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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건국 1,100년 고려 예술의 정수를 엿보다
김 석

‘고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뭘까요?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전 세계에 코리아(Korea)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는 사실? 아니면 유교를 국가 경영의 근본이념으로 삼은 조선과 달리 불교국가였다는 점? 전 세계를 매혹시킨 고려청자의 나라? 외세의 침략 앞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완성한 팔만대장경의 나라? 대답은 천차만별이겠지요.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답이 가장 많지 않을까요. 시기로 보나 기록으로 보나 조선은 가깝고 고려는 멀었던 것이 현실이니까요. 


고려가 건국한지 올해로 꼭 1,100년이랍니다. 따져보니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것이 918년이었습니다. 혹시 이 시기를 다룬 추억의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기억하시나요? 저도 굉장히 열심히 본 기억이 납니다. 기록을 들춰보니 이 드라마가 남긴 자취들이 참으로 놀랍더군요. 2000년 4월부터 2002년 2월까지 무려 200편이 방송됐습니다. 역사 드라마 최장기 방송 기록이었지요. 게다가 시청률 60%를 돌파한 마지막 드라마란 기록까지 남겼습니다. ‘전설 같은 시대’를 다룬 ‘전설 같은 드라마’였던 겁니다. 


방영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드라마까지 들먹이며 새삼스레 그 시대를 들추는 까닭이 있습니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이 마련한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때문이에요. 상당히 멀게만 느껴지던 고려시대를 딱딱한 역사책이 아닌 박물관 전시실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겁니다. 게다가 전시를 앞두고 과연 북한이 자기네 국보인 <고려 태조상>을 보내올 것이냐 말 것이냐 비상한 관심이 쏠리기도 했지요. 남과 북이 유물을 교환 전시한 사례는 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뭔가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더 컸던 게 사실입니다. 



 보고도 믿기 힘든 극사실주의 조각 


처음 이 조각상을 본 순간, 차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나,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거든요. 저 눈동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코며 입이며 귀도 그렇지만, 입가와 미간과 이마의 잔주름까지 어쩌면 저리도 생생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가. 현대 조각품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극사실적인 표현이 자못 섬뜩함마저 느끼게 합니다. 솔직히 가짜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어요. 우리 미술사에 이런 조각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심지어 교과서에서조차 본 일이 없었으니까요. 


<희랑대사상 乾漆希朗大師坐像>, 고려 10세기, 건칠과 나무에 채색, 높이 82.4cm, 합천 해인사, 보물 제999호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고려 건국 시기에 유명했던 승려 희랑대사(希朗大師)입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을 막후에서 도왔고, 건국 이후에는 왕의 스승이 된 인물이었다고 하지요. 합천 해인사를 근거로 화엄종을 크게 일으킨 고승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으니 그 모습을 조각으로 새겨 후대에 남겼겠지요. <희랑대사상>은 10세기 중반 조각 분야 최고 걸작이자, 국내 유일의 고승 초상 조각으로 평가됩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품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이토록 온전하게 보존돼 왔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울 뿐입니다. 


그래서 천 년도 넘은 조각상이란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더군요. 그런 스님이 천 년 세월 동안 가야산 해인사에 기거하다 이번에 처음 절 밖으로 나들이를 했습니다. 이것 자체만도 엄청난 사건이에요. 만약 북에서 태조 왕건의 조각상이 내려와 둘의 극적인 만남이 성사됐다면 “스승과 제자, 천 년만의 해후”가 됐을 겁니다. 두 분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라고 박물관에서 미리 널찍하고 조용한 공간까지 마련해 놓았더군요. 전시 기간이 아직 넉넉하니 기적 같은 만남이 성사될지 혹시 또 모를 일입니다. 


  

<고려 태조상 高麗太祖像>, 고려, 개성시 해선리 현릉, 높이 138.3cm,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북한 국보 



 국내에 있어도 보기 힘든 희대의 유물들 


<희랑대사상>과 같은 귀한 유물은 국내에서도 참 보기가 어렵지요. 웬만한 규모의 박물관급 전시가 아니면 사실 평생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듭니다. 고려 건국 1,100년이란 확실한 계기가 아니었다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유물들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에요.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아니 전문가라 할지라도 전시장에 있는 모든 유물을 속속들이 보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애써 본들 그 많은 유물이 전부 각별한 감동을 주거나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니고요. 골라보기가 필요한 이유이지요. 


 

(1)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 長谷寺 金銅藥師佛坐像>, 고려 1346년, 금동, 높이 88.0cm, 청양 장곡사, 보물 제337호

(2) <대승사 금동아미타불좌상 大乘寺 金銅阿彌陀佛坐像>, 고려 14세기, 금동, 높이 87.5cm, 문경 대승사, 보물 제1634호


이 불상을 한 번 보세요. 박물관과 사찰을 드나들면서 숱하게 많은 불상을 봐왔지만, 이렇게 잘 생긴 불상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습니다. 저만 그런가 싶어 주변에 물어보니 전시회에 다녀온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불상에 유독 끌리더라고 하더군요. ‘고려의 대표 미남’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는 반응들이었지요. 충남 청양군 칠갑산에 있는 사찰 장곡사(長谷寺)에 있는 이 불상은 난생 처음 절 바깥에 나온 귀한 유물입니다. 나란히 전시된 또 다른 보물 <대승사 금동아미타불좌상> 역시 처음으로 절 밖에 나와 전시되는 불상이에요.  


 

(1) <안향초상>, 전(傳) 이불해, 조선 16세기 중엽, 비단에 색, 88.8×53.3cm, 안동 소수서원, 국보 제111호

(2) <이색초상>, 작가미상,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28.2×24.8cm, 기탁1157 한산이씨대종회, 보물 제1215호


여기 초상화 두 점이 있습니다. 왼쪽은 원나라에서 이 땅에 주자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안향(安珦, 1243~1306), 오른쪽은 고려 말의 대학자로 정몽주와 정도전 등의 스승이기도 했던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입니다. 두 초상화 모두 조선시대 작품이긴 합니다만 고려시대 인물 초상화로는 워낙 희귀한 그림들이어서 나란히 국보와 보물로 지정돼 있지요. 전시장 후반부에 단연 두드러지는 이 초상화들 역시 이만한 규모의 대형 전시가 아니면 만나기 힘든 귀한 작품들입니다. 


어떤 유물이 오래 보존되고 않고를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재료’입니다. 돌이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유물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에 멀게는 구석기 시대 물건까지도 온전하게 남아 전하는 것들이 많지요. 청자와 같은 도자기류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림’이에요. 종이나 비단을 재료로 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오래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만 해도 임진왜란 이전 그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거고요. 그러니 더 앞선 고려시대의 그림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기마도강도 騎馬渡江圖>, 전(傳) 이제현, 고려 14세기 전반, 비단에 색, 28.7×38.5cm, 국립중앙박물관 


그래서 실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닐 고려시대의 그림에 더 주목하게 되나 봅니다. 왼쪽 위는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익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작품으로 전하는 그림입니다. 오른쪽 상단에 ‘익재’라는 글씨와 ‘이제현인’이란 도장이 찍혀 있지요. 눈 덮인 겨울에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먼저 건넌 두 사람이 일행을 돌아보는데, 뒤따른 이들은 어떻게 건너야 하나 고민이 꽤 많은 모양입니다. 비단이 많이 해지긴 했지만 이만한 상태로 전해지는 것만도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엽기도 獵騎圖>, 전(傳) 공민왕, 고려 14세기(추정), 비단에 색, 25.0×22.2cm, 국립중앙박물관

(2) <출렵도 出獵圖>, 전(傳) 공민왕, 고려 14세기(추정), 비단에 색, 25.0×21.0cm, 국립중앙박물관


위의 세 그림은 모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데요. 특히 왼쪽과 가운데는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는 고려 31대 임금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작품으로 전해집니다. 말 타고 사냥에 나선 모습을 역동적으로 포착한 그림이지요. 화풍도 크기도 비슷하다보니 연구자들은 같은 두루마리에서 따로따로 분리된 그림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존 상태는 썩 좋지 않지만 고려시대 그림이 워낙 희귀하다보니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하고 감사한 작품들입니다. 두 그림을 한데 묶어서 <천산대렵도 天山大獵圖>라 불러 왔지요. 


 

 

(1) <염소 羊圖>, 작가미상, 고려 14세기(추정), 비단에 색, 23.5×14.9cm, 국립중앙박물관

(2) <이양도 二羊圖>, 공민왕, 고려 14세기, 비단에 엷은 색, 22.0×15.7cm, 간송미술관


동물 그림을 유난히 좋아하는 제게 더 특별하게 다가온 작품입니다. 염소 네 마리를 털 한 올 한 올까지 세세하게 그려냈을 뿐 아니라, 위에 소개한 다른 그림들에 비해 보존 상태도 훨씬 좋습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간송미술관에 이와 유사한 <이양도 二羊圖>란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화풍과 크기가 비슷한 이 그림 역시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하고 있지요. 공민왕이 그렸건 아니건 간에 고려시대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그림들을 전시장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결코 흔하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외국인도 극찬을 아끼지 않은 고려의 예술  


그런가 하면 멀리 바다를 건너와 잠시 고국 땅을 밟은 우리 유물들도 있습니다. 해외 유수의 박물관(미술관)에서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는 귀한 존재들이지요. 일부러 해외까지 나가서 찾아가보지 않는 한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것들. 전시 기획자들이 어렵게 섭외해서 모셔왔으니만큼 더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볼 수밖에요. 고려를 대표하는 3대 문화유산으로 흔히들 금속활자, 팔만대장경, 청자를 꼽습니다. 어떤 이는 청자, 불화, 사경을 들기도 하고요. 


굳이 세 가지로 국한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저는 청자, 불화, 나전 이 세 가지에 주목합니다. 먼저 고려시대를 넘어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고려청자입니다. 1123년에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은 귀국한 이듬해에 보고서를 작성해 황제에게 바칩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이란 이름의 이 보고서는 고려의 제도와 문물, 풍습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인데요. 이 책이 특히 더 유명해진 것은 바로 아래 구절 때문입니다. 


"고려인은 도기의 푸른 빛깔을 비색이라고 하는데, 요 몇 년 사이에 도기 만드는 솜씨와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저 유명한 ‘비색 청자’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겁니다. 세상의 수많은 청자 가운데 오로지 고려의 청자의 저 신비롭기 그지없는 빛깔에만 허락된 ‘비색’이란 표현을 황제에게 바치는 공식 문서에 적어놓은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에 청자에 눈이 먼 일본인들은 고려시대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쳐서 국보급 청자를 무더기로 약탈해갔습니다. 청자를 향한 일본인의 광적인 집착이 낳은 쓰라린 역사의 단면이죠. 하지만 분명한 건 일찍이 청자를 극찬한 것도, 청자에 집착한 것도 ‘외국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 <청자 구름․학․구화무늬 피리 靑磁象嵌雲鶴菊花文笛>, 고려 13세기, 길이 36.5cm, 메트로폴리탄박물관

(2) <청자 동자모양 연적 靑磁童子形硯滴>, 고려 12세기, 높이 11.0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실생활에서 쓰는 그릇 하나에도 예술혼을 불어넣은 고려 도공의 수준은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요. 재미있는 건 청자 가운데 간혹 악기가 보인다는 겁니다. 대개는 장구가 흔한데 이번에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모셔온 물건은 특이하게도 피리입니다. 이걸 실제로 연주하려고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감상용일까요. 뭔가 자꾸만 상상을 하게 만드네요. 또 하나는 동자가 오리를 가만히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의 연적입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물건인데도 어쩌면 저토록 사랑스러운지. 국보니 보물이니 다 제쳐놓고 이것만 내내 바라보며 흐뭇했답니다.


 

(1) <나전 국화넝쿨무늬 경함 螺鈿菊唐草文經函>, 고려 13세기, 나무에 칠, 높이 25.5cm, 너비 47.4cm, 영국박물관

(2) <나전 대모 국화넝쿨무늬 합 螺鈿玳瑁菊唐草文三葉形盒>, 고려 12세기, 나무에 칠, 높이 4.1cm, 너비 10.2cm,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앞에서 소개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홀딱 반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흔히 나전칠기라고 부르는 공예품이에요. 얇게 갈아서 만든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려서 장식하는 기법을 나전(螺鈿)이라고 하는데요. 청자와 마찬가지로 나전 역시 중국에서 건너왔겠지만, 고려 나전은 한중일 3국을 통틀어 최고 수준의 예술적 성취를 이뤘습니다. 위의 왼쪽에 있는 것은 나전으로 만든 경함(經函), 즉 불교 경전을 보관하던 상자입니다. 이 자랑스러운 보물은 영국박물관(흔히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르지요.)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먼 길을 날아왔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독특한 형태의 물건 역시 저 유명한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품입니다. 특이하게도 대모(玳瑁), 즉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장식 재료로 썼는데요. 너비 10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공간에 저리도 세밀하고 꼼꼼하게 재료를 갈고 깎아 붙였을 장인들의 솜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눈썰미 좋은’ 송나라 사신 서긍도 이걸 놓치지 않았던 거고요. 


나전 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 


 세밀가귀(細密可貴).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요. 나전을 비롯한 고려 예술의 핵심을 중국의 사신은 그토록 정확하게 꿰뚫어본 것이지요. 그래서 삼성미술관 리움이 2015년에 연 전시회에 바로 이 제목을 그대로 붙였고, 우리 미술의 ‘품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관람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렇듯 예리한 안목을 지닌 한 외국인 덕분에 고려 예술은 그 시대에 이미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겁니다. 



“다음 생에는 부디 남자로 태어나게 하소서” 


하나하나 귀하고 아름다운 고려의 문화유산을 돌아보던 중에 뜻밖의 기록을 만났습니다. 1302년에 조성된 아미타불상 안에서 나온 복장물(腹藏物) 가운데 발원문(發願文)인데요. 불상을 만들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십시일반 시주를 받아 불상 제작비를 충당합니다. 대신 시주한 이들의 이름과 소원을 적은 문서를 불상 안에 넣어주는 거고요. 개중에 거액을 시주한 이의 경우 별도로 격을 갖춘 발원문을 따로 써서 불상에 봉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1302년 아미타불상에서 나온 아래의 발원문이 바로 그 예입니다.


 

<주성미타복장입안발원문 鑄成彌陀腹藏入安發願文>, 고려 1302년, 종이에 먹, 44.6×103.7cm, 온양민속박물관 


꽤 긴 내용을 글씨도 가지런하게 정성껏 적어 내려간 이 발원문의 주인공은 ‘창녕군부인’이란 분이랍니다. 발원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서원하건대 인간의 생을 잃지 않고 중국의 바른 집안에서 태어나되 남자의 몸을 얻게 해주소서.” 


세 가지를 빌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 중국에서 태어나게 해 달라, 남자로 태어나게 해 달라. 전체 발원문의 맥락 속에서 살펴야 하겠지만, 이 구절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때리더군요. 기왕 사람으로 태어날 거라면 중국에서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니…. 오죽했으면 이런 소원을 빌었을까요. 그런데 비슷한 소원을 빈 사람이 또 있습니다.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물> 중 발원문(白雲景閑發願文), 고려 1346년, 47.8×1,058cm, 청양 장곡사  


위의 사진은 앞에서 소개한 장곡사 불상에서 나온 발원문인데요. 가로 10미터가 넘는 비단에 천 명이 넘는 시주자의 이름과 소원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군데군데 소원을 적어 붙인 천 조각도 보이고요. 요즘으로 치면 포스트잇에 사연을 적어 붙인 거지요. 그 중에 작은 쪽지에서 이런 내용이 확인됩니다.


“태어나는 때마다 널리 중생을 일깨우고, 여자는 남자가 되게 하소서.” 


여기서도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전시 기획자도 이게 특별하게 보였는지 유물 설명에 이렇게 적었더군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유물들이 그득한 전시장을 돌아보는 내내 아득했습니다. 청자도 좋고, 불상도 불화도 다 좋은데 뭔가 결정적인 게 빠진 것만 같은 허전함. 고려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을까. 그 시대에 무엇을 고민했고, 무엇이 힘들었으며, 무엇을 바랐을까. 그러던 차에 고려 여인들이 적은 비슷한 내용의 소원이 마음에 와 닿더군요. 고려 사람의 생각과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기록. 이번 전시에서 인간적으로 가장 큰 울림을 준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옛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더듬어보는 이유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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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임진왜란 때 원숭이 기병대가 있었다고?
김 석


지난 6월의 어느 날이었지요. 습관처럼 뉴스를 뒤적거리다 퍽 흥미로운 기사 한 편을 만났습니다. 한 일간신문이 6월 13일 자로 <임진왜란 때 왜적 혼 빼놓은 ‘원숭이 기병대’ 실제 있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제목만 딱 보면 황당하기도 하고 솔깃하기도 하죠. 기사를 읽어봤더니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 擇里志》를 번역하던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책의 여러 이본(異本)을 비교 조사하는 과정에서 임진왜란 당시에 ‘원숭이 부대’가 실제 전투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이 거의 빠짐없이 수록됐을 뿐 아니라 내용에도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택리지》에 등장하는 원숭이 부대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쓴 인문지리서 《택리지》



“(명나라 장수) 양호는 (중략) 중무장한 기병 4,000명과 교란용 원숭이(弄猿) 기병 수백 마리를 이끌고 가서 소사하 다리 아래 들판이 끝나는 곳에 매복하게 하였다. 왜군이 숲처럼 빽빽한 대오를 이루어 직산으로부터 북상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거리가 100여 보가 되기 직전에 먼저 교란용 원숭이를 풀어놓았다. 원숭이는 말을 타고 채찍을 잡고서 말에 채찍을 가해서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군들은) 원숭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자 사람인 듯 하면서도 사람이 아닌지라 모두 의아해하고 괴이하게 여겨 발을 멈추고 쳐다만 보았다. 적진에 바짝 다가서자 원숭이는 말에서 내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왜적들은 원숭이를 사로잡거나 때려잡으려 하였으나 원숭이는 몸을 숨기고 도망 다니기를 잘해서 진영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 장면은 평양전투, 행주산성전투와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 육상에서 거둔 3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소사전투’를 묘사한 대목인데요. 소사(素沙)는 지금의 충남 천안 일대입니다. 소사전투는 1597년의 일이고, 그로부터 150여 년이 흐른 뒤에 이중환은 《택리지》를 저술하면서 ‘팔도론․충청도’ 항목에 이 기록을 남깁니다. 할리우드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이 실제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놀랍고도 흥미로운 대목이지요.


위 기록이 알려주는 사실들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① 전투 초기에 적진을 교란하기 위해 원숭이를 투입했다. ② 원숭이가 사람처럼 말을 탈 줄 알았다. ③ 사람인 것 같았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원숭이 기병대가 실제 전투에 투입돼 쏠쏠한 활약을 했다는 겁니다.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묘사가 꽤 구체적이고 생생하죠? 진짜일까요? 만약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실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소사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


이 대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안대회 교수는 원숭이 부대에 관한 다른 기록들을 찾아내 논문을 씁니다. <소사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란 제목의 논문은 《역사비평》 2018년 가을 호에 수록됩니다.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이번엔 논문을 찾아 읽었습니다. 안대회 교수가 찾아낸 기록 몇 가지가 있더군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경리 양호 치제문(楊經理鎬致祭文)>. 명나라 장수 양호의 죽음을 애도한 글인데,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답니다.



弄猿三百 농원 삼백이

一時鞭馬 한꺼번에 말을 달렸지.

狡彼倭奴 저 교활한 왜적들을

悉殲蹄間 모조리 말굽 아래서 섬멸했네.



이 짧은 구절에 새로운 사실이 등장합니다. 교란용 원숭이가 ‘3백’이었다고 써놓았습니다. 연암은 대체 뭘 근거로 이렇게 쓴 걸까요. 틀림없이 뭔가를 보고 썼을 텐데요. 하지만 안대회 교수도 그 정확한 근거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자료가 더 없나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원숭이 부대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을 발견하지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이런 내용이 보입니다.



“왜적을 베어 죽일 때 군사들이 모두 붉은 옷이나 비단옷을 입고 등에는 원숭이 한 마리를 업었다. 원숭이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내달렸다. (중략) 원숭이가 좌충우돌하니 왜적이 처음 보고서 놀라고 혼란스러워 완전히 패하여 남은 이가 없었으니 원숭이 또한 전공을 세웠다고 하겠다.”



위에서 본 내용과는 조금 다릅니다. 말을 탄 병사가 등에 원숭이를 업었고, 그 원숭이가 채찍으로 말을 몰았다는 겁니다. 원숭이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부분은 앞에서 소개한 기록과 일치하고요. 이것 말고도 안대회 교수가 찾아낸 또 다른 기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무인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임진왜란에 관한 한 가장 자세한 기록물로 평가되는데요. 이 책에는 조경남이 사명대사 유정(劉綎, 1544~1610)의 부대를 직접 목격하고 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초원(楚猿) 4마리가 있어 말을 타고 다루는 솜씨가 사람과 같았다. 몸뚱이는 큰 고양이를 닮았다.”



사람이라면 굳이 ‘사람과 같았다.’고 표현할 까닭이 있었을까요. 게다가 ‘큰 고양이를 닮았다.’고까지 했습니다. 안대회 교수에 따르면, 유정의 부대에 원숭이가 있었다는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 신녕현감으로 전투에도 참가한 손기양(孫起陽, 1559~1617)이란 분의 일기에도 살짝 등장합니다.



“원숭이는 능히 적진으로 돌진할 수 있고…”



하지만 안대회 교수로 하여금 원숭이 부대가 실제로 있었음을 믿게 해준 결정적인 기록은 따로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에 터를 잡고 살아온 풍산김씨 문중에 대대로 전해오는 화첩, 그러니까 그림 모음집 안에서 원숭이 기병대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는 것이었죠. 《세전서화첩(世傳書畫帖)》이라 불리는 이 화첩에는 그림 32점이 실려 있는데요. 이 가운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란 제목의 그림 2점 가운데 한 점을 주목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원숭이 병사?


풍산김씨 가문에 대대로 전해오는 《세전서화첩》에 수록된 <천조장사전별도>



이 귀중한 화첩이 2012년에 번역 출간됐더군요.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화첩을 구해다가 문제의 그림을 직접 확인해보았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명나라 원군을 전송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에 붙은 설명을 보면 당시 풍산김씨 문중의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이란 분이 명나라 부대를 여러모로 살뜰하게 챙긴 모양입니다. 명나라 장수가 조선을 떠나면서 특별히 김대현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지요.



“지난 두 해 동안 힘든 일을 겪으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돌보아 준 것을 참으로 잊을 수 없다. 지금 서로 이별하게 되니 그동안의 감회가 구름처럼 떠오른다. 귀국의 유명 화가인 김수운(金守雲)이 그린 전별도를 길이 기념할 수 있도록 그대에게 주겠다.”고 하면서 그림을 건네주었다.



밑줄 친 부분에서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조선의 김수운이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첩의 그림이 그때 그 그림은 아닐 개연성이 크지요. 명색이 조선의 유명 화가가 이 정도 수준의 그림을 그렸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김수운이 그렸다는 원본이 남아 있지 않으니, <천조장사전별도>는 후대의 화가가 상상력을 발휘해 다시 그린 것으로밖엔 볼 수 없습니다.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포르투갈 출신의 용병 해귀(海鬼)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이 그림의 왼쪽 아래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퀴 달린 수레에 아주 이국적인 외모의 병사 네 명이 타고 있지요. 다른 병사들을 묘사한 것과 비교하면 몸집이 훨씬 큰 데다 피부색은 까무잡잡하고 머리털은 붉은 색으로 그려졌습니다. 가운데 삐죽 솟아나온 병사의 머리 오른쪽 위로 글자가 보이지요? 해귀(海鬼)입니다. 해귀는 포르투갈 출신의 해군 용병입니다. 


임진왜란에 포르투갈 용병이 참전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 바로 이 그림을 근거로 현재 주한 포르투갈 대사관에서 풍산김씨 후손들에게 해마다 연하장을 보낸다지 뭡니까.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임진왜란에 참전한 다국적 군대를 묘사한 것으로는 이 그림이 유일무이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둘째고, 이런 귀중한 그림을 화첩에 묶어 대대로 전해온 정성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런 그림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원병(猿兵)



이제 해귀들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옮기면 짐승의 탈을 쓴 사람인 것도 같고 짐승인 것도 같은 털 복숭이 병사들이 보이죠. 생김새를 보면 신체의 모양이나 서 있는 모습은 사람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몸을 잔뜩 뒤덮고 있는 털의 묘사라든가 짐승처럼 주둥이가 뾰족한 머리 모양을 보면 사람과는 또 딴판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그림만 봐선 딱 잘라서 뭐라 단정 짓기가 어렵지요.


깃발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원병삼백(猿兵三百)’. 원숭이 병사 3백이라고 적었습니다. 앞에서 본 연암 박지원의 글 내용과 일치하는 숫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걸 실제 원숭이로 볼 것이냐, 아니면 단지 변장을 한 사람으로 볼 것이냐,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전서화첩》을 연구해서 2012년에 번역본을 낸 두 연구자는 이들을 “여진족 출신 투항자들로 구성된 군인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것까지 포함해서 안대회 교수는 원숭이 기병대에 관한 해석이 크게 네 가지로 이뤄지고 있다고 논문에 소개합니다.



① 원숭이처럼 민첩한 병사

② 털이 많이 난 중국 주변 국가의 소수민족 병사

③ 원숭이의 탈을 써서 변장한 병사

④ 원기(猿騎), 곧 마상재(馬上才)



역사,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하다


자, 여기까지 읽고 난 여러분은 위의 보기 넷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보시나요. 사실 이 논문은 충분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임에도 언론들이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봐선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처럼 들리니까요. 제가 여기에 소개한 내용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그래도 궁금하다면 안대회 교수의 논문을 직접 찾아 읽어야 합니다.


그럼 제 생각은 어떠냐고요? 논문을 찾아 읽고 화첩까지 구해 본 저로서는 원숭이 부대가 실재했다는 쪽을 조금 더 믿어보고 싶습니다. 이런 흥미로운 역사의 한 장면이 진짜라고 한다면 훗날 대하역사극의 한 대목에서 원숭이 기병대가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요. 역사라는 건 분명 흘러간 과거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우리를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하곤 한답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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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웨일즈 1편
영국 속 작은 나라 웨일즈에 가다
이 환
영국이지만 영국 같지 않은 땅
웨일즈(Wales)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북아일랜드로 이뤄진 나라다. 그래서 국가명이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줄여서 UK라고 부른다. 정확히는 19세기 아일랜드를 복속한 후 1922년 지금의 이름으로 확정됐다. 웨일즈는 사실상 다른 민족, 다른 언어를 쓰며 문화도 사뭇 다르다.
런던을 출발해 기차로 두 시간을 달려 잉글랜드 서쪽 마지막 도시인 체스터역에서 내려 차로 달렸다. 시계를 빠져 나가자 마자 웨일즈 영역에 왔다고 알려준다. 두 가지가 확연히 차이난다. 하나는 저 멀리 서쪽으로 높은 산들이 솟아있다. 구릉과 평야가 대부분인 잉글랜드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풍경.
두 번째는 교통과 관광안내 표지판이다. 암호 같은 알파벳과 영어 표기가 항상 붙어있다. 웨일즈어다. 영국 땅이지만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곳의 분위기는 색다르다.
초록빛 풀밭과 양들이 수십 번씩 반복되는 언덕을 오르고 내린다. 윈도우 컴퓨터 초기화면에서 본 것 같은 아름다운 초록언덕이 반복된다. 콘위 시내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잠시 쉬었다. 시간을 거슬러 온 느낌이다. 언덕 아래 펼쳐진 풍경은 중세 마을 모습 그대로다.
바닷가 바짝 옆 콘위성이 거인처럼 서있고 언덕 아래 마을을 뱅 둘러 성벽이 병풍처럼 바깥 세계를 향해 굳게 막아 서있다. 그야말로 철옹성이다. 바다 위엔 수백 척의 요트들이 한가로이 떠있다. 웨일즈에는 콘위성 외에 1969년 찰스 왕자가 황태자 서임식을 생중계해 유명해진 카나번성 등 고성들이 641개나 된다.
동화 속 꿈 같은 공간
콘위성
다음날 이른 아침, 콘위성을 찾았다. 완공하는데 만 4년(1283~1287) 밖에 안 걸린 초고속 성채다. 그런데도 견고하게 지어져 보존 상태가 좋아 중세 고성연구에 중요한 성이다. 불행히도 이 성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즈를 정복해 쌓은 잉글랜드성이다. 당시로서는 이민족이 침탈해 만든 성이다.
고성 해설사 윌리엄스씨는 “친구들이 내게 왜 하필 잉글랜드가 정복해 만든 성에서 일하느냐?”며 핀잔을 준다고 한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한다. “그때마다 저는 말하죠. 역사는 역사다. 오래 전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이 성 꼭대기에 있는 깃발을 보세요. 바로 웨일즈 깃발 아닙니까? 뭐가 문제죠?” 일행들은 웃음과 함께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수백 년 고성 망루에서 서쪽으로 펼쳐진 스노든산맥을 바라본다. 성 안의 잉글랜드인들과 성문 밖 웨일즈인들을 떠올려 본다. 산 주변 마을에서 척박하게 살아가는 웨일즈인들에게 이곳은 동화 속 꿈 같은 도시였으리라. 바닷바람이 제법 거세다. 인간은 거친 역경들을 이겨내며 오늘날 같은 멋진 세상을 만들었다.
평야 위에 우뚝 솟은 산
브레콘산
영국은 전체적으로 산세가 약하다. 그나마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산이 높다. 가장 높은 산이 1,113m 높이의 웨일즈 북부 스노든산이며, 남부에서 제일 높은 산이 브레콘산(886m)이다. 평야 위에 솟은 높은 언덕 산 정도다.
이곳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자신의 차를 타고 이동하며 이야기 나누자고 한다. 매우 활달해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안내했다. 웨일즈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다. 관목과 풀 밖에 없는 황량한 브레콘산 등산로를 따라 한 시간 여 오르니 정상이 성큼 다가왔다. 지금껏 평야만 봐서인지 정상에서 펼쳐진 풍경은 나쁘진 않았다.
그 뒤 노인은 대단한 폭포(Waterfall)가 있다며 꼭 봐야 한다며 한참을 데리고 안내했다. 결론은 아주 작은 폭포.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신기한 명소다. 웃음이 나왔지만 “원더풀!”이라 화답해줬다.
세계에서 가장 큰 중고책 마을
헤이온 와이
이곳은 미리 알던 곳으로, 꼭 가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다. 서점에서 한 괴짜 책 애호가의 이야기를 접했다. 머리에 왕관을 쓴 그는 자신의 성채를 책 왕국으로 선포하고, 자신을 왕으로 칭했다. 그의 이름은 리차드 부스(Richard Booth). 옥스포드를 졸업한 후 몰락해 가는 1961년부터 시골마을을 책으로 가득 채우고, 급기야 900년이 넘는 헤이성을 사들여 세계에서 가장 큰 중고서점을 만들었다. 30여 개의 전문서점들이 마을을 가득 채웠다. 중고서적은 거의 40만권이 넘는다고 한다.
한 괴짜 책 애호가 리차드 부스의 노력 덕분에 이 마을은 영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을이 되었다.
필자가 그를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는 옆 마을로 외출 중이었다. 직원이 전화를 연결해주어 인사를 나눴다. 목소리는 우렁차고 처음 듣는 외지인의 어눌한 영어에 밝게 대답해 줬다. 한 가지 주제를 몇십 년간 억척스럽게 천착한 그의 의지와 혜안을 배운다. 세상은 이런 괴짜들이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 같다. 이제 더 웨일즈 북서쪽 마을로 이동한다.
웨일즈 유기농 식당 보드난트

지역에서만 나오는 양, 소고기, 야채, 과일 등으로 요리하는 식당과 시장이다. 요리교실 체험 프로그램이 있고, 미식가들에겐 필수코스.

www.bodnant-welshfood.co.uk
영국에서 가장 작은 집

콘위성 마을에 붙어있는 항구 바로 앞에 있다. 높이 3m, 폭이 1.8m로 마지막 거주자는 어부였는데 180cm가 넘는 거구였다고 한다.

콘위 캐슬호텔(Conwy Castle Hotel)

성문 안 마을 중심가에 세워진 1570년대부터 운영해 온 고즈넉하고 유서깊은 호텔. 중세시대 집에 온 느낌이다.

www.castlewales.co.uk
About Writer 이환
영국이지만 영국 같지 않은 땅
웨일즈(Wales)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북아일랜드로 이뤄진 나라다. 그래서 국가명이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줄여서 UK라고 부른다. 정확히는 19세기 아일랜드를 복속한 후 1922년 지금의 이름으로 확정됐다. 웨일즈는 사실상 다른 민족, 다른 언어를 쓰며 문화도 사뭇 다르다.

런던을 출발해 기차로 두 시간을 달려 잉글랜드 서쪽 마지막 도시인 체스터역에서 내려 차로 달렸다. 시계를 빠져 나가자 마자 웨일즈 영역에 왔다고 알려준다. 두 가지가 확연히 차이난다. 하나는 저 멀리 서쪽으로 높은 산들이 솟아있다. 구릉과 평야가 대부분인 잉글랜드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풍경.

두 번째는 교통과 관광안내 표지판이다. 암호 같은 알파벳과 영어 표기가 항상 붙어있다. 웨일즈어다. 영국 땅이지만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곳의 분위기는 색다르다.

초록빛 풀밭과 양들이 수십 번씩 반복되는 언덕을 오르고 내린다. 윈도우 컴퓨터 초기화면에서 본 것 같은 아름다운 초록언덕이 반복된다. 콘위 시내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잠시 쉬었다. 시간을 거슬러 온 느낌이다. 언덕 아래 펼쳐진 풍경은 중세 마을 모습 그대로다.

바닷가 바짝 옆 콘위성이 거인처럼 서있고 언덕 아래 마을을 뱅 둘러 성벽이 병풍처럼 바깥 세계를 향해 굳게 막아 서있다. 그야말로 철옹성이다. 바다 위엔 수백 척의 요트들이 한가로이 떠있다. 웨일즈에는 콘위성 외에 1969년 찰스 왕자가 황태자 서임식을 생중계해 유명해진 카나번성 등 고성들이 641개나 된다.

동화 속 꿈같은 공간
콘위성

다음날 이른 아침, 콘위성을 찾았다. 완공하는데 만 4년(1283~1287) 밖에 안 걸린 초고속 성채다. 그런데도 견고하게 지어져 보존 상태가 좋아 중세 고성연구에 중요한 성이다. 불행히도 이 성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즈를 정복해 쌓은 잉글랜드성이다. 당시로서는 이민족이 침탈해 만든 성이다.

고성 해설사 윌리엄스씨는 “친구들이 내게 왜 하필 잉글랜드가 정복해 만든 성에서 일하느냐?”며 핀잔을 준다고 한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한다. “그때마다 저는 말하죠. 역사는 역사다. 오래 전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이 성 꼭대기에 있는 깃발을 보세요. 바로 웨일즈 깃발 아닙니까? 뭐가 문제죠?” 일행들은 웃음과 함께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수백 년 고성 망루에서 서쪽으로 펼쳐진 스노든산맥을 바라본다. 성 안의 잉글랜드인들과 성문 밖 웨일즈인들을 떠올려 본다. 산 주변 마을에서 척박하게 살아가는 웨일즈인들에게 이곳은 동화 속 꿈 같은 도시였으리라. 바닷바람이 제법 거세다. 인간은 거친 역경들을 이겨내며 오늘날 같은 멋진 세상을 만들었다.

평야 위에 우뚝 솟은 산
브레콘산

영국은 전체적으로 산세가 약하다. 그나마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산이 높다. 가장 높은 산이 1,113m 높이의 웨일즈 북부 스노든산이며, 남부에서 제일 높은 산이 브레콘산(886m)이다. 평야 위에 솟은 높은 언덕 산 정도다.

이곳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자신의 차를 타고 이동하며 이야기 나누자고 한다. 매우 활달해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안내했다. 웨일즈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다. 관목과 풀 밖에 없는 황량한 브레콘산 등산로를 따라 한 시간 여 오르니 정상이 성큼 다가왔다. 지금껏 평야만 봐서인지 정상에서 펼쳐진 풍경은 나쁘진 않았다.

그 뒤 노인은 대단한 폭포(Waterfall)가 있다며 꼭 봐야 한다며 한참을 데리고 안내했다. 결론은 아주 작은 폭포.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신기한 명소다. 웃음이 나왔지만 “원더풀!”이라 화답해줬다.

세계에서 가장 큰 중고책 마을
헤이온 와이

이곳은 미리 알던 곳으로, 꼭 가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다. 서점에서 한 괴짜 책 애호가의 이야기를 접했다. 머리에 왕관을 쓴 그는 자신의 성채를 책 왕국으로 선포하고, 자신을 왕으로 칭했다.

한 괴짜 책 애호가 리차드 부스의 노력 덕분에 이 마을은 영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을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리차드 부스(Richard Booth). 옥스포드를 졸업한 후 몰락해 가는 1961년부터 시골마을을 책으로 가득 채우고, 급기야 900년이 넘는 헤이성을 사들여 세계에서 가장 큰 중고서점을 만들었다. 30여 개의 전문서점들이 마을을 가득 채웠다. 중고서적은 거의 40만권이 넘는다고 한다.

필자가 그를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는 옆 마을로 외출 중이었다. 직원이 전화를 연결해주어 인사를 나눴다. 목소리는 우렁차고 처음 듣는 외지인의 어눌한 영어에 밝게 대답해 줬다.

한 가지 주제를 몇십 년간 억척스럽게 천착한 그의 의지와 혜안을 배운다. 세상은 이런 괴짜들이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 같다. 이제 더 웨일즈 북서쪽 마을로 이동한다.

웨일즈 유기농 식당 보드난트
지역에서만 나오는 양, 소고기, 야채, 과일 등으로 요리하는 식당과 시장이다. 요리교실 체험 프로그램이 있고, 미식가들에겐 필수코스.
영국에서 가장 작은 집
콘위성 마을에 붙어있는 항구 바로 앞에 있다. 높이 3m, 폭이 1.8m로 마지막 거주자는 어부였는데 180cm가 넘는 거구였다고 한다.
콘위 캐슬호텔(Conwy Castle Hotel)
성문 안 마을 중심가에 세워진 1570년대부터 운영해 온 고즈넉하고 유서깊은 호텔. 중세시대 집에 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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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그림으로 피어난 우리 땅 ‘독도’
김 석

그 섬에 화가가 있었습니다. 하늘은 푸르렀고, 바다의 푸름은 그보다 더 깊었지요. 파도 소리, 새 소리 가득한 섬. 벗인 양, 연인인 양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 짓는 모습이 얼마나 정겨웠던지. 육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외딴 섬은 화가의 가슴을 한없이 요동치게 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두 섬이 그토록 오랜 풍파를 꿋꿋이 견뎌온 어엿한 우리 땅이었으니까요. 동도에서 서도를 바라보는 화가의 붓은 그림 속에서 아련한 메아리를 불러냅니다.


류인선, <독도-동도에서 서도를 바라보다>, 23.3×40.9cm,  캔버스에 아크릴과 오일 파스텔, 2015



언제나 시릴 그 바다와 또 언제나 맑고 신선할 그 공기와 괭이갈매기 소리…! 제가 본 독도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아주 오래 전 울릉도로 갈 때 본 동해는 그 깊이가 얼마나 아득한 건지 검은 돌 같기도 했는데, 하얀 파도와 어울린 독도의 물빛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푸른빛이었습니다. 괭이갈매기(독도의 주인인 듯한)의 배설물이 척박한 환경을 비옥하게 만들어주었는지 소리쟁이와 방가지똥은 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만큼 튼실해 보였습니다. 철 이른 연보랏빛 해국 꽃이 드문드문 보이고 개갓냉이 노란 꽃은 무리를 이뤄 독도에 노란 옷을 입혀주고 있었습니다. 바위채송화와 갯제비쑥도 곱게 연초록 융단을 짜고 있을 즈음, 잊지 못할 2015년 5월 16일이었습니다. 

- 작가의 말


화가가 독도에 첫 발을 내디딘 건 한창 꽃피는 5월이었습니다. 소리쟁이, 방가지똥, 개갓냉이, 갯제비쑥… 정겨워서 더 고마운 꽃들이 뿌리 내리고 번성한 섬. 육지에서 그렇게도 먼 곳에서 어쩌면 그렇게 살뜰하고 의젓하게 뭇 생명들의 싹을 틔워 올렸을까요. 그 대견함에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비단 화가뿐이었을까요. 긴 세월 모진 풍파를 말없이 견뎌낸 저 꽃들이야말로 독도의 어엿한 주인이 아닐는지요.


류인선 <독도-풀꽃 사이로 보다 1, 2, 3>, 116.8×91cm, 면천에 한지와 채색, 2015


이 땅의 온갖 꽃에 남다른 애정을 품은 화가가 독도의 꽃들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겠지요. 동양화가인 류인선 작가가 2015년에 완성한 그림 <독도-풀꽃 사이로 보다>입니다. 세 그림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는데요. 화폭 아래 배꼼 고개를 내민 풀꽃들이 마치 독도를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같지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의 시선이 풀꽃들의 시선과 겹쳐져 있어요. 생명으로서의 꽃을 존중할 줄 아는 화가의 바로 그 ‘눈높이’ 덕분에 이 작품은 독도를 묘사한 그 어떤 그림보다도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류인선 <독도수호바위 풍경>, 91×182cm, 면천에 한지와 채색, 2015



화가들, 독도를 그리다


독도를 그린 화가는 꽤 많습니다. 독도를 주제로 한 미술 전시회 또한 그리 드물지 않고요. 위에 소개한 류인선 작가의 작품들도 2015년 10월 28일부터 12월 13일까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개최된 특별기획전 <독도 오감도>란 전시회에서 대중에 선보였는데요. ‘문화를 통한 독도사랑’을 표방한 예술가들이 뜻을 모아 꾸린 라메르에릴(바다와 섬)이란 이름의 사단법인이 기획한 첫 전시였지요.


우리 화가들에게 독도는 단순한 풍경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잊힐 만하면 불거지는 일본의 도발에 화가들은 붓으로 답했습니다. <독도 오감도>를 시작으로 같은 주제로 전시회가 모두 네 차례 열립니다. 가장 최근 전시는 지난해 11월 29일부터 12월 1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국의 진경 – 독도와 울릉도>였습니다. 일부러 찾아가긴 멀지만 가까이서 독도를 볼 수 있었던 건 화가들의 그림 덕분이었죠.


3,200개가 넘는 우리나라의 섬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려진 섬. 이 땅의 자연지형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려진 대상물. 독도는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겠지요. 그러니 그 많은 독도 그림을 역사라는 틀 안에만 꽁꽁 가둘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림은 무엇보다 그림으로 보면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어떤 그림들은 더 특별한 예술적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김선두 <독도-작은 리조트>, 145×112cm, 장지에 분채, 2017


정일영 <독도>, 97×162cm, 캔버스에 아크릴, 2017


하태임 <독도>, 91×116.8cm, 캔버스에 아크릴, 2017


임만혁 <독도 17-1>, 75×213cm, 한지에 목탄, 2017


김덕기 <원더풀 독도>, 193.9×259.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용의 기운’을 품은 신비의 섬 독도


독도만 그리는 화가가 과연 있을까요. 글쎄요. 과문한 탓인지 아직 그런 화가를 만나보진 못했습니다. 그럼 독도를 주제로 개인 전시회를 연 화가는 있었을까요. 찾아보니 실제로 있더군요. 모르긴 몰라도 처음 만난 독도는 화가에게 말할 수 없이 깊은 예술적 영감을 주었을 겁니다. 그래서 다시는 못 올 것처럼 동도에서 서도까지 독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눈과 가슴에 한가득 담아가는 것도 모자라 붓을 들었겠지요.


2015년 6월, 서울 대학로 혜화아트센터에서 아주 특별한 전시회가 열립니다. 전시 제목은 <조광기 독도 아크릴 드로잉 전>. 엿새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 화가가 독도 그림만을 모아 대중에 선보인 건 아마도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 전시회 포스터를 보면 독도의 두 섬 가운데 동도 그림이 보이고 그 아래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바다에서 본 동도의 모습은 한 마리 용이 꿈틀거리는 듯…”


조광기 <독도의 꿈>, 77×107cm, 메트지에 아크릴 드로잉, 2015


그런데 참 묘하게도 독도의 모습에서 용을 떠올린 화가가 또 있었답니다. 한국화가 소산 박대성 화백의 <독도>입니다. 올해 2월 7일부터 3월 4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된 박 화백의 개인전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에서 공개된 그림인데요. 가로 8미터로 전시장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장대한 규모의 이 작품은 압도적인 힘으로 관람객을 사로잡는 대작입니다. 독도 그림으로 이보다 큰 작품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붉은 여의주를 움켜쥔 신성한 해룡(海龍)의 대갈일성이 그림 밖으로 생생하게 전해져오는 것만 같습니다.


박대성 <독도>, 218×800cm, 종이에 잉크, 2015


예술가들만 감지해낼 수 있는 어떤 강한 에너지가 전해진 걸까요. 2015년의 어느 하루 8시간 동안 독도를 만나고 돌아온 화가는 곧바로 독도를 그리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그림 12점을 대중 앞에 선보입니다. 독도가 아니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그림이었고 전시회였을 겁니다. 독도 그림으로 처음 개인전을 연 서양화가 조광기 화백의 독도 그림은 지금까지 보아온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또 다릅니다. 독특하게 아크릴 물감을 드로잉의 재료로 활용했는데, 바탕 재질에 따라 질감의 차이가 도드라지는 게 특징이지요. 


조광기 <독도의 꿈>, 90×7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좌) 조광기 <독도의 꿈>, 107×77cm, 메트지에 아크릴 드로잉, 2015    (우) 조광기 <독도의 꿈(일출)>, 90×7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조광기 <청산사유(독도)>, 60×50cm, 혼합재료, 2018


시인이 뜨거운 우리 말글로 그려낸 독도. 아마 독도를 노래한 시인 역시 꽤 많겠지요. 그 중에서 독도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시는 아마도 도종환 시인의 <독도>일 겁니다. 때론 감상적이면서도 때론 유장한 시어들이 빚어내는 깊은 울림에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데요. 조광기 화백이 최근에 그려낸 독도 그림 한 점은 마치 도종환의 시를 붓으로 풀어낸 것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하늘이며 땅이며 온통 푸른 빛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된 독도, 푸름 안에 깃든 독도였지요.



그림 속에서 독도가 말을 걸어왔다



김준권 <山韻-0901>, 400×160cm, 수묵목판, 2009


얼마 전 벼르고 별렀던 한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올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 당시 회담 못지않게 화제가 된 미술품이 있었지요. 두 정상의 뒤로 멋들어진 첩첩 산줄기가 장대하게 펼쳐진 이 판화 작품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목판화가 김준권의 <산운(山韻)-0901>입니다. 어떻습니까.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줄기 너머에서 산의 소리가 들리시나요?


하지만 전시장을 가만 돌아보던 제게는 그보다 더 눈에 띄는 작품들이 있었답니다. 바로 독도 그림이었어요. 며칠 동안 독도에 관해 생각하고 자료를 찾고 글을 써오던 차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공간에서 또 다른 독도를 만난 겁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전시장을 돌면서 몇 번이고 독도를 눈에 담았지요. 독도를 그린 꽤 많은 작품을 봐왔어도 ‘독도의 아침’을 담아낸 작품은 처음 만났습니다. 바로 이 작품입니다.


김준권 <독도의 아침>, 30×40cm, 유성목판, 2018


이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잠시 판화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목판으로 찍어냈다는 걸 알고 다시 보면 정말 믿기지 않는 그림입니다.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저토록 미세한 색의 변화를 판화로 표현해냈다는 데 놀랐습니다. 아침 해가 서서히 고개를 내밀면서 자욱했던 해무가 조금씩 걷히는 그 순간의 독도를 참으로 절묘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전시장에는 이 그림 양쪽 옆에 독도의 동도, 서도가 나란히 걸려 있었어요. 작가의 솜씨인지, 전시기획자의 감각인지는 몰라도 색이 입혀진 독도 그림이 그렇게 동쪽과 서쪽에서 독도의 아침을 호위하듯 서 있는 모습마저도 퍽 특별해 보이더군요. 작품을 본 사람들은 판화라는 사실 자체를 믿기 어렵다는 반응이었지요. 붓으로 그렸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섬세한 선과 결의 묘사라든가 색채의 조화가 돋보이는 그림이었습니다.


(좌) 김준권 <독도-서도>, 89×60cm, 채묵목판, 2014    (우) 김준권 <독도-동도>, 89×54cm, 채묵목판, 2014



독도가 전하는 메시지


꽤 많은 독도 그림을 찾아보고 살피는 내내 책 한 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소설가 김탁환의 <독도평전>인데요. 제목이 참 독특하지요? 사람도 아닌 섬의 평전을 쓴다니, 그 발상이 참 남다릅니다. 독도가 품은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은지요. 책이 발간된 2005년까지 독도의 생애를 적어나간 작가는 그 이후의 삶을 여생(餘生)이라는 제목 아래 짧게 기록합니다.


까맣게 모른 채 그냥 지나갈 것 같아 적어둡니다.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입니다. 독도는 멀지만 그림은 가깝잖아요. 그래서 독도 그림을 애써 찾아다니고 수없이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독도를 만나보려 했던 겁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은 유행가 가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독도는 소중한 우리 땅입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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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추억의 ‘플란다스의 개’와
위대한 ‘루벤스’ 이야기
김 석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골 마을의 작은 오두막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지요. 소년과 할아버지는 몹시도 가난했습니다. 온종일 굶는 날도 많았거든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웃집 젖소에서 짜낸 우유를 작은 수레에 싣고 가까운 도시로 배달하는 것뿐이었어요. 하지만 나이 들어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에겐 수레를 끄는 일조차 버거웠답니다. 그래도 소년은 행복했습니다. 언제나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지요.

마을에서 떠들썩한 축제가 열리던 날이었어요. 웃고 떠드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들 사이를 할아버지는 힘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풀숲에 쓰러진 커다란 개를 발견하게 되지요. 그 옆에는 작은 금발 머리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서 있었고요. 할아버지는 개를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보살핍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개는 기적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소년의 둘도 없는 가족이 됩니다.

1975년 일본에서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플란다스의 개>는 국내에서도 방영돼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소년, 위대한 화가를 꿈꾸다

기억하시나요.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이 따뜻한 동화를 말이에요.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분들은 그래 그거야 하실 겁니다. 저 역시 아주 어렴풋하게 본 기억은 있지만,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 뭔지 줄거리가 어떻게 되는지는 까맣게 잊고 말았답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어서야 문득 그때 그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고 싶어지더군요. 넬로와 파트라슈의 따스한 우정을 담은 동화 <플란다스의 개>를 말입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사실 소년에겐 아주 큰 꿈이 있었습니다. 루벤스 같은 위대한 화가가 되는 것이었어요. 루벤스가 누구냐고요?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미술의 역사에서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루벤스가 태어난 고향은 플랑드르 지방입니다. 지금의 벨기에에 속한 지역이지요. 동화의 주인공 넬로가 사는 곳이 바로 이 플랑드르입니다. 루벤스는 플랑드르의 자랑이었어요. 넬로는 그런 루벤스를 한없이 동경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루벤스처럼 위대한 화가가 될 거야! 넬로는 그런 간절한 꿈을 무럭무럭 키워갑니다.

‘루벤스의 도시’ 안트베르펜에는 루벤스가 살던 집이 있고 죽은 뒤에 잠든 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첨탑이 있는 성당에는 루벤스가 남긴 거대한 그림들이 걸려 있지요. 소년은 그 그림들을 몹시도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그림을 볼 수 없었어요.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언제나 커다란 천이 그림을 가리고 있었거든요. 우유를 배달하러 갈 때마다 넬로는 어김없이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루벤스의 그림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요.

“가난해서 돈을 못 낸다는 이유만으로
그림을 볼 수 없다니 정말 너무해! 그분은 분명 가난한 사람들은
못 보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저 그림들을 그리진 않았을 거야.
우리가 언제라도 매일 그림을 보길 바랐을 거라고.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 아름다운 그림을 천으로 덮어
어둠 속에 가둬 놓고 있어! 부자가 와서 돈을 내지 않으면
빛도 들지 않고 아무도 못 보게 말이야.
난 저 그림들을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아.”

이미지 출처: 김지혁 그림, <플란다스의 개>(인디고, 2012)

그림의 신, ‘루벤스’를 만나다

넬로에게 루벤스는 ‘신’이었습니다. 소년은 천국 같은 꿈에 빠져들었지요. 주체할 수 없는 열망에 사로잡힌 소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소년은 그림을 그립니다. 물감을 살 돈이 없었기에 돌 위에 석필로 그림을 그렸지요. 소나무 널빤지에 숯으로도 그렸고요.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년은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넬로에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티 없이 해맑고 착한 소년에게 세상은 한없이 가혹하기만 합니다. 가난한 것도 모자라 화가가 되겠다고 하느냐며 둘도 없는 친구 알루아의 아버지는 둘 사이를 강제로 떼어놓습니다. 심지어 아무 잘못도 없이 하루아침에 방화범으로 몰리자 마을 사람들은 등을 돌려 버리지요. 유일한 혈육이었던 할아버지는 지독한 가난과 병마를 못 이기고 결국 넬로만 남겨둔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미지 출처: 김지혁 그림, <플란다스의 개>(인디고, 2012)

집세를 감당할 수 없어 끝내 정든 오두막을 떠나야 하는 넬로와 파트라슈의 가련한 운명이란…. 한겨울 추위 속에서 둘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루벤스의 그림이 걸려 있는 성당이었어요. 문이 열린 성당 안으로 들어가 긴 복도를 지나자 천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루벤스의 그림이 마침내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슬픈 동화는 소년의 꿈이 이뤄지는 이 극적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넬로가 일어서더니 그림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창백한 얼굴에서 기쁨에 찬 눈물이 반짝거렸다.
“드디어 그림을 봤어! 오, 하느님, 이제 됐습니다!”

그렇게 둘은 죽음을 맞습니다. 루벤스의 그림을 올려다보며 죽은 넬로의 얼굴엔 미소가 피어 있었지요. 저 나이 어린 소년이 목숨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그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기엔 너무나도 가슴 시린 이야기입니다. 저 착하고 순수한 영혼들을 기어이 죽음에 이르게 만든 작가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몰라요. 죽는 순간에도 넬로를 미소 짓게 만든 루벤스의 그림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그림들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있는 ‘루벤스의 집’

‘루벤스의 도시’라 불리는 안트베르펜은 사실 루벤스의 어머니의 고향이었습니다. 루벤스가 태어난 곳은 안트베르펜이 아니라 독일의 지겐이었지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 때문에 독일로 이주해 살던 루벤스 가족이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간 것은 루벤스가 12살 때였습니다. 이곳에서 성장기를 보낸 루벤스는 스물한 살 나이에 화가가 됩니다. 그리고 1600년, 그토록 꿈에 그리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 루벤스는 그리스와 로마, 르네상스의 위대한 유산을 통해 화가로서의 자질을 탄탄하게 다집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길에 오른 루벤스는 이후 안트베르펜에 정착합니다. 뛰어난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귀국한 지 1년 만에 당시 남부 네덜란드를 다스리고 있던 알브레흐트 대공 부부의 궁정화가로 임명됐지요. 루벤스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갑니다. 당시는 전통적인 가톨릭 구교와 종교개혁을 부르짖는 신교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무척이나 심했어요. 성상 파괴 운동이란 것이 벌어져 가톨릭 성당치고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지요.

전쟁이 끝나고 다시 성당을 재건해야 했을 때 루벤스는 그림 주문을 받습니다. 마침내 완성된 제단화가 성당에 걸리자 루벤스는 단숨에 플랑드르 지방 최고의 화가로 찬사를 받게 되지요. 안트베르펜의 성모 성당에는 루벤스의 제단화 세 폭이 남아 전하는데요. 넬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그림들입니다.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입니다.

(좌)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 (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넬로, 둘도 없는 친구 파트라슈를 꼭 끌어안다

거룩하고 신성한 성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그려진 거대한 그림 앞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요. 단순히 그림 자체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놀라운 영적 감동이 보는 이를 가슴 떨리게 하고 눈물짓게 하지 않았을까요. 감히 그 앞에 무릎 꿇고 고개 숙여 기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한 번이라도 그림을 본 이들은 그 주체하기 힘든 감동에 벅차올라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루벤스 그림 봤어? 봤냐고?

그림의 명성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을 겁니다. 어린 넬로도 그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위대한 루벤스의 위대한 그림을 너무나도 보고 싶었지요. 그림 한 점을 본다는 것이 목숨과 맞바꿀 만한 것이었을까. 한낱 동화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가슴 시린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던가요. 다시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을 펼쳐 봅니다. 넬로가 둘도 없는 친구 파트라슈를 꼭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하지요.

“거기 가면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어.
그분은 우리를 갈라놓지 않을 거야.”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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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갤러리, 클레토 무나리 국내 최초 개인전 개최
경쾌하고 파격적인 컬러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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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다소 낯선 클레토 무나리와 그가 설립한 회사 클레토 무나리 컴퍼니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회사가 자리한 이탈리아 북동부 도시 비첸차Vicenza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이탈리아 건축가와 디자이너, 그리고 디자인 스튜디오가 그렇듯, 위대한 르네상스의 유산과 그들의 작업 세계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비첸차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친퀘첸토Cinquecento’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하는 시기, 즉 위대한 1500년대를 빛낸 도시인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와 함께 빠질 수 없는 도시다. 르네상스의 수많은 위대한 천재 중에서 건축가로서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1500년대에 이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사이트에 비첸차를 ‘팔라디오의 도시’라고 표기했을 정도. 이런 강력한 문화유산은 20세기로 이어져 또 한 명의 위대한 거장을 낳았다. 그는 바로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건축가 중 한 명인 카를로 스카르파다. 클레토 무나리는 1973년에 카를로 스카르파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무나리는 스카르파의 조언에 따라 회사를 비첸차에 설립했고, 자신만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갔다. 클레토 무나리는 현재 ‘비첸차의 자존심’으로 불리면서 팔라디오와 스카르파라는 이 도시의 거대한 유산을 잇고 있다.

카를로 스카르파는 합리주의를 우선시하는 엄격한 모더니즘으로부터 탈피한 건축으로 유명하다. 단조로움과 규칙성이 지배하는 모던 건축이 아니라 불규칙성, 예상치 못한 변화를 만들어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신체를 일깨운다. 다시 말해, 너무 편안해서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환경을 창조해 신체와 의식을 깨운다. 이런 스카르파의 디자인 철학은 클레토 무나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무나리가 회사를 설립한 1970년대는 전 세계에서 변화가 소용돌이치는 시기였다. 풍요로운 경제가 끝나고 위기가 찾아왔다. 보수화한 모더니즘은 디자인을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로만 여겼고, 이에 따라 디자이너의 창의력은 억압당했다. 무나리는 디자이너들에게 다시 창조적 힘을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에토레 소트사스, 알레산드로 멘디니 같은 기업에 비타협적인 디자이너들이 안티디자인 운동을 벌이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 발흥하는 시기였다. 무나리는 이들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렇게 해서 창조적 열정으로 가득한 건축가, 디자이너, 예술가들과 협업하는 클레토 무나리 컬렉션이 탄생했다.

대구신세계 8층 신세계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클레토 무나리 전시회 전경 (9.1~9.30)

클레토 무나리는 자사의 디자인 정체성을 만들던 1970~80년대에 ‘디자인’이 갖는 의미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디자인이 기술과 너무 깊이 연관되어있다”고 말했다. 디자인이 이성의 힘에 종속돼 지나치게 건조하고 딱딱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무나리의 첫 번째 제품 라인인 실버 컬렉션은 오랜 시간 투자해 1978년에 첫 제품이 탄생했다. 그의 정신적 지주인 카를로 스카르파의 주전자다. 이 주전자는 매우 단순한 원통형이다. 하지만 주둥이와 손잡이로 인해 대단히 독창적 디자인으로 완성됐다. 원래 단순할수록 그것을 제조하는 것은 어렵기 마련이다. 이 제품은 비첸차가 위치한 베네토Veneto주의 전통적 장인들과 협업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이 디자인을 생산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고 하니 그들의 열정과 노고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이 주전자는 지금까지도 무나리가 가장 좋아하는 제품 중 하나다. 스카르파의 주전자에 이어 가에 아울렌티, 마리오 벨리니, 에토레 소트사스, 한스 홀라인, 알레산드로 멘디니, 루이지 콜라니 등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디자이너 제품이 추가되면서 실버 컬렉션은 더욱 풍성해졌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실버 컬렉션 제품은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소장품이 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당대의 뛰어난 창조자와 장인들을 연결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제품을 생산하는 ‘재능의 연결자’로서 클레토 무나리의 능력은 최고조에 이른다. 다양한 건축가, 디자이너와 협업해 하나의 제품 라인을 만들어내는 것은 클레토 무나리가 개척한 것이고, 이런 제품은 ‘신국제 양식New International Style’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82년에 알레시가 발표한 ‘차와 커피 피아자’라는 협업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신국제 양식의 사례로 언급되는데, 이는 사실 클레토 무나리 실버 컬렉션의 뒤를 이은 것이다. 다양한 크리에이터와 협업하는 것은 제품 라인에 무수히 많은 문화적 유전자를 담는 결과를 낳는다. 실버 컬렉션에 이어 1985년에는 150점의 액세서리로 구성된 주얼리 컬렉션을 발표했다. 이 컬렉션에도 전 세계의 뛰어난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참여했고, 주얼리는 각각의 건축가와 디자이너 스타일과 문화적 정체성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디자이너 에토레 소트사스의 반지는 그의 대표작 칼톤 책장을 닮았고, 화가 산드로 키아의 반지 역시 그가 그리는 그림 속 인물과 닮아 있다. 그런가 하면 1987년에 발표한 시계 컬렉션 중 건축가 한스 홀라인이 디자인한 손목시계는 고전 건축물처럼 생겼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인 한스 홀라인은 1970년대에 고전 건축물의 형식을 본뜬 건축 작품으로 유명했는데, 자신의 그런 건축적 모티프를 시계에 그대로 가져왔다.

1990년대 들어 클레토 무나리는 새로운 장르로 컬렉션 라인을 확장했다. 1990년대 초반 무나리는 유리 공예 산업으로 유명한 무라노Murano의 유리에 흠뻑 빠져 글라스 컬렉션이 탄생한다. 무라노 역시 비첸차와 같이 베네토주에 속한 섬이다. 글라스 컬렉션은 21세기까지 이어져 2002년에 베로나 글라스 컬렉션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마테오 툰, 마리오 보타, 보렉 시펙, 리처드 마이어 같은 세계적 건축가와 함께 클레토 무나리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검은색 표면 위에 흰색 선으로 사람 눈이 그려진 유리 오브제다. 이 눈은 마치 예리하게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자신의 역할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2004년에는 무나리 자신을 포함해 5명의 건축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에게 바치는 ‘5개의 펜 컬렉션’을 발표했다. 무나리는 아프리카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월레 소잉카에게 헌정하는 만년필을 디자인했다. 그는 평소 종이에 옮긴 글은 낭만과 따뜻함을 운반하는 힘을 지녔다고 확신했고, 이러한 믿음에서 영감을 받아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컬렉션에는 클레토 무나리 컴퍼니에서 출판한 책이 포함되어 있고, 이 책에는 작가들의 친필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 이러한 작업에서 클레토 무나리 컬렉션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클레토 무나리의 컬렉션은 기본적으로 매우 고가의 럭셔리 제품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단지 고급 재료와 화려한 디자인만으로 그런 럭셔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디자이너의 재치와 유머 감각, 문화적 향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그는 사업적 한계, 예를 들어 시장의 눈높이와 대중성 같은 것을 변명 삼아 디자이너의 창의력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보다 디자인의 혁신에 관대하다. 그러면서도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보기 드문 사업가다. 아마도 그 스스로가 창조적인 디자이너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뛰어난 크리에이터들과의 친분과 적절한 선정, 베네토주의 장인 기술, 비첸차의 문화유산, 시대적 흐름 같은 것을 적절히 결합하고 연결해 오늘에 이르렀다.

2000년대에 클레토 무나리는 가구, 카펫, 세라믹 등으로 컬렉션의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장했다. 2016년에는 주얼리 컬렉션을 발표했다. 그의 나이 86세 때의 프로젝트다. 1973년, 43세의 나이에 카를로 스카르파와 운명적 만남을 갖고 회사를 설립한 뒤 이제 45년째 접어든 클레토 무나리 컴퍼니의 제품은 여전히 젊고 활기차고 생생하며,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다. 평생을 아름다움의 수집가, 감성의 발명가, 예술가들의 친구로 살아온 클레토 무나리의 천진난만하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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