높습니다. 이 작품은 4,150만 홍콩달러, 우리 돈 63억 2,626만 원에 낙찰되며 한국 미술품 역대 최고가 기록을 세웁니다.


(좌) 2016년 6월 K옥션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에 낙찰된 김환기의 작품 <파랑>

(중) 2016년 4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최고가 기록을 세운 김환기의 작품 <무제>

(우) 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사상 첫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의 작품 <최초>


김환기가 김환기를 넘어서는 역전극은 2016년 내내 국내 양대 미술품 경매사인 서울옥션과 K옥션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접전 양상으로 펼쳐집니다. 2016년 6월 K옥션 여름 경매에서 김환기의 전면 점화 <27-VII-72 #228>(왼쪽 그림)이 54억 원에 낙찰되며 국내 경매 사상 최고가 낙찰 기록을 다시 세웁니다. 불과 두 달 전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의 또 다른 전면 점화 <무제>(가운데 그림)가 세운 역대 최고가 48억 6,750만 원(3,300만 홍콩달러)을 가볍게 넘어선 거죠.


돌이켜 보면 김환기 열풍의 출발점은 2015년 10월 서울옥션의 홍콩 경매였습니다. 김환기 화백이 1971년에 제작한 전면 점화 <19-Ⅶ-71 #209>(오른쪽 그림)는 당시 3,100만 홍콩 달러, 우리 돈 47억 2,100만 원에 낙찰되는데요. 이로써 2007년 경매에서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가 세운 역대 최고가 경매 기록이 8년 만에 깨지게 됩니다. 불과 2년 사이에 김환기의 그림이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된 겁니다.



더 중요한 건 해외에서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가던 시기와 맞물려 실로 일찍이 한국 미술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열풍’을 타게 된 거지요. 위의 표를 보면 10위 안에 김환기의 작품이 8점입니다. 이중섭과 박수근이 각 한 점씩이고요. 경매 시기로 보면 박수근의 <빨래터>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2015년 이후에 시장에서 높이 평가받은 것들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국민화가들의 작품 가격은 더 오를 거라는 점, 만약 최초로 100억 원 시대를 여는 작가가 탄생한다면 그 주인공은 김환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합니다.



추상에서 구상으로…김환기 시대가 열렸다


(좌) 2018년 3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40억여 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항아리와 시>


그런 면에서 지난 3월 29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40억여 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위 작품을 더 주목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시장을 지배한 김환기의 작품은 1970년대 초반에 미국 뉴욕에서 그린 ‘전면 점화’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이었지요. 김환기의 ‘추상미술’은 거듭되는 경매를 통해 탄탄한 시장 경쟁력을 입증합니다. 그런 만큼 앞으로 또 다른 작품이 시장에 나온다면 지금보다 더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한 작가의 작품이 시장에서 탄탄한 신뢰를 구축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김환기 추상 예술의 토대요 뿌리가 되는 뉴욕 시절 이전 작품에 대한 관심까지도 자연스럽게 커지고 있는 것이지요. <항아리와 시>는 우리의 토속적 정서를 대변하는 달항아리와 매화가 그려진 ‘구상미술’ 계열의 작품입니다. 게다가 화면 오른쪽에는 서정주의 시가 한글로 쓰여 있고요. 전면 점화와 달리 한국이라는 지역성이 강한 이런 작품까지 해외에서 기대 이상의 좋은 반응을 끌어낸 건 퍽 의미 있는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환기의 구상 작품이 최근 경매에서 전면점화 못지않은
높은 가격에 낙찰될 수 있었던 요인은 뭘까요?

표면적으로는 양질의 전면점화 품귀현상이겠지만, 내면적으로는 다소 시들해진 단색화 열풍을 감안하여 소장가들이 시장에 내놓기를 회피하는 소극성이 더 크게 작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트바젤홍콩에 꾸준한 한국 주요 갤러리의 참여, 서울옥션 홍콩법인 등 국내 현대미술 작가와 작품의 긍정적 측면을 어필하는 계기를 꾸준히 이어온 점이 해외의 주요 컬렉터에게 보이지 않는 신뢰감을 형성한 점도 10년 전인 2007년의 과열 현상과 차별화를 유도했다고 판단됩니다.

김환기의 작품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우선 단색화 열풍과 무관하게 폭넓은 작품의 성향을 구비했기 때문일 겁니다. 더불어 구상 위주의 탄탄한 국내 내수시장의 지지기반과 뉴욕 시절의 감성적 표현주의의 추상적 조형어법까지 겸비하여 글로벌 마켓의 수요층을 동시에 충족시켜주고 있지요. 더욱이 환기미술재단을 비롯해 국내 굴지의 미술관 및 갤러리, 경매사 등의 지속적인 지원 활동이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거로 보입니다.
즉, 미술시장 측면과 동시 미술사적인 비중을 함께 키워나가는 좋은 사례로 볼 수 있겠습니다.

한국 미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앞으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보다 입체적이고 전방위적인 협업이 필요하겠죠. 특정 작가의 작품가격을 높이는 것보다, 그의 작가적 비중을 높여주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상승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미술관과 갤러리, 평론계, 미디어, 기업 및 소장가 등이 동시에 작가에 대한 조명을 병행해야 합니다. 특히 제도적, 행정적 제도 개선으로 건전한 미술품 소비문화 확산과 장려 정책 역시 빼놓을 수 없겠지요. 또한, 원로/중진작가와 젊은 유망작가의 세대 간 간극을 좁히는 연계성 지원 프로그램도 중요하겠습니다.

김환기의 구상 작품이 최근 경매에서
전면점화 못지않은 높은 가격에
낙찰될 수 있었던 요인은 뭘까요?

표면적으로는 양질의 전면점화 품귀현상이겠지만, 내면적으로는 다소 시들해진 단색화 열풍을 감안하여 소장가들이 시장에 내놓기를 회피하는 소극성이 더 크게 작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트바젤홍콩에 꾸준한 한국 주요 갤러리의 참여, 서울옥션 홍콩법인 등 국내 현대미술 작가와 작품의 긍정적 측면을 어필하는 계기를 꾸준히 이어온 점이 해외의 주요 컬렉터에게 보이지 않는 신뢰감을 형성한 점도 10년 전인 2007년의 과열 현상과 차별화를 유도했다고 판단됩니다.

김환기의 작품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우선 단색화 열풍과 무관하게 폭넓은 작품의 성향을 구비했기 때문일 겁니다. 더불어 구상 위주의 탄탄한 국내 내수시장의 지지기반과 뉴욕 시절의 감성적 표현주의의 추상적 조형어법까지 겸비하여 글로벌 마켓의 수요층을 동시에 충족시켜주고 있지요. 더욱이 환기미술재단을 비롯해 국내 굴지의 미술관 및 갤러리, 경매사 등의 지속적인 지원 활동이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거로 보입니다.
즉, 미술시장 측면과 동시 미술사적인 비중을 함께 키워나가는 좋은 사례로 볼 수 있겠습니다.

한국 미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앞으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보다 입체적이고 전방위적인 협업이 필요하겠죠. 특정 작가의 작품가격을 높이는 것보다, 그의 작가적 비중을 높여주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상승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미술관과 갤러리, 평론계, 미디어, 기업 및 소장가 등이 동시에 작가에 대한 조명을 병행해야 합니다. 특히 제도적, 행정적 제도 개선으로 건전한 미술품 소비문화 확산과 장려 정책 역시 빼놓을 수 없겠지요. 또한, 원로/중진작가와 젊은 유망작가의 세대 간 간극을 좁히는 연계성 지원 프로그램도 중요하겠습니다.



어느 유명 화가의 그림이 수백억, 수천억 원에 팔렸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해외토픽을 장식하고는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럼 우리는?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에요. 한국에서 태어난 게 불행이자 원죄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하지만 이제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으로 시작한 이 글의 제목은 잘못 붙인 것이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미술도 이제는 세계무대에서 얼마든지 통할 수 있고, 또 실제로도 통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했으니까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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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이런 완벽한 밥은 어떻게 짓는거죠?
정동현
#정동현




배가 불러 더 이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뒷 주방을 바라보며 디저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다찌에 앉아 스시를 먹은 지 1시간 남짓 흐른 때였다. 광어로 시작해 도미, 전복, 성게알, 제철을 맞은 방어까지, 갖가지 생선을 올린 스시에 쉴 틈이 없었다. 느긋한 포만감이 찾아왔다. 그 후에는 자리를 뜨고 싶은 성급한 마음이 들었다. 간만의 부산이었다. 해운대 인근에 있는 스시집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는 아까웠다.


“서비스 괜찮으십니까?”


실장이란 배지를 단 요리사가 나에게 갑자기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네”라고 답했다. 안경을 쓰고 팔뚝이 굵었던 그는 주방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보였다. 아마 50대 중 후반쯤 되었을까?


“솥밥이 조금 남아서요.”


부산 사투리로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리던 그는 솥을 앞에 두고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스시를 쥐기 전 요리사들이 으레 하는 몸동작이었다. 그다음 그는 얼음물에 두꺼운 두 손을 담그더니 바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 속에 손을 넣었다. 갓 지은 밥을 쥐기 위해 얼음물로 손을 차갑게 식힌 것이었다. 그리고 흔히 보는 삼각형으로 밥 모양을 잡고 김으로 밑을 받쳐 나에게 건넸다.





“소금물로 지은 오니기리(주먹밥)입니다.”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밥과 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주먹밥이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주먹밥에 비해 크기도 꽤 컸다. 나는 그 주먹밥을 잠시 바라봤다. 밥알 깨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밥과 밥 사이를 잇는 전분기도 없었다. 자세히 보니 하얀 쌀눈도 보였다.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습기에 김이 눅눅해질 것 같았다. 그대로 밥을 입에 넣었다. 한 입을 베어먹고 나는 다시 그 밥을 바라봤다. 놀라운 식감이었다. 소금물로 밥을 지어서일까? 살짝 단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밥알에 탄력이 있었다. ±1의 오차도 없이 간은 완벽했다. 뭉쳐진 밥은 입속에서 밥알 하나하나로 자연히 흩어졌다. 솥에서 익힌 밥이 버금은 구수한 향이 코로 빨려 들어갔다. 식감과 향, 간이 모여 하나의 감각으로 변했다. 쾌감이었다. 나는 놀라서 요리사를 바라봤다. 그는 다른 손님과 이야기 하며 웃고 있었다.


“이 밥을 어떻게 지은 거죠?”


나는 굳이 그 요리사를 불러 물었다. 그는 여전히 웃으며 답했다.


“쌀 종류는 고시히카리입니다. 쌀도 중요하지만 프로세스도 중요합니다. 씻기, 불리기, 물기 제거, 밥물 잡기, 불 세기, 뜸 들이기, 이 모든 게 딱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그는 우문에 현답을 하듯 답했다. 맞는 말이었다. 세세한 노하우가 모여야 사람의 감각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결과물이 나온다. 나는 더 설명을 청하지 않았다. 대신 그 주먹밥을 묵묵히 씹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밥이란 무엇일까? 한국 식당과 일본 식당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밥맛이라고 한다. 일본 식당에 가면 밥맛 없는 곳이 드물다. 우리가 식사하는 것을 '밥' 먹는다라고 말하듯이 한국인의 식단에서 여전히 밥은 제일 중요하다. 영양소 측면에서는 주된 탄수화물 공급처이며, 맛의 구성에 있어서도 가장 기본이 된다. 그림으로 치자면 하얀 캔버스와 같다. 특별한 맛이 없는 듯 보이지만, 밥맛이 없으면 전체 그림이 제대로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려면 밥이 제일 중요하다. 그럼 어떤 쌀을 골라야 할까? 그것을 알기 위해선 쌀의 가공 방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쌀 겉면은 하얗다. 이유는 도정을 하면서 겉을 깎아내서 그렇다. 쌀 외피는 쌀 내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그 외피를 깎아내는 순간부터 순수한 탄수화물에 가까운 '쌀'은 쉽게 산화된다. 오래된 쌀로 밥을 하면 맛이 산뜻하지 않고 쉰 맛이 나는 게 바로 그것 때문이다. 좋은 쌀을 고르기 위해서는 첫째, 도정일이 가까워야 하고, 둘째 부서진 쌀이 없는 완전미의 비율이 높아야 한다. 쌀이 부서져 있으면 속의 전분이 쉽게 빠져나와 밥을 지으면 입에서 풀어지지 않고 떡져서 식감이 떨어진다. 쌀의 품종도 중요하다. 사실 어떤 품종을 고르는가는 기호의 문제다. 그보다 ‘혼합미’라고 적힌 쌀을 고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품종의 구분 없이 종합미곡처리장에서 쌀을 섞어 가공했다는 뜻이다. 애초에 품종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과정을 거친 쌀이 좋기는 쉽지 않다. 이제 정말 밥을 지어보자.





요즘 나오는 전기밥솥은 첨단 과학의 산물이다. 굳이 가마솥 타령을 하지 않아도 가정에서는 차고 넘친다. 그보다는 밥을 짓는 과정이 중요하다. 쌀은 차가운 물에 세 번 정도 씻는다. 이때 너무 박박 씻으면 겉면에 상처가 나서 좋지 않다. 예전처럼 불순물이 섞이는 경우도 적어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 쌀은 한 시간 정도 불려서 쓰는 게 가장 좋다. 그보다 오래 불리는 것도 좋지 않다. 목욕을 오래 하면 피부가 불듯이, 쌀도 마찬가지다. 오래 놔두면 잘 익기야 하겠지만, 표면이 뭉개져서 밥의 식감이 좋지 않다. 드디어 밥물을 맞출 차례다. 밥물 맞추는 게 가장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불리지 않은 쌀은 1:1.2, 불린 쌀은 1:1로 밥물을 맞추면 실패하는 법이 없다. 이것은 손맛이 아니라 화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화학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레시피를 보면 밥을 지을 때 소금을 넣거나 물 대신 육수를 쓰기도 한다. 분명히 소금을 넣거나 다시 국물을 쓰면 맛이 달라진다. 특히 소금을 넣게 되면 쓴맛이 덜해지고 잡맛을 제거해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도 쌀의 경우에는 소금을 넣는 레시피가 많다. 그 이유는 한국 쌀보다 기름기가 훨씬 적기 때문에 밥이 심심하게 느껴지기 쉽기 때문이다. 뜸을 들일 때 코코넛 밀크를 섞는 레시피가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 중에서 밥을 맛있게 먹는 방법 하나만을 말하라고 한다면 답이 있다. 바로 그때그때 밥을 짓는 것이다. 식당 밥이 맛없는 이유는 쌀이 너무 익어서 그런 것이다. 식은 밥을 낼 순 없으니 밥을 보온기에 넣어두는데 그 열에 밥은 계속 익는다. 그 시간 동안 신선함과 윤기, 수분은 사라지고 찰기만 남아서 마치 군내 나는 떡이 되고 만다. 무엇보다 갓 지은 밥의 향기가 사라진다. 쌀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그때 그때 밥을 짓는다면 최소한 몇 시간 지은 밥보다는 맛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뜸을 들이고 밥이 완성되면 바로 밥을 잘 섞어주자. 밥 속에 갇혀 있던 여분의 수증기가 밖으로 나와 밥이 뭉치는 것을 막는다. 이것으로 밥 짓기는 끝이 난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우리가 전기밥솥 스위치 한번 누르고 마는 그 행위 속에 무수한 디테일이 숨어 있다. 일본에서는 밥을 제대로 지을 때 쌀을 100번 씻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쌀에 붙은 전분기를 확실히 제거한다. 그래야 쌀알과 쌀알이 붙지 않고 낱알이 살아 있다. 솥 위에 엄청난 무게를 더해 압력을 높이기도 한다. 그러려면 깨진 쌀알이 없는 완전미여야 한다. 그러지 않을 때 오히려 전분이 쉽게 새어 나와 밥 전체를 망치게 된다. 계절에 따른 쌀알의 건조 정도도 밥물 잡기에 영향을 미친다. 이 모든 조건, 레시피와 조리 예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디테일이 합쳐졌을 때, 우리는 밥 한 숟가락에 눈을 뜨고 기뻐하게 된다. 깊이 알면 알수록, 몰입할수록,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하얀 쌀밥, 우리가 삼시 세끼 먹는 그 밥에도 깊고 넓은 신비가 담겨 있다. 그래서 알면 알수록 입이 무거워진다. 알면 알수록 고개가 숙어진다. 알면 알수록 부끄러움이 많아진다. 이는 밥뿐만이 아닐 것이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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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화가들의 핫 플레이스 ‘인왕산’
2편. 역사와 예술을 품은 인왕산
김 석
#김석기자


500년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이었던 경복궁 위로 고개를 내민 작지만 늠름하기 이를 데 없는 산. 한양의 주산(主山)인 백악산(북악산)입니다. 해발고도가 342m에 불과해도 동쪽의 낙산(타락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남산(목멱산)과 함께 한양을 감싸 안은 내사산(內四山) 가운데 가장 높답니다.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한양을 대표하는 산의 지위를 누린 건 백악산이었지요.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송두리째 불에 타 폐허가 되자 상황이 달라집니다. 주인 없이 터만 남은 궁궐 뒤에 쓸쓸히 서 있던 백악 대신 인왕산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한 겁니다.


(좌) 정황, <청풍계>, 18~19세기, 모시에 엷은 채색, 22.7×16.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장시흥, <창의문>, 18세기 후반, 종이에 엷은 채색, 19×15.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런 시대 분위기에 정점을 찍은 인물이 바로 화성(畫聖 : 그림의 성인, 즉 매우 뛰어난 화가를 높여 이르는 말)으로 추앙받는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었고요. 인왕산을 한양의 ‘랜드 마크’로 만든 것은 전적으로 겸재의 유산이었습니다. 인왕산 구석구석을 그림으로 남긴 것은 물론 인왕산 전경을 최초로 화폭에 아로새긴 화가 또한 겸재였으니까요. <인왕제색도> 덕분에 인왕산은 국보에 그려진 최초의 산이라는 영예를 누리게 되지요. ‘인왕산 화가’ 하면 겸재를 꼽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겁니다. 생전에도 그랬고 사후에도 겸재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풍이 크게 유행하면서 그를 따르고 본받은 화가들이 ‘겸재 화파’를 이룹니다. 겸재의 그림 솜씨를 물려받은 손자 정황(鄭榥, 1735∼?)의 <청풍계>는 겸재의 그림과 구별이 안 될 만큼 꼭 닮았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장시흥(張始興, ?~?)이라는 화가가 그린 <창의문>입니다. 청와대를 지나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을 지금은 자하문 고개라고 많이들 부르지요. 자하문은 창의문의 별칭이었습니다. 인왕산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 능선은 창의문을 기점으로 백악산으로 다시 솟구쳐 오릅니다. 역시 낙관만 가리면 영락없는 겸재의 그림입니다.



인왕산 전경을 담은 또 하나의 그림


강희언, <인왕산도>, 종이에 엷은 채색, 36.6×53.7㎝, 개인 소장


겸재 이후 인왕산 전경을 그린 화가가 또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중인 화가인 담졸 강희언(姜熙彦, 1738~?)입니다. 위 그림이 강희언의 <인왕산도>인데요. 한눈에 봐도 겸재의 <인왕제색도>와는 확연히 다른 화풍이 눈에 띄지요.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역시 인왕산의 당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일 겁니다. 겸재의 인왕산은 실제 경치와 분명히 다릅니다. 실제와 똑같이 묘사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해 가장 인왕산다운 인왕산을 그렸으니까요. 반면 강희언의 그림을 보면 산세는 물론 인왕산을 끼고 이어진 한양도성과 산 아랫마을까지 꼼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 위에서 사선으로 물결치듯 죽죽 뻗어 내려간 골짜기의 묘사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전통 한국화에선 볼 수 없었던 원근법을 적용했다는 점일 겁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 글씨에 “늦은 봄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며(暮春登桃花洞 望仁王山)” 그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직접 찾아 나선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지금의 창의문 쪽 백악산 중턱에서 그린 것으로 봤어요. 500~6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볼 때 인왕산의 전모가 한눈에도 적절하게 포착된다는 겁니다. 이태호 교수는 “강희언 그림에서 현대적인 기품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라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화면 아래 흰 안개도 그렇지만 하늘을 마치 수채화 그리듯 시원하게 채색했다는 점이에요. 이 부분은 강희언의 직업과 연결해서 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강희언은 열일곱 나이에 천문 지리 분야인 음양과에 급제한 뒤 관상감에서 관원으로 일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기상청 직원 출신 화가라고 할까요. 자신보다 63살이나 많은 겸재와 이웃에 살며 그림을 배웠지만, 제자는 스승의 유산에 서양화풍을 과감하게 접목합니다. 그림 왼쪽 상단에 당시 예술계의 큰 어른이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평가가 적혀 있습니다.



寫眞境者 每患而使乎也圖 而此幅 旣得十分逼眞 且不失畵家諸法
(진경을 그리는 자는 그림이 지도와 같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충분히 사실적이고 또한 화가들의 여러 화법을 잃지 않았다.)



겸재가 좋아 인왕산을 그리게 한 시인


겸재 정선과 같은 시대를 산 인물 가운데 권섭(權燮, 1671~1759)이란 분이 있습니다. 명문세가 출신임에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 이름은 덜 알려졌지만, 우리 문학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시인이지요. 지금까지 전해오는 한시만 3,000수가 넘는다고 하는데요. 권섭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삼연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문하에서 화가인 겸재 정선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나이 차도 5살밖에 안 됐고요. 두 사람의 돈독한 친분을 보여주는 시 한 편이 남아 있습니다. 제목은 ‘정선에게(寄鄭元伯)’입니다.



2002년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 출품된 《옥소북악십경》 (사진제공: 서울옥션)


권섭은 생전에 겸재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꼭 갖고 싶은 겸재의 그림이 있으면 손자에게 같은 구도로 다시 그리게 해서 화첩으로 묶어 간직했을 정도니까요. 그 손자가 권신응(權信應, 1728~1786)이란 화가입니다. 2002년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권섭의 작품으로 소개된 《옥소북악십경》이란 8폭짜리 화첩이 출품돼 관심을 모았는데요. 당연히 권섭이 직접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손자를 시켜서 그린 게 아닐까 합니다. 《옥소북악십경》을 자세히 검토한 미술평론가 최열 선생은 화풍으로 볼 때 권신응의 그림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인왕산이 등장합니다.


권신응, <청풍계>,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화면 맨 위에 가는 먹선 두어 개로 쓱쓱 그어나간 능선 위에 한자로 인왕산(仁王山) 세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습니다. 산수화에다가 구체적인 지명을 써넣은 대표적인 화가가 겸재 정선이었지요. 다분히 겸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도에 지명을 써넣은 당시의 경향을 흡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지도가 아닌 그림에 인왕산 이름이 적혀 있는 사례로는 극히 이례적이지요. 그 왼쪽 아래 커다란 바위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적혀 있습니다. 지금도 인왕산에 가면 볼 수 있는 백세청풍 바위의 글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글씨를 가져와 새겼습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더 유명한 인왕산 청풍계는 당시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안동 김씨 장동파, 즉 장동김씨의 땅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백세청풍 각자를 새긴 김상용은 인왕산 쪽에, 형보다 더 유명했던 동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인왕산이 바라다보이는 백악산 쪽에 살았습니다.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김상헌은 고달픈 타향살이 속에서 인왕산을 그리워하는 시를 씁니다.



필운산(弼雲山)은 인왕산의 옛 이름입니다. 떠나온 집을 그리는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아무튼,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가 깃든 터전이었으니 도성 안에서 얼마나 풍광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알만하지요. 기왕 김상헌의 형 김상용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보다 앞선 시기에 청풍계를 그린 작품을 한 점 더 볼까요.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성호기념관에 <청풍계첩(靑楓契帖)>이란 주목할 만한 시화첩이 소장돼 있습니다. 광해군 12년인 1620년 봄에 인왕산 청풍계(靑楓溪) 태고정(太古亭)에서 이름난 문인 7명이 모여 봄을 즐기고 시를 지어 책으로 묶습니다. 이런 모임을 계회(契會)라고 하는데, 계회를 기념하는 그림 한 점이 함께 수록돼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인왕산 그림을 만나다


성호기념관 소장 《청풍계첩》에 수록된 인왕산 청풍계 그림


왼쪽으로 인왕산 아래 개울이 흐르고 그 옆에 초가집이 한 채 고고하게 서 있지요. 김상용의 집 태고정(太古亭)입니다. 이곳에서 모임을 연 겁니다. 정작 집주인인 김상용은 다른 지방에서 벼슬을 살고 있어 모임에는 함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모임에 참석한 인물은 모두 7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병조판서 이상의(李尙毅, 1560~1624)라는 분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계회를 연 뒤 시와 그림을 두루마리에 묶어 참석자들이 한 부씩 나눠 가졌습니다. 이런 두루마리를 계축(契軸)이라고 합니다. 다른 두루마리는 모두 사라지고 이상의 소장본만 집안에 대대로 전해집니다.


(좌)백세청풍 각자 (우) 김상용 집터 표석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상의의 증손자가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입니다. 이익은 ‘경서청풍계첩후(敬書淸楓溪帖後)’라는 글에서 두루마리의 그림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1736년에 원본을 똑같이 그리게 한 뒤 원래 두루마리였던 것을 첩(帖), 그러니까 책의 형태로 바꿨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결국 <청풍계첩>에 수록된 위의 그림은 17세기에 그려진 원본을 18세기에 다시 그린 거지요. 그렇다고 해도 이 그림의 가치가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인왕산 청풍계를 그린 유일한 작품일 뿐 아니라, 겸재 정선보다 시기적으로 무려 120년이나 앞서기 때문입니다. 청풍계 역시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김상용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을 뿐이지요.


권신응, <옥류동>,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다시 권신응의 그림을 더 볼까요. 《옥소북악십경》 가운데 <옥류동>이란 작품에도 인왕산(仁王山) 세 글자가 선명합니다. 그 아래로 죽 내려오면 또 다른 세 글자가 보이는군요. 수성동(水聲洞)입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 덕분에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된 바로 그 수성동 계곡입니다.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진 것만 봐도 당시에 얼마나 이름난 명승지였는지 알 수 있지요.


(좌)권신응, <삼계동>,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우)권신응, <수문루>,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이 밖에도 《옥소북악십경》에는 크든 작든 인왕산이 등장하는 그림이 더 있습니다. 왼쪽 그림의 삼계동(三溪洞)은 지금의 부암동, 그러니까 서울미술관과 석파정이 있는 그 일대 땅의 옛 이름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수문루(水門樓)>입니다. 오른쪽 아래로 보이는 문은 홍지문(弘智門)이고, 그 왼편에 수문 다섯 개가 나란한 구조물은 오간수문(五間水門)입니다. 문루 위에 적힌 세 글자는 한북문(漢北門)으로 홍지문의 다른 이름이고요. 조선시대에는 인왕산 능선을 타고 뻗은 한양도성이 부암동으로 내려와 홍지문까지 이어졌지요. 멀리 북한산 문수봉이 우람하고, 가깝게는 홍제천이 굽이굽이 흐르는 이곳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었던 모양입니다. 화면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인왕산 바위가 흔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옥계시사와 임득명의 인왕산 그림


인왕산 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살며 서당 훈장 노릇을 하던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이란 분이 있습니다.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으로 가난했지만 글 좋아하고 시를 무척 잘 썼다고 하지요. 조선의 문예군주로 불리는 정조가 서얼과 중인 출신 인재들을 대거 등용해 규장각에서 일하게 한 사실은 유명합니다. 조선 중앙관청의 하급관리인 경아전(京衙前), 특히 규장각 서리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 바로 인왕산 기슭의 옥계(玉溪), 즉 옥류동(玉流洞) 일대였어요. 천수경을 중심으로 시 짓고 풍류 즐기는 이들 13명이 의기투합해 1786년 7월 16일 시 모임을 결성합니다. 옥계시사(玉溪詩社)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임득명, <등고상화>, 《옥계사수계첩》, 종이에 엷은 채색, 24.2×18.9㎝,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그 해에 옥계시사 동인들은 자신들의 시와 그림을 엮어 책을 꾸밉니다. 현재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옥계사수계첩(玉溪社修禊帖)》인데요. 여기에 옥계시사 동인이었던 화가 임득명(林得明, 1767~?)의 그림 4점이 전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그림이 12폭이었다고 하는데 8점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전해지는 그림 4점 가운데 인왕산 그림 한 점은 각별하게 주목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임득명의 <등고상화(登高賞華)>는 인왕산에서 즐기는 봄꽃놀이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요. 갈지자(之)로 흘러내리는 능선을 따라 붉은 꽃이 활짝 피어나 보기 드문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지요. 인왕산의 봄을 대표하는 그림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임득명이라는 화가가 남긴 흔적은 더 있습니다. 옥계시사 결성 5년 뒤인 1791년에 꾸며진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에 임득명의 그림 11점이 수록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지요. 이 시첩은 현재 영국 국립도서관(The British Library)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빛을 못 보다가 한국사학자 정옥자 교수가 《조선후기 중인문화연구》라는 책에 자세한 내용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인왕산의 야경을 그린 단원 김홍도


김홍도, <송석원시사 야연도>, 1791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6×31.8cm,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이 만들어진 그해에 모임에 초청받은 전문 화가들이 또 다른 그림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그중 하나가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송석원시사 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입니다. 난데없이 왜 송석원시사로 이름이 바뀌었냐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옥계시사 결성을 주도한 천수경은 나중에 자신의 호를 송석원(松石園), 송석도인(松石道人)으로 바꿉니다. 옥계시사와 송석원시사는 결국 같은 모임으로 시기에 따라 명칭이 달리 불린 것뿐입니다.


제목에서 보듯 이 작품은 밤 그림입니다. 조선 정조 때인 1791년 6월 15일 유두날 밤,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서 열린 시 모임을 그린 작품이지요. 달빛 그윽한 밤에 당대의 시인과 문사 9명이 초가집 앞의 너른 뜨락에 앉아 풍류를 즐기고 있습니다. 문인들의 고상한 모임을 그린 이런 그림을 아회도(雅會圖), 또는 아집도(雅集圖)라고 부릅니다. 이 모임에 초청받은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고, 당대의 서예가였던 미산 마성린(1727~1798)이 시를 썼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 모임을 그리게 할 정도로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마성린이 쓴 시의 내용처럼 여름밤의 아스라한 분위기가 깊은 운치를 자아내지요. 김홍도가 46세에 그린 이 작품은 한껏 무르익은 그 시대의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인문, <송석원시회도>, 《송석원시사첩》, 1791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6×31.8cm, 개인 소장


여기에 김홍도의 그림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 한 점 더 있습니다. 김홍도와 동갑내기 화가인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의 <송석원시회도(松石園詩會圖)>입니다. 김홍도의 그림과 달리 이 작품은 낮 그림이에요. 화면 왼쪽 너럭바위 위에 두 무리가 옹기종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지요. 뒤로는 왼쪽에 인왕산, 오른쪽에 백악산이 솟아 있고 멀리 뒤로 삼각산이 보입니다. 김홍도와 단짝 친구였던 이인문 역시 모임에 초빙돼 그림을 그렸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낮과 밤에 모인 장소가 달랐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화폭을 잔잔하게 물들이고 있는 인왕산 자락의 그윽한 풍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배경에 치솟은 커다란 바위에는 송석원(松石園) 세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좌)1950년대에 김영상이 찍은 송석원 각자 바위 (우)송석원 터 표석


송석원이 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많은 이가 궁금증을 품고 찾아다녔지요. 하지만 어렴풋하게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에 서울연구가 김영상 선생이 찍은 사진으로 남아 있는 ‘송석원’이란 바위 글자는 저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32세 때 글씨라고 합니다. 이 바위 역시 지금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연구자들은 아마도 지금의 박노수미술관 근처 어딘가에 바위가 묻혀 있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인왕산 일대 답사에 나선 이들은 보통 박노수미술관 근처에서 송석원시사의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더듬어보곤 하지요. 과거의 자취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 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품은 산


박제신, <서교전별>, 1826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3×31.8cm


옛 그림에서 인왕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여행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지난해 말, 국내의 한 고미술품 경매에 인왕산 그림이 한 점 나왔습니다. 소향관 박제신(朴齊臣, 1792~?)이란 생소한 화가가 그렸다는 <서교전별(西郊餞別)>이란 작품인데요. 경매사 측이 소개한 그림 내력을 보니,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담헌 홍대용의 손자인 홍양후(洪良厚, 1800~1879)가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갈 때 서대문 밖에서 배웅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림 좌우 여백에 적혀 있는 글씨가 그런 내용을 알려주지요. 박제신은 정조 때 우의정을 지낸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의 손자였으니, 아버지 대에서 맺은 인연이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져 이런 그림이 탄생하지 않았나 하고 경매사 측은 설명합니다.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면 역시나 겸재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겸재의 그림이 시대의 전범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던 겁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 인왕산 그림을 더는 보기 어렵게 됩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조와 정조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인왕산도 차츰 그 빛을 잃어갔습니다. 이 시점에서 옛 화가들이 그림 속에 남긴 인왕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까닭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토록 가까운 곳에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있었으니 한양 최고의 명승으로 각광받았을 수밖에요. 500년 조선 역사에 그렇게도 많은 이야기와 사연을 품은 채 그림의 소재로, 배경으로 널리 사랑받은 산이 달리 또 있을까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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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워라밸의 시작, 요리하는 자유
정동현
#정동현


신세계그룹이 올해부터 대기업 최초로 주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했다. 덕분에 업무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오후 다섯시다. 회사 문을 나서 지하철에 들어서면 쉽게 앉을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삶의 형태가 바뀐 것이다. 팀의 부제가 ‘2AM’, 팀 주제가로 ‘죽어도 못 보내’를 부르던 시절은 안녕이다. 아침 9시에 업무를 시작해 저녁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운 오후 5시가 되면 일이 끝난다. 이른바 워라밸은 이렇게 이룩되었다. 정확한 시간에 일이 시작되고 끝난다.





지하철은 바흐의 평균율 연주처럼 규칙적인 리듬으로 역을 통과한다. 직장인이 받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생활을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온다고 한다.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것은 자율이라고 하고 또 다른 말로는 자유라고 한다. 이제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선택의 문제다. 여기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유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할 수 있는 자유, 또 다른 하나는 하지 않을 자유다. 어떤 것을 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나는 말하고 싶다. 요리할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하라.


생존의 필수 기술이었던 요리가 취미 생활이란 범주 안에 들어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이제 요리는 당당한 취미 생활이고 또 당당한 특기인 시대다. 그 말은 요리 자체에 돈과 시간이 꽤 많이 든다는 이야기다. 한가지 밝힐 사실이 있다. 만약 절약하고 자 한다면 4인 가구 이상이 아니라면 외식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 비싼 식재료 값, 각종 기구, 수도광열비, 특히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요리를 한다는 말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대규모로 식재료를 구입하고 대량으로 조리해 단가를 낮춘 즉석식품을 먹는 편이 시간과 돈을 아끼고자 한다면 보다 현명한 선택이다.





그렇다면 요리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쉽게 생각해보자 일 년에 몇 안 되는 캠핑과 같은 행사에 솜씨를 발휘할 수도 있다. 물론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무인도에 떨어진다거나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좋은 기술인 것도 맞다. 역시 이 또한 매우 드문 확률이다. 직업으로서 요리란 기술을 습득한다면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직업을 구할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든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며 그 나라 최저임금에 가까운 급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하나하나 따지면 굳이 스스로 요리를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남이 몰아주는 차가 제일 좋듯 남이 해주는 요리가 제일 맛있다는 말에 수긍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요리는 편리나 이익, 영리 같은 숫자 놀음과 큰 관련이 없다.



불, 요리 그리고 진화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한 책 요리본능(2011,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옛날 요리는 생존의 기술이었고 인류가 동물과 다른 존재가 된 전제조건이었다. 하버드 교수 랭엄 박사는 자신의 저서 ‘요리 본능’에서 현재 인류가 존재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요리라고 썼다. 요리함으로써 각종 식재료의 맛과 흡수율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가용 가능한 열량이 늘어나게 되어 뇌 체적 증가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현재 각종 신념과 여러 필요 때문에 식재료 그대로 생식을 하는 집단의 경우 시간당 흡수 열량 자체가 요리해서 먹는 쪽에 비교해 현저히 낮으며 그에 따라 성장 장애, 영양결핍, 생리불순, 심지어 불임과 같은 여러 증상을 겪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거창하지만 요리란 인간이기 위한 하나의 조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리는 문화 그 자체이다.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요리에 각국의 기후, 문화, 역사, 경제 상황에 스며들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오래 보관이 가능한 건조 파스타 위주의 단순한 식문화가 발달했고 중앙집권적인 정치 제도를 가졌으며 물산이 풍요로운 프랑스에서는 일찍이 왕족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호화로운 식문화가 탄생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요리로 귀결된다.


요리하며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인간의 조건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말 자체는 거창하지만, 요리를 하는 순간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것 같다. 밥을 짓고 나물을 무치며 국을 끓일 때, 그 모든 준비 과정에서 고립된 현대인이 아니라 이 사회와 관계하는 인간임을 느낀다. 만약 밥을 짓는다면 어떤 쌀을 고를지, 그 쌀이 어떤 처리 과정을 거쳤는지, 쌀에 물을 얼마나 불릴지, 화력에 따라 쌀알의 분포에 따라, 기구에 따라, 어떻게 밥맛이 달라지는지 느끼게 된다. 그 과정이 반복되고 학습되면 요리란 행위로 이름 붙여진다. 시금치를 산다. 서양의 시금치와 동양 시금치의 차이에 대해서, 왜 소금물에 데쳐야 싱싱한 초록색이 살아나는가에 대해서, 왜 소금간을 할 때 설탕으로 살짝 밑간을 하는지, 왜 소금에서도 단맛이 나는지, 이런 사실에 대해 알게 된다. 그것이 요리다.





만약 밥 짓기 전문가라면 이보다 더욱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쌀의 유래, 품종의 역사, 그리고 한국 농경 정책과 자본의 역할 등, 수많은 이야기가 밥 짓기 하나에 얽혀 있다. 요리를 하려면 장을 봐야 한다. 그때부터 무수한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쌀을 살 것인가? 왜 이 쌀이어야 하는가? 그 선택을 하며 사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 쌀이 어떤 가공을 거치고, 그 가공 방법에 있어 어떤 법제가 적용되는지. 그리고 문화적으로 왜 쌀이 우리에게 중요한지, 밥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의 식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등 그 끝이 없다. 실제로 요리에 들어가게 되면 또 다른 차원의 설명이 필요하다. 요리는 이제 화학이 된다. 물을 얼만큼 부어야 하고, 어떻게 불 조절을 해야 하는지는 삼투압과 열에너지, 비열 등과 관련이 있다. 어떤 팬이 잘 뜨거워지는가? 왜 팬은 무거워야 하는가? 비열이 높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요리를 하며 배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즉 요리를 통해 우리는 사회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진다. 김밥을 한 번이라도 싸본 사람은 김밥 원가 운운하며 그 값이 비싸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김밥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수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김밥을 싸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 과정에 숙련되면 마지막에는 창조의 기쁨을 느낀다.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 재료들을 썰고 볶아 새로운 결과물을 만드는 기쁨이 찾아온다. 이윽고 그 결과물을 사람들과 나눌 때는, 먹을 것을 나누는 원초적인 사랑이 탄생한다.


느껴보라. 차가운 물이 손에 닿고 쌀알이 그 물속에서 움직이는 감촉을. 갓 지은 밥의 구수한 향내를. 요리는 귀찮고 해치워야 하는 숙제가 아니다. 인간이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이요, 필수적인 과제다.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립의 가장 기초다. 바로 주방에 가라. 칼을 들어라. 양파를 잘라라. 불 위에 팬을 올려라. 인간이란 동물로서, 한 사회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한 남자와 여자로서, 삶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그 밸런스를 위해, 요리란 무게추를 삶에 올려놓자. 돈과 서류 속에서 존재하는 허깨비 같은 삶이 아니라 칼과 불, 피와 고기, 풀과 나무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되자. 그리고 깨닫게 된다. 행복이란 균형 속에 찾아온다는 것을. 균형이란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란 것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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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G블로그 에디터가 전하는 이야기
봄, 어떤 시작을 준비하고 있나요?
SSG블로그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만나는 봄 VMD


총총총 바쁘게 움직이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그저 스쳐 지나던 나무에 시선이 머뭅니다.

무거웠던 어깨가 가벼워져 조금은 힘이 나고,
길어진 해에 조금은 나른하기도 합니다.


춘삼월, 

봄 경치가 한참 무르익는 이 계절
우리 마음도 조금은 여유로워집니다.

그래서 계절도, 새 학기도 이때 시작하나 봅니다.

들뜬 마음에 새해 세웠던 계획들이 흐트러졌다면
숨 한 번 고르고 다시 시작해보세요.

멀게만 느껴졌던 봄이 이렇게 성큼 다가왔듯 

어렵게만 생각되는 목표지점에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거예요.


SSG블로그도 춘삼월 봄꽃 같은 이야기로 여러분을 찾아가 볼까 합니다. 


날씨 언니가 알려주는 황사대비 피부관리법,

위풍당당 이마트 트레이더스의 성공비결,

봄날의 달달한 썸남썸녀 스토리,

맛있는 음식이 당기는 봄, 제주소주 푸른밤을 찾아 떠나는 서울 속 제주 맛집 여행,

새로운 계절, 꼭 마련해야 할 신세계그룹 화제의 상품을 소개하는 쓱-REVIEW까지!


살랑이는 봄의 바람과 햇살, 힘차게 돋아나는 새싹.

이 계절 하루하루를 여러분과 함께한다면  

그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 이 시간이 더욱 따스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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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옛 그림에서 찾은 무술년 개 이야기
김 석
#김석기자


오수개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고려 시대에 전라북도 임실에 살던 김개인(金盖仁)이라는 사람이 개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어느 날 외출을 하는데 개도 함께 따라나섰지요. 주인이 술에 취해 길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불이 나서 점점 가까이 다가왔어요. 개가 아무리 짖어도 주인은 안 일어났고요. 그래서 개는 냇물에 몸을 담근 뒤 풀밭을 이리저리 굴러 불이 못 번지게 막습니다. 그러고는 기운이 다해 그만 죽고 말지요.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 그 사실을 알고는 노래를 지어 기리고 고이 묻어줍니다. 그때 무덤에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서 그 땅을 오수(獒樹)라고 했다지요. 이 이야기는 고려 후기의 문신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 補閑集>에 실려 후대에 널리 알려집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제 한 몸 바쳐 주인을 구한 충직한 개의 이야기는 그 뒤에도 조금씩 내용만 달리해서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집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개만큼 인간과 가까운 동물이 또 있을까요. 개와 인간이 함께한 역사만도 2만 년이나 됐다고 하니까요. 고구려 고분 벽화인 무용총 수렵도는 사냥 장면을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입니다. 화면 맨 아래에 검은 사냥개가 말 탄 사냥꾼과 함께 역동적인 모습으로 먹잇감을 쫓고 있지요. 삼국시대에 이미 사냥을 위해 개를 길들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좌) 김유신묘 십이지신상 부조

(중) 삼국시대 굽다리접시 (호림박물관 소장)

(우) 경복궁 근정전 월대 석견


2018년은 무술년(戊戌年) 개띠 해입니다. 무(戊)는 오방색 가운데 황색을 뜻하고, 술(戌)은 개를 의미하지요. 그래서 2018년을 황색 개띠 해라고 합니다. 개는 열두 가지 띠 동물 가운데 열한 번째 동물입니다. 방위로는 서북서 방향을 지키는 신이고, 시간으로는 오후 7~9시, 달로는 음력 9월을 담당하는 시간의 수호신이기도 하고요. 잘 짖는 본성으로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존재로서의 상징성이 오래전부터 옛 풍습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음을 알 수 있지요. 경복궁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 석견(石犬)을 새긴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기행문 <춘성유기 春城遊記>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는 암수 석견이 있는데, 암컷은 새끼 한 마리를 안고 있다. 무학대사는 이 석견은 남쪽 왜구를 향해 짖고 있는 것이고, 개가 늙으면 대를 이어 가라고 새끼를 표현해 넣었다고 했다.



이암, <화조구자도>, 16세기 중반, 종이에 채색, 86×44.9㎝, 보물 제1392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강아지 그림이 있습니다. 볕이 따사로운 봄날, 화면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검둥이 녀석이 하얀 꽃망울을 피워 올린 배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돌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어딘가를 쳐다봅니다. 저 눈동자 표현 좀 보세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뒤로 누렁이 한 마리가 두 발을 앙증맞게 모은 채 쿨쿨 낮잠을 자고 있군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평화롭게 잠든 저 표정, 참 귀엽습니다. 그런가 하면 호기심 가득한 흰둥이 녀석은 땅바닥에 철퍼덕 엎드린 채 앞발로 꾹 누른 방아깨비와 노느라 여념이 없네요.


그냥 보기만 좋은 그림이 아닙니다. 개는 털을 가진 동물이죠. 그런데 그림 속 강아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털이 하나도 없습니다. 털을 묘사하는 대신 몸통을 먹으로 채웠어요. 이 그림은 조선 초기에 개와 매 그림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왕족 출신 화가 이암(李巖, 1507~1566)이란 분의 작품인데요. 먹을 이렇게 쓴 그림은 당시 중국에도 없었답니다. 전문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에요. <화조구자도>란 제목이 붙은 이 대단한 그림은 현재까지 확인된 걸로는 조선시대 최초의 개 그림으로 전합니다.


일본화가 소다츠의 개 그림


더 대단한 건 이암의 그림이 국내는 물론 당시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줬다는 사실입니다. 위의 두 작품은 이암보다 100년쯤 뒤에 교토에서 활동한 일본화가 다와라야 소다츠(俵屋宗達)의 그림인데요. 털을 그리지 않고 먹으로 물들이듯 그렸지요. 일본에서 다라시고미(滲し込み)라 불리는 이 기법의 뿌리가 바로 조선의 이암이었던 겁니다. 그만큼 이암의 그림이 일찌감치 일본에 건너갔다는 뜻이고요. 심지어 17세기 일본에서 나온 <본조화사 本朝畵史>란 책에는 이암을 아예 일본 화가로 소개하기도 했답니다.



(좌) 이암, <모견도>, 16세기 중반, 종이에 옅은 채색, 73.5×42.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우) 이암, <화조묘구도>, 16세기, 종이에 채색, 폭당 87×44.2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개의 변함없는 충직함은 때론 배신을 밥 먹듯 해대는 인간들의 반면교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황해도 강령에서 전승되는 탈놀이인 <강령탈춤>의 한 대목에는 개도 사람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 윤리, 즉 오륜(五倫)을 두루 갖췄다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그럼에도 툭하면 욕설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인간들이 야속할 만도 합니다. 게다가 위 그림에서도 보듯 전통적으로 개는 고양이와 앙숙이지요. 그런데 이것 때문에도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아야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조선 후기 문장가 이옥(李鈺, 1760~1815)의 ‘고양이를 탄핵한다(劾猫)’는 재미있는 글에서 개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다음과 같이 토로합니다.


신은 비록 미천하고 용렬하오나 그 지키는 바가 도둑입니다. 밥을 물에 말아 국을 타고, 한 노구솥 밥에 태반이 콩인 것으로 하루 두 번 배고픔을 면하는 것은 오로지 주인의 은혜입니다. 그리하며 밤이면 감히 눈을 붙이지 못하고 구멍마다 돌면서 경계하여 오로지 도둑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저 울타리 밖의 도둑도 몰아 쫓아내고자 하는데 하물며 집안의 도둑이겠습니까? ... 이것이 신이 저것을 보면 반드시 쫓아 버리고 마주치면 물어뜯는 이유입니다. ... 어찌 주인께서는 무슨 사심이 그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십니까? ... 장차 고양이는 배가 불러 죽고 신은 가마솥에서 죽게 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좌) 김두량, <긁는 개>,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23.1×26.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이경윤, <화하소구>, 비단에 옅은 채색, 17.7×15.5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전기에 이암이 있었다면 후기에도 개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또 한 명의 화가가 등장하는데요. 영조 때 직업 화가로 활약한 남리 김두량(金斗樑, 1696~1763)입니다. 위에 소개해드리는 <긁는 개>는 김두량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명품입니다. 나무 아래에서 개가 어디가 그렇게 간지러운지 몸을 잔뜩 구부린 채 몸을 긁적이고 있습니다. 털을 정말 한 올 한 올 정성 들여 사실적으로 그렸지요. 알쏭달쏭한 눈빛이며 입 모양까지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특히 개의 몸체에서 보이는 생생한 입체감은 서양 화법을 수용한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긁는 개라는 소재는 그 전에도 그려졌습니다. 오른쪽 작품은 조선 중기 문인화가 낙파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그림인데요. 역시 몸을 외로 꼰 채 몸을 긁고 있는 개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지요. 덥수룩한 털을 한 올 한 올 정성껏 묘사해 현장에서 보고 그린 듯 사실감이 도드라집니다. ‘나무 아래에서 가려운 곳을 긁고 있는 개’라는 구도는 김두량의 그림과 같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그냥 보기 좋아서 그린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숨어 있거든요.


한자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개는 戌(술), 나무는 樹(수)이지요. 戌은 지킬 무(戍)와 글자 모양이 비슷합니다. 지킬 무(戍)는 지킬 수(守)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나무 수(樹)와도 음이 같습니다. 결국 나무 밑 개 그림에는 “지킨다”는 뜻이 담기게 됩니다. 긁는 개는 복을 긁어 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둘을 종합하면 나무 밑 긁는 개는 집안을 지키고 복을 들여오는 좋은 의미의 그림인 거지요. 비슷한 구도의 그림이 반복해서 그려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김두량, <삽살개>, 1743년, 종이에 옅은 채색, 35×45cm, 개인 소장


김두량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삽살개>입니다. 삽살개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이게 무슨 삽살개인가 싶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삽살개와는 생김새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요. 이 그림이 중국, 일본을 거쳐서 1995년 7월 부산의 진화랑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도 논란이 엄청나게 뜨거웠다고 합니다. 급기야 MBC <PD수첩>에서까지 보도됐을 정도였다니까요. 논란의 출발점은 이 그림의 옛 소장자가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 함께 묶은 화첩에다가 “내가 방(尨) 그림 한 본을 구했더니 필세가 발랄하고 묘하다”고 적어놓은 대목입니다. 방(尨)이 삽살개를 뜻하기 때문이었지요.


삽살개든 아니든 이 개는 처음부터 유명해질 팔자를 타고 난 것 같습니다. 그림 위쪽의 글씨를 쓴 이가 바로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였으니까요. 실제로 영조는 김두량을 무척이나 아낀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남리(南里)라는 호를 직접 지어주고, 도화서 화원 최고위직인 별제까지 내려줍니다. 게다가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지 직접 글씨까지 써줬지요.




(좌) 전(傳) 장조, <견도 犬圖>, 51.8×86.5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우) 전(傳) 장조, <견도 犬圖>, 51.7×75.5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기왕 영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혹시 왕이나 왕세자가 그린 개 그림은 없을까 궁금해집니다. 실제로 있어요. 우리가 흔히 사도세자로 알고 있는 장조(莊祖, 1735∼1762)가 그린 걸로 전해지는 개 그림 두 점입니다. 전문 화가의 솜씨는 아니지만,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거침없이 쓱쓱 그려낸 것이 꽤나 매력적이지요. 어찌 보면 굉장히 현대적인 드로잉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최대의 문예 군주로 불리는 아들 정조의 재능은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좌)작가 미상, <삽살개>,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30.9×29.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장승업, <쌍구도>,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68×68㎝,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우)어유봉, <삽살개>,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63.5×37cm, 개인 소장


다시 삽살개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삽살개는 우리나라 토종으로 유명하지요. 순우리말로 ‘삽’은 쫓는다는 뜻이고 ‘살’은 귀신, 액운이란 뜻입니다. 이름 자체가 귀신 쫓는 개란 뜻이니, 그리 이름 지은 까닭도 자연스레 짐작이 됩니다. 삽살개 그림도 여러 폭이 남아 있는데요. 화가에 따라 삽살개를 어쩌면 저렇게 다르게 그릴 수 있을까요. 특히 어유봉의 <삽살개>는 과연 저 동물이 삽살개는커녕 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상상 속의 동물로 그려졌습니다. 귀신 물리치는 개의 특성을 부각시키려다 보니 닮게 그리기보다는 표현을 일부러 과장한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좌)김홍도, <경작도>, 1796년, 종이에 옅은 채색, 26.7×31.6cm, 보물 제782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우)김홍도, <점심>, 《단원풍속도첩》, 종이에 옅은 채색, 28×23.9cm, 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럼에도 최고의 삽살개 그림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좌측의 작품을 고르겠습니다. 저 유명한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그림인데요. 삽살개가 아주 작게 그려져 있지요. 여기서 중요한 건 개의 뒷모습을 그렸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개 그림은 모두 앞모습이나 옆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김홍도는 풍속화에다가 지금껏 본 적 없는 개의 뒷모습을 그려놓았어요. 주인이 밭 가는 모습을 멀뚱히 서서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자세가 예술이에요. 저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그림 전체가 확 살아나는 느낌이랄까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 선생도 이 그림에 반했던지 “밭갈이하는 주인의 얼굴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설멍한 삽살개의 뒷맵시”라는 기가 막힌 표현을 남깁니다.


김홍도의 유명한 그림 한 점을 더 볼까요. 보물로 지정된 《단원풍속도첩》 안에 있는 오른쪽 그림은 점심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개 한 마리가 앉아서 사람들 밥 먹는 걸 지켜보고 있습니다. 실로 절묘한 위치에 개를 그려 넣었어요.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인간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개의 모습이 그림을 더욱 박진감 있게 한다.”는 유홍준 교수의 평가가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 그림에 개가 없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저렇게 참 작게 그렸는데도 시각적인 효과는 정말 대단하지요. 역시 대가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봅니다.



김홍도, <모구양자도>, 18세기, 비단에 옅은 채색, 90.7×39.6cm,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는 개를 등장시킨 그림을 여러 점 남겼는데요. 그중에서도 대표작이라 할 것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모구양자도>입니다. 어미와 새끼가 다정하게 어울려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지요. 여기서 다시 한번 김홍도라는 화가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저 어미개의 당당하고 우아한 자태에서 보게 되는 건 바로 고결한 선비의 모습이에요. 개의 모습에다가 사람의 온기,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어느 연구자는 김홍도만큼 세상을 따스한 시선으로 본 화가는 없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보신 이암의 <모견도>와 함께 개 가족을 묘사한 가장 따스한 옛 그림으로 꼽을 만합니다.



작가 미상, <맹견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44.2×98.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편 꽤 오랫동안 김홍도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그림도 한 점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맹견도>인데요. 1910년대에 서울 북촌의 어느 가정집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당시 미술계의 권위자였던 본 고희동, 안중식 등 화가들이 김홍도의 작품으로 결론을 냈어요. 그러곤 김홍도의 도장을 임의로 파서 찍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졌지요. 하지만 나중에 가짜 도장이란 사실이 밝혀져 누가 그렸는지 확인되지 않은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나라 화가의 그림이 맞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일단 쇠사슬에 묶인 채 어눌한 표정으로 엎드려 있는 저 개는 우리 토종개가 아닙니다. 게다가 개를 묘사한 방식이나 바닥을 포함한 배경에 표현된 원근법과 명암법 등은 우리 전통 기법이 아니라 전형적인 서양화법이거든요. 만일 이 그림이 우리 화가의 솜씨라면 조선 후기에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화법을 수용한 작품일 테고, 그게 아니면 서양화법을 익힌 청나라 화가의 그림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맹견이라기엔 너무도 해맑고 순하게 보이는 저 눈동자 때문에라도 오래 기억에 남을 그림이에요.


(좌) 신윤복, <나월불폐도>, 비단에 수묵, 25.3×16.0cm, 간송미술관 소장

(중) 김득신, <성하직구>, 종이에 옅은 채색, 22.4×27.0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신광현, <초구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35.1×29.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름난 화가들의 개 그림 몇 점을 더 소개해 드립니다. 왼쪽은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로 이름을 날린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의 그림입니다. 상념에 잠긴 개의 자세와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작품이에요. 그 옆에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그림은 한여름에 삼대가 모여 짚신 삼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표정만 봐서는 한 여름 무더위가 그다지 실감 나지 않지요. 그런데 개의 표정을 한 번 보세요. 혀를 쭉 내민 채 헉헉대는 모습입니다. 표정이 정말 예술이에요. 이것 하나로 그림이 확 살아나지요.


애완견을 사람 못지않게 끔찍하게 아끼고 보살피는 반려동물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개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힘겹지요. 주인으로부터 버림받고 떠돌이개 신세가 되거나 먹을거리로 제 한 몸 바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최근에는 대형견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사례까지 잇따르기도 했고요.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건 여전히 개는 인간과 살 부비며 함께 살아가는 고마운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사람과 개가 교감하는 따뜻한 모습을 담은 마지막 그림, 신광현의 <초구도>에 더 눈길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