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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히말라야에서 만난 사람들, 네팔 2 편
이 환
#이환작가
#히말라야
#이환





위치

아시아의 산맥으로 인도아대륙과 티베트 고원 사이, 파키스탄, 인도, 중화인민공화국 시짱 자치구, 부탄, 네팔에 걸쳐 위치

최고봉

높이8,848m (29,029ft)의 에베레스트 산

기후

산의 높이에 따라 기후차가 심하고, 우기(6-9월)와 건기(10월-5월)가 있음













셰르파는 티베트말로 ‘동쪽 사람들’이란 뜻이다. 산에서 만나는 많은 포터와 고산 안내자의 이름엔 ‘셰르파’가 꼭 들어간다.





렌조 패스 고갯마루에서 바라본 쿰부히말. 먼 옛날 이곳은 바다였다. 물 아래에서 커다란 땅덩어리들이 부딪혀 하늘 위로 치솟은 땅, 이곳이 히말라야다.


가파르고 험한 고개인 렌조 패스 Renjo Pass, 5417m를 만났다. 기암괴석의 바윗돌 수천 개를 밟은 끝에 겨우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히말라야의 모든 고개에는 티베트 불경이 인쇄된 오색 깃발이 나부낀다. 에베레스트와 주변 고봉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숨통이 트인다. 이곳은 쿰부히말의 상당 부분을 가장 넓게 조망할수 있는 뷰포인트다.





렌조 패스를 넘어 고쿄 피크 중턱에서 바라본 마을과 호수. 고쿄 피크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훌륭하다.





앙상한 가지에 맺힌 은빛 얼음꽃이 피었다.





호주에서 온 용감한 대학생 토라와 세라 자매다. 부모님께 겨우 허락을 받고 한 달 동안 트레킹을 한다고 했다. 이 험한 길을 여자 두 명이서 도전하다니, 얼마나 용감한가!





촐라 패스라는 관문을 넘어서면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진다. 아름다운 봉우리로 이름난 아마다블람의 야경을 담았다. 칠흑같은 어두운 밤하늘에서 뻗어 나오는 수많은 별빛!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더욱 밝게 빛난다. 아마다블람은 히말라야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 중 하나다. 쿰부히말을 트레킹하다 보면 어디에서든 아마다블람의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있다. 바로 옆에 촐라체가 하늘 위로 치솟아 있다. 자세히 보면 소름 끼칠정도로 거친 바위산이다. 골 사이사이 쌓인 흰 눈덩이 때문에 산이 더 시커먼 느낌이다.





촐라 패스를 넘어 눈밭을 걷고 나면 가느다란 등산로가 바위산을 끼고 시작된다. 저 너머에는 수만 년에 걸쳐 형성된 커다란 빙하가 절벽을 이루고 있다.


히말라야의 뜻과 에베레스트 산의 진짜 높이 히말라야 Himalaya는 산스크리트어로 히말 Himal(Snow)+알라야alaya(House), 즉 ‘눈의 거처’란 뜻이다. 에베레스트는 영국인들이 1865년 영국왕립지리학회 초대 측량부 장관 조지 에베레스트 George Everest 경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네팔 지도에는 에베레스트란 이름의 산이 없다. ‘사가르마타 Sagarmatha’가 있을 뿐이다. 네팔의 모든 정부 공식문서나 행정구역명엔 사가르마타가 표준이다. 산스크리트어로 ‘하늘의 머리 Head of the Sky’라는 뜻이다. 하지만 셰르파들은 초모룽마 Chomo rungma라고 부른다. ‘세상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중국도 초모룽마를 차음해 주무랑마 珠穆朗瑪라고 한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칸첸중가가 히말라야의 최고봉인 줄 알았다.하지만 영국 측량대가 실제 측량을 하다 보니 더 높은 산이 칸첸중가 너머에 있었다. 보통 에베레스트의 높이는 8848m로 알려졌다. 하지만 8880m나 8863m로 표시되기도 한다. 미국 탐험대는 GPS 장비를 이용해 8850m라고 발표했다. 2005년 중국의 한 기관은 8844.4m라고 주장했다. 기준이 되는 해수면의 높이가 날마다 들쭉날쭉 달라질뿐더러, 측정 방법에 따라 또 다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산꼭대기 위의 빙설이 3.5m나 된다. 어찌됐든 네팔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높이는 8848m다. 혹자는 지구온난화에 의해 3.5m나 되는 빙설이 녹아 내려 높이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지질 학자들은 지각운동에 의해 해마다 6mm씩 동북쪽으로 움직이면서 높아진다고 말한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산악인 중에는 휴대전화 번호 뒷자리가 ‘8848’인 경우가 많다. 고 박영석 대장이 그랬고, 엄홍길 대장도 그렇다.





촐라체에서 딩보체 마을로 내려가는 길.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사이에 드넓은 초지가 펼쳐져 트레킹의 진수를 맛볼수 있다.





부처님의 자비, 힌두 신들의 보호, 어느 신이든 절대자의 살핌 없이는 저 고봉을 오를 수 없다. 거대한 자연의 품에 마음과 몸을 맡기고 겸허하게 한발 한발 나아갈 뿐이다.





우리가 묵은 로지 주인장의 네 살 꼬마 공주 리마 Lima가 깜찍한 재롱을 피운다. 어눌한 토막 영어로 거리낌 없이 말을 붙여 왔다. 동네 영어교실에서 익힌 솜씨란다. 짐짓 어른인 우리에게 큰 소리로 야단도 친다. 귀엽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외국인들의 왕래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네 살이지만 결코 응석받이가 아니다. 혼자서 차가운 수돗물에 자기양말과 신발 빨래를 거뜬히 해낸다. 한국의 네살배기와는 천지 차이다.







남체 Namche, 3420m로 내려오는 내내 구름이 발갛게 불이 붙어 있었다. 활활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서쪽 하늘이 붉디붉게 물들었다. 고산의 공기층이 아래 지역과 달라 아침저녁 노을빛이 다르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만날 수 있는 신기한 볼거리 중 하나다.





히말라야의 겨울 구름은 오묘하다. 무지갯빛을 발한다. 신비하다. 어찌 보면 악마가 입을 벌려 삼킬 듯 기괴하기도 하다. 금세 광풍이 몇 차례 일더니, 양털 구름이 푸른 하늘에 일자 모양으로 획을 긋는다. 한참을 히말라야의 하늘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 고단한일정 속에서 잠시 잠깐 느껴 보는 여유다.





남체는 산 발치다. 루클라 쪽에서 올라온 많은 트레커들은 이곳에서 하루 이틀 묵는데 본격적인 고산 적응을 위해서다.





남체에는 엄홍길대장의 이름이 새겨진 방이 따로 있다. 한국인 최초로 14좌를 완등한 그를 기리는 방이다.





소년들이 당구대 같은 나무판 위에서 ‘카롬 Carom’이라는 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시야 속에 들어왔다. 카롬은 원반 돌을 손가락으로 밀쳐 구멍에 넣는 것인데 네팔의 국민 게임이다.





네팔에 사는 부족들 바깥세계엔 셰르파족이 가장 많이 알려졌다. 산악인들이 주로 이들과 탐험에 나서기 때문이다. 쿰부히말 주변에만 3만5000여명이 살고 있다. 예전엔 산 너머 티베트와의 교역으로 먹고살았지만, 요즘은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셰르파는 종족의 이름이면서 성 姓이다. 포터들의 이름을 물으면 성과 이름이 같은 사람이 많아 처음엔 헷갈린다. 우리 팀에도 파상 셰르파가 두 사람이었다. 그래서 ‘키 큰 파상’, ‘술 잘 먹는 파상’이라고 구별해 불렀다. 셰르파족은 아이 이름을 태어난 요일에 따라 짓는다. 자연히 같은 이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월요일에 태어나면 다와 Dawa, 화요일에 태어나면 밍마르 Mingmar라고 부른다. 라크파(Lhakpa, 수요일), 푸르바(Phurba, 목요일),파상(Pasang, 금요일), 펨바(Pemba, 토요일), 니마(Nyima, 일요일) 이런 식이다. 남자 여자 똑같이 짓는다.


이 밖에도 네팔 전역엔 여러 부족이 살고있다. 네와르족 Newars은 100만 명이 넘는다. 카트만두 계곡 쪽에 몰려 있으며, 유명한 예술가가 많다. 네와르 건축과 미술 양식도 이들의 창조성에서 비롯됐다. 포터들 중에는 셰르파족 외에 구룽, 타망, 라이족 등이 있다. 구룽족 Gurungs은 티베트-미얀마계인데 안나푸르나가 있는 포카라 주변에 많이 산다. 구르카 용병으로 많이 활동한다. 라이족과 림부족은 동부 네팔 국경 산악 지역에 많이 산다. 인도 시킴에서 이들을 많이 만났다. 이들도 쿠쿠리라는 칼을들고 다니며, 구르카 용병으로 많이 들어갔다. 타망족 Tamangs은 카트만두 북부에 많이 살며 육체 노동자가 많다. 카트만두 기념품 가게에서 만나는 탱화나 카펫은 대부분 이들의 손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순수 티베트족도 있다. 이들은 중국의 티베트 침공 때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온 12만 명의 망명자 중 일부다. 1만2000여 명이 네팔로 이주해 살고 있다. 카트만두 시내 호텔, 음식점 사장들은 거의 티베트계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이가 많다.





겉보기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엄청난 자연 재앙이 될 수 있다. 지구온난화로 10년 안에 히말라야 산맥의 50여 군데에서 큰 홍수가 발생할 수 있다고 유엔환경계획 UNEP이 경고했다.





물건을 나르는 좁교 행렬. 3000m 위에서는 야크가 힘을 발휘하고, 그 아래에서는 좁교가 짐을 나른다. 좁교는 야크보다 털이 적고 몸집도 작다.





루클라 공항은 경비행기 전용으로 커다란 운동장이 활주로다. 커다란 버스터미널 같다. 활주로 아래는 낭떠러지다.이륙할 때는 절벽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두둥실 탄력을 받고, 착륙할 때는 골짜기에서 절벽으로 오르는 동안 자연히 속도가 줄어든다. 비행기표에는 지정 좌석이 없다. 그냥 전망 좋은 곳에 앉으면 된다. 카트만두로 갈 때는 오른쪽 창가에서 에베레스트와 고산들을 볼 수 있다. 루클라에 올 때는 왼쪽이 고산 밀집 지역이다.





가난한 산골 마을을 찾은 이방인들을 보기 위해 전교생이 교사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제 10년 뒤,20년 뒤 이 아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마을은 또 얼마나 변해 있을까?





세계 어디에서나 어린이는 어린이다. 한 가정에서 나라에서 이들은 미래요 희망이다.







나마스테 Namaste! 안녕하세요! ‘내 안의 신이 당신의 신에게 인사합니다.’라는 뜻이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말이 또 있을까?





비행기에서 본 히말라야의 아름다움은 또 다르다. 날이 맑아 한 달 내내 걸었던 가우리샹카르와 에베레스트 산군도 구별할 수 있었다. 비행기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를 한 달 동안이나 두 발로 걸었다. 참 우습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이제는 여행을 마무리해야 할 때다. 파키스탄의 카라코람 히말라야에서, 인도의 동북쪽 끝 시킴과 네팔 끝 일람의 차밭까지 180일간의 히말라야 유랑 流浪이 끝났다. 언젠가 이 아름답고 정겨운 시골 마을들을 다시 올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웃음, 눈물, 도전, 실망, 두려움, 좌절로 뒤범벅된 긴 시간이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자신도 돌아봤다. 견디기 힘든 자갈밭과 눈밭, 추위에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원정 기간 내내 가장 소중했던 건 결국 ‘사람’이었다. ‘사람’은 ‘사랑’이었고 스승이었다. 삶은 기나긴 여행이며 유랑이다. 또 다른 유랑의 시간이 언젠가는 다시 올 것이다. 유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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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히말라야에서 만난 사람들, 네팔 1 편
이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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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아시아의 산맥으로 인도아대륙과 티베트 고원 사이, 파키스탄, 인도, 중화인민공화국 시짱 자치구, 부탄, 네팔에 걸쳐 위치

최고봉

높이8,848m (29,029ft)의 에베레스트 산

기후

산의 높이에 따라 기후차가 심하고, 우기(6-9월)와 건기(10월-5월)가 있음









네팔 히말라야는 카라코람 히말라야에 비해 여성스럽지만 8000m 고봉이 즐비한 명실상부한 리얼 히말라야다.





지구의 선물이라는 히말라야를 품은 네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다양한 문화와 투박한 정취의 음식들도 생각나게 한다. 인도와 중국 사이에 끼여 있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로 8000m가 넘는 히말라야 14좌 고봉 중 8개가 밀집한 산악국가다. 네팔이라는 이름은 카트만두 계곡에서 한때 융성했던 네파 Nepa 왕국에서 비롯됐다.


사람보다 신이 많다고 할 정도로 신에 대한 경외심이 깊은 나라인 네팔은 인구 대부분이 힌두교를 믿고 있다. 불교도는 그 수가 많지 않지만 산속에서 생활하는 부족들은 대부분 불교도다. 얼굴도 우리와 비슷한 몽골리안이다.


 


 

바크타푸르 궁 옆 힌두 사원, 신도들이 바친 음식 찌꺼기들로 먹을 것이 풍부한 사원 안은 비둘기들의 안식처다.


 



네팔은 유구한 역사와 독자적이고 뛰어난 문화를 자랑한다.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사원이나 외곽의 바크타푸르 Bhaktapur, 파탄 Patan 왕궁에 가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천혜의 휴양도시 포카라,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도 네팔의 자랑이다. 여기에 하늘이 내려준 히말라야까지 품고 있으니 네팔 사람들의 자존심은 만만치 않다.




힌두 사원 옆 나무 아래에 신도들이 기도하며 바친 꽃잎들. 네팔은 산간 마을을 제외하면 국민 거의가 힌두교 신자다.







네팔 서부 지역의 산간 마을. 학교를 마친 여학생들이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을 걸어가고 있다. 짚단을 나무 기둥에 매달아 놓은 모양이 특이하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을 지나는 여인들과 소년. 그 많은 짐을 이고 지고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눈 천지인 히말라야의 나라지만 정작 평원에 사는 아이들은 눈을 못 보고 산단다. 그래서 눈이나 눈사람 등의 낱말 카드를 보여 주고 설명하는데 애를 먹는다고 한다. 바다가 없기 때문에 바다와 고래 같은 단어를 가르칠 때도 난감하다고 한다. 기후적으로 네팔은 아열대 지역에 속한다. 대체로 네팔 하면 ‘눈의 나라’를 떠올리지만 눈이 있는 높은 산은 북쪽에 걸쳐 뻗어 있을 뿐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최근 몇 년 새 한국에서 ‘치유의 길’로 이름난 힐링 코스다. 사업가, 전문직 종사자, 남녀 직장인들이 ‘지친 머리’를 식히러 찾는 곳이다. 난코스가 아니면서도 단기간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ABC라고 하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4,130m라는 것은 상식이 됐다. 1980년 영국 찰스 황태자도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를 나흘 동안 걸었다고 한다.





푼힐 전망대 서북쪽에는 다울라기리(8,167m)가 위용을 펼치며 서있다.





포카라 Pokhara는 네팔 최대의 관광 도시이자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관문이다. 포카라 뒤편으로 우뚝 서 있는 네팔어로 ‘물고기 꼬리 Fish Tail’란 뜻을 가진 마차푸차레 Machhapuchhare, 6,997m의 모습이 실로 장관이다.





푼힐 전망대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산군. 안나푸르나는 산스크리트어로 ‘풍요의 여신’이란 뜻이다.





포카라 시내와 안나푸르나 산군을 조망할 수 있는 평화탑 샨티 스투파 shanti stupa는 일본의 한 불교 종파가 세운 것이다. 탑 바로 앞에 옥빛 페와 호수가 반짝이고, 안나푸르나 설산들과 마차푸차레가 한눈에 들어온다.





페와 호수는 해발 800m의 포카라 남쪽에 있다.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다. 안나푸르나 등 히말라야의 설산에서 녹은 물이 흘러 들어 형성된 것이다.







안나푸르나의 트레킹 중에 만난 소녀들. 집안일을 돕기 위해 땔감, 물건을 나르는 고사리손들이 정겹다.


 



수도 카트만두 타멜 거리 곳곳에 달아놓은 원색의 깃발들. 히말라야를 오가는 트레커들의 출발지이자, 마지막 휴식 장소이다.

 





타멜에서 나와 왕궁 지역에 들어서면 두르바르 광장이 있고 주변에 사원들과 구 왕궁 Old Palace이 있다. 가히 카트만두의 ‘중심 중 중심’이다. 광장 옆 3층 건물엔 ‘세계 유일의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 데비 Kumari Devi’가 살고 있다. 쿠마리 데비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석가모니의 ‘샤카’ 성을 가진 여성 중 4~12세 소녀들이 지원한다고 한다. 눈과 머리카락이 검고, 몸에 흉터도 없어야 하며, 이의 모양도 좋고 목소리가 깨끗해야 하는 등 32가지의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한다.





어두운 방에 가둬 놓고 공포 분위기를 연출했을 때 놀라지 않아야 하고, 이전의 쿠마리가 사용했던 옷이나 장신구 등을 가짜와 섞어 놓았을 때 진짜를 골라내야 한다. 일단 쿠마리로 뽑히게 되면, 이곳에서 살게 되는데 나갈 수도 없고, 다른 이들과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 이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여신 자리는 오래가지 않는다. 몸이 성숙해 초경이 시작되면 불결해진 걸로 여겨 집을 나가야 한다. 나머지 인생은 거의 불운하다고 한다. 결혼을 하면 남자도 불행해진다고 해서 평생 외롭게 혼자 사는 쿠마리가 대부분이다.


 



스와얌브나트는 네팔의 불교 사원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맨 처음 맞는 건은 걸인 가족들이다. 그 다음이 원숭이들이다. 원숭이들이 하도 많아 ‘원숭이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파탄은 카트만두에서 5km, 바크타푸르는 카트만두 동쪽 15km 지점에 있다. 모두 15~17세기 말라 왕조 당시의 왕국이다.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삼국지를 연상케 한다. 카트만두, 파탄, 바크타푸르 세 왕국은 1768년 샤 왕조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좁은 땅덩어리에서 각각 문화를 꽃피웠다. 네팔 스타일 힌두 건축물의 백미 白眉가 여기에 몰려 있다.


두르바르 Durbar라고 하는 광장을 지나니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 독특한 건축 양식의 궁들이 나타났다. 고색창연한 힌두식 건축물들이 석탑, 청동탑들과 어우러지며 장관을 연출했다. 건물 창이나 외부는 목조가 대부분이다. 압권은 목조 조각이다. 섬세하고 정밀하다. 이토록 뛰어난 작품은 유럽이나, 인도, 중국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시미가운 마을 고갯마루에서 바라본 가우리상카르 봉우리가 석양에 물들어있다.롤왕링히말의 으뜸산이며 힌두교 신자들은 시바 신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




새벽부터 시작한 산행은 몇 날 며칠이고 계속된다. 고단한 하루 하루가 지나면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르고 또 다른 목표를 향해 걷고 걷는다. 보통의 포터들은 하루 종일 일해 겨우 10달러 정도를 버는데, 그나마 처음 계약 때 장갑, 신발 구입명목으로 받는 돈도 그것들을 사지 않고 모아 둔다.





산중 마을에선 발효된 기장에 물을 부어 몇 시간씩 끓여 증류하는 술인 라크시를 손수 빚는다. 가공 방법에 따라 50도에서 70도 사이의 독주가 만들어진다.





석양이 롤왈링히말의 하얀 설산을 붉게 물들였다. 산촌 마을의 어둠은 일찍도 찾아온다.





네팔 히말라야에는 ‘설인 雪人 예티 Yeti’의 전설이 무성하다. 롤왈링히말에 특히 그런 이야기가 많다. ‘예티’는 ‘설산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간혹 산악인들 중에 ‘설인을 봤다’는 이들이 있다. 산중 곰파에는 설인의 머리나 손이라고 알려진 전시물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실제로는 산양 혹은 곰의 가죽이거나 티베트승 미라의 한 부위라고 한다.





죽음의 고개 테시라프차를 건너는 원정대와 셰르파들. 바위 아래는 낭떠러지다.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미끄러운 빙벽이라 위험한 구간이다. 사진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 Sebastiao Salgado의 ‘금 캐러 벽을 오르는 금광 노동자들 사진’이 떠올랐다. 절벽으로 가까이 가 보니 깎아지른 얼음 벽이다. 괜히 빙벽이 아니었다. 삐끗하면 그 자리에서 몇 백 미터 아래로 추락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려왔다. 아이젠을 했지만 정확하게 내딛지 않으면 이내 미끄러진다.





돌개바람이 몰아쳐 몸이 휘청거린다. 해는 중천에 떴는데도, 쌓인 눈이 미친 바람에 날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화이트 아웃 White out이다. 세차게 몰아치는 강풍 때문에 한 발 한 발 옮기는 것도 쉽지 않다. 이 고개를 넘는 동안 눈밭에 방치된 시신을 여러 구 목도했다.





강풍이 만년설을 휩쓸어 올려 눈산에 하얀 연기를 피우는 듯하다. 고산지대의 날씨는 돌변하기 일쑤다.




타메 Thame, 3820m는 셰르파 마을이다. 롤왈링히말 너머 쿰부히말의 들머리가 그곳이다. 마을 위쪽 커다란 곰파를 보니 안심이 된다. 달아 놓은 지 몇 년이 흘렀는지 색이 바래 꾀죄죄한 타르초와 룽다가 곳곳에서 펄럭인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쿰부히말의 중심부로 진입한다.





롤왕링히말에서 쿰부히말로 넘어가는 마을 타메에서 어린이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히말라야에서 만난사람들 네팔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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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히말라야에서 만난 사람들, 북인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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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저마다 인도의 인상을 이야기하지만, 모두가 제각각이다. 한두 번 다녀온 사람들은 자신만만하게 인도를 정의한다. 하지만 서너 번쯤 방문한 사람은 “글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수십 번 가본 사람은 아예 “잘 모르겠다.”고 한다.

이렇게 그 속을 알 수 없는 나라가 바로 인도다. 인도의 인적 저력은 무시할 수 없다. 많은 초등학생은 구구단을 19단까지 외운다고 한다.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강대국이다. 문화는 어떤가? 고대 인더스문명을 시작으로 시대마다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인도 히말라야는 인도 북부 카슈미르 Kashmir에서 동쪽 중국 네팔 접경까지 동서로 뻗어 있다. 이 긴 루트 중 핵심 지역을 꼽자면 잠무 카슈미르 Jammu-Kashmir와 히마찰프라데시 Himachal Pradesh 지역이다. 잠무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와 중국, 파키스탄의 경계에 있는 산악 지대로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할 때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남부 쪽이 인도에 귀속되면서 종교 분쟁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물의 도시 스리나가르 Srinagar! 행정구역상 잠무 카슈미르 주의 주도다. 히말라야 아래 해발 1700m에 위치한 스리나가르는 풍광 좋고 물자가 풍부한 매력적인 곳이다.

‘동양의 베네치아, Almost Heaven’이라 불리는 물의 도시 스리나가르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자신들의 수상 호텔 House Boat로 가자며 호객꾼들이 몰려든다. 달 호수 Dal Lake엔 1400여 개의 수상 호텔이 가장자리를 따라 빙 둘러 자리 잡고 있다. 호텔마다 내건 울긋불긋 꽃 등불이 자못 몽환적이다. 곤돌라 모양의 배 시카라 Shikara를 타고 하우스 보트로 이동해야 한다.






스리나가르에서 동쪽인 레로 갈수록 확연히 공기가 달라진다. 우선 사람들의 얼굴 생김새가 평소 우리가 접해 온 인도인들과 확연히 다르다. 티베트인들이다. 우리와 같은 몽골리안이다. 인도지만 인도가 아닌 듯하다.


레와 가까워질수록 티베트 불교 사원 곰파 Gompa가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옛 불교 왕국답다고나 할까. 깎아지른 바위산 위의 곰파들은 모두 유서 깊은 티베트 불교 사원이다.




파키스탄, 중국과의 접경지대에서는 민간 헬기 섭외가 다소 어려웠으나, 운 좋게 성공해 히말라야 설산을 하늘에서 볼 수 있었다. 국내 최초로 이 지역을 촬영하는 행운을 얻었다. 하늘에서 본 히말라야의 광활한 설산과 빙하, 아직 채 얼지 않은 옥빛 호수들, 수백 겹 첩첩이 이어지는 설산,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진풍경에 쏙 빠져들었다.




히말라야 설산이 호수의 파란물에 쏙 담겼다. 온 천지가 새하얀 산꼭대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니!







인도히말라야 아래 뉴테리 산골마을에서 만난 여인들이 땔감을 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여인들이 뭔가를 이고 지고 다니는 모습을 어디 가든 쉬이 볼 수 있다. 이 곳 여인들의 삶은 더더욱 고달프다. 냉장고며 가스레인지 등 문명의 이기는 상상할 수도 없다. 여인들은 산에서 땔감을 거두고, 무거운 짐을 메고 다닌다. 온갖 빨래와 음식 만들기, 농사일, 아기 양육 등이 모두 여인들의 몫이다.



산에서 만난 아낙들은 대부분이 변변한 신발도 없이 고무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그럼에도 그들은 거칠고 가파른 산길을 외지인보다 빨리 움직였다. 발가락을 꼭 오므려 땅에 굳게 지탱하는 힘이 강해 보인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 히말라야 어머니들의 능력이 놀랍고 안타깝다.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자락에 자리 잡은 명상과 요가의 힌두 성지 리쉬케시(Rishikesh). 인도인에게 강가는 삶과 죽음의 모든 의미를 담은 영혼의 강이다. 수백, 수천 킬로 떨어진 고향에서 갠지스강을 찾아온 순례자와 수행자들! 힌두인들은 이 성수(聖水)를 마시고, 목욕을 하며 영혼의 때를 씻어낸다. 죽어서 재가 되어 돌아가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들에게 삶의 시간은 그저 돌고 도는 윤회의 순간일 뿐! 팍팍하고 고단한 삶도 잠깐 왔다 가는 여행일 뿐인 것을…




진리 眞理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들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나 우리 곁, 우리 안에 있었다. 강가 가트의 벽에 적힌 문구가 짧지만 인상적이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서산으로 숨을 즈음, 갠지즈 강 가에는 장엄한 풍경이 펼쳐진다.




해 질 녘이면 갠지스 강은 순례객들의 염원을 담은 꽃 접시 위의 향불로 붉게 변한다. 강의 신(神)이 이들의 소원을 받아들이는 듯 물결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순간 이 강물 앞에 잠깐 선 속 좁은 여행자의 번뇌와 잡념도 사라진다.



뜨거운 인도의 태양은 소년의 겉옷뿐 아니라 마음까지 걷어냈다. 똑바로 보는 세상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아마도 소년의 눈에 비치는 힌두사원의 웅장함도, 강물에 몸 담그는 순례자 여인들의 진지함도, 고행길을 하염없이 걷는 사두의 고뇌도, 한 줄기 여름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는 이 소년만큼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시킴은 특별자치주다. 이 말은 인도 본 대륙에서 동북쪽으로 한참을 벗어난 낙후 지역이란 말과 같은 의미다. 그래서 인도에서도 특별하게 대우하는지 모르겠다. 주도는 강토크 Gangtok. 방문한 곰파에서 동자승들을 만났다. 시킴에서 1000km도 넘게 떨어진 히마찰프라데시 지역의 라다크에서 온 아이들이다. 히말라야 산간 지역은 9월 말이나 10월이면 눈이 쌓여 길이 끊기기 때문에 가족이 미리 데리고 가지 않으면 오도 가도 못 한다. 저마다 큰 소리로 불경 읽기에 몰두하던 어린 스님들은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가 이내 개구쟁이들로 변한다. 어딜 가든 아이는 아이다.





산에서 내려오다가 소녀들을 만났다. 망치로 큰 돌을 깨서 자잘한 자갈로 만들고 있었다. 익히 알려진 ‘돌 깨는 어린이들’이다. 이 소녀들이 하루 종일 깨면 90kg의 자갈이 나온다. 얼마 받느냐고 물으니 90루피를 받는다고 한다. 약 1.5달러다. 가슴이 꽉 메어 온다.



인도에는 신기한 직업이 많다. 빨래만 해주거나 도시락을 배달하는 직업도 있으며, 심지어 귀지만 파주는 사람도 있다. 거리의 이발사도 그 중 하나. 손님을 대하는 앳된 얼굴의 소년 이발사의 표정은 제법 진지하고 의젓하다. 아직 노동의 힘겨움을 알기에는 너무 어려 보이지만, 손놀림은 능숙했다.



인도의 직업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정해지는 카스트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제도는 외부인의 관점에서 보면 참 이해하기 힘든 관습이다. 헌법 15조엔 ‘국가는 국민에 대해 종교, 인종, 카스트, 성, 출신지, 기타 어떤 이유로도 차별하지 않는다’라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카스트제도는 시골로 갈수록 사람들의 생활 속에 뿌리 깊이 잠재돼 있다. 어느 직업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대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른바 세습 가업이다. 안타깝다. 같은 하늘 아래 사람들의 삶은 이처럼 천차만별이라니….



시킴 주 아래에 위치한 최대의 휴양 도시이자 세계 최대의 차 생산지 중 하나다. 제국주의 지배 시절 영국인들이 이 마을의 쾌적함과 풍요로움을 지나쳤을 리 없다. 1780년까지 시킴 왕국에 속해 있었으나, 1816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점령한 이후 지금의 인도에 편입됐다. 그래서일까. 시킴 주 경계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는 주변은 온통 차밭이다. 평지는 물론 산간 비탈 언덕도 온통 초록빛이다. 영국이 홍차 강국이 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식민시대의 유산 덕분이다.





이곳의 명물 중 하나로 꼬마 기차 Toy Train를 빼놓을 수 없다. 영국은 이곳에서 재배된 엄청난 양의 찻잎을 운반하기 위해 폭 61cm의 협궤철도를 만들었다. 정식 명칭은 다르질링 히말라야 철도 Darjeeling Himalayan Railway. 1881년에 운행을 시작해서 그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석탄 연료 증기기관차다.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많은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기차역은 동네 어린이들의 놀이터다.







동이 터 오는 다르질링의 새벽. 하늘 끝에 눈썹 같은 그믐달이 떠 있다. 어둠은 검푸른 빛으로 변해 이내 붉은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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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히말라야에서 만난 사람들, 파키스탄 편
이환 작가
#이환작가




낯선 땅에서 만나는 아이의 웃음, 그리고 각자의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여행의 의미는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히말라야 2,400km, 시간(時間)…. 그리고 기다림




2011년에서 2012년 초까지 파키스탄, 인도, 네팔에서 6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히말라야 산맥은 직선 거리로 무려 2,400㎞나 된다. 서쪽 끝 파키스탄 카라코람 히말라야에서 인도 히말라야와 네팔을 거쳐 칸첸중가가 있는 인도 시킴까지 카메라를 동무 삼아 발품을 팔았다.






지구에는 여러 형태의 삶이 존재한다. 다른 이의 삶을 경험하고 돌아보는 것은 여행의 매력이다. 이 척박한 땅의 풍경과 사람 속에서 내가 담고 싶은 것은 시간과 기다림이었다. 거대한 히말라야 자연(自然)은 그 자체가 ‘시간’이었고 ‘기다림’이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고통스럽기도 하다. 때로는 척박한 돌과 얼음길을 의연하게 한 발 한 발 헤쳐 나가야 한다.



순수의 땅에서 만난 사람들





북파키스탄 산간도시 치트랄 읍내에서 본 거리. 상점 앞에서 뭔가를 질문하는 노인과 그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길이 앙증맞다.

첫 번째 이야기는 파키스탄 히말라야다. ‘순수한 땅’을 의미하는 이곳은 몇몇 곳을 제외하면 알려진 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물론, 자연은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곳이다. 해발 8,000m 이상인 히말라야 14좌 중 5개(K2, 낭가 파르바트 Nanga Parbat, 로드 피크 Broad Peak, 가셔브룸 Gasherbrum Ⅰ, Ⅱ)가 이곳에 있다.


히말라야의 서쪽 끝 힌두쿠시 산맥을 가장 빠르게 찾아가는 방법은 항공편이다.





그녀의 이름은 샤닐라.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11살 원주민 소녀가 이제 원숙한 여인이 되었다. 당시 고산증이 찾아와 내려간 마을에서 처음 만난 원주민 아이가 바로 샤닐라이다.





고산증에 시달린 나를 맞아 준 북파키스탄 부니 마을. 처음 만난 외지인 주변을 맴돌던 소녀들의 이름은 메위시, 메라즈, 라일라, 알리샤, 샤닐라… 자세히 물으면 모두가 친척 관계로 얽혀있다. 실크로드 근처로 동서양의 교류가 많았던 이 지역 사람들의 외모에서도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치트랄에서 산길을 차로 두 시간 정도 달리면 아프카니스탄 접경에 ‘칼라시’라는 마을이 있다. 독특한 전통의상을 고집하고, 독자적인 언어와 종교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이 곳을 방문한다는 건 의미있어 보인다. 칼라시 계곡은 파키스탄 정부 관광 홍보 책자에 단골로 다뤄지는 지역이다. 전통 복장을 입은 칼라시 여인들의 모습은 홍보 사진의 메인으로 등장한다.









낭가파르바트 산에서 차로 한 시간 떨어진 라마호수에서 폴로경기가 열렸다.

폴로는 이 지역에서 매우 인기있는 스포츠다. 경기를 지켜보는 모습 만으로 이곳이 이슬람 땅임을 실감할 수 있다.





남성들이 운동장 주변에서 응원에 열을 올리는 것과 달리 여성들은 아이들과 함께 뒤편 산 위에 앉아 차분히 경기를 지켜본다.





전반전이 끝나자, 여성 정치인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언덕에 모여있는 여인들에게 다가갔다. 이 지역의 유력 여성 정치인 사디야 장관이다(사진 맨 아래). 조용히 경기를 관람하던 이슬람 여인들은 사디야 장관이 나타나자 환호성을 지르며, 흡사 소녀 팬들처럼 흥분했다.









치트랄에서 길기트 넘어가려면 해발 3,800m의 산두르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돌산이 병풍처럼 휘감은 이 인적 드문 산촌마을에서 한 소녀가족을 만났다. 아홉 살 소녀 샤나이 굴샨의 가족이다.





목동의 딸인 샤나이의 손과 발은 고산 추위에 온통 부르터 있다. 아이의 마음을 얻고 싶어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보여줬지만, 굴샨은 눈만 휘둥그래질 뿐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헤어지는 길 십여 미터를 가다 뒤돌아보니, 샤나이는 엄마에게 사진을 보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아이는 아이, 기분 좋은 헤어짐이다.





낭가파르밧 올라가는 중턱에서 만난 꼬마들. 부모가 들판에서 감자를 수확하는 동안 꼬마들은 바위 위에서 끼리끼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소년들은 얼마나 자랐을까?




파키스탄 남부

시골 마을로 가는 길




파키스탄 남부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소금광산 ‘큐라’가 있다. 수십만 년 전 바다가 치솟아 올라왔을 때 그 바닷물이 말라 소금광산으로 변한 것이다. 위 사진은 소금 조각으로 장식해 조명을 비춰 장식한 동굴을 저속셔터로 표현한 것이다.





파키스탄 시골길에서 만난 달구지와 화물트럭. 과거와 현대의 교통수단을 같은 시공간에서 보니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히말라야의 트럭은 국가를 불문하고 화려한데 그 중 으뜸은 파키스탄 트럭이다. 차 가격보다 장식 비용이 더 크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거의 모든 트럭 뒤엔 ‘Horn Please’, ‘Blow Horn’이라고 쓰여 있다. 이곳에서는 경적을 자주 울리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다.





길기트에서 북쪽 중국 방향으로 달리면 카라코람 하이웨이 (KKH)가 나온다.

이 길을 세 시간 달리다 큰길을 따라 빠지면 아담한 언덕 마을 훈자(지도 상의 명칭은 칼리마바드 Kalimabad)가 나타난다.

국내의 한 광고에도 등장한 장수 마을이다.





훈자 마을 뒤쪽으로는 형태가 멋지기로 유명한 레이디 핑거 Lady finger를 만날 수 있다(위 사진). 여인네의 뾰족한 손가락을 닮아서 지어진 이름이다. 레이디 핑거 뒤로는 울타르 피크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다.




예전방식을 이어 살아가는 훈자 마을 사람들




훈자마을의 랜드마크 발티트 성. 얼핏 보면 티베트 라사에 있는 포탈라 Potala 궁과 모양이 흡사한 이곳은 700여 년 전 국왕 아야쇼 2세가 발티스탄의 공주를 신부로 맞으면 지은 것이다. 티베트 건축 스타일로 만들어진 고즈넉한 성채로 훈자 마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훈자 호텔에 묵는 동안 동네에 성대한 전통결혼식이 있어 초대를 받았다. 이국 땅에서 보는 결혼식 구경은 언제나 즐겁다. 화려한 장식과 화장 속에서도 눈에 띄는 것이 팔의 문신이다. 인도의 헤나와 유사한 것으로 우르두어로 메흐디 Mehdi라고 한다.





마을골목 어귀에서 만난 훈자마을 소녀들.

부니마을처럼 북쪽에 위치한 훈자마을,

그래서 이곳 사람의 얼굴에도

동서양의 장점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훈자마을 뒷산 이글 네스트(Eagle Nest)에 동네 여인들이 소풍을 왔다. 언덕 위 바위마다 뚫려 있는 구멍이 독수리 둥지를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이곳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배경이 된 장소이기도 하다.





북파키스탄 힌두쿠시의 끝자락 부니산에서 한 주민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이곳 산촌마을 사람들은 거대한 자연의 위용 앞에 인간은 한낱 미미한 존재에 불과한 걸 잘 알고 있는 듯하다.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 북쪽 우리의 남산 같은 마르갈라 언덕에서 본 석양 풍경.





치트랄에서 길기트로 넘어가는 가장 큰 고개인 산두르패스 호수의 석양. 자연의 색깔은 세상에 존재하는 색의 수만큼 다양하다. 새로움을 찾는 여행은 이런 다른 색깔을 맛보고 즐기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