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갤러리 지상현 수석 큐레이터가 추천하는 ‘거장의 갤러리’
[SSG미술] 호안 미로(JOAN MIRO)편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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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 미로(JOAN MIRO), 예술의 기쁨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11세 소녀의 삶과 감정을 대상으로 한 정신분석학적 통찰력을 보여주는데요. 기쁨, 슬픔, 두려움, 분노, 혐오라는 다섯 가지 기본 감정 중 특히 기쁨과 슬픔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며 어느 하나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발하고도 새롭게 풀어냈습니다. 트리니티 가든에 서있는 호안 미로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조각을 바라보면서 이 영화의 메시지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인간의 무의식과 본질에 관심이 있던 미로는 밝은 색채와 단순한 상징으로 꿈과 환상의 예술을 창조한 작가입니다. 아이의 그림처럼 순수하고 자유로운 미로의 작품을 보면, 작가의 밝고 행복한 내면이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유쾌해 보이는 미로의 작품 속에는 우리가 상상한 것과는 다른 우울한 세계가 존재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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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된 현실에서 찾은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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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신세계백화점 본관 옥상에 위치한 트리니티 가든에 들어서면 동글동글한 모양 매끄러운 검은 피부 그리고 약 2m에 거대한 덩치의 조각과 마주하게 된다. 언뜻 만화 캐릭터나 동물을 연상시키는 이 귀여운 조각은 꿈과 환상의 예술가 호안 미로의 작품 ‘인물 Personnage’이다.
“출생 지역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표적 작가가 있다면 그것은 의심 없이 호안 미로입니다. 카탈루냐와 미로는 운명적이었고 이 양자 관계는 영속될 것이다”라는 존 페르초의 말처럼, 미로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1893년 스페인 카탈루냐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그는 보석상과 시계 제조업을 하는 아버지와 가구상을 하던 외조부로부터 뛰어난 손재주와 창의성을 물려받았는데요. 미로는 가족으로부터 상업에 종사하도록 강요받자 심한 좌절감에 빠졌고, 신경쇠약으로 병을 얻어 근교 농장으로 요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미로는 농장의 밝고 따스한 자연환경으로 점차 정신과 육체가 회복되면서 미술에 빠져들었고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동안 억눌렸던 재능과 예술적 감각을 방출하듯 미로는 카탈루냐의 따뜻한 기후가 만들어내는 풍경과 선명한 색채, 풍부한 감성으로 가득 찬 안정되고 사실적인 회화를 그렸습니다. 이곳의 사람들, 동물, 새, 곤충, 나무, 태양과 대지는 미로를 매료시켰으며, 미로의 평생에 걸쳐 예술적 상상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나는 비관주의자이다. 모든 상황을 나쁜 방향으로 생각한다. 만일 내 그림에서 무언가 유머러스한 점이 있다면, 이는 의식적으로 추구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유머는 내 기질의 비극적 측면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는 단지 자동적인 반작용이다.”
이런 미로의 말처럼 미로의 내면에는 밝은 부분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미로가 스페인과 파리를 오가며 예술적 성장을 이루고 있을 무렵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게 되는데요. 평화롭던 카탈루냐는 쿠데타로 집권한 프랑코 정권에 의해 전쟁과 정치적 탄압의 무대로 변하고 미로는 국외로 도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유럽 역시 양차대전의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전쟁 침략자들은 자유의 산물을 상징하는 예술 활동을 파괴했고, 미로는 전쟁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도는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추방당한 자의 상실감, 고향을 향한 그리움, 전쟁의 참상, 폭력으로 인한 절망과 상처, 오랜 타향살이와 이방인의 삶이 미로의 내면을 점령했습니다. 이 시기 미로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접하였고 특히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에 매료됩니다. 전쟁의 충격 속에서 태어난 초현실주의는 이성의 억압과 통제로부터 해방되어 무의식과 인간 본질의 자유를 추구했습니다.
성숙할수록 단순화되고, 본질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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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 미로, 인물 Personnage, 1974, 브론즈, 190×150x173cm
미로는 자신의 작업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엇을 그리기 위해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형태가 스스로 드러난다. 형태는 내 붓 아래에서 여자가 되기도 하고 새가 되기도 한다. 첫 단계는 자유롭고 무의식적이지만 두 번째 단계는 치밀하게 계산된다.”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미로의 작품들은 대상의 사실적인 재현에서 자유로워지고, 점차 대담하고 단순하고 추상적인 상징과 기호들로 변모합니다. 미로 고유의 스타일이라 일컫는 뚜렷한 색감, 무한한 공간감, 상징화된 계단, 별, 새, 여자 등은 바로 이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아이들의 그림이나 낙서의 자유로움을 찬미하듯, 미로의 꿈과 환상의 이미지에 빠지게 됩니다. 당시 그가 처해있던 고통의 상황과 피폐한 내면은 역설적이게도 초현실주의를 통해 아이 같은 순수성과 상상력이 넘치는 즐거운 예술을 낳습니다. 즉 미로의 꿈과 환상의 예술은 억압된 현실에서 자유를 꿈꾸는 열망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미로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 판화, 벽화 등 다양한 재료와 방식으로 예술적 재능을 실험했습니다. 특히 조각은 회화만큼이나 많은 작품 수를 남겼는데요. ‘인물 Personnage’는 미로의 노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초기의 왁자지껄했던 형태들은 단순화되어 대상의 본질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작품 속 형태에 대해 “내게 있어 형태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사람, 새 아니면 그 외의 것들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인물 Personnage’는 현실이 아닌 상상 속 인물입니다. 보는 각도나 사람에 따라 통통한 여인이기도 하고 귀여운 새이기도 하고 주전자이기도 하고 도라에몽(일본 만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미로는 상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작품 특성에 맞는 주조소를 선택했습니다. ‘인물 Personnage’은 파리에 위치한 쉬스 Susse 주조소에서 만들어 브론즈에 매끄러운 표면 처리를 해 한층 유연한 느낌을 줍니다. 이것은 시각적인 상상뿐 아니라 촉각적인 상상을 하도록 자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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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진의 거장 유섭 카쉬가 미로를 촬영할 당시 “호안 미로에게 작업복을 입히자 그의 아이 같은 재치와 유머러스함이 사진에 나타났다”고 회상했습니다. 미로가 스스로를 비관적인 사람이라고 했음에도 그의 표정과 작품은 비관적인 내면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천진난만하고 유쾌하고 행복합니다. 그는 꿈과 환상의 세계를 그리며 슬픔과 기쁨의 순간을 느끼며 살았을 것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전달되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동화처럼 1983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호안 미로는 그가 평생 그려온 별이 빛나는 하늘로 떠났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우울하게 느껴질때, 트리니티 가든의 ‘인물 Personnage’를 찾아가보는 건 어떨까요. <인사이드 아웃>처럼 ‘슬픔’의 감정을 가진 호안미로라는 위대한 예술가 친구가 ‘기쁨’을 가져다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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