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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북에서 온 현대 판화를 소개합니다!
김 석
#김석






“판에 새겨서 찍은 그림.” 판화(版?)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판화 얘기냐고요? 제가 이번에 소개해드릴 것이 바로 판화이기 때문이죠. 그것도 흔하게 볼 수 없는 북한 판화입니다. 북한에도 당연히 화가들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최고의 기량을 지닌 화가들을 모아놓은 단체가 바로 ‘만수대창작사’라는 곳인데요. 정기적으로 전람회를 열어 우수한 작품을 가려 시상도 합니다. 


2010년 북한 국가미술전람회 도록


공훈예술가 김봉주의 판화 작품 


얼마 전에 북한에 출장을 다녀온 한 후배가 북한에서 사왔다며 제법 구색을 갖춘 양장본 도록을 한 권 건네더군요. 2010년 북한의 국가미술전람회 도록이었습니다. 책을 펴낸 주체는 ‘만수대해외개발회사그룹’입니다. 이름만 보면 만수대창작사가 생산한 미술품의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곳이 아닐까 싶더군요. 아무튼 도록을 넘기다 보니 북한 현대미술이 이 정도였나 싶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그중에 판화가 어엿한 한 분야로 포함돼 있는 게 눈에 띄었지요. 



처음 대규모 공개되는 북한 현대 판화 

하지만 이런 작품을 직접 볼 기회가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었죠. 더군다나 남북이 평화의 큰 길로 나아가는 시대에 말이에요. 그러던 차에 국내에서 북한 현대 판화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간헐적으로 북한 판화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적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100점이 넘는 북한의 현대 판화가 공식적으로 우리 미술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선보이는 건 처음입니다. 


홍춘웅 <백두의 봄>(2011) 


백두산의 봄을 그린 판화 작품입니다. 화면을 분할해 보면 맨 아래 들판에 진달래가 여기저기 피었고, 그 위로 초록빛을 한껏 머금은 자작나무 숲이 펼쳐집니다. 그 배경에 멀리 산자락은 파란색으로 물들었고, 그보다 더 멀리로 보이는 눈 덮인 봉우리가 푸른 하늘과 이마를 맞대고 있습니다. 이념과 무관하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이런 작품, 참 좋죠? 



 

1. 김영광 <총석정의 저녁>(2011) 

 2. 김도선 <해금강의 파도>(2008) 


그리운 ‘금강산’을 그린 작품도 눈길을 붙듭니다. 해질녘의 총석정과 해금강을 아련한 색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드는 시간.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와 자유롭게 비상하는 갈매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한창 남북이 화해 무드였던 2007년 한 해에만 네 차례나 금강산을 다녀오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해금강의 낙조를 본 적은 없었죠. 언젠가 다시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면 저 멋진 낙조를 꼭 보고 와야겠습니다. 



판화로 보는 북녘 사람들의 생활상 


1. 류상혁 <명절날의 민속거리>(2008)

2. 황보신 <추석날>(2013) 


이번에 선보이는 북한 판화를 몇 가지 주제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위에 소개해드린 것처럼 자연이나 역사 유적을 묘사한 일련의 작품들이 있지요. 하지만 이보다 더욱더 흥미를 자아내는 건 북한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한 그림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명절을 쇠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그린 <명절날의 민속거리>와 <추석날>입니다. 명절이 되면 야외로 나들이 나가 흥겨운 민속놀이도 즐기고, 온 가족이 모여 떡을 만들어 나눠 먹는 정경입니다. 북한의 요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명절이 주는 풍성함과 행복감은 북한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겠지요. 


길은경 <일요일의 하루>(2010)


같은 맥락에서 북한의 휴일 풍경을 묘사한 작품들도 꽤 흥미롭습니다. <일요일의 하루>라는 제목의 판화를 한 번 보세요. 대동강변인지 어딘지는 몰라도 강가에 낚시꾼들이 그득하죠. 우리의 휴일 풍경과 다를 게 없습니다. 북한 사회가 우리의 고정관념과 달리 꽤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근 북한에서 공개하는 여러 영상에서 여실히 확인됩니다. 진짜 저럴까 싶을 정도로 휴일이면 놀이공원이나 식당이 온통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모습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니까요. 


1. 김옥선 <탈곡장에서>(1999)

2. 인성진 <사랑을 싣고>(2016) 


북한 사람들의 일상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이런 작품과 달리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는 다분히 선전적 성격의 작품들도 보입니다. 대규모 건설 현장을 묘사한 작품들도 같은 맥락이에요. 힘들고 괴롭고 찌푸리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죠. 이런 점은 대단히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예술이 순수하게 예술로서 존재할 수 없는 북한 사회의 특수한 조건이 반영된 것이죠. 그걸 감안하면서 작품을 해석하고 감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김영호 <북부철길건설장> 

2. 황병균 <건설장의 야경>(2014) 



“남녘의 판화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근래 보기 드물게 북한의 미술 작품, 그것도 엔간해선 접하기 힘든 북한의 현대 판화를 직접 볼 수 있는 이 전시회는 1년여 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성사됐다고 합니다. 사실 정치와 외교 무대의 담판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는 앞으로 더욱더 활성화돼야 합니다. 앞장서서 전시를 준비한 판화가 김준권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남녘의 판화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판화작품을 통해 서로의 생각도 읽어보고,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귀한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를 통해 그동안 단절됐던 남북한 판화문화 환경의 상호이해를 도모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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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문화로 나라를 지킨 선각자 간송 전형필
김 석


수백 미터나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름난 맛집일까요? 아닙니다. 뜻밖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어느 미술관이었어요. 도대체 왜? 무얼 보려고 그 길고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저리도 묵묵히 감내하는 걸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더구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진풍경이 해마다 어김없이 봄, 가을 한 차례씩 펼쳐진다고 했지요.

 

2011년 가을이었어요. 미술 담당 기자가 되어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그런 미술관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답니다. 나지막한 산자락 중턱에 서 있는 고색창연한 미술관 건물이 주는 첫인상은 그다지 강렬하지도 않았고요. 세월의 때가 켜켜이 내려앉은, 그것 자체가 문화재처럼 보이는 오래된 전시장은 심지어 편안한 관람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미술관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린 까닭은?


간송미술관이 자랑하는 보물 중 하나인 신윤복의 <미인도>



그럼에도 사람들이 미술관 앞에 줄을 서는 까닭은 이 미술관에서만 볼 수 있는 희대의 보물들 때문이었습니다. 워낙에 이름난 문화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만한 이들은 다 알았지만, 간송미술관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지요. 2008년에 방송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었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인도>를 실제로 볼 수 있대! 직접 가서 봐야겠군!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죠. 어느 틈엔가 저 또한 긴 줄 한 가운데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답니다. 간송의 보물을 보기 위해서 말이에요. 간송미술관 전시회를 여러 번 취재해서 방송도 했고, 미술관이 펴내는 도록 《간송문화》도 꾸준히 구해다 읽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사실들을 배우고 알아가면서 미술관의 설립자인 간송은 대체 어떤 분이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간송이 1938년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 보화각(葆華閣)은 이후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마침 간송 전형필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 있더군요. 전기 작가 이충렬 선생이 쓴 《간송 전형필》입니다. 간송은 한 마디로 시대의 거인이었습니다. 문화로 나라를 지킨 거인. 일제강점기에 대한독립을 부르짖으며 싸운 것만 독립운동이요 애국이 아니었음을 간송의 삶은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을 뜻있는 일에 쓰고자 했던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에 한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그것도 20대에 말이에요. 이때부터 간송이 우리 문화재를 모아들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드라마도 그런 드라마가 없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지켜낸 문화재를 보기 위해 후손들은 기꺼이 몇백 미터씩 긴 줄을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거고요. 감동은 이렇게 또 다른 감동으로 이어집니다.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겸재 정선의 화첩


(좌)해악전신첩_ 겸재가 72세 때인 1727년에 그린 화첩 《해악전신첩》(보물 제1949호)   

(우)금강내산_ 정선, 《해악전신첩》 중 <금강내산>, 비단에 채색, 32.5×49.5cm,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에 수장된 조선 시대 회화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겸재 정선의 작품입니다. 겸재가 72살 때 만든 《해악전신첩》은 그중에서도 특히 더 반짝반짝 빛나는 보물이지요. 금강산을 비롯해 강원도와 동해안의 명승지를 그린 그림 21점이 수록된 이 화첩이 구출되는 과정은 간송이 지켜낸 그 어떤 보물보다도 더 극적이었습니다.



사랑채 한쪽에 붙은 변소엘 가다 보니까 머슴이 군불을 때고 있는데 무슨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처넣고 있단 말예요. 그런데 문득 들여다보니 초록색 비단으로 귀중하게 꾸민 책이 하나가 눈에 띄었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 책을 보자고 했지요. 그리고 펼쳐보니 겸재 정선의 화첩이란 말예요. 내가 그 시각에 변소엘 가지 않았거나 한 발짝만 늦었어도 그 화첩은 아궁이 속에서 불타서 영원히 사라졌을 테지요.

 

그걸 들고 사랑방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펴 보이며 조금 전의 위기일발을 말하자 그저 그랬느냐는 반응일 뿐이었어요. 그래 내가 말했지요. ‘불에 타 없어질 뻔했던 거니 내게 파시오.’라고. 그러자 주인은 순순히 그러자는 거예요. 내가 ‘값을 얼마나 드릴까요?’ 하고 물었더니, 생각해서 내라는 거예요. 그래 몇 마디 시세 얘기를 하다가 그때 돈으로 20원을 지불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다음날 용인에서 ≪겸재화첩≫을 갖고 서울에 올라와 이순황 씨를 만나 적당한 곳에 팔아달라고 부탁했었지요. 그 바람에 간송댁을 방문하게 되었고, 또 그분을 처음으로 뵙게 됐던 거지요. 듣던 대로 아주 부드럽고 따뜻하더군요. 늘 미소를 짓는 인상이었고, 나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아래인 청년이었는데 아주 품위가 있어 첫눈에 반했어요.


- 장형수 <간송 수장의 비화> ≪보성 75호≫ 1975년


경기도 용인에 살고 있었던 친일파의 거두 송병준의 집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한 겸재의 화첩은 이렇듯 극적으로 당시 골동품 거간이었던 장형수 씨에 의해 구출돼 간송의 품으로 들어갔던 겁니다. 이 무슨 인연이고 운명이었을까요. 아궁이 땔감으로 그대로 불태워졌다면 70대의 노장이 그린 만년의 걸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겁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고려 13세기, 높이 41.7cm, 국보 제68호

 


고려청자가 이룬 최고의 예술적 성취가 집약된 명품 중의 명품 <청자상감운학문매병>입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도 실렸던 이 청자는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강력하게 각인된 것이었으니, 훗날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 역시나 하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저 아름답다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이 귀중한 물건에도 잊지 못할 사연이 숨어 있답니다.

 


이 물건은 발굴되기가 무섭게 골동 거간의 손에 넘어갔으며 그 거간은 자기 단골손님이었던 일본인 거물급 수장가에게 팔기 위하여 대구로 가지고 갔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지 공교롭게도 목표로 삼았던 사람이 일본으로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허탕 치고 말았다. 만약 그 일본인 수장가가 있었다면 이 물건은 영원히 일본으로 건너가 버리고 말았으리라. 


이 거간은 생각 끝에 하는 수 없이 꿩 대신에 닭 격으로 골라잡은 상대가 대구에서 치과의원을 개설하고 있던 신창재 씨였으며 가까스로 사천 원에 넘기고 한숨을 내쉬었던 것 같다. 신창재 씨는 그 얼마 후 박재표 씨 손을 거쳐 서울 필동에 살던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 씨 손에 넘겼는데 그 가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신 씨가 두둑이 얹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간다.


총독부박물관에서도 이 물건이 탐나서 일만 원까지 내겠다고 교섭이 왔으나 엄청난 가격 차 때문에 결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수장가들을 비꼬아가며 비웃던 일본인 골동계 인사들의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놀라운 일이 장안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총독부박물관도 값이 엄청나게 비싸 손을 대지 못하고 군침만 꿀떡꿀떡 삼키고 있던 고려청자 희대의 명품 천학매병을 그들이 식민지 백성이라고 깔보던 삼십도 채 안 된 새파란 청년이, 마치 청과시장에서 사과 몇 알 사듯이 가격도 한 푼 깎지 않고 냉큼 사버리고 만 것이다.


- 이영섭 <내가 걸어온 고미술계 삼십년> ≪월간 문화재≫ 16호(1973년 11월) 




반드시 지켜야 할 물건이라는 판단이 서면 통 크게 쓸 줄 알았던 간송의 배포와 결단력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니 상대인 일본인도 그만 두 손 다 들 수밖에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큰 손을 상대로 거둔 쾌거에 식민치하에서 억눌리고 숨죽여 살던 이들의 속이 잠시나마 얼마나 후련했을까요. 문화재를 지키는 것은 이렇듯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인 수집가로부터 고려청자를 사들인 집념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12세기 중기, 높이 9.9cm, 국보 제270호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살포시 품에 안았습니다. 새끼는 한쪽 손을 들어 어미의 볼을 더듬고 있고요. 모자의 애틋한 정이 담긴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작품이지요. 연적 하나에도 이렇게까지 따뜻한 정감을 담아낼 줄 알았던 고려 도공의 마음자리는 얼마나 고왔을까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집니다.

 

훗날 국보로 지정된 이 귀한 물건의 주인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존 개스비(Sir John Gadsby)라는 영국인 변호사였습니다. 남다른 안목으로 모아들인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수집품은 당대에도 명성이 자자해서 ‘꿈의 컬렉션’으로 불렸다지요. 간송은 이 물건들을 꾸준히 눈여겨봅니다. 개스비가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면 그 전에 수집품을 정리할 것으로 보고 때를 기다린 겁니다.


 

국보 제74호로 지정된 <청자오리형연적> 역시 간송이 사들인 개스비의 수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때가 옵니다. 간송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존 개스비와 세기의 담판을 벌이지요. 개스비가 20년 동안 모은 고려청자 22점을 놓고 치열한 밀고 당기기를 했지만, 사흘간의 치열한 협상에도 소득이 없었답니다.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결국 청자의 주인이 될 운명이었을까요. 이번엔 개스비가 경성으로 날아와 간송을 만납니다.

 

간송은 개스비를 성북동의 보화각 공사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사재를 들여 박물관을 짓는 간송의 뜻을 헤아린 개스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자신이 내놓은 청자 22점 가운데 20점을 간송에게 넘겨줍니다. 자그마치 기와집 400채 값에 말이에요. 끈질긴 인내심과 태산 같은 배포가 아니었다면 개스비의 수집품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에게 오랫동안 많은 한국 미술품을 수집해준 것을 치사하고, “나도 귀하의 애써 모은 수집품을 인수하여 귀하에게 지지 않도록 정성껏 보존하겠다”고 말한 후 그의 수집품을 즉석에서 인수하였다.


(중략)


작별할 때, 나는 “오랫동안 애장하였던 수집품들과 헤어지게 되니 대단히 섭섭하시겠습니다. 고려자기가 보고 싶거든 언제든지 오십시오” 하였더니, 그는 “암, 가고말고요. 꼭 가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자기를 한국의 수집가인 귀하가 한국으로 도로 가져가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하는 그의 대답에는 정말 기쁨이 넘쳐 흐르는 듯하였다.


- 전형필 <고미술품수집비화> 《신태양》 1957년 9월호



 간송 전형필의 문화 보국 정신을 되새기다

 

그렇게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 모은 우리 문화재가 수천 점에 이른다고 하지요. 이 가운데 국보가 12점, 보물이 31점이나 된다고 하니 개인이 이런 엄청난 역사적 소명을 감당했다는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구절절 사연이 깃든 간송의 보물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참 고마웠습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아낌없이 쏟아부은 선구적 정신의 소유자가 있었음을. 간송이야말로 문화로 나라를 지킨 독립운동가였음을. 100년 뒤 미래를 내다본 그 탁월한 안목 덕분에 지금 우리가 간송의 보물들을 마음껏 감상하고 즐길 수 있음을.

 

간송 전형필의 문화광복(文化光復)에 향한 간단없는 열망과 문화 보국(文化保國) 정신을 돌아볼 수 있는 뜻깊은 전시가 3ㆍ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 열리고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지요. 많은 분이 전시장을 찾아 간송의 보물들을 만나는 기쁨과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유물 하나하나에 쏟아부은 간송의 피와 땀과 눈물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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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웨일즈 2편]
아더왕의 전설이 살아있는 곳, 웨일즈 북부
이 환


웨일즈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어릴 적 음악 시간에 배운 웨일즈 민요가 간혹 있었고 프로축구 선수 라이언 긱스가 이곳 출신이란 것 외에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이 지역에 대한 정보가 우리나라에선 전혀 없다시피 한 낯선 지역이다. 국내 대형서점조차도 웨일즈를 단일 주제로 한 책도 거의 없다.


웨일즈는 일찍이 북해에서 진출한 켈트인의 땅이었다. 1~5세기 로마 지배당했고 그 후 작은 왕국들로 나뉘다가 1282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정복한다. 이때부터 장남을 ‘프린스 오브 웨일즈 (Prince of Wales)라 칭했는데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1536년엔 헨리 8세에 의해 완전히 합병된다. 한마디로 북방 켈트인들이 살던 곳이 앵글로 색슨이 주류인 잉글랜드에 정복된 나라다. 



오늘날 인구는 3백만 명이 조금 넘는다. 총면적은 20,798km²로 딱 전라도 크기다. 주민들도 인정이 많다. 찰스 다윈만큼 업적이 컸지만, 덜 알려진 진화론의 선구자 러셀 월리스, 인도와 히말라야 전역을 답사해 지도로 만든 에베레스트 경, 영화배우 안소니 홉킨스와 케서린 제타존스의 고향이 이곳이다. 양의 숫자가 사람 수보다 4배 많은 1,200만 마리다. 



해안의 요새,
카나번 성


서북쪽에 위치한 고성마을을 찾았다.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카나번 성이다. 이곳 역시 콘위성처럼 잉글랜드가 13세기 이 지역을 점령한 후 바닷가 바로 옆에 세워진 성채다. 웨일즈는 다른 유럽 나라처럼 특히 고성이 많다. 크고 작은 성이 이 작은 땅덩어리에 무려 641개나 된다.



1969년 찰스 왕자의 황태자 서임식도 이곳에서 거행됐다. 많은 나라로 생중계해 더더욱 유명해졌다. 물론 영국 유네스코 문화유산 중 하나다.



숙소인 블랙보이인(Black Boy Inn)을 찾았다. 성채의 옆문을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에 바로 붙어있는 유서 깊은 숙소다. 옛 해적들이 묵었을 만한 중세풍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실제로 이 호텔은 16세기 만들어졌다. 조명도 희미하고, 벽 장식이며 테이블도 중세시대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묵었던 유럽 숙소 중 가장 몽환적인 곳이다.



아더왕의 전설이 깃든
스노든 산



다음날 카나번 성 주변을 산책했다. 해자 역할을 하는 호수 건너 언덕이 있어 성 전체를 조망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수많은 요트와 고깃배들이 즐비하다. 가장 아름답고 견고한 성채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는 주변 마을 사람들은 행복할 것 같다. 

 


카나번 성에서 벗어나 산 쪽으로 한 시간 정도 이동했다. 위용 있는 산들이 산맥으로 이어져 통상적인 잉글랜드와 확연히 다른 거친 지형이다. 가장 높은 산은 북쪽에 자리한 스노든 산(1,085m).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 경도 이곳에서 등반 훈련을 했다고 한다. 



우리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비하면 산세가 한참 떨어지지만, 이곳엔 유명한 전설이 숨어있다. 바로 아더왕의 이야기! 원탁의 기사 랜슬롯 경과 왕비 기네비아, 마법사 멀린과 '보검' 엑스칼리버 전설의 주인공인 아더왕이 바로 저 산에서 활동했다는 것. 어릴 적, 동화와 영화 등에서 수없이 듣고 보아 온 전설의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하지만 실제 아더왕의 존재 여부는 확인된 바 없다. 오늘날 잉글랜드 주류인 색슨인들을 물리쳤다는 영웅담이 윤색돼 웨일즈의 영웅으로 변신한 거다. 


 



입구에서 자전거를 타고 숲길로 이동했다. 이곳을 즐기는 데 최고는 산악자전거와 카약 타기다. 수천 년 원시림 사이로 피어난 꽃들을 감상하며 바람을 맞부딪혀 본다. 호수 위엔 가족 단위 관광객들과 청년들이 이미 여기저기 노 젓기에 분주하다. 




저 멀리 스노든 산 정상이 대장처럼 우뚝 서 있다. 호수 가장자리엔 나무들이 물속에 잠긴 채 생생히 살아있다. 나무숲 사이를 가로질러 여기저기 움직여본다. 탐험가가 따로 있으랴. 노젓기에 집중하고 자연에 취하다 보니 잠시 현실감을 잊었다. 웨일즈의 자연 속 한가운데다. 몽유도원이 따로 있으랴! 그저 마음 내려놓는 바로 이 자리가 천국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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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트의 리얼한 마케팅 이야기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일, 재발견 프로젝트
#최훈학마케팅담당



지역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브랜드로 'Made in Japan'


일본, 특히 도쿄는 가깝기도 하고 새로운 상품과 트렌드에 대한 정보를 얻기 용이해 자주 방문합니다. 최근 도쿄의 쇼핑몰들을 방문해보면 ‘Made in Japan’, ‘Japan made를 강조한 상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작년 여름 도쿄를 방문했을때 ‘Nest Robe’라는 남성 편집숍을 들어가서 하얀 린넨 셔츠 하나가 마음에 들어 살펴보니 상당히 고가여서 구매를 망설였습니다. 그때 점원이 다가와서 셔츠에 대해 설명해주는데 교토 산 마로 만든 셔츠라며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상품에 Japan made 로고를 붙이는 것을 넘어 숍 하나를 일본산 제품으로만 꾸민다던가 아니면 ‘도쿄 교통회관’처럼 일본 각 지역 현 들의 특산품만을 모아서 쇼핑몰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도쿄 kitte 쇼핑몰


도쿄 교통회관


▍시간이 증명해주는 의미있는 것들의 아름다움 ‘D&Department’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많은 분들도 알고 있는 일본의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가 운영하는 ‘D&Department’ 였습니다. ‘D&D’는 단순히 팬시하고 아름다운 것이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Long life design’ 즉 시간이 증명해주는 오래 사용해온 의미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나가오카 겐메이는 제품을 수집하고 리디자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D&D travel magazine’을 만들어 일본의 각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사용해보고 먹어보고 체험해 본 것을 바탕으로 지역다움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여 나가오카 겐메이의 저작과 인터뷰들을 수집하여 확인해보니, 일본 역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도쿄에 지나치게 모든 것이 집중되고 지역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이 잊히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이런 부분을 개선하는데 기여하고자 트래블 매거진 사업과 여행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지역 토산품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 이마트 '재발견 프로젝트'

재발견스토어 사진


나가오카 겐메이의 글을 읽고 저는 국내 여행을 다니며 보았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강원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고 식사를 위해 찾은 어떤 항구의 토산품점은 베트남산, 중국산, 페루산 건어물들이 상당수였으며 강원도산 상품들은 보면서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상품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 저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질 좋은 지역 토산품들이 제값을 인정받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상품화가 필요하고 바로 그것이 이마트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치를 다시 발견한다는 의미에서 ‘재발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이를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 ‘재발견 프로젝트’ 상품화 과정 >


1. 각 지역, 도별로 지역의 주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질 좋은 식품을 선별한다.


2. 각 지역의 특징은 살리되 ‘재발견 프로젝트’라는 공통 아이덴티티 하에 상품 디자인을 다시 한다.

   - 상품 패키지는 이마트 마케팅담당의 디자인팀 주관으로 하며 비용은 이마트에서 부담한다.

   - 상품의 용기를 변경할 경우 금형 비용 때문에 중소기업인 협력사에 부담이 될 수 있으므로 용기는 변경하지 않는다.


3. 상품을 구입하는 공간도 중요하므로 이마트 내에 ‘재발견 프로젝트 스토어’를 만들고 이 비용은 이마트가 주로 부담하되, 지역 상품을 활성화한다는 취지 하에 각 지역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재발견 프로젝트의 첫 스타트를 강원도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주요 상품 패키지



실제 프로젝트의 성과는 결국 매출로 판단해야 합니다. 비용을 더 투입한 만큼 더 많은 고객이 구입하고 만족한다면, 지역 토산품을 납품한 회사도 성장하고 저희도 보람이 있으니까요. 다행히 재발견 프로젝트 이전 대비 28% 매출이 신장하였습니다.


춘천점 재발견프로젝트 스토어 매출 그래프


물론 개선해야 할 부분도 있었습니다. 디자인 측면에서 기존 지역 토산품들이 갖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니멀한 디자인을 선택했습니다. 작은 상품의 경우엔 별 문제가 없었지만, 볼륨이 큰 상품(황태, 다시마, 미역류 등)은 미니멀 한 디자인 컨셉으로 큰 포장재를 만들다 보니 밸런스가 맞지 않아 지나치게 단순해 보이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강원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입성한 이마트 '재발견 프로젝트'


따라서 두 번째 프로젝트 제주도에서는 아래와 같이 상품 디자인을 보완하였습니다. 재발견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디자인 아이덴티티는 유지하되 상단에 지역의 특징을 디자인화하여 반영하였고, 폰트 등 세세한 부분도 더 손을 보았습니다.


제주 주요상품 패키지


강원도와 제주도에 그치지 않고 각 지역별로 어느 정도 라인업이 형성되고 고객의 반응이 좋으면 수도권 대형점포 중심으로 확대해 갈 예정입니다. 또한 재발견 프로젝트는 단순히 지역 상품을 리디자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의 각 지역별 전통음식 중 잊혀 가고 있는 음식들을 복원하고 유지하는 것을 후원하고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도록 가정간편식으로 개발하는 것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글로벌 트렌드에 더 관심을 두고 세계에서 인정받는 해외 브랜드들에 더 열광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무조건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자국 우월주의에 빠져서는 안되겠지만,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식품들의 가치를 바로 보고 알리는 것은 우리 세대뿐 아니라 이후 세대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식의 세계화를 이야기하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식품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한식의 세계화를 이룰 수 있겠어요. 


재발견 프로젝트는 우리나라 모든 특산품의 가치를 다시 발견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마트 최훈학 마케팅 담당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IDEA와 MONEY의 사이에서,

회사와 고객의 사이에서

항상 방황하는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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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의 음식을 쓰다
추억이 서린 곳, 종로의 노포를 말하다 
정동현
#정동현



종업원이 테이블을 흘깃 봤다. ‘왜 아직도 다 먹지 않았냐’는 무언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시간은 저녁 9시 무렵이었다. 가게 영업시간은 오후 10시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종업원들은 이미 몸이 붕 뜬 듯 서로 떠들며 잡담을 했다. 


그곳은 오래된 가게, 노포(老鋪)였다.


“이래가지고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음식을 다 먹지 않고 나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뒷맛이 썼다.


 


낙원동과 익선동에는 이른바 ‘레트로’의 바람이 가장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1920~30년대 경성 건축왕이라고 불렸던 ‘정세권’이 개발하고 분양한 근대형 한옥 주택들은 여전히 낮은 키에 웅크렸다. 여전히 사람이 머무는 곳도 있지만, 태반이 뜯어고쳐 카페와 디저트 가게, 혹은 주점으로 형태를 바꿨다. 그 끝 무렵, 낙원상가로 이어지는 골목에는 ‘호반’이 있다. 



빛 바랜 골목의 40년 명성 호반


1961년 장사를 시작한 호반은 여러 차례 가게 자리를 옮겼다. 규모를 확장하기도 하고 개발 계획에 밀려 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2015년 6월에 잠시 문을 닫았다. 40년 넘게 가게를 이끌던 주인이 은퇴한 것이다. 1974년 호반에 들어와 막내 생활을 했던 지금의 주인장이 그 간판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낙원동에 문을 열었다.  

 


이 집은 본래 이북음식을 전문으로 했다. 간간하게 맛이 오른 대창 순대, 선이 똑 떨어지는 수트처럼 잡내 하나 없이 삶아낸 우설을 먹으면 그 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집을 이북음식에 한정 짓기에는 그 스펙트럼이 좁지 않다. 통통한 낙지를 살짝 매콤하게 볶아 참기름 조금 뿌려 또아리를 튼 소면을 곁들여 먹을 때, 직접 만든 두부를 밑에 깔고 감자, 무, 애호박을 올린 뒤 도톰한 병어를 센 불에 졸여낸 병어조림을 숟가락으로 퍼먹을 때, 찬 바람 부는 서해에서 올린 자잘한 강굴의 바닷내음을 느낄 때, 짤막한 한 줄로 소개할 수 있는 식당이 아닌 눈물과 땀이 흐르고 사랑과 우정이 맺힌 한 권의 긴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가게를 막 옮겼을 때는 휑한 빈자리에 마음이 쓰였으나 이제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자리 잡기가 쉽지 않게 되어 버렸다. 젊은이와 노인이 모두 함께 떠들고 노는 드문 집이다. 단품으로 보면 저렴하지 않지만 들어간 재료의 단가를 안다면 비싸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손님을 하대하지 않고 늘 웃는 낯으로 대하는 것도, 시계처럼 정확한 맛을 유지하는 것도, 이 집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노객들의 손때가 묻은 곳 OB낙원호프’ 


호반이 배를 가득 채우는 곳이라면 ‘OB 낙원호프’는 마른 목을 축이는 곳이다. 호프집이라고 하여 우습게 볼 개재가 아니다. 이 집의 역사도 40년을 넘는다. 그 시간의 길이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폭이 60cm 정도 되는 좁고 긴 나무 탁자가 학교처럼 세 줄로 늘어선 이 집에는 늘 낙원동과 인사동에 머무는 노객(老客)들이 가득 찬다. 붓을 들고 소리를 내어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도 이 집의 단골이다. 길가에 선 별 것 없는 호프집이지만 맥주 한잔을 시켜 목구멍으로 흘러내리면 새로운 세상이다. 열대과일 향이 살짝 풍기는 상쾌한 생맥주는 본래 마시던 맥주 맛이 맞는지 의심하게 한다. 종업원에게 물으면 그저 ‘관리를 잘해서’라고 말하며 살짝 웃고 만다. 그러면 그 맛을 확인하려고 다시 또 한잔을 시키게 된다. 



안주라고 치면 흔한 마른안주 등속이 전부다. 그러나 나무 그릇에 담긴 마른안주나 손수 구워주는 스팸을 시켜놓으면 상이 가득 차지 않아도, 캐비어니 푸아그라니 하는 것들로 값을 치르지 않아도 가슴이 가득 찬다. 그 뒤로 노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조약돌 던지듯 서로 말을 톡톡 던지면 늘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은 작은 구름처럼 잠시 멈춰 지친 몸을 누인다. 


  



90년대의 추억이 흐르는 LP뮤직바 라커스


만약 밤이 깊다면, 만약 날이 춥다면, 음악을 들으며 몸을 녹이고 갈 곳 없는 마음을 쉬게 하고 싶다면 종로2가 ‘라커스’에 가야 한다. 오래전 흔했던 LP판을 틀어주는 이른바 ‘뮤직바’인 라커스는 1999년 문을 열었다. 스스로를 ‘디제이’라고 칭하는 주인장은 신청곡을 받지만 LP와 CD로 가진 음악만 튼다. 어차피 인터넷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 없는 곡을 틀 방법도 없다. 


이곳에 오는 사람은 근처 어학원의 학생들, 어학 강사 외국인들, 회사원들, 단골이라고 칭하는 중년들, 이제 막 단골이 된 20대 등 종잡을 수 없는 무리가 이 집에 드나든다. 이곳을 노포라고 부르기에는 연식이 길지 않지만 이런 종류의 술집이 도심 한복판에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든다.  



안주라고 부를 것은 별로 없다. 그저 마른 옥수수를 씹으며 맥주나 위스키 따위를 시켜 마신다. 그러다 옛날 아버지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짐빔’을 즐겨 마셨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면 ‘짐빔 콕’ 같은 것을 시키게 된다. 캐러멜의 진한 단맛, 옥수수로 빚은 버번 위스키의 희미한 단맛이 겹쳐 쌓인다. 차갑고 달달하며 독한 액체가 몸으로 퍼져 나간다. 나의 아버지가 마셨고 취했던 그 술이다.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듣던 음악이 허공에 맴돈다. 눈을 감고 앞으로만 달려가던 몸이 멈춘다. 쌓인 시간 위에 앉아 작은 잔을 만지작거린다. 오래전 그때처럼, 그 사람처럼, 오래된 가게에서.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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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가깝고도 먼 동물 ‘돼지’를 찾아서
김 석

왜 제가 돼지를 가깝고도 먼 동물이라고 했을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옛 그림을 감상하고 공부하면서 저는 특별히 ‘동물’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옛 그림에서 동물을 찾으면 학창 시절 생물 수업 시간에 배운 어류-양서류-파충류-조류-포유류 분류법에 따라 목록을 만들어서 정리를 해놓는 거죠. 옛 그림에는 정말 온갖 동물들이 다 있습니다. 한데 워낙에 보기 힘든 동물들이야 그렇다 쳐도 돼지 그림은 정말 드뭅니다. 이상하죠?


왜 그럴까, 이유를 따져봤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 가장 가깝게 지낸 동물로 크게 네 종류가 있지요. 개, 소, 닭, 그리고 돼지입니다. 이 중에서도 개와 소, 닭은 옛 그림에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제가 2017년 이맘때 닭을, 작년엔 개를 묘사한 옛 그림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재료가 차고 넘쳐서 쓸 그림을 선별해야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돼지는 아무리 뒤져봐도 옛 그림에서 보이지 않더라는 겁니다.


 2018년 무술년 개 이야기, 2017년 정유년 닭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옛 그림에 돼지가 안 보이는 까닭은?


그래서 제 나름대로 추측을 해봤지요. 네 가지 동물 다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돼지에게만 없는 건 뭘까. 개와 소, 닭은 각기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장기를 하나씩 갖고 있습니다. 개는 짖어서 집을 지켜주고, 소는 힘들여 밭을 갈아주고, 닭은 울어서 새날을 알려주죠. 그런데 돼지는 아무 재주가 없어요. 먹고 싸고 자는 게 전부니까요. 그래서 옛 화가들이 유독 그렇게 돼지에게만은 인색했던 걸까 싶기도 합니다.


김준근 <산제>, 종이에 수묵, 23.2×16.0cm,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그래서 더욱 이 그림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답니다. 조선 시대 유일의 돼지 그림이라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돼지를 주인공으로 그린 조선 시대 유일의 그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작품은 조선 말기의 화가 기산 김준근(金俊根, 미상)의 <산제>입니다. 멧돼지 두 마리가 사이좋게 내달리는 장면을 그렸어요. 등에 날카로운 털이 수북한 것이나 날카로운 어금니를 보더라도 영락없는 멧돼지입니다.


김준근이라는 화가는 베일에 싸인 인물입니다. 언제나 태어나고 언제 돌아갔는지 남아 있는 기록이 없거든요. 조선 말기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대표적인 개항장이었던 원산을 근거지로 그림을 그려 팔았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지요.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는데, 특이하게도 김준근의 그림은 전 세계에서 무려 1,800점이 넘게 확인됐습니다.


외국인들의 방문이 활발해지던 시기에 김준근은 조선 풍속화를 그려 팔았습니다. 그렇게 판매한 그림들이 훗날 세계 각국의 박물관에 소장되면서 이 물음표 같은 화가의 이름은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됐지요. 그래서 김준근의 그림을 ‘수출 풍속화’라 부르고, 김준근을 ‘미술 한류의 원조’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한 김준근의 <산제>는 돼지가 주인공인 조선 유일의 그림입니다.



 동물 그림의 ‘끝판왕’ <수렵도>와 <호렵도>


그래도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하던 차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죠. 혹시 사냥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에 멧돼지가 있지 않을까? 조선 시대에는 사냥 그림이 꽤 많이 그려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수렵도>, <호렵도>는 동물 그림의 ‘끝판왕’이라 할 만큼 갖가지 동물들이 그야말로 총출동합니다. 물론 여기서 멧돼지가 빠질 리 없고요.


 

<수렵도 12폭 병풍>, 조선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채색, 각 132×52cm


조선 후기의 12폭짜리 병풍 수렵도의 가장 오른쪽 제1폭입니다. 가운데 말 탄 사냥꾼이 시커먼 네발짐승을 향해 창을 내리꽂는 모습이 보이지요. 어떤 동물 인가 했더니 멧돼지였습니다. 이 병풍의 세 번째 폭에도 사냥꾼을 피해 달아나는 멧돼지 한 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이 정도면 꽤 실력 있는 화가가 그렸을 겁니다.


 

<호렵도 8폭 병풍>, 조선 19세기, 종이에 채색, 78.5×351cm


그보다 훨씬 뒤에 그려진 이 병풍에도 멧돼지가 등장하는데요. 세 번째 폭을 보면 사냥꾼의 화살을 피해 달아나는 짐승들이 바로 멧돼지입니다. 이번엔 세 마리가 떼로 도망치고 있군요. 위의 <수렵도>에 비하면 수준이 좀 떨어지지만, 쫓고 쫓기는 팽팽한 긴장감을 해학으로 승화시킨 화가의 재치가 돋보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수렵도>나 <호렵도>가 유행했으니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대부분 멧돼지가 그려져 있을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합니다. 옛 그림에 등장하는 돼지는 모두 ‘멧돼지’라는 것을요. ‘집에서 기르는 돼지’는 없습니다. 먹고 싸고 자는 것밖에 몰라서 안 그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만에 하나 어딘가에 집돼지가 숨어 있다면? 글쎄요. 그런 게 있었다면 진즉에 알려졌겠죠. 먹고 싸고 자는 게 특기인 집돼지는 그림의 모델이 된 적이 없습니다. 조선 시대 이전 그림이나 유물에 등장하는 모든 돼지는 100% 멧돼지입니다.



 문헌 기록에 담긴 이런저런 돼지 그림


해마다 이맘때면 꼭 찾아가 보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에요. 어느 해부턴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열리는 띠 동물 전시 때문이랍니다. 돼지 그림을 워낙 찾기가 힘들다 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올해도 가봤죠. 하지만 역시나 새로운 그림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사주》에는 띠 동물 그림과 함께 그에 해당하는 점괘가 적혀 있습니다.


다만 돼지를 그린 흥미로운 책이 보이더군요. 당사주(唐四柱)라 해서 사람의 사주를 토대로 운세를 풀이한 책인데, 여기에 돼지띠 점괘를 풀이하면서 돼지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그냥 봐도 그림 수준은 상당히 떨어지긴 합니다만, 똑같은 돼지를 참 다르게도 그려놓은 것이 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나오더군요. 심지어 맨 오른쪽 것은 돌돌 말린 꼬리가 아니었다면 무슨 동물인지 알 수조차 없습니다.


 

이의조 《가례증해 家禮增解》, 1792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그런가 하면 돼지를 부위별로 설명해놓은 특이한 그림도 있답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의조(李宜朝, 미상)가 주자의 《가례(家禮)》를 보충해서 쓴 《가례증해(家禮增解)》란 책에 이런 그림이 실려 있더군요. 요즘 정육점에 가면 볼 수 있는 부위별 고기 설명서와 비슷하지요. 조선 시대에 제사 지낼 때 돼지고기의 어떤 부위를 쓰고, 어디에 어떻게 올려놓는지 설명한 내용입니다. 다른 데선 보기 힘든 그림이에요.



  

 <시정 豕鼎>, 조선시대, 높이 37.4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제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돼지고기는 심지어 담은 그릇도 따로 있었더군요. 놋쇠로 만든 이 그릇의 이름은 <시정>입니다. 풀이하면 ‘돼지 솥’이에요. 뚜껑에 돼지 시(豕) 자가 새겨져 있지요. 상당한 위엄과 격조가 엿보이는 이 그릇은 종묘 제례에서 삶은 돼지를 담은 그릇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몸체를 지탱하는 세 발의 모양마저 돼지입니다. 이런 곳에 돼지가 숨어 있을 줄이야.



돼지는 본디 인간의 수호신이었다!


조선 왕실의 가장 크고 중요한 제사였던 종묘 제례에 돼지 모양 그릇이 쓰였다! 여기서 돼지는 ‘신성성’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저 먹고 싸고 자는 집돼지가 아니라 멧돼지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저 지체 높은 궁궐 지붕 위에 올라앉아 망을 보고 있을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궁궐에 가면 지붕 위에 까만 조각상이 줄지어 있는 걸 볼 수 있지요. 잡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경복궁 경회루 추녀마루의 저팔계 잡상


잡상은 궁궐 건물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궁궐마다 잡상의 개수나 배열 형식은 조금씩 다릅니다. 같은 궁궐이라도 건물에 따라 또 다르고요. 하지만 일반적인 순서는 맨 앞에 있는 것이 저 유명한 《서유기》의 삼장법사, 그 뒤가 손오공, 그리고 다음 선수가 바로 저팔계예요. 돼지입니다. 고개를 뒤로 젖힌 모습이 특징이지요. 잡상이 11개로 가장 많다고 알려진 경복궁 경회루 지붕에는 저팔계가 두 개입니다.



 

불국사 극락전 앞과 처마 밑의 돼지는 어느 돼지띠 해에 화재예방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이게 궁궐에만 있었느냐? 유서 깊은 사찰에서도 돼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경주 불국사 극락전 앞에 놓인 황금돼지를 본 적 있으신가요? 마침 올해가 황금돼지다 뭐다 해서 요란하게들 떠들더군요. 돼지가 뜬금없이 왜 사찰 마당에 떡 하니 앉아 있을까요.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재가 워낙 걱정이 되다 보니 어느 돼지띠 해에 만들어서 저렇게 ‘화재 예방’을 상징하는 의미로 두었답니다. 


그런데 불국사에는 돼지 한 마리가 더 있습니다. 불국사 극락전 처마 밑에 저렇게 돼지가 꼭꼭 숨어 있었더군요. 제아무리 불국사를 많이 가본들 처마 밑까지 샅샅이 살피지 않는다면 저 돼지를 어떻게 찾아내겠어요. 불에 대한 염려가 얼마나 컸으면 저렇게까지 했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확인한 사실, 돼지는 불을 막아주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겁니다. 화재로부터 절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던 거죠.



풍성하고 넉넉한 한 해가 되길 바라며


이렇듯 유교 문화에서건 불교 문화에서건 돼지가 ‘인간의 수호신’으로 여겨진 건 아주 오래전부터였답니다. 나쁜 기운으로부터 궁궐을 보호하고, 화마(火魔)로부터 사찰을 지키는 신성한 존재로 인식돼온 것이죠.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런 의미를 찾기 힘들어졌어요. 도리어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버렸죠. 실제로 얼마 전엔 멧돼지가 사람을 해친 사건도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금도 돼지 저금통에 한 푼 두 푼 동전을 모읍니다. 저금통이 가득 차서 잔뜩 배가 부르면 그만큼 풍요와 행운이 깃들 거라 믿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돼지꿈은 좋은 꿈이라고도 하잖아요. 해가 바뀐다고 해서 사는 일이 벼락처럼 좋아지는 건 아닐 테지만, 새해에는 부디 몸도 마음도, 또 기왕이면 주머니 사정도 퉁퉁하고 튼실한 돼지처럼 넉넉해지길 마음속으로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