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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다시 주목받는 신사임당, 오해와 진실
김 석
#김석기자




조선 성리학의 완성자로 불리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 조선시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뛰어난 그림들을 남긴 화가. 사임당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사임당의 그림을 모은 전시회가 열리고,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사임당에 관한 책 두 권이 잇따라 나왔습니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니면 드라마 방영에 맞춘 마케팅? 글쎄요.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해도 좀 느닷없기는 합니다. 더구나 드라마도 예상과 달리 큰 관심을 못 받았으니 말이에요.





사임당이 우리 안의 사임당, 우리 곁의 사임당이 된 건 바로 오만 원권 지폐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지요. 왜 사임당이지? 우리 역사를 빛낸 위인들은 많은데 어째서 사임당일까? 당시 언론 보도를 찾아보니 한국은행의 선정 이유는 “여성·문화 예술인으로서 대표적 상징성이 있다” 였습니다. 이 결정으로 사임당은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여성으로 ‘공인’을 받게 됩니다. 오천 원권 지폐에 새겨진 아들 율곡 이이와 함께 모자가 동시에 지폐에 등장하는 전무후무한 기록까지 남기면서요.



<수묵포도>,  비단에 수묵,  31.5×21.7cm(그림 크기),  간송미술관 소장



지폐 얘기가 나왔으니 사임당의 그림부터 살펴볼까요. 오만 원권 지폐의 앞면을 수놓은 포도 그림이 보이시지요? 사임당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작품입니다. 포도 알이 익은 정도에 따라 먹의 묽기를 달리해서 생동감을 기가 막히게 살렸지요. 그런데 이 그림에는 옛 그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화가의 낙관이 없습니다. 글씨도 없고요.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 사임당의 그림인지 아닌지 판별하기가 훨씬 쉬웠을 거예요.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에 여성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못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림이나 글씨에 자기 도장을 찍는다는 건 더더군다나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거고요.


오늘날 사임당이 그렸다는 그 많은 그림은 ‘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이른바 *전칭(傳稱) 작입니다. 그래서 사임당이란 화가 이름 앞에 전(傳)이란 말을 붙여 흔히 ‘전(傳) 신사임당’이라고 표기를 하는 거지요. 다만 사임당의 작품이라고 볼 근거가 남아 있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위의 포도 그림은 조선 후기 최고의 그림 수집가였던 석농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이란 분이 펴낸 전설적인 그림 모음집 <석농화원(石農畵苑)>에 ‘수묵포도(水墨葡萄)’란 제목으로 수록돼 있을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문장가 동계 조귀명(趙龜命, 1693~1737)이 쓴 다음과 같은 글까지 붙어 있습니다.


*전칭(傳稱) : 전하여 일컬음





이 정도로 단단히 못을 박은 걸 보면 그림이 진품이라는 걸 힘주어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임당의 작품이냐 아니냐 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만약 신사임당의 작품이 아니라는 데 무게중심을 두면 우리 회화사의 커다란 알맹이가 한꺼번에 사라지고 말지요. 오죽했으면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인 백인산 선생조차 자신의 책 <간송미술 36: 회화>의 첫머리에 사임당의 포도 그림을 소개하면서 글의 대부분을 이런 곤란한 상황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을까요.




그녀의 작품이 들어가야 했다면, 이 <포도> 외에 마땅한 대안은 없었을 것이다. 학술적인 안목으로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지만, 이 대목에서는 조금 너그러워지고 싶다. 이 그림마저 아니면 신사임당의 그림은 더욱 자취를 찾기 어려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써는 3백 년 전문인들의 말에 기대어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자수 초충도 병풍>,  1540년경,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



포도 그림 뒤로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낸 그림이 한 점 더 있습니다. 잘 익은 가지 세 개가 탐스럽게 달려 있는 이 작품은 먹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실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완성한 자수(刺繡)인데요. 줄기며 잎이며 꽃이며 벌이며 그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생동감 있는 묘사가 일품이지요. 게다가 색채의 사용을 보면 수백 년 전 작품이 맞나 싶게 현대적인 감각까지 엿보입니다. 그래서 이 가지가 포함된 여덟 폭짜리 <자수 초충도 병풍>은 보물 제595호로 지정돼 귀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사임당의 그림들이 실은 바로 이 자수를 위한 밑그림이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풀과 벌레가 어우러진 사임당의 그림들은 소재도 그렇고 표현법도 그렇고 자수와 겹쳐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임당은 생전에 풀과 벌레를 즐겨 그렸습니다. 이런 그림들을 초충도(草蟲圖)라고 하는데요. 사임당이 우리 회화사에서 초충도의 선구자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사임당에게서 영향을 받은 걸로 알려진 겸재 정선의 그림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도드라집니다.



(좌) 초충도 8폭 병풍 중 제6폭 ‘양귀비와 풀거미’,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우) 겸재 정선,  <홍료추선(붉은 여뀌와 가을매미)>,  20.8×30.5cm, 1742년,  간송미술관 소장



사임당 그림에서 양귀비 풀은 화면 한가운데 서 있지요. 하지만 겸재의 그림을 보면 화면 한쪽에서 풀이 돋아 나오고 있고요. 다시 말해 사임당의 그림에선 주인공인 식물이, 그것도 한 포기만 커다랗게 화면 가운데에 배치되는 중앙 집중식 구도로 되어 있습니다. 겸재의 그림에서 보듯이 당시 화가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거든요. 게다가 사임당의 작품은 입체적이기보다는 평면적이고 자연스럽기보다는 장식적인 면이 더 두드러집니다. 그래서 사임당의 초충도는 그림 자체를 위한 거라기보다는 자수를 위한 밑그림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거지요. 그래서 오히려 사임당의 초충도는 전에 없던 독창성을 띠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임당은 정말 복이 많은(?) 화가입니다. 본인의 얼굴이 들어간 최고액권 지폐의 주인공일 뿐 아니라, 아들 율곡 이이가 등장하는 오천 원권 지폐에도 두 점씩이나 작품이 실렸으니 말이에요. 오천 원 지폐 뒷면을 보면 좌우로 그림 두 점이 나란히 붙어 있는데요. 위에 소개해 드린 ‘양귀비와 풀거미’와 함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돼 오죽헌·시립박물관에 소장된 초충도 8폭 병풍 가운데 셋째와 다섯째 그림입니다.



<초충도 병풍>,  48.6×35.9cm,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1호,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왼쪽에 짙은 색으로 인쇄된 그림은 수박을, 오른쪽에서 희미하게 뒤를 받치는 그림은 맨드라미를 묘사했습니다. 특유의 온화하고 섬세한 묘사가 고운 색채와 어우러져 역시 사임당이야 하는 감탄을 자아내지요.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정호(鄭澔, 1648~1736)도 병풍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임당의 작품에 대해선 후대에 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송상기(宋相琦, 1657∼1723)는 지금은 어디에 소장됐는지 확인되지 않는 사임당의 7폭 병풍에 ‘사임당의 풀벌레 그림을 한여름에 볕을 쬐어주려고 마당 가운데 내다 놓았더니 닭이 쪼아 종이가 뚫렸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비슷한 신화 같은 이야기가 후대에도 심심찮게 구전된 건 바로 이 글귀 때문이지요.


다시 진짜, 가짜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사임당의 작품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란은 당연히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얘기입니다. 최근 <신사임당>이란 책을 낸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친절하게 정리한 내용을 보면, 진짜라고 볼만한 요건은 크게 네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 사임당이 살았던 강릉에 있었거나 둘째, 사임당 후손의 집에서 나왔거나 셋째, 당대의 유명 인사가 소장했거나 넷째, 작품의 유통 경로가 자세하게 밝혀졌다면 진품일 가능성이 큰 걸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역시 판단은 쉽지 않습니다. 당대의 유명 학자나 문인이 쓴 품평이 붙어 있다고 해서 사임당의 진품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서울 부암동에 있는 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시 <사임당, 그녀의 화원>를 통해 최근 새롭게 공개된 ‘묵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아래 그림입니다.



<묵란도>,  연도 미상, 비단에 수묵, 92.5×45cm,  서울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2005년에 KBS의 에 처음 공개된 이후에 서울미술관의 설립자 안병광 회장이 구매하기 위해 소장자를 1년 반 동안 설득해서 <진품명품> 감정가의 배 이상을 주고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지요. 먹으로만 그렸다는 사실만 다를 뿐 앞서 보신 것처럼 식물 한 포기를 화면 가운데 배치한 사임당 초충도의 전형적인 중앙 집중식 구도를 보여줍니다. 그림 위에 붙은 글은 어떤 내용일까요. 글쓴이는 바로 율곡 이이의 제자인 당대 최고의 대학자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입니다. 첫 머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고 중찬성 이 공(이원수)부인 신(申) 씨의 작품이다.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오히려
능히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어서 된 것은 아닌 것 같이 이렇거늘 하물며 오행(五行)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근본 되는 기운의 융화를 모아 참 조화를 이룸 이겠느냐.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사임당의 뛰어난 재주를 높이 평가한 대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송시열은 그 뒤에다가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라는 평을 붙입니다. 순수한 작품 평가를 넘어서는 내용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이 글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됩니다.



만일 이 그림이 다행히 보존되어 없어지지 않았다면 지금 이 그림첩 아래 붙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부인의 어머니 된 것과 선생(율곡)의 아들 된 것이 진실로 근본과 가지가 서로 전승함임을 알게 하여 저
상곡군(上谷君, 정자(程子)의 어머니 후부인) 집안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이야기를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함이 옳을 것이다. 백종은 그 소홀히 하지 말진저!



강릉 오죽헌과 신사임당 동상



16세기까지만 해도 어엿한 화가 대접을 받았던 사임당은 17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율곡의 어머니’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화가로서의 사임당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율곡을 낳은 위대한 어머니의 이미지가 더 크게 부각된 겁니다. 정치적 목적에 따른 사임당 신화 만들기 프로젝트였다고 할까요. 그 뒤로 일제강점기에도 사임당을 추켜세우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당시 사임당은 일본에서 수입된 현모양처(賢母良妻)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로 조선인 징병을 독려하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 활용됐지요.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국가 영웅을 추켜세우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는데요. 그때도 사임당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합니다. 당시 영부인 육영수 역사를 근대의 현모양처 신사임당의 현신으로 비유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니 사임당에게 덧씌워진 자애로운 모성의 이미지가 지금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가 않은 겁니다. 오만 원권 지폐의 인물로 사임당을 선정했을 때 여성계가 강하게 반발한 것도 사임당이 수백 년 세월 동안 이런 왜곡된 이미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최근 석 달 간격을 두고 <사임당전>과 <신사임당> 두 책이 잇따라 출간된 것도 흥미롭지만, 저자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관점의 차이가 확연한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사임당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 다른 책들을 펼쳐보아도 그런 관점의 차이가 드러나거든요.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요. 사임당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작품’에 집중할 일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사임당의 것으로 전하는 작품이 여러 점 소장돼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사임당 초충도의 백미라 할 초충도 8폭 병풍은 한마디로 기가 막힌 명품입니다.



<초충도 8폭 병풍>,  16세기 초, 종이에 채색,  각 폭 34.0×28.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덟 폭짜리 병풍의 셋째인 ‘수박과 여치’, 넷째 그림인 ‘가지와 범의 땅개’입니다. 조선 중기의 그림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고 격조 높은 색의 구사가 일품이지요. 풀과 벌레의 섬세한 묘사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당대에 견줄 이가 없을 정도로 묘사력 하나만큼은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던 사임당의 기량이 마음껏 펼쳐진 걸작입니다. 그래서 후대의 연구자들이 사임당의 대표작으로 가장 많이 꼽는 것이 바로 이 병풍 그림입니다. 더구나 이 병풍은 1978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증한 작품이기도 해서 더 흥미를 자아내지요.


흔히 사임당 하면 포도 그림이나 초충도를 떠올리는데요. 그런데 사임당은 생전에 이미 산수화가로 꽤 이름을 날린 화가였습니다. <패관잡기>라는 책을 쓴 16세기 문인 어숙권(魚叔權)은 “근래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매우 많지만, 산수화에는 김장(金璋)과 이원수의 아내 신 씨와 학생 안찬(安瓚)이 있다.”라며 이름을 구체적으로 들었고요.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묵재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란 분은 “저녁에 목사 노인보, 판관 김난종이 함께 보러 와 죽청에서 대화를 나눴다. 이원수도 왔는데, 이전의 이름은 난수(蘭秀)로 산수화를 잘 그린 신 씨의 남편이다.”라고 했습니다.



(좌) 맹호연 시 산수도,  전 신사임당,  종이에 담채,  34.2×62.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이백 시 산수도,  전 신사임당,  종이에 담채,  34.8×63.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사임당의 것으로 전하는 산수화입니다. 두 작품 모두 물가 풍경을 그렸는데요. 왼쪽 그림에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시가, 오른쪽 그림에는 역시 당나라 시인이었던 이백(李白)의 시가 적혀 있습니다. 사실 이 그림 역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임당의 것이라는 명확한 물증은 없습니다. 사임당의 그림을 논할 때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한계는 이 그림도 비껴갈 수 없는 겁니다. 때문에 사임당의 작품이 과연 몇 점이냐 하는 것도 매번 혼란을 부릅니다. 10여 점 남짓이라는 극히 보수적인 주장부터 자그마치 80여 점에 이른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4남 3녀를 낳고 48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 짧은 삶의 시간 동안 온갖 다사다난함 속에서 그토록 눈부신 예술을 꽃피웠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임당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위와 옥석이 가려져야 한다는 점을 숙명처럼 떠안고 있지요. 아들 율곡이 16세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쓴 ‘선비행장(先妣行狀)’의 마지막 대목을 다시 찬찬히 읽어봅니다. 아들의 뜨거운 문장 속에서 사임당은 어머니이기 이전에 누구보다 뛰어난 화가였으니까요.



자당은 평소에 묵적(墨跡)이 뛰어났는데 7세 때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하다. 또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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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에게해의 보석, 그리스 산토리니(Santorini)
이 환
#이환작가



에게 해의 보석 같은, 동화 같은 하얀 섬

산토리니
Santorini

우리네 대부분은 답답한 현실 안에 갇혀 살고 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에 널려진 수많은 여행 블로그, 주말판 신문의 한편이나 여행사의 안내 책자에는 아름다운 여행지의 사진들이 장식된다. 하지만 내 평생 언제 한 번 갈 수 있을까 한숨 한 번 크게 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낙심과 기대가 섞인 채로… 필자도 녹록지 않은 직장생활 만 20년이 지난 뒤 보름이라는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어디를 갈까? 주저하지 않고, 마음속의 그림 같은 곳을 택하기로 했다. 바로 산토리니 섬.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산토리니(Santorini)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회자되고, 세계에서 한 해 수십만 명이 몰려드는 섬! 그리스식 이름은 티라(Thira)다. 13세기 베네치아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성(聖) 이레나(Saint Irene)를 기리는 예배당을 지었는데, 그 성인 이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섬의 사람들 모두 모아도 13,000명의 작은 섬.

“죽기 전에 에게 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에게 해만큼 쉽게 사람의 마음을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옮겨가게 하는 것은 없으리라.”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사실 이곳까지 오게 한 책이다. 작가의 고향이자 주된 배경인 크레타 섬은 바로 산토리니와 가까이 붙어있다. 복잡한 머릿속과 여기저기 구겨진 마음이 이곳에 가면 ‘조르바’의 자유로운 영혼을 닮아갈 것 같은 꿈을 가지고…

산토리니, 용암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하얀 집들, 파란색 교회당 위 지붕이 동화 속 같은 섬.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로 꼽힐 만한 매력이 분명 이곳에 있다.

아테네와 다른 고대도시들이 철학과 신화, 과거의 도시라면 이 섬은 동화 같은 낭만과 환상이 가득한 섬이다. 크레타와 산토리니 등 에게 해 섬사람들은 오랜 기간 강대국의 침략과 자연재해 속에서도 독특한 문화를 지켜왔다.

아테네(Athens)에서
산토리니(Santorini)로

아테네에서 산토리니로 가는 길은 비행기와 배편 두 가지! 여유가 있다면, 배를 타고 이 섬 저 섬 둘러보며 바닷길을 떠다니는 묘미도 있다. 자유인 조르바처럼! 이토록 아름다운 산토리니가 기원전 1,500년경 화산 폭발이라는 대재앙의 결과로 만들어진 섬이라는 건 아이러니다.

신항구에서 버스로 20분 가량 가면 피라(Fira) 마을을 만난다. 버스에서 내리니 가파른 절벽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에서 마을의 번화가로 가기 위해서는 588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편하게 오를 수 있도록 나귀와 케이블카가 있지만, 그만큼 비용을 치러야 한다.

이렇게 절벽에 집을 지은 이유는 중세시대 에게 해 일대의 해적들이 섬사람을 잡아가고 곡물을 빼앗아갔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바다가 보이면서 침입하기 어려운 이곳을 피난처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땅속으로 들어간 곳에 참호처럼 집을 지어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이 되었다. 재료는 화산 폭발에서 나온 붉은 돌과 화산회 등을 이용했다.
섬은 초승달 모양이다. 섬 중심 마을인 피라(Fira)와 그 위 세계 최고의 저녁노을 뷰포인트가 있는 이아(Oia) 마을이 있다. 항구가 있는 올드 포트에서 피라까지 가는 방법은 세 가지. 걷는 것, 나귀 타는 것, 그리고 케이블카.

산토리니(Santorini)
중심 마을, 피라(Fira)

걸어서 가려면 580여 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걷는 쪽을 택했다. 따가운 햇살에 비지땀이 흘러도, 지그재그 수백 계단에 다리 근육이 조여 들어와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좁은 계단길 중간중간 나귀를 만날 때마다 기쁘게 길을 피해준다. 여기선 동물이 우선이다. 나귀에게 길을 양보할 때는 반드시 낭떠러지 쪽이 아니고, 건물 쪽으로 피해야 안전하다. 그때마다 관광객들은 나귀를 보며 신기한 미소를 던지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돌계단을 오르는 나귀의 모습은 제법 힘들어 보인다.

동화 속 같은 풍경이다. 하양과 파랑의 강렬한 색대비는 누구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훌륭한 관광엽서 사진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이곳에선 누구나 사진작가가 된다.

아기자기한 상점들 하나하나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피라(Fira)를 지나
이아(Oia)로

피라 마을에서 20여 분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다시 가파른 용암 절벽에 수백 채의 파란 지붕의 하얀 집들이 옹기종기 매달린 것 같은 이아(Oia)가 나타난다. 피라가 북적북적하다면 이곳은 아담하고 조용하다. 디자인이 뛰어난 수공예품 가게, 성물 가게, 명품숍들이 여기저기 어우러져 있다.

산토리니 섬을 유명하게 만든 아틀란티스 서점. 이곳엔 <어린 왕자>, <그리스인 조르바>, <호밀밭의 파수꾼들> 등 알려진 책들의 초판본이 많다는 것. 물론 가격도 수백만 원 내외로 비싸다.

이 섬을 찾은 영국인 부부가 풍광에 매료돼 친구들과 만든 서점. 이아 마을에서 꼭 들러야 할 관광코스다.

섬 전체가 예술품과 디자인 그 자체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붉은빛 절벽 아래엔 요트와 모터보트들이 즐비하다. 마을 광장에서 공연하는 무명가수. 이런 마을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평생 부르며 사는 그녀는 행복하다.

화산토가 천지인 이곳에도 포도밭이 있다. 진흙이 없어서 포도나무에 병충해가 드물어 없어 예로부터 품질 좋기로 이름난 와이너리가 많다.

동네 어귀의 공동묘지. 아름다운 이 마을을 가꾸고 일군 주인공들의 안식처.

“사람은 나이가 든다 해서 반드시 더 나아지지만은 않는다. 매사에 동요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조언을 건넬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지혜로워진다고도 똑똑해진다고도 할 수 없다. 너그러워 보일 때도 있지만, 그건 어떤 사실을 인정해서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즉 무관심해서다”
-가쿠다 미쓰요, <무심하게 산다>중에서-

산토리니(Santorini) 최고의 뷰포인트,
굴라스 성채(Goulas Castle)

이아 마을을 돌다 보니, 사람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몰려간다. 굴라스 성채. 에게 해 최고의 노을을 볼 수 있는 최고의 뷰포인트다. 일찍부터 자리 잡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다. 카페와 리조트에 숨어있던 손님들이 삼삼오오 나오더니 난간과 테라스를 가득 메운다. 옛 로마의 전망대였던 성채(사실 다른 진짜 이름이 있다)가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는 곳으로 변했다. 한낮 바다를 뜨겁게 달군 태양은 서쪽 수평선 너머로 숨어들 기세다.

많은 사람이 묻는다. 만약에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어디냐고! 많은 이들은 단연 이곳 ‘산토리니 섬’을 꼽는다. 이곳에서는 세상 고민, 시름도 꿈도 기쁨도 마비된다. 세상 사람들이 정해놓은 시간을 정지시키는 ‘마력’이 있다.

북쪽 절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흰 집과 리조트들은 태양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분홍에서 붉음으로, 다시 검붉음으로 변한다. 어둠이 짙어갈수록 집들 사이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또 다른 밤 풍경을 선물 받는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형언키 어려운 뿌듯함과 우울함이 뒤섞여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굿나잇! 산토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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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6월 Publisher’s letter
행복한 꿈
SSG블로그



"꿈이 뭐예요?


꼭 장래희망 같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여러분을 미소짓게 하는 '행복한 꿈'에 대해서 묻는거니깐요.


혹시.. 어린시절과는 다르게 머뭇거리지는 않으셨나요?


우리가 어릴 적 꿈꾸었던 것들이 

여전히 한결 같든, 이미 실현되어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든,

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꿈으로 대체되었든,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 한 켠에 꿈을 간직하고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적어도 꿈을 꾸는 사람만이 이미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첫 발을 내 딛은 사람이니깐요!


S
SG블로그도 여러분의 꿈, 신세계그룹의 꿈을 향해 달려가겠습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제 2회 글짓기 대회를 통해 

밝고 건강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의 꿈의 이야기와 함께할 예정인데요.


여러분이 꿈꾸는 모든 것들이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행복한 하루 하루가 이어지길 바라며


행복한 꿈이 가득한 SSG블로그의 5,6월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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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사진이야? 그림이야?
김 석
#김석기자



뭔가 말을 꺼내려는 걸까요?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당장이라도 무슨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만 같습니다. 조금은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앳된 모습의 여인은 지금, 바로 당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일단 마주치면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강렬함이 한 줄기 빛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파고들지요. 도대체 저 여인에게는 어떤 내밀한 사연이 감춰져 있는 걸까요.



섬광처럼 다가온 이 여인의 얼굴을 처음 대면했을 때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그림입니다. 사진이 아니었어요. 직접 보여드리지 못하는 게 몹시도 안타까울 만큼 그 생생한 사실감이 화폭 전체를 휘감아 돌지요. 화가의 작업실 한쪽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그 얼굴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더 놀라운 모습으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진 같은 그림을 사진으로 보여드려야 한다는 것도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에요.




여인의 상반신을 그린 작품의 옷 주름과 머리 부분을 따로 확대해 보면 한 마디로 입이 딱 벌어지고 맙니다. 세상에나, 도대체 이걸 어떻게 그렸을까요. 더 놀라운 건 이 그림이 수채화라는 사실입니다.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안 갈만큼 극도의 사실감을 살린 이런 유형의 그림들을 흔히 극사실주의 회화라고 부르는데요. 이 부류의 그림을 그동안 꽤 많이 보았어도 수채 물감으로 저토록 정밀한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는 데는 그만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림을 그린 이는 윤위동. 30대의 젊은 서양화가입니다. 이미 20대 시절부터 극사실주의 기법의 인물화에서 출중한 재능을 선보여온 터라 윤위동의 작품 세계는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제법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수채 물감으로 소묘를 해서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한 게 계기가 돼서 지금까지 줄곧 수채화 작업을 해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토록 생생한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붓질이 필요했을까요.




화가의 역량을 평가하는 좋은 척도의 하나는 사람의 손발을 얼마나 잘 그리느냐 하는 겁니다. 보통 사람을 그릴 때는 얼굴 묘사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게 손과 발이라고 해요. 정확한 비례와 균형, 위치와 자세는 물론 동작까지도 조금만 계산이 어긋나면 굉장히 어색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윤위동 작가의 초창기 작품들 중에는 유독 손과 발을 정밀하게 묘사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 도저한 사실감에선 섬뜩함마저 느껴지지요.


모든 예술가가 대체로 마찬가지겠지만 화가들도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섭니다. 계속 똑같은 그림만 그릴 순 없으니까요. 남의 입맛에 맞는 그림만 계속 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서 화가로서,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진정한 나의 세계를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모험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윤위동 작가가 3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작품들을 선보였지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바로 ‘모래’입니다.



(좌) 윤위동, <Glory1>, 모래 위에 아크릴 채색, 130×160cm, 2016

(우) 윤위동, <Glory2>, 모래 위에 아크릴 채색, 80×240cm, 2017


왼쪽 그림을 자세히 볼까요. 캔버스에 진짜 모래를 발라 붙인 뒤에 화면 가운데 아래부터 돌들이 점점 커지다가 다이아몬드 결정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각각의 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이아몬드의 휘황한 광채와 그림자까지 정교한 솜씨는 여전하지요. 다만, 모래라는 재료의 특성 때문에 수채 물감 대신 채색이 쉽고 잘 마르는 아크릴 물감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작은 모래 알갱이가 커지고 커져서 끝내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완성되어가는 그 자취에다가 작가는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예술 세계 또한 그렇게 한껏 무르익어 찬란하게 꽃피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겨 있겠지요. 낱낱의 존재들은 모두 흔적을 남기게 마련. 그래서 오른쪽 그림은 모래라는 세상 위에 돌들이 지나간 자취가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좌) 윤위동, <자취 3>, 장지 위에 수채, 116×64cm, 2016

(우) 윤위동, <추종1>, 장지 위에 수채, 색연필, 2016


윤위동 작가의 또 다른 변화를 보여주는 곤충 그림들입니다. 이번에 새로 발표한 신작들인데요.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생생하지요. 화가의 뛰어난 관찰력과 표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들입니다. 장지에 수채화로 그리는 특유의 기법은 여전하지만, 주로 인물 묘사에 집중했던 것과는 사뭇 달라졌지요. 화가는 이 유형의 그림에 하나같이 ‘자취’나 ‘추종’이란 제목을 붙여 놓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왼쪽 그림이 화면 오른쪽의 희미한 존재가 차츰 또렷해지면서 개미라는 한 개체로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오른쪽 작품은 대장격인 개미 뒤로 수많은 작은 개미가 따르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두 개미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작은 물방울들이 알알이 맺혀 있는 걸 볼 수 있거든요. 화가는 결국 이런 과정들, 흔적들을 통해서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와 섭리, 더 나아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끈끈하게 이어지는 윤회의 철학을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화가의 이런 깊은 뜻을 알고 나면 작품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질 수밖에요. 극사실주의 그림들은 일단 그 외형의 화려함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지요. 하지만 사람도 겉모습만 잘생기고 예쁘다 해서 다가 아니듯, 화가들이 별 의미도 없이 자기 그림 솜씨 뽐내보려고 극사실주의 그림에 몰두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가로서 삶의 진실에 한 발이라도 더 다가가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팔이 빠지도록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이고요.



디에고 코이 <반사>, 종이에 연필


사전을 찾아보면 극사실주의(hyperrealism)를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사진처럼 극명한 사실주의적 화면 구성을 추구하는 예술양식”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팝 아트(Pop Art)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지극히 미국적인 리얼리즘의 한 흐름으로 여겨지지요. 슈퍼리얼리즘(superrealism),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 래디컬리얼리즘(radicalrealism) 등등 부르는 용어도 꽤 다양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유행이 생겨난 걸까요? 당시 미국 미술의 주류는 추상미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무리 추상미술이 대단하다 해도 대중에겐 사실 잘 와 닿지 않았지요. 도대체 뭘 그린 건지 도통 모르겠으니 말이에요. 그런 추상미술이 미술 권력의 정점에서 장기 집권 체제를 이어가자 반기를 든 화가들이 등장합니다. 화가들이여! 다시 붓을 들라! 거칠게 말씀드리면 극사실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겁니다.



페드로 캄포스, <Hot Day III>, 캔버스에 유채, 120×170cm


사진 같다! 사진보다 더 실감 난다! 똑같다! 극사실주의 그림을 본 사람들이 보이는 흔한 반응입니다. 한 마디로 잘 그렸다는 거지요. 똑같이 그릴 수 있는 화가의 수고와 능력에 감탄하는 겁니다. 자타공인 누구나 잘 그렸다고 고개를 끄덕인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극사실주의 그림은 사진과 곧잘 비교됩니다. 사진이야 카메라 셔터만 눌러도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그걸 그림으로 그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극사실주의가 등장한 과정도 비슷합니다. 1970년대 우리 미술계를 주름 잡은 건 최근 한껏 몸값이 뛰고 있는 ‘단색화’로 대변되는 추상미술이었지요. 여기에 대한 반성으로 1980년대에 싹을 틔운 사실주의 미술의 흐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극사실주의였던 겁니다. 그 뒤로 별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2000년대 중반 미술시장의 본격적인 성장과 함께 다시 무대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김창영 <Sand Play>


모래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영 화백의 작품입니다. 캔버스에 모래를 얇게 바른 뒤에 붓으로 세밀하게 다시 그려서 완성한 건데요.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 화백은 이른바 ‘모래 회화’라는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며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았지요. 부산에서 살았던 1970년대 후반에 바닷가 모래밭에서 영감을 얻어 그리기 시작했다고 하니 모래만 그린 세월이 어느덧 40년을 헤아립니다.


화가는 모래 위의 흔적들이 쉴 새 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습에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보았다고 해요. 그저 모래밭을 실감나게 그렸구나,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진짜 모래를 캔버스에 얹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발라 진짜와 가짜, 현실과 가상의 차이가 뭔지를 생각하게 만들지요. 그저 똑같이만 그린 건 아니란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 극사실주의 회화의 존재 이유가 있는 거고요.



이목을, <空1017>, 판넬에 유채, 2010년경 (이미지 출처: 아트뮤제)


극사실주의가 대중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화가의 노고입니다. 지독할 정도의 끈기와 집착, 정성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지요. 완벽에 가까운 화가의 손재주에 감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물론 초창기에는 영혼은 없이 기교만 앞세운 그림이란 비난도 적지 않았다고 해요. 하지만 손으로 그린다는 그 행위 때문에 도리어 극사실주의 회화가 보여주는 아날로그적 가치는 더 돋보입니다.


반면 그걸 그려내는 화가에겐 고통입니다. 위에 소개하는 그림은 ‘대추 화가’로 유명한 이목을 화백의 작품이에요. 마치 화면에서 대추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생생한 사실감 덕분에 이목을 화백의 작품들은 한동안 굉장히 귀하신 몸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화가에겐 그게 그만 독이 되고 말았지요. 갈수록 나빠지는 시력을 되찾을 길이 없었으니까요. 터럭 한 올까지 현미경 보듯 정교하게 그려야 했으니 직업병에 시달렸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왼쪽부터) 김대연 , 정창기 , 이창효 , 윤병락 


실제처럼 생생한 그림 앞에 서면 누구나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촉각을 자극한다는 바로 그 점이야말로 극사실주의 회화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이목을 화백의 대추 그림도 그렇지만 극사실주의 화가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주특기가 있습니다. 남들은 그리지 않는 걸 찾아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거지요. 우리나라에도 독보적인 개성을 지닌 극사실주의 화가들이 꽤 많습니다. 


위에서 맨 왼쪽은 김대연 화백의 포도 그림입니다. 포도를 얼마나 많이 그렸으면 ‘포도 그림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에요. 저걸 그렸어 하는 반응이 절로 나오지요. 극사실주의 화가들 중에는 이렇게 정물, 특히 과일을 주로 그리는 화가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딸기와 자두 그림으로 유명세를 얻은 정창기, 역시 자두를 많이 그린 이창효, 사과 그림의 윤병락 등은 지속적으로 과일을 소재로 한 정물화를 그려온 화가들입니다.



(왼쪽부터) 박종경 , 김영성 , 남학호 , 류재현 


동식물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들은 꽤 많습니다. 이광호는 선인장 종류의 식물을, 박종경은 콩을 화폭에 가득 채워 넣습니다. 김영성은 어항 속 금붕어나 달팽이, 개구리, 곤충 따위를, 박정빈은 잉어를 즐겨 그리지요. 그런가 하면 자연 자체로 시선을 돌려 자갈밭 풍경에 초점을 맞춘 남학호나 숲 자체를 묘사의 대상으로 삼은 류재현의 그림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극사실주의의 정체성과 딱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지요.



(왼쪽부터) 안성하 , 고영훈 , 설경철 作, 이석주 , 배주 


그런가 하면 움직이지 않는 사물들을 작품의 소재로 끌어들이기도 하는데요. 유용상과 안성하는 유리잔에 무언가를 담은 형상을 주로 선보이고 있지요. 책 그림 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고영훈, 설경철의 그림도 책 좋아하는 분들의 취향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다른 시점을 보여주는 이석주의 그림도 책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장난감 레고만 집중적으로 그린 덕분에 한때 ‘레고 작가’로 불렸던 배주라는 화가도 빼놓을 수 없지요.



강형구,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259×193.5cm, 1999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극사실주의 회화의 본령은 인물 초상이 아닐까요. 극사실주의 인물화 분야에서는 해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우리 화가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바로 강형구 작가에요. 200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자화상과 우리 시대의 우상들을 화폭에 그려왔지요.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을 다르게 그림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정중원 


최근 해외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은 젊은 극사실주의 화가 정중원의 작품 역시 놀라움을 줍니다. 이 작품을 본 해외 언론이 실제 사진과 그림을 비교해서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사실 저는 전혀 구분을 못하겠더라고요. 그 정도로 실제처럼 묘사하는 재주가 뛰어나 해외에도 활발하게 작품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인물화로 국내외에 이름을 알린 화가들로 이상원, 강강훈, 한영욱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왼쪽부터) 이상원 , 강강훈 , 한영욱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마도 모든 예술에 통용되는 말일 겁니다. 사진 같아서, 실제보다 더 실제 같아서 놀라움을 주는 극사실주의 회화는 무엇보다 어렵지 않아서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니까요. 하지만 화가에 따라, 소재에 따라 거기에 담긴 의미와 정신은 천차만별이지요. 화가들이 수백, 수천만 번의 붓질을 마다않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완성된 작품은 그래서 하나의 작은 세상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그 속엔 생생한 우리네 삶이 숨 쉬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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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주저하지 말고 해라. 지금 당장!
정동현
#정동현


레스토랑에서 경력이 제일 짧은 사람은 나였지만 나이로 치면 주방장 다음이었다.



‘진짜 한국이었으면…….’



나는 노인공경이 아닌 나이 든 대접을 해주는 한국을 그리워했다. 그때 내 나이 서른, 그러나 그 주방의 요리사 대부분이 20대였다. 나이 든 요리사가 멋진 모자를 쓰고 우아하게 맛을 보는 모습은 동화책 이야기였다. 마치 군대처럼 뜨거운 청춘들이 입에 욕지거리를 달고 매일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곳이 바로 주방이었다. 나는 영국 런던의 나이트브릿지(Knight-bridge)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정글 같은 주방 풍경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영어는 잘 들리지 않았고 몸은 굼떴다. 무급으로 일했지만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 가장 어린 요리사인 엔드류는 19살, 다람쥐 같이 빠릿빠릿했다. 누군가의 말이 들리면 엔드류는 벌써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대신 매번 주방 구석 눈이 안 가는 곳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보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 해?”



나보다 열 살은 어린 요리사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따지듯 물었다. 나는 변명 거리를 찾아 우물거렸다. 



“일을 찾아서 하라고. 뭔가 도움이 돼야지! 저기 가서 저거나 도와.”



맞는 말이니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 요리사의 손가락이 머문 곳은 엔드류 옆이었다. 엔드류는 가니시(Garnish : 주 요리에 곁들이는 부 요리)로 나가는 감자 요리를 준비 중이었다. 요리의 이름은 도피누아즈(Dauphinoise), 직사각형 큰 판에 한 가득 감자를 얇게 잘라 켜켜이 쌓고 그 사이사이 치즈와 크림을 넣어 오븐에 구웠다. 그 다음 그 큰 판을 식혀 굳힌 뒤 동그란 링을 그 판에 박아 모양 대로 감자를 뽑아냈다. 그게 일 인분이었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 동그란 감자요리를 다시 오븐에 구워 냈다. 내가 맡은 일은 정말 간단했다. 요리를 할 필요 없이 다 조리가 끝난 감자에 링을 박고 뽑아내면 됐다. 나는 그 단순한 작업을 잘 하고 싶었다. 그래서 링들을 옆에 쌓아두고 '이걸 어떻게 박으면 낭비가 없을까' 잠시 주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엔드류는 링을 뺏어 주저 없이 빼곡하게 판 위에 박아넣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주저하지 말고 그냥 해버려."



그일이 있기 몇 달 전이었다. 요리 학교에서 나는 곱게 모자를 쓰고 천천히 밀가루 무게를 달았다. 신중하고 차분했다. 밀가루 설탕 반죽을 동그랗고 얇게 펴서 판 위에 올렸다. 그것이 오븐에서 갓 구워져 나와 뜨겁고 말랑말랑 할 때 돌돌돌 말아서 과자를 만들었다. 식으면 단단해져서 동그랗게 말아지지 않는다. 다른 도구를 사용할 수 없어 손으로 말아야 하는데 오븐에서 나온 과자는 뜨거웠다. 손가락을 댔다가 뜨거워서 떼고 '어쩌나' 망설이고 있었다. 그날 실습교사는 24살 알렉스, 17살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에서 일을 한 다음 다시 학교로 돌아와 교사가 되었다. 알렉스는 늘 밝았고 요리를 할 때면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웠다. 알렉스는 뜨거운 과자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큰 손으로 주저 없이 뜨거운 과자를 돌돌돌 말아버리며 나에게 말했다.



"뜨겁지 않아. 너의 머리가 뜨겁다고 생각하는거야. 그냥 하면 돼!"



'파인딩 포레스터(Finding Forrester)' 클립 영상



대학 시절 나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Finding Forrester)’를 좋아했다. 브루클린에 사는 흑인 학생 자말이 숨어사는 저명한 소설가 포레스터에게 우연한 기회에 글쓰기 비밀 교육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포레스터는 글쓰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자말 앞에 타자기 한 대를 놔둔다. 과제는 ‘무엇이든 쓰기’였다. 자말은 타자기를 앞에 둔 채 골똘히 고민한다. 고민만 하다 결국 해가 진다. 그 모습을 보던 포레스터는 스스로 타자기 앞에 앉는다. 그리고 신나게 타자를 두드린다. 마치 어린애가 실로폰을 치는 것 같다. 포레스터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듯, 경쾌한 리듬으로 단숨에 글을 써버린다. 자말은 이 모습을 어이없게 쳐다본다. 포레스터 다음으로 타자기 앞에 앉은 자말. 무엇을 쓸까 고민하지만 글은 역시 써지지 않는다. 그도 생각이 많다. 그런 그에게 포레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었다. 나를 설득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왜 요리를 해야 하는지, 먹고는 살 수 있는지, 후회는 안 할 것인지,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어야 하는지 등등 수많은 질문들에 답을 해야 했다. 그러나 학교에 등록금을 내고 회사를 그만두자 그런 걱정과 고민이 싹 사라졌다. 지난 과거의 걱정과 고민이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선택에는 포기가 필요하다. 결정과 선택이 빠른 사람은 포기가 빠른 사람이고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욕심이 많으면 포기가 힘들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욕심이 없으면 결정이 빠르다. 결정과 포기,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단어 사이에는 '욕심'이 숨어 있다. 욕심은 결국 생각이다.


과자는 물론 뜨거웠다. 알렉스가 한 것처럼 뜨거운 과자를 말고 나니 손 끝에 가볍게 화상을 입은 듯 했다. 찌릿했다. 그래도 아예 뜨거워서 손을 못 댈 정도는 아니었다. 빨리 해버리니 개운했다. 과자는 예쁘게 돌돌 말렸다. 다른 아이들은 나처럼 손을 댔다가 떼며 망설였다. 그 와중에 과자는 평평한 모습으로 단단해졌다. 


생각은 더 나은 결과를 낳기 위한 사려(思慮)보다 주저(躊躇)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이유는 깊이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렸기 보다 주저하고 망설였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기도 전에 안 되는 이유, 괴로운 이유, 힘든 이유, 여러 이유들을 만들어낸다. 인과관계가 없는 일들의 인과관계를 꾸며낸다. 그러나 '논리적인 이유'보다는 '근거 없는 두려움'이 대부분이다. 나는 많은 생각을 하면서 그만큼 이유 없는 걱정을 만들어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문득 내가 겁 먹고 멈칫거리는 것이 느껴질 때 그 뜨거운 과자를 떠올린다. 지금이 아니면 굳고 말 뜨거운 과자다. 그러나 해보면 별 것 아닌 사소한 어려움이다. 나를 움직이고 결국 세상을 바꿔놓는데 필요한 것은 늘 작은 용기뿐이다. 생각하지 마라. 해버려라.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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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모나리자를 능가하는 한국의 미소
김 석
#김석기자



이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진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데도 실제로 본 것 마냥 너무도 익숙하고 친숙한 이미지. 수없이 다양하게 복제되고 일상 속에 찬연하게 퍼져 있는 바로 그 얼굴. ‘신비로운 미소’의 대명사로 불리는 모나리자.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대표하는 희대의 명작. 알 듯 모를 듯 수수께끼 같은 미소로 지금까지도 구구한 억측과 궁금증을 낳고 있는 그림이지요.


운 좋게도 두 번이나 직접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실은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에요. 크기도 작을뿐더러 워낙에 관람객들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어서 가까이서 그 신비로운 미소를 대면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니까요. 차라리 복제된 이미지로 감상하는 편이 훨씬 더 낫지요. 뭐 사정이야 어떻든 수천 년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미소’ 하면 첫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겁니다.



금동반가사유상, 삼국시대 <6세기 후반>, 높이 83.2cm, 국보 7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렇다면 우리 문화재 속에는 어떤 미소가 담겼을까요. ‘한국의 미소’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불세출의 명작 금동반가사유상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의 불상이 각각 국보 78호와 83호로 지정돼 있는데, 아무래도 인간적인 매력은 78호 쪽이 좀 더 돋보이지 않나 싶어요. 만면 가득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저 천상의 미소. 보면 볼수록 마음이 푸근해지는 한국의 미소입니다.


불상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지요. 특히 반가부좌를 한 채 미소 짓고 있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은 모진 억압에 고통 받고 신음했던 백성들에게 구세주 같은 존재였습니다. 기댈 곳 없는 막막한 현실에 한 줄기 빛과 같은 구원자. 그래서 미륵보살은 늘 변함없이 온화하고 넉넉한 미소로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 그래, 그래, 모든 게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다 잘 될 거라고, 말이에요.



‘신라의 미소’ 얼굴무늬 수막새에 얽힌 사연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 6월호에 ‘신라의 가면와’란 제목의 글이 실립니다. 내용인즉슨 당시 경주의 야마구치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던 27살의 젊은 의사 다나카 다카노부가 경주 읍내 일본인 골동품상에게서 유물 한 점을 구입했는데, 특이하게도 사람 얼굴 모양을 한 기와장식이었습니다. 당시에도 큰 화제가 됐는지 잡지에까지 소개되지요. 글쓴이 역시 당시 경주고적보존회에서 활동하던 오사카 긴타로라는 일본 사람입니다.


유물의 소유자인 다나카 다카노부는 1940년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영영 이별할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20여 년 세월이 흐른 뒤 용케도 유물의 존재를 기억해낸 분이 있었어요.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장이었던 박일훈 선생입니다. 끈질기게 유물의 소재를 추적한 끝에 1972년, 마침내 유물의 주인인 바로 그 의사 다나카 다카노부와 연락이 닿게 됩니다. 박 선생은 유물을 기증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고, 결국 마음이 움직인 다나카는 그해 10월 직접 경주박물관을 찾아 유물을 기증합니다.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 현재길이 11.5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그렇게 한 뜻있는 분의 간절함이 결실을 맺어 되찾아온 귀중한 유물이 바로 지금 우리가 ‘신라의 미소’라 부르는 얼굴무늬 수막새입니다. 1932년, 지금의 경주시 사정동 영묘사 터에서 출토된 이 유물은 지붕에 얹는 기와 중에서 하늘을 향해 볼록한 수키와(목조건축의 지붕을 덮는 반원통형의 기와)의 끝에 장식하는 유물이에요. 다른 말로 와당(瓦當)이라고도 합니다. 기와의 뒷면에 수키와를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어 실제로 지붕 장식에 쓰였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보면 볼수록 끌리는 이 느낌은 대체 뭘까요? 서글서글하고 한없이 정다운 저 눈매와 두툼하게 아래로 흐르는 콧대, 그 아래로 한가득 머금은 자애로운 미소. 저토록 향기로운 웃음을 흙으로 빚어 구워낼 줄 알았던 신라 도공의 마음에도 따뜻한 미소가 흘러 넘쳤을 겁니다. 더욱이 틀에다 찍어낸 게 아니라 도공이 손으로 직접 빚은 것이라니 말이에요. 이런 기와장식을 실제로 사용할 줄 알았던 옛 사람들의 ‘파격’은 또 어떻고요.





그래서 신라의 미소는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당시 ‘새천년의 미소’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됐고, 저 유명한 경주 빵의 상표에까지 등장하며 ‘신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으뜸 이미지가 됐지요. 그 미소에 매료된 시인들이 앞 다퉈 노래로 화답했으니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는 이봉직 시인의 동시 ‘웃는 기와’ 한 대목이 참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시대의 간극을 넘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까지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합니다. 명품의 가치는 그래서 현재진행형이라고 했다지요. 신라의 미소에서 깊은 감흥을 얻은 또 다른 시인이 있습니다. 천 년을 훌쩍 뛰어넘는 유구한 세월에도 전혀 빛 바라지 않은 그 소탈하고 후덕한 미소. 시인의 마음은 그 고운 웃음의 결을 따라 시간을 초극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유영합니다.





깎아지른 벼랑에 새겨진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백제 <7세기 초>, 국보 84호



먼 옛날 백제 사람들이 터를 닦고 살았던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대대로 강댕이골이라 했던 용현계곡 한 쪽 벼랑에 새겨진 부처의 존재를 이곳 주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부처가 찬란한 백제 불교의 유산이라는 사실은 1959년에야 재발견됩니다. 지금 우리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라 부르며 국보로 귀하게 여기는 바로 그 마애불입니다.


유물 안내판의 설명에 따르면 가운데가 석가여래입상, 왼쪽이 제화갈라보살 입상, 오른쪽이 미륵반가사유상입니다. 세 부처를 나란히 새겼다 해서 이런 배치를 ‘삼존불 형식’이라 하는데요. 왼쪽에 보주(寶珠)를 든 보살이 과연 누구냐를 놓고 지금까지도 해석이 분분하답니다. 중국이나 일본, 심지어 같은 한반도 내에서도 신라나 고구려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성이라 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학술적인 부분은 전문가들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아무 편견 없이 돌에 새겨진 부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합니다.





세 분이 모두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지요. 따로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참 좋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가운데 본존상의 얼굴을 한 번 볼까요. 영락없는 뭇사람의 얼굴입니다. 국보 금동반가사유상에서 보던 그 거룩하고 우아한 부처님이 아니라 친근한 옆 집 아저씨의 딱 그 모습이에요. 부리부리한 눈매, 뭉툭한 코, 두툼한 입술, 둥그런 형태에 살집 넉넉한 얼굴이지요. 하늘의 사람이 아니라 땅의 사람, 다시 말해 서민의 얼굴인 겁니다.


그래서 서산마애불은 서민 불상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답니다.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서산마애불에 얽힌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일화들이 소개돼 있는데요. 서산마애불이 발견된 직후에 우리나라 고고학의 선구자인 김원용 선생이 이런 유명한 제안을 했다고 해요.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런 미소는 마음 좋은 친구가 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창한다.”


그래서 백제의 미소가 된 거였어요. 2012년 서산마애불을 직접 답사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그 사람 좋은 미소 앞에서 그때 저는 무엇을 생각하고 소망했을까요. 저 바위 위에서 1400여 년을 한 결 같은 미소로 살아낸 부처님은 그 모든 시름도 잊고 팍팍한 세상사도 잠시 내려놓고 여기서 잠시나마 편히 머물다 가시게, 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먼먼 옛날의 백제인은 까마득한 후손들에게 한없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남겼지요.



흙으로 만든 부처와 보살, 고구려 <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라의 미소, 백제의 미소도 있는데 혹시 고구려의 미소라 부를 수 있는 건 없을까? 궁금해서 이리저리 자료를 뒤져보니 아주 흥미로운 유물이 등장하더군요.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 실에 가면 한 쪽에 흙으로 빚은 작은 부처와 보살들이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있지요. 1937년 평안남도 원오리(元五里) 옛 절터에서 한꺼번에 발굴된 이 소조불(흙을 빚어 만든 불상)은 6세기 중엽 이후에 만들어진 출토지가 분명한 고구려 불상이라 합니다.


온전한 불상과 보살상에 파편까지 하면 312개나 한자리에서 출토됐다 하는데요. 그 중에서도 앉아서 가지런히 두 손 모으고 있는 보살상 두 점에 유독 마음이 끌립니다. 순전히 흙으로 빚은 것들이 자그마치 1500년 세월에도 저토록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니 놀랍지요. 게다가 단정하게 앉아 예를 갖춘 보살들의 저 생생한 표정은 또 어떤가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한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바짝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그 환한 미소가 한결 도드라져 보이지요.





수월관음도에서 찾은 고려의 미소


눈치 채셨겠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유물들은 대부분 불교 문화재입니다. 그리고 이 전통은 불교국가인 고려로 이어지게 되지요. 고려가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 가운데 특별히 세 가지를 꼽을 만합니다. 청자와 나전칠기, 그리고 불화(佛畫)입니다. 2010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려불화대전>이란 기념비적인 전시가 열립니다. 전 세계 각지에 흩어진 고려불화 108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실로 역사적인 전시였어요.


이 전시가 그토록 중요했던 까닭은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불화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가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어서 한자리에 모으는 것 자체가 대단히 힘든 일이거든요. 한 달하고도 열흘 남짓한 전시 기간 동안 전국의 승려들이 몇 번이고 전시장에 다시 찾아와 그림 속 부처님 앞에서 기도하고 불공을 드리는 보기 드문 장면도 연출됐습니다. 평생에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처럼 말이에요.



수월관음도, 고려 후기, 비단에 색, 106.2×54.8cm, 보물 1426호,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고려불화 최고의 미소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수월관음도입니다. 수월관음(水月觀音)이란 말 그대로 물에 비친 달을 내려다보는 관음보살을 가리킵니다. 수월관음도는 남인도의 바닷가에 있는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의 연못가 바위에 앉아 선재동자(善財童子)의 방문을 받고 있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그린 겁니다. 그림 속 관음보살은 선재동자를 내려다보고 있지요. 후덕한 얼굴에 은은하게 번지는 저 미소를 한 번 보세요. 가히 압권입니다.





그런데 관음보살의 표정만 그런 게 아니에요. 선재동자를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저 천진난만하고 앙증맞은 입술에 머금은 미소를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요. 숱한 수월관음도를 보았어도 이렇게 자애롭고 우아한 미소로 보는 이를 따뜻하게 해주는 명품은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고려불화 최고의 명작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을 언젠가 꼭 한 번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리도 곱고 아름다운 고려의 미소를 말입니다.



서민적인 해학이 빚어낸 조선의 미소


유교 국가인 조선 시대에 이르면 그 전까지 문화 전반을 지배했던 불교의 영향력이 몰라보게 위축됩니다. 굳이 빗대어 설명하자면 줄곧 신의 영역을 지향했던 문화예술이 그제야 비로소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왔다고 할까요. 조선의 미소를 딱 지칭해서 이거다, 못 박은 글을 보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하면 역시 풍속화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단원 김홍도의 그림 속엔 ‘조선의 미소’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풋풋하고 건강한 서민들의 웃음이 한가득 담겨 있습니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27.8×23.8cm, 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당 훈장 선생님께 혼이 났는지 울음을 참지 못해 훌쩍거리는 아이, 그 모습을 아이고 고소해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참 정겹지요. 시끌벅적한 장터 한가운데서 펼쳐지는 한 판 씨름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천차만별 다양한 표정은 또 어떤가요. 누구는 웃고 누구는 자못 심각한 표정인데, 다들 판돈 두둑하게 걸었다면 마지막에 웃는 이는 과연 누가 될까요.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아이의 저 환한 미소 역시 참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김홍도의 그림은 보는 이를 한없이 따뜻하게 해줍니다. 더도 덜도 보탤 것 없는 서민들의 수수하고 꾸밈없는 삶을 화폭에 그려낼 줄 알았던 화가의 따뜻하기 그지없는 시선, 그 마음의 결이 느껴지니까요. 넉넉함과는 거리가 멀었을 팍팍한 삶의 현장 속에서도 늘 웃음과 미소를 잃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 바로 그 미소가 그저 벗어나고만 싶은 고통에 불과했을 고단한 일상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이었을 겁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단원 풍속도첩>에 수록된 풍속화 24점 하나하나가 모두 조선의 미소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 기억하시나요. 광대들의 삶과 사랑, 시련과 애환을 그린 이 영화에는 조선시대 전문 연예인이었던 광대들이 펼쳐 보이는 갖가지 예능이 선보이는데요. 그 중에서도 얼굴에 탈을 쓰고 노는 탈놀이 장면은 보는 이를 짜릿하고 조마조마한 긴장감 속으로 몰고 갑니다. 우리 문화재 가운데 탈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아요. 경북 안동의 유서 깊은 하회마을과 이웃 병산마을에 전해지는 탈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회탈이라 부르는 것들이지요.



(좌) 중탈,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국보 제121호, 하회병산동민 소유, 국립중앙박물관 위탁 보관

 (우)-(상) 이매탈, (중) 부네탈, (하) 선비탈, 


하회탈 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익숙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게 바로 ‘중탈’입니다. 입 주위를 중심으로 얼굴 부분과 턱 부분이 따로 만들어져 줄로 이어놓은 걸 볼 수 있지요. 초승달 모양을 닮아 여지없이 환한 웃음을 떠올리게 하는 눈과 눈썹, 콧구멍이 잔뜩 커진 듯 뭉툭한 코와 불룩 솟아오른 광대뼈, 마치 허허허 웃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쩍 벌린 입모양까지 영락없는 박장대소의 표정입니다.


국보로 지정된 탈은 모두 13점입니다. 이 가운데 하회탈이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까지 해서 11점이고, 병산 탈은 2점이 남아 있습니다. 탈은 원래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별신굿을 할 때 쓰던 물건이에요. 보통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었기 때문에 굿이 끝나고 나면 태워버리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요행히 13점이 남아 국보가 될 수 있었던 건 이례적으로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그 유래가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탈은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진 걸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셈이지요. 오리나무를 깎은 뒤 옻칠을 여러 겹 해서 반들반들하고 운치 있는 색을 냈다고 합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는 이런 탈을 쓰고 정월대보름에 한바탕 흥겨운 굿판을 벌였을 옛 사람들의 흥취가 탈에 담긴 각양각색의 표정에 생생하게 담겨 있는 듯합니다. 탈 하나하나에 새겨진 저 웃음, 저 미소야말로 조선의 미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웃을 일이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요즘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일까요. 하지만 그 옛날이라 해서 다르진 않았겠지요. 육신의 병을 이겨내는 최고의 묘약이 바로 웃음이라 말하듯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는 것도 다름 아닌 웃음입니다. 누천 년 조상들의 손때 묻은 소중한 유물에서 찾아낸 한국의 미소. 그 미소에서 삶의 희망과 활력을 얻었던 옛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을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