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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G 음악]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임진모가 들려주는 스팅 (Sting) 편
임진모
#ssg 음악




 

음악을 통해 사회를 바꾸는 뮤지션의 뮤즈





영국이 배출한 음악가 스팅(Sting)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모든 것을 갖춘 인물’입니다. 음악가든 아니면 사람이든 어떤 쪽으로 바라봐도 조금도 뒤지지 않는, 요즘 말로는 넘을 수 없다는 의미의 ‘넘사벽’이기 때문이지요. 시사주간지 <타임>이 그가 60살이 된 2011년에 환갑축하 인터뷰를 단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뮤지션의 뮤즈가 된 남자, 스팅

음악가로서 그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천재’입니다. 일례로 2010년에 발표한 팝과 클래식의 환상적인 퓨전 앨범 <심포니시티즈>를 듣는 사람은 너무나 아름답고 흥분에 넘치는 그 천재적인 음악에 경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밴드 ‘폴리스’ 시절부터 솔로 활동에서 거둔 히트곡을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함께 새로이 편곡한 이 앨범은 스팅의 음악영역은 클래식을 넘나든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그는 못하는 음악이 없습니다. 장르에 대한 왕성한 식욕이라고 할까요. 밴드 폴리스를 1985년 무렵 그만 둔 이유도 그때까지 해오던 ‘록에 싱싱한 연료가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그는 “그 때문에도 뮤지션은 록 테두리를 넘어 아프리카 음악, 재즈 그리고 클래식을 겨냥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가 ‘뮤지션이 사랑하고 인정하는 뮤지션’이 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진정한 뮤지션은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실험적으로 또 다채롭게 음악 스타일을 구사하는 인물이니까요. 그를 이제는 뮤지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아티스트라고 부르지요. 평론가 앤서니 드커티스 말대로 그는 ‘위대한 작품을 쓰는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뮤지션의 뮤즈가 된 남자, 스팅


 

|Sting – Fields Of Gold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 되면 전파를 덮는 그의 곡 ‘황금 들녘’(Fields of gold)을 두고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 경(卿)은 “아무나 쓸 수 없는 이 시대의 명곡”이라고 찬사를 보낸 바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영화 ‘레옹’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처연함의 극치를 보여준 곡 ‘내 마음의 모습’(Shape of my heart)을 빼놓을 수 없지요. 2003년에 우리의 월드스타 ‘비’가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취입했을 때, 또 그 무렵 인기 최정상이었던 팝스타 크레이그 데이비드가 ‘라이스 앤 폴’(Rise and fall)을 만들었을 때 모두 이 곡을 샘플링 했습니다.

 

 

|Sting – Shape Of My Heart

 


스팅은 이 곡을 비롯해 그의 대표작들인 선사하는 빼어난 멜로디 생산력은 물론 감각적이고도 세련된 리듬을 구성하는 역량 역시 타의 추종이 불가능할 만큼 탁월한 재능을 자랑합니다. 그의 최대 히트곡이라 할 ‘너의 발걸음마다’(Every breath you take)를 들으면 바로 인정할 겁니다. 1997년 한해를 휩쓸며 빅 히트를 친 퍼프 대디의 ‘널 그리워할 거야’(I’ll be missing you)는 바로 이 곡을 기초로 만든 힙합음악이지요.

 

아마도 이것은 그가 리듬이자 멜로디 악기인 베이스를 연주해온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대중음악의 톱 베이시스트를 뽑는 설문조사에서 늘 상위권에 꼽힐 만큼 베이스 연주 실력을 인정받습니다. 음악의 다양성을 보이려면 무엇보다 리듬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나야 하는데 그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 2막, 배우 그리고 사회활동가로의 변신





갈수록 대중음악 분야에서 중요성을 더하는 ‘비주얼’ 측면에서도 그는 클래스가 다릅니다. 인간미 넘치면서 강렬한 개성을 지닌 외모 덕에 그는 1980년대 중후반 <모래언덕>, <플렌티>, <더 브라이드> 등 영화에 잇따라 출연, 배우로도 전성기를 누렸죠. 특히 <더 브라이드>에서 프랑켄슈타인이란 악역을 맡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50대가 넘어서도 그의 공연장에는 언제나 ‘음악에 그리고 우월한 외모에’ 넋을 잃은 여성관객들이 객석을 점령하곤 했지요. 남자들은 그래서 늘 그에게 부러움과 시샘을 느낍니다.

 

이걸로도 충분한데 그는 정의를 위해 뛰는 사회의식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또한 발군입니다. 1980년대에는 국제사면위원회의 일원으로 인권평등과 평화를 메시지로 한 공연에, 아프리카 자선을 위한 <라이브에이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97년에는 런던 로열 알버트 홀에서 열린, 카리브해 섬 몬세라트의 화산폭발로 인한 이재민을 돕는 자선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음악에만 빠져 세상사와 무관한 이기적 인간이 아니라 평등, 평화, 인류애, 정의와 같은 도덕적 가치와 소통하는 사회운동가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브라질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말레이시아 등에 걸쳐 있으며 지구촌의 산소 공급원 역할을 하지만 난(亂)개발로 인해 점차 파괴되어가고 열대우림(rain forest)과 그 지역 원주민을 위해 기금을 조성하는 비영리단체를 그의 아내인 트루디 타일러와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이를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으며 매년 자선공연을 개회해오고 있지요. 열대우림을 보호하기 위한 그의 줄기찬 노력과 헌신을 기리기 위해 콜롬비아의 한 청개구리 종(種)은 스팅의 이름을 따서 지어지기도 했습니다.

 

 

성실한 천재가 전하는 완벽한 조화의 음악

그는 음악으로 전 세계 음악팬의 ‘사랑’을 받지만 지속적인 사회활동과 사람 됨됨이 때문에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존경’의 수준을 보입니다. 이러니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 따로 없습니다. 2011년 <타임>지는 세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스팅을 선정했습니다. 아티스트로서 그는 당연히 음악에 성실하게 임합니다. 나이 오십이 된 2000년대 이후에만 다섯 장의 앨범을 내놓았고 올해도 프랑스 여가수 밀레느 파머와 듀엣으로 ‘스톨른 카’를 발표했습니다. 이 곡은 프랑스 인기차트 정상에 올라 스팅 음악이력 최초의 프랑스 1위곡이 됐습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천재성과 더불어 성실성입니다. 흔히 이것은 이율배반적이지만 스팅의 경우는 완벽한 조화를 보입니다.

 

젊은 시절에 검은색과 노란색 줄무늬의 스웨터를 자주 입어 그게 마치 벌과 같다고 해서 그는 스팅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것도 노랑과 검정이라는 이질적인 색깔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이런 배합과 조화의 미덕을 바탕으로 느리고 빠름, 옛 것과 새로운 것, 밝음과 어두움 그리고 평범함과 특별함이 만나 어울림을 갖는 음악을 들려줍니다. 겸손과 성실성을 가지고 음악수요자를 놀라게 하고 감동을 창출하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늘 스팅에 놀라고 감동합니다.

 

 

|TED2014 Sting – 내가 다시 작곡을 하게 된 방법

 


마지막으로 스팅이 직접 TED에서 진행한 강연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어린 시절, 조선소 근처에 살면서 항구에 있는 배들처럼 그곳을 떠나기만을 바라던 소년 스팅. 그를 다시 작곡할 수 있게 한 원천이 바로 그 시절의 기억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소박한 스팅의 무대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영상이니 꼭 한 번 감상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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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G 음악] 글렌 굴드(Glenn Gould) 편
#ssg 음악





글렌 굴드(Glenn Gould, 1932-1982)가 50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글렌 굴드에 대한 관심과 찬사는 굴드의 사후에도 끊이질 않고 있는데요, 많은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피아니스트로 표현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실제로 옥스퍼드의 음악가 사전(Musician Dictionary)에서는 그를 ‘캐나다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작가’로 소개하고 있기도 하죠. 유난히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넘쳐났던 20세기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글렌 굴드를 소개합니다!

 

 

기행과 천재성의 기묘한 관계





우리가 ‘천재’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몇 가지 단상이 있습니다. 사회와 자신을 격리하는 배타성, 편집증에 가까운 괴팍함, 그리고 기존의 틀을 깨는 창의 등. 글렌 굴드의 삶은 마치 이러한 천재의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해 살아왔나 싶을 정도로 영화 속 천재의 삶을 녹여낸 듯한 특이한 일화가 유독 많습니다.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죠.

 

글렌 굴드는 세균 공포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병원에 출입하지 않았고, 스스로 자신의 체온과 수면패턴, 몸의 상태 등을 모두 기록하였죠. 목욕할 때도 장갑을 끼고, 사람들과 악수하는 것을 꺼리고, 한여름에도 두꺼운 코트를 입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세게 악수를 한 사람을 고소하고, 건강상의 이유로 공연을 취소한 적도 많습니다. 항상 수많은 신경 안정제와 항생제를 먹었고, 음식물은 오렌지주스와 비스킷 정도만 섭취했죠. 자신의 최고 전성기였던 32세에 이후 무대에는 단 차례도 오르지 않고, 밀폐된 공간에서 녹음만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기행을 단순히 천재의 이상행동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음악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모든 삶을 통제해 온 굴드의 모습은 음악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성기 때 모든 공연을 중단한 것 역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청중 속에서 완벽한 음악을 전달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음반 속에는 글렌 굴드의 피아니즘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해석과 이를 표현하는 명료한 음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아래 바흐를 연주하는 굴드의 모습에서 황홀경에 빠져 자신만의 피아니즘을 완성해가는 굴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Glenn Gould plays Bach

 

 

글렌 굴드와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 BWV 988)

글렌 굴드를 상징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준 고무의자, 그 앞에 놓인 스타인웨이의 오래된 피아노, 낮은 고무의자에 앉아 기괴한 자세로 피아노를 치는 그의 모습, 자신만의 템포와 해석 방식으로 재탄생 시킨 음악, 그리고 그의 레코딩에 담긴 그의 흥얼거림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러한 굴드의 상징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입니다. 기존의 해석과 연주 방식을 모두 무시하고, 자신만의 템포로 연주하는 글렌 굴드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은 그의 시작과 끝이었지요.

 

괴팍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굴드가 가진 수많은 철칙 중 하나가 한 번 녹음한 음악은 절대 다시 녹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철칙을 깨고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두 번 녹음하죠. 첫 녹음은 1955년 굴드의 데뷔 녹음이었습니다. 1981년 그는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녹음하였고 이는 그의 마지막 레코딩이 되었습니다. 두 음악을 한 번 비교해서 들어보시죠.




 

|JS Bach – Original Handwritten Scores – Goldberg Variations (by Glenn Gould 1955)

 


 


굴드가 1955년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출시했을 때 대부분의 음악평론가들은 ‘미친놈의 연주’라고 혹평했다고 합니다. 굴드가 재해석한 음악은 기존의 모든 해석과 전통을 모두 무시하고, 빠른 템포로 일관되게 연주해 나가기 때문이죠. 20대의 천재 음악가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다른 의미로 ‘미친놈의 연주’가 맞을지도 모릅니다. 현란한 테크닉과 기존의 파괴하는 그의 연주 방식은 엄청난 매혹으로 다가오죠. 26년 뒤, 그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어떤 차이를 느끼셨나요? 우선은 2배 가까이 느려진 템포가 눈에 띕니다. 비범함으로 가득했던 천재가 거장이 되어 비움의 미학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불멸의 거장으로서 남다

글렌 굴드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았고, 생전에 모든 명성을 손에 거머쥔 축복받은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13살에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하며 데뷔하였고, 소개해드린 1955년의 골드베르크 연주곡으로 인기와 명성을 모두 획득했지요, 유럽과 미국 등 가장 명성 높은 음악의 고장에서 한 번도 공부한 적이 없었다는 점은 오히려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해석을 가능케 한 음악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50년의 삶 동안 그는 우울증, 고독, 광기 속에서 살아왔고, 뇌졸중으로 이른 나이에 급작스럽게 사망하였죠. 글렌 굴드의 오랜 친구였던 피터 오스왈드가 쓴 글렌 굴드에 대한 책에는 그가 얼마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는지에 대한 일화가 나옵니다. 무대에 서길 꺼렸던 그였지만, 대화가 통하는 상대와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고, 즉흥으로 연주를 제안하는 그는 생각만큼 괴팍한 예술가인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가 보였던 철저한 삶의 통제는 오히려 음악을 위한 희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굴드가 보여줬던 음악과 삶의 방식은 옳고 그름의 문제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결코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엄청난 열정과 헌신이지요. 이미 생전에 모든 명성을 얻었던 글렌 굴드에 대한 연구가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추천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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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G블로그 에디터가 추천하는 ‘천재음악가’
[SSG 음악] 키스 자렛(Keith Jarrett) 편
#ssg 음악







지난 5월 8일은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Keith Jarrett)이 칠순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제는 전설의 반열에 오른 그이지만 얼마 전 스위스에서 솔로 콘서트를 진행할 정도로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데요. 20세기 재즈음악의 증인이자, 역사가 될 키스 자렛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 큰 영광으로 여겨집니다. 클래식, 재즈, 팝송 등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과 독창적인 연주 세계, 그는 의심할 여지 없는 현존하는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입니다. 하나의 길을 오랫동안 걸어온 거장을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묘한 감흥을 주는데요. SSG블로그가 두 번째로 준비한 천재 음악가 키스 자렛과 함께 재즈의 매력에 빠져보면 어떨까요?

 

키스 자렛, 천재성으로 그의 음악세계를 열다

1945년 필라델피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키스 자렛은 음악 영재였지요. 절대 음악을 가진 그는 일곱 살 때 클래식 연주로 리사이틀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가 재즈에 심취한 것은 고등학생 무렵인데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의 연주를 들은 이후입니다. 이후, 보스턴의 버클리 음대에 진학하며 뉴욕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때 그는 찰스 로이드(Charles Lloyd) 밴드에 영입하게 되는데요. 1968년 찰스 로이드 밴드는 해체하면서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에게 함께 연주할 것을 제의 받습니다. 그의 음악적 천재성이 만들어낸 자연스런 흐름이었지요. 그가 장학생으로 입학한 버클리 음대를 1년 만에 관둔 이유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에게 진짜 교육은 주는 곳은 학교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고, 자신이 몸담고 만나고 있는 당대 음악가와의 교감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1971년 ECM 레이블에서 첫 스튜디오 솔로 앨범 <페이싱 유(Facing You)>를 선보였습니다. 부드럽고 로맨틱한 피아노 선율로 이루어진 그의 데뷔 앨범은 키스 자렛 열풍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렛의 신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최고 앨범으로 회자되는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75년 1월 24일, 쾰른 오페라 하우스에서 피아노 솔로 콘서트를 녹음한 음반 말이지요.

 


퀄른 콘서트, 전설의 반열에 들어서다





추운 겨울, 스위스 취리히의 공연을 마친 후 바로 쾰른에 도착한 자렛은 몸 상태가 꽤 좋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허리가 좋지 않아서 교정기를 착용할 정도였지요. 레스토랑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은 그나마 애교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요? 자렛이 도착한 공연장에는 자렛이 요청한 뵈젠도르프 피아노가 아닌 다른 모델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자렛이 요청한 모델은 뵈젠도르퍼 290 임페리얼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Bösendorfer 290 Imperial concert grand piano)였습니다. 하지만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는 요청한 것보다 훨씬 작은 뵈젠도르퍼 피아노였지요. 자렛이 요청한 것보다 상단부는 작고 얇고, 하단부는 약한 음을 내서 키스 자렛이 추구하는 고음부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율은커녕 페달조차 작동하지 않는 상태였지요. 그가 무대에 오른 것은 피아노 조율을 힘겹게 마친 늦은 밤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즉흥 연주를 시작으로 음반사에 남을 명 연주를 선사했습니다. 최악의 환경에서 그는 고음부를 포기하고, 중저음 중심으로 즉흥연주로 선보인 기념비적인 앨범이지요.

 

 


|Keith Jarrett – THE KÖLN CONCERT

 


오늘날 이 음반을 다시 반복해 들어 봐도, 이토록 아름답고 서정적인 음악이 그렇게 최악의 상황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피아노 즉흥 연주로 무대를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집중력과 힘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과 헌신 없이는 감히 시도하기 힘든 일이지요. 그는 이렇게 용감한 시도를 통해 음악적 성과와 상업적 성공 모두를 거머쥐었습니다.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600만 장 판매량을 올리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피아노 앨범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재즈 초심자가 꼭 거쳐야 하는 하나의 관문이기도 합니다.

 


초지일관, 자신의 길을 걷다

 

 


|Keith Jarrett – Summertime

 


사람들은 왜 이토록 키스 자렛의 피아노에 열광하는 것일까요? 영상은 1984년 도쿄에서의 공연 모습입니다.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곡 <섬머 타임(Summer Time)>인데요. 잘 아는 곡인 만큼 키스 자렛 피아노의 힘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피아노는 재즈를 잘 모르는 사람조차 빠지게 하는 감성과 이미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입증하는 열정을 담고 있습니다. 리듬에 스스로를 맞기며 흥겹게 연주하는 키스 자렛. 분명 그는 <섬머 타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음악가에게 자신의 음악은 음악가 그 자체입니다. 그가 현존하는 전설로 자리매김했다면, 그 비밀은 그의 삶 속에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은 디스코와 록의 시대였습니다. 당시 재즈계도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나 허비 행콕(Herbie Hancock)의 퓨전 밴드가 유행할 정도로 재즈-록 퓨전이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과 무관하게, 일렉트릭 키보드의 시대에 오로지 어쿠스틱 피아노만을 고집했던 인물이 자렛입니다. 어찌 보면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는 음악 트렌드를 거스르는 정반대의 길이었지요. 그는 순수하고 정열적으로 한결같이 피아노만을 탐닉했습니다. 그 속에서 상업적인 음악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감수성과 미묘한 뉘앙스를 포착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음악에만 집중했던 고집이 만들어낸 성과입니다.

 

그의 음악에는 늘 신선하면서도 정직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듣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자유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손길 가는 대로 연주하면 누군가의 방식이 아니라 그만의 독특한 세계가 열립니다. 순간적인 감흥에 따라 다양한 음악 장르를 넘나들지만 피아노와 고독하게 대화하는 법을 잊지 않는 것도 그의 미덕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자렛은 “독창적인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그때부터가 출발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개인적인 감정을 얼마나 잘 표현해낼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에서 그가 평생 추구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와의 아름다운 우정

키스 자렛을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독일의 음반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입니다.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인 1969년 ECM(‘에디션 오브 컨템포러리 뮤직’의 약자) 레이블을 설립한 기념비적인 인물이지요. 그는 기존의 재즈 음악을 클래식처럼 섬세하게 담는 새로운 방식을 추구했습니다. 아이허의 진가는 무엇보다 키스 자렛의 음악에서 ECM뿐만 아니라 재즈의 미래를 봤다는 사실입니다.





아이허는 애틀란틱 레코드에서 재즈 트리오 앨범을 낼 정도로 상한가를 치던 자렛에게 자신의 레이블인 ECM과의 앨범 작업을 수 차례 부탁합니다. 그리고 노르웨이 출신의 색소폰 연주자 얀 가바렉(Jan Garbarek)의 ECM 앨범 <아프릭 페퍼버드(Afric Pepperbird)>(1979)를 자렛에게 보냅니다. 자렛은 이 앨범을 듣고 당시로서는 신생 레이블인 ECM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아이허는 일종의 삼고초려를 통해 자렛을 얻었고, 그에게 게리 피콕(Gary Peacock)과 잭 디조넷(Jack DeJohnette)과의 트리오 앨범을 권했습니다. 이들은 훗날 키스 자렛 트리오의 멤버가 될 멤버들이죠. 하지만 완벽주의자이자 고집쟁이(?)인 자렛은 이를 거부하고 첫 앨범으로 <페이싱 유(Facing You)>를 선택했죠. 그 후, 자렛은 얀 가바렉과 함께 <비롱잉(belonging>(1974)에서 호흡을 맞추었고, 가바렉과 함께 한 두 번째 앨범 <마이 송(My Song)>(1978)으로 히트를 쳤습니다. 프로듀로서의 아이허의 역량이 키스 자렛의 커리어에 미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Keith Jarrett – Questar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 앨범 역시 아이허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습니다. 물론, 이 공연은 자렛의 솔로 즉흥 연주에 대한 고집 덕분에 탄생하였습니다. 이때 유럽 연주 여행을 동행한 것이 아이허였지요. 당시 빡빡하고 무리한 일정은 자렛의 건강을 나쁘게 만든 원인이었지만, 쾰른 오페라 하우스에서 기적의 공연을 놓치지 않고 녹음한 것 역시 아이허이니 말입니다.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 앨범의 성공은 당시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ECM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음악적 동지로서 자렛과 아이허가 이어온 45년의 시간의 시작점입니다. 자렛은 아이허가 소개한 뮤지션과의 작업이나 프로젝트에는 시간이 걸려도 꼭 참여해 연주합니다. 그리고 아이허는 ECM이 추구하는 풍부하고 생생한 사운드로 자렛을 응원합니다. 아이허는 그 누구보다 자렛의 음악을 잘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키스 자렛과 ECM이 오늘날 재즈의 신화로 불리는 것만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요. 자렛 없는 아이허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아이허 없는 자렛도 꿈꿀 수 없습니다.

 


현재진행형의 뮤지션을 위한 찬가





키스 자렛의 칠순을 맞이해 그의 영원한 동지 ECM에서 두 장의 앨범을 선보였습니다. 하나는 2014년 4월부터 7월까지 도쿄, 토론토, 파리, 로마에서 가진 6차례의 피아노 솔로 공연 중 가장 감동적인 연주를 담아낸 <크리에이션(Creation)>입니다. 제목처럼 또 다른 ‘창조’를 꿈꾸는 이 솔로 콘서트 앨범은 2005년 <카네기홀 콘서트(The Carnegie Hall Concert)>나 2011년 <리오(RIO)> 앨범처럼 비교적 짧은 호흡의 연주를 선사합니다.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의 26분짜리 첫 곡 ‘파트 1(Part 1)’처럼 반복적이고 실험적인 테마를 사용하는 긴 음악은 이제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전보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한층 여유가 느껴지니 말이지요. 여전히 사색적이고 깊이 있는 호흡이 생생히 전해집니다. 또 하나는 클래식 앨범 <바버, 바르톡 피아노 협주곡(Barber, Bartok: Piano Concertos)>입니다. 1980년대 중반에 녹음된 곡들은 그가 재즈뿐만 아니라 클래식에 얼마나 심취해 있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가 재즈나 클래식이라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한 뮤지션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두 장의 앨범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이것이 키스 자렛의 음악세계를 제대로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그는 다양한 음악을 마음껏 혼용하기에 단순히 재즈라는 틀로 한정하는 것이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재즈 앨범에서 클래식의 우아함을, 클래식 앨범에서 재즈의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음의 향연을 원하신다면 시쳇말로 ‘완전체’ 키스 자렛을 경험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의 음악을 통해 음악으로 만나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리라는 것만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