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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의 음식을 쓰다
낡은 골목, 전통 깊은 '힙지로'의 맛집
정동현
#정동현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마치 목이 마르기 전에 물을 마셔야 한다는 말이 있듯 고기 생각이 나기 전에 이미 고기를 먹었어야 한다. 특히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혹한 혹서 기후 덕에 미국 해병대가 최적의 훈련 장소라고 밝힌 한반도에서 고기를 먹지 않고 여름을 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극기다. 


고기라고 하면 꼭 하얀 마블링이 박힌 한우 투뿔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강남 어딘가에서 남이 구워주고 남이 사주는 고기를 먹는 이들이다. 세련된 건물과 흡족한 서비스, 고급스러운 재료를 보면 역시 돈값을 한다 싶다. 그러나 자주 먹을 수 있는 값은 아니다.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어깨를 툭툭 쳐가며 가볍게, 흥겹게 먹을 수 있는 분위기 역시 아니다. 


친구의 집에 온 것처럼, 그의 부모처럼, 익은 김치를 내어주고 반갑게 인사하며, 너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보다 오래된 곳에 앉아 고기를 먹는 그 정취는 또 이길 수 없다. 친구가 보고 싶을 때, 그런데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몇 주 전일 때,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을지로로 와라.”





 한여름의 동빙고가 되어주는 

백제정육점



시작은 종로5가의 ‘백제정육점’이다. 불판 앞에 앉는 것조차 짜증 나는 날, 백제정육점은 모두의 환영을 받는다. 북새통 같은 광장시장 육회 골목을 어슬렁거리지 말자. ‘정육점’이라는 든든한 이름을 단 이곳에 가면 입맛을 시원하게 돋우는 유일한 육회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육회만 파는 집은 아니다. 육회를 시작으로 등심, 특수부위, 차돌박이 등 소의 전 부위를 먹을 수 있다. 하물며 설렁탕, 육개장 같은 식사 메뉴도 ‘일절’이다. 



이 모두가 평균 이상이지만, 동계올림픽이 열리면 전 경기를 다 챙겨보더라도 쇼트트랙은 꼭 사수하듯이 이 집의 육회는 충분이 아닌 필수 조건이다. 육회가 테이블 중앙에 놓이면 이 말이 괜한 헛소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산처럼 수북이 쌓인 육회 위에 올라간 달걀노른자를 모임의 주선자가 술술 살살 고기에 섞어주면 맛의 밀도가 한결 짙어진다. 이에 서걱서걱 씹히는 깨소금과 설탕의 조합은 육회 맛의 비결이자 포인트다. 혹자는 ‘너무 달다’고 불평하기도 하는데 입맛을 돋우는 용도로 생각하면 절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사각사각 얼음과자 같은 소고기의 낮은 온도에는 오히려 입자가 씹히는 설탕의 단맛이 조화가 나쁘지 않다. 온도가 낮을수록 미각이 둔해지기에 어느 정도 강한 단맛은 맛의 설계에 필요하다. 



더불어 짧게 치고 끝나는 설탕에 배의 진득한 단맛이 섞이고 파의 알싸한 맛까지 엮이면 오색단청처럼 맛이 화려해진다. ‘육회’라는 두 글자 아래 담긴 맛의 스펙트럼이 만만치 않다. 산더미 같은 한 접시에 차가운 맥주를 곁들여 먹노라면 여름을 피하는 동빙고라도 찾은 것 같다. 





노포에서 즐기는 연탄불의 맛, 

경상도집



비싼 돈을 내지 않더라도 남이 구워주는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종로5가에서 멀리 가지 않은 국립의료원 뒷골목에 가면 간판도 없는 작은 고깃집이 있다. 이름은 경상도집, 카드 결제도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좌석 없이 노상에 깔린 탁자에 요령껏 앉으면 된다. 


두 명이 오더라도 주문은 3인분으로 시작하는 것이 관례. 이유는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탓에 추가 주문은 시간이 걸린다. 일 인분은 아예 주문 받지도 않는다. 이렇게만 보면 욕쟁이 할머니가 떠오르지만, 욕먹으며 밥 먹을 일은 없다. 무심해 보여도 빈 국그릇을 그냥 보지 못하는 살뜰한 서비스를 겪게 된다. 


  


이곳에서 파는 메뉴는 돼지갈비 하나뿐. 단맛과 짠맛이 2:3 정도의 비율로 느껴지는 거뭇거뭇한 돼지갈비는 서울 어디에 내놔도 쳐지지 않는다. 없다시피 한 인테리어를 감안한 어드밴티지 없이도 충분히 먹어주는 맛이다. 


그 맛의 연유를 살핀다면 며느리도 모르는 양념, 좋은 원물 등이 손에 꼽히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연탄불 화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릴 적 방을 데우던 그 연탄불에 석쇠를 올려 고기를 구우면 인간이 좋아하는 ‘구운 맛’이 극대화된다. 155도 이상 열을 받으면 나타나는 마이야르(maillard) 현상에, 설탕과 간장이 열을 받아 캐러멜화되는 과정까지 거치면 몸에 좋은지 나쁜지 따질 겨를 없이 빠져들게 되는 맛이 탄생한다. 고기 한점, 한점 살펴가며 가위로 탄 부위를 잘라내는 정성까지 곁들여지고 사람들은 이름도 없는 이곳에 장사진을 편다. 






 달달한 서울식 옛날 불고기 

보건옥


누가 뭐래도 고기는 불판 위에 구워야 제맛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나는 을지로4가 ‘보건옥’에 간다. 불고기로 한가락 하는 이 집은 이웃 우래옥에 비해서도 맛이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원물 고기의 등급 자체는 차이가 나지만 파김치, 멸치볶음 등 한 상 쫙 깔리는 밑반찬을 앞에 두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저절로 엉덩이가 무거워진다. 



위로 볼록한 구형 불판도 좋고 아래로 오목한 신형 불판도 좋다. 일단 불판을 가스 불 위에 달구며 국물 자작한 불고기를 휘적인다. 애교 섞인 말투처럼 은근한 단맛이 간장의 짭조름한 맛 뒤로 몸을 숨긴다. 버섯과 야채도 숨을 죽인다. 익은 불고기는 넉넉히 앞접시에 덜어 담는다. 고기가 줄어들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마 ‘난 이제 됐어’라고 손사래치는 이도 생기리라. 그래도 조금 더 먹으라고 덜어주는 마음, 빈 잔이 보이면 말없이 따라주는 친구의 옆모습이 낯익다. 



불고기로 아쉽다면 김치찌개로 넘어가는 게 순서다. 고깃집 김치찌개라 들어간 고기양이 남다르다. 아닌 게 아니라 점심이면 김치찌개 먹는 사람이 태반이다. 김치 반 고기 반인 찌개를 약한 불에 뭉근히 익힌다. 고기와 김치의 결이 풀리고 말랑말랑 살캉살캉 해 질 무렵, 흰밥을 시킨다. 


하얀 쌀밥 위에 건더기를 한 국자 퍼 올린다. 숟가락으로 퍼서 입안 가득 넣는다. 시고 기름진 국물이 입안에 그득하다. 부른 배로 이야기를 나눈다. 넘치는 정을 나눈다. 무덥고 힘들지만 견딜만한 한국의 여름이다. 오래된 식당이 있고 오래된 벗이 있어 괜찮은 하루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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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속 독서 풍경 - 3편
책 읽는 기쁨을 그 무엇에 비하랴!
김 석

얼마 전에 출간된 김탁환 작가의 새 장편소설 <대소설의 시대>는 18세기 조선을 무대로 한 작품입니다. 여기서 대소설(大小說)이란 오늘날의 장편소설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여성들’이란 사실입니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18세기는 여성들이 소설 창작의 주체이자 독서의 주체로 맹활약한 시기였답니다. 김탁환의 소설에서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등장하는 임두라는 작가도 여성이고, 그 소설을 베껴 쓰는 이들도 여성이며, 다음 편이 나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가장 열성적인 독자들도 여성이죠.



 

(좌) 김탁환 <대소설의 시대>  (민음사, 2019)

(우) 윤덕희 <책 읽는 여인>, 비단에 담채, 20×14.3cm, 18세기, 서울대박물관 소장



그 시대 여성들이 그토록 이야기에 목말랐던 까닭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2016년 11월 칼럼에서 여성이 책을 읽는 장면을 담은 우리 옛 그림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위 그림은 ‘책을 읽는 행위’를 묘사한 옛 그림 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당시에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제아무리 풍속화가 만개한 18세기라 해도 당시에 이런 그림이 그려지고 전해졌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놀라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대소설의 시대>를 읽고 나니 이런 그림이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것이 아무 이상할 게 없더군요. 이 그림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사대부 화가 윤두서의 아들인 윤덕희(尹德熙, 1685~1776)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7년 9월 한 고미술 경매에 이것과 아주 비슷한 그림이 한 점 출품됩니다. 같은 사람이 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판박이 같은 그림이었죠.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닐까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뭔가가 있었습니다.


윤두서 <미인독서 美人讀書>, 비단에 채색, 61×40.7cm



한 여인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모습만 보면 위의 것과 같은 그림입니다. 심지어 왼손 검지로 책을 가리키는 자세까지 똑같죠. 이 그림을 남긴 화가는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책 읽는 여인>의 화가 윤덕희의 아버지입니다. 이제 의문이 풀리죠. 아버지와 아들이 비슷한 구도의 독서하는 여인을 그렸다! 경위야 어찌 됐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셈이죠. 이렇게 부자가 나란히 책 읽는 여인을 그림으로 남긴 것도 한국 미술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부분입니다.


기나긴 독서의 역사에서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여성적인 삶의 형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불과 300여 년밖에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여성들에게 독서는 그만큼 간절하고 절실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남성이 책을 읽는 것만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수많은 그림에 남성의 독서가 묘사됐지만, 십중팔구는 커다란 풍경의 일부로 그려졌을 뿐입니다. 독서하는 남성을 따로 떼어 그린 경우가 극히 드문 이유입니다.


 

정선 <모옥독서 茅屋讀書>, 종이에 수묵, 31.6×42.1cm



2017년 한 경매에 출품돼 관심을 모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입니다. 화면 아래 띠풀로 지붕을 이은 정자에서 어느 선비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군요. 이 그림에서 보듯 인물은 거대한 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로 묘사돼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저 사람이 뭘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물론 예외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옛 산수화 속에서 독서인은 이렇듯 아주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얼마 전에 교보문고에서 상반기 독서 시장 통계를 발표했는데요. 상반기에 서점에서 책을 구매한 사람을 성별로 보면 여성이 60.7%였습니다. 연령대별로는 40대가 32.9%로 가장 많았고요. 두 통계를 합하면 책 구매자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40대 여성(21.5%)입니다. 더 재미있는 현상은 책과 관련한 책의 표지에서 ‘독서하는 여성’을 묘사한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입니다.



   

굳이 많은 예를 일일이 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 표지들은 제가 최근에 본 것들 몇 가지일 뿐입니다. 찾으려 들면 훨씬 더 많은 사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죠. 그것은 다시 말하면 ‘여성의 독서’가 그만큼 화가들에게 특별한 소재로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물론 가장 오른쪽 책의 표지처럼 남성의 독서도 있습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지만요.


다시 우리 그림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조선 후기에 시장이 크게 발달하면서 세책방(貰冊房)이라는 가게가 성황을 누리게 되는데요. 요즘 말로 하면 서점보다는 책 대여점에 가깝습니다. 김탁환의 소설에도 쥐 영감이라 불리는 당대 최고의 세책방 주인이 꽤 자주 등장합니다. 이들은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새 소설 작품의 시장에 나갈 만한지 아닌지를 예리하게 가려낼 줄 아는 비평가이기도 했죠.


<태평성시도 太平城市圖>, 비단에 색, 8폭, 각 113.6×49.1cm, 국립중앙박물관



세책방이 등장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8폭짜리 병풍 그림 <태평성시도>인데요. 자그마치 2,170여 명이 등장하는 이 대작은 조선 후기 생활사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그 시절에 도심에서 번성한 시장의 모습이 참으로 다채롭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병풍의 제4폭에 문제의 세책방이 보입니다.


<태평성시도> 제 4폭에 보이는 세책방의 모습



1층은 책은 빌려주는 곳입니다. 탁자 위에 책이 잔뜩 쌓여 있고 건물 안에서 한 명, 밖에서 한 명이 책을 들춰보고 있습니다. 가게 주인이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빌려 갈 거야 말 거야 하는 표정일까요. 그 위로 이층에선 누군가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죠. 책을 그대로 베끼는 필사(筆寫)에 여념이 없군요. 지금처럼 복사기나 프린터가 없던 시절에는 손으로 베껴 쓸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부를 만들어서 빌려주거나 파는 거죠. 영화 <음란서생>(2006)에도 세책가가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책 욕심 있는 이들은 자기만의 근사한 서재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김탁환의 <대소설의 시대>에 어김없이 이 개인 서재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소설의 주인공인 김진이 산속에 마련한 자기만의 은밀한 서재! 그곳에는 세상에 없는 진기한 책들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어느 책이 어디 있는지는 오로지 주인만 알 뿐이죠.



이광사 <이씨산방장서도 李氏山房藏書圖>, 종이에 수묵담채, 23.1×29.0cm, 선문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에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험준한 바위 절벽이 강과 맞닿은 경치 좋은 골짜기 안에 호젓한 기와집이 보입니다. 바위산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공간에 보일 듯 말 듯 깃든 모습이 참 절묘하죠. 화면 아래 오른쪽에 보이는 세 사람이 그곳을 찾아가는 모양입니다. “저쪽으로 가면 된다네.”


산방(山房)은 산속 암자를 뜻합니다. 안에 책이 그득그득 쌓여 있는 게 보이죠. 이 그림은 중국의 어느 고사를 그린 겁니다. 흔히 소동파로 널리 알려진 중국 송나라 때 시인 소식(蘇軾, 1037~1101)의 <이군산방기 李君山房記>라는 글에 나오는 고사인데요. 요약하자면 소식의 친구가 산속 암자에서 공부를 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구천여 권에 이르는 장서를 후대에 남겨 많은 이가 그 책으로 공부를 하게 했다는 이야기랍니다. 일종의 공공도서관 역할을 했던 것이죠. 책이 귀하던 시절에 그런 모범적인 사례가 있었다면 공부하는 이들은 얼마나 좋았을까요.



<평생도 平生圖> 부분, 19세기 말~20세기 초, 종이에 색, 8폭, 각 110.2×51.5cm, 국립중앙박물관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했던 그 옛날의 독서. 출세하느냐 마느냐가 책에 달려 있었으니, 부모들의 교육열은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그림은 <평생도>라는 이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는 8폭 병풍 그림의 한 부분인데요. 평생도란 말 그대로 한 사람의 일생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죠. 위에 보이는 장면은 그중에서도 사랑채에서 아버지로 보이는 이가 글 익히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글공부에 열심인 자식을 보며 마음 가득 차오르는 기쁨을 감출 수 없을 것이고,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큰 효도가 또 어디 있을까요.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한 사람의 일생에 기억할 만한 행복의 순간이 ‘책’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이 그림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독서라는 건 결국 ‘남’이 아닌 ‘나’를 가꾸고 살찌우는 일입니다. 옛사람들이 남긴 그림에서 ‘책 읽는 기쁨’을 만납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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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웨일즈 3편]
웨일즈의 전통을 듬뿍 간직한 곳,
웨일즈 서북부
이 환

전편에서 웨일즈의 고성 마을들과 책마을 헤이온와이, 아서 왕의 전설을 가진 스노도니아를 여행했다. 마지막으로 지중해 이탈리아를 흠모해 만든 포트메리온과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있는 방고와 앵글시 섬을 둘러본다. 그리고 아일랜드로 건너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서북쪽 끝 항구도시 홀리헤드를 소개한다.







전에 백화점 그릇가게에서 포트메리온(Portmerion www.portmeirion-village.com)이란 브랜드를 발견하고 이렇게 예쁜 도자기를 만드는 마을은 얼마나 멋질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이곳을 만든 주인공은 잉글랜드 출신으로 어릴 적에 이주한 건축가 윌리엄스 엘리스(Sir Williams Ellis·1894~1978)다.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마을 포르트피노를 동경한 나머지 1926년부터 이곳을 지중해풍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아흔이 되도록 고치고 짓고 또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고 하니 그의 열정에 숙연해진다. 입구의 조각장식 문을 들어서면 천국의 정원에 온 듯한 느낌이다. 



원색으로 칠해진 벽과 지붕들, 우아한 정원과 분수, 대리석상 수십 개가 여행자를 맞는다. 포트메리온 도자기도 알고 보니 그의 딸 수잔이 만든 브랜드다.






 

웨일즈 서북쪽 본토의 마지막 큰 도시는 방고(Bangor)다. 웨일즈대학이 있어 젊은 기운이 가득하다. 로마군이 침공했을 때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전투지여서 유적들도 많고 고풍스럽다. 이 도시에서 브리타니아 다리를 건너가면 앵글시 섬에 다다른다. 이 섬은 웨일즈와 잉글랜드를 통틀어 가장 큰 섬이다. 


방고에서 다리를 건너 5분정도 차로 달리면, 작은 마을 기차역이 있다.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 기차역 푯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1848년 앵글시 섬에서 첫 번째로 생긴 이 기차역 이름은 숨이 찰 정도로 길다. 



세계적으론 모르겠지만, 최소한 영국에서 가장 길다. 뜻은 ’빠른 물살 소용돌이 옆 흰 개암나무의 구덩이 속 성 마리아 교회와 붉은 굴의 성 티실리오 교회‘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간단히 ’Llanfair PG‘라고 부른다.








웨일즈 본토에서 앵글시 섬을 가는 데는 두 개의 다리가 있다. 하나는 메나이 현수교(Menai Suspension Bridge·1826년 건설), 다른 하나는 브리타니아교(Britania Bridge·1850년)다. 브리타니아교 아래로는 기차 철길이 있다. 


모터보트를 타고 메나이 해협을 둘러보았다. 섬 주변을 둘러보는 데는 가장 효율적인 교통수단이다. 물개들이 한가로이 모여 햇볕을 쬐는 바위자락이 가장 인기 있어 보인다.


이 지역은 옛 드루이드교의 흔적과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고대 켈트족의 믿음으로 알려진 이 종교는 드루이드라는 사제들이 지도자 역할을 했는데 신전을 만들지 않았고 문헌도 남기지 않았다. 다신교에 영생불멸을 믿었고 마법과 주술이 발달했다. 숲 속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사람을 죽여 피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제의식 때문에 로마군이나 잉글랜드군이 침입했을 때 많은 핍박을 받았다. 잉글랜드 남부의 거석유적인 스톤헨지(Stonehenge)도 이들이 만들었고 할로윈이란 서양풍습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앵글시 섬에서 아일랜드로 넘어가는 관문이 바로 홀리헤드(Holyhead) 항구다. 페리로 3시간 15분, 쾌속선으로 1시간 20분이면 더블린에 도착한다. 대합실에서 아일랜드로 수학여행 가는 전통 옷을 입은 웨일즈 여학생들을 만났다. 


앙증맞은 모자와 레이스 자수로 장식된 숄에 체크치마를 단정히 입은 모습이 정감 있다. 검정색의 기다란 ‘웰시 모자’는 체크무늬 앞치마와 함께 이곳 전통의상의 특징. 시골 아낙네들이 주로 입었던 옷 양식이 전통의상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여행(旅行)의 한자말은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며 간다’라는 의미다. 영어 ‘travel’의 어원은 좀 다르다. ‘travail’에서 나왔는데 노동, 고생을 뜻한다. 여행 장비와 교통수단이 부족했던 먼 옛날 바깥나들이는 고행 길이었을 것이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를 거쳐 여기까지 오는 데는 쉽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땅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한편으로 기쁨이었다. 이제 포크음악의 본고장, 아이리시펍과 기네스의 나라 아일랜드로 향해간다.





영국관광청 웹사이트   

www.visitbritain.com  


웨일즈관광청 웹사이트 

www.visitwal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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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새로운 광화문 현판, 언제 볼 수 있을까?
김 석
#김석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물괴>(2018)란 영화를 봤습니다. 괴수 영화에 사극을 버무린 흥미로운 작품이었죠. 영화 자체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못 받았던 것 같더군요. 흥행에도 실패했고요. 그런데 영화가 끝나갈 즈음 아주 흥미로운 장면 하나가 보였습니다. 주인공들이 괴수와 최후의 대결을 벌인 장소가 경복궁인데요. 밤을 새운 처절한 사투가 끝이 난 뒤 동이 터올 무렵, 궁궐 밖에 있던 이들이 하나 둘 광화문으로 향합니다. 여기서 제 눈을 확 뜨이게 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광화문 현판이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광화문 현판(왼쪽)의 색깔은 지금의 현판(오른쪽)과 정반대입니다.



이 장면은 실제로 광화문에서 촬영했을 겁니다. 자세히 보면 현재의 광화문과 그 모습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게 있죠. 현판입니다. 지금 광화문에 걸린 현판과 비교해볼까요. 현판 크기는 물론 글씨까지 똑같죠. 하지만 색깔이 다릅니다. 영화 속 현판은 짙은 바탕에 흰 글씨로 돼 있습니다. 지금의 광화문 현판과 정반대인 거죠. 제작진이 현판 색깔만 일부러 바꾼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영화의 배경은 조선시대입니다. 당시 광화문 현판 색깔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짙은 바탕에 흰 글씨’였습니다. 실제 현판이 틀리고, 영화 속 현판이 맞는 겁니다.





광화문 현판에 얽힌 ‘흑역사’를 되짚어보기 위해선 2010년 8월 15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날, 광화문 광장에서 요란하게 치러진 광복절 기념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새롭게 복원된 광화문을 공개한 일이었습니다. 일제가 고의로 틀어버린 광화문의 위치를 경복궁 중심축에 맞춰 원래 자리로 옮기고, 덕지덕지 붙어 있던 콘크리트를 모두 뜯어낸 뒤 석축과 문루를 옛 모습에 가깝게 되살렸죠. 해방된 지 65년이 지나서야 광화문이 어엿하게 제자리를 찾은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광화문은 공개되자마자 구설수에 휘말렸습니다. 문제는 현판이었죠. 현판 글씨를 본 사람들이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생동감이 하나도 없는 죽은 글씨라는 것이었죠. 이 글씨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916년 유리원판에 있는 것을 그대로 살린 겁니다. 유리원판이란 오늘날 사진 필름에 해당하는 감광판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유리건판(琉璃乾板, glass dry-plate)이라고도 하죠. 플라스틱으로 만든 필름이 보편화하기 전에 주로 사용된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유리원판은 문화재 복원에 결정적인 근거 자료가 됩니다.



1916년 광화문 유리원판 사진(왼쪽)과 디지털로 복원된 광화문 현판 글씨(오른쪽) 



광화문 현판 복원도 마찬가지였죠. 2005년에 문화재청은 바로 이 유리원판을 디지털로 정밀 분석해서 당시 현판을 70%가량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며 복원된 광화문 현판 글씨를 공개했습니다. 위 사진이 바로 그겁니다. 경복궁 복원의 기준 시점은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방치됐던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중건한 1888년입니다. 1867년에 시작된 공사가 1888년에 마무리되기 때문에 이 해를 기준점으로 봅니다. 사진 속에 보이는 광화문 현판 글씨는 중건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임태영(任泰瑛. 1791∼1868)이 쓴 겁니다.


설왕설래하는 와중에 또 하나의 변고가 일어나게 됩니다. 복원된 광화문을 공개한지 불과 며칠도 안 돼 현판에서 균열이 발견된 겁니다. ‘부실 졸속 복원’이라는 비난이 빗발치듯 쏟아졌죠. 논란이 커지자 결국 현판을 다시 제작해서 거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현판 글씨를 한글로 바꾸자, 한자로 하되 한석봉 글씨로 하자, 아니다 원래대로 가자, 아예 현대 서예가에게 맡기자… 온갖 요구와 주장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옵니다. 말 그대로 광화문의 수난이자, 광화문 현판의 수난이었습니다.






그렇게 또 5년여가 흐른 2016년 2월. 저는 한 시민단체로부터 뜻밖의 사진 한 장을 받았습니다. 광화문을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이었죠. 무슨 영문인지 몰라 왜 사진을 보낸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현판을 자세히 보라고 하더군요. 흐릿하긴 해도 광화문이란 세 글자가 보였습니다. 그것도 짙은 바탕에 밝은 글씨로 말이죠. 만약 사진에 담긴 모습이 사실이라면 새로 제작하는 현판을 어쩌면 다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를 결정적인 자료가 될 것이었죠. 따라서 가정 먼저 확인해야 했던 건 사진의 출처가 믿을 만한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사진을 보내온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 대표와 머리를 맞대고 사진의 출처를 찾아 국내외 검색 사이트란 사이트는 샅샅이 훑어 나갔습니다. 과연 출처를 확인할 수 있을까. 자꾸만 조바심은 나는데 단서가 잡히질 않더군요. 그렇게 한참을 헤매고 헤매다가 어느 외국 사이트에 다다랐습니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홈페이지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스미스소니언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그토록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문제의 광화문 사진을 찾아냈습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의 ‘국가 인류학 자료보관소’ 홈페이지에 등록된 광화문 사진(위)과 현판 확대 이미지(아래)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광화문 세 글자 가운데 ‘광’ 자와 ‘화’ 자는 얼른 알아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짙은 바탕에 밝은 글씨죠. 광화문 세 글자가 이렇게 육안으로 보이고 게다가 현판 색깔까지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 발견된 건 당시로서는 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공신력 있는 박물관 소장품이니 믿을 만한 출처까지 확인됐습니다. 이 사진이 촬영된 시기는 적어도 1895년 이전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경복궁 복원 기준 시점은 1888년. 광화문 복원의 근거가 된 유리원판이 촬영된 시기는 1916년. 이제 어느 사진이 경복궁 복원 기준 시점에 가까운지는 분명해졌습니다.





《경복궁 영건일기》는 일본 와세다대학 도서관에 9책 9권이 소장돼 있습니다.



이 사진 한 장으로 광화문 현판의 고증이 잘못됐다는 사실이 입증됩니다. 문화재청도 이를 인정하고 면밀한 조사를 거쳐 2018년 1월 결국 현판 색상을 바꾸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근거가 확인됩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발간하는 학술지 《고궁문화》 11호에 실린 논문 <경복궁 영건일기와 경복궁의 여러 상징 연구>에서 광화문 현판의 색상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문헌 자료의 존재를 밝힌 겁니다. 


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연구자 김민규 씨가 일본 와세다대학에 소장된 《경복궁 영건일기》를 확인해보니, 광화문 현판의 색상은 흑질금자(黑質金字), 즉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였습니다. 광화문 현판 색상의 오류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문헌 자료입니다. 사진에 이어 문서까지 나온 겁니다. 이로써 광화문 현판 색상에 대한 오랜 논란에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안중식 <백악춘효도>, 1915년 여름, 가을, 비단에 엷은 색, 197.5×63.6cm, 202.0×65.3cm, 

등록문화재 485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근대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일부러 이 전시회를 찾아간 이유는 조선왕실의 마지막 화원(畵員), 즉 왕실 화가였던 심전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악춘효>(1915)를 보기 위해서였답니다. 경복궁의 전경을 그린 <백악춘효>는 ‘여름본’과 ‘가을본’ 두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습니다. 세부 묘사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같은 구도로 그린 그림이죠. 두 점이 전시장에 나란히 걸린 건 극히 드문 일이라 더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더군요.


 

두 그림에서 광화문 현판 부분을 확대해 보면 바탕색이 짙다는 걸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광화문 현판 색상에 관한 단서가 들어 있습니다. 현판 색깔을 자세히 볼까요. 광화문이라는 세 글자는 없습니다만 바탕은 분명 검정입니다. 기와 색깔과 비교하면 짙은 색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죠. 위에서 정리했듯이 지금 광화문에 걸려 있는 현판의 색이 잘못됐다는 사실은 사진과 문헌 자료를 통해 거듭 입증된 바 있습니다. 화가가 현판 색깔을 일부러 잘못 칠했을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그림이야말로 현판의 원래 색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일 겁니다. 그래서 더 흥미롭기도 하고요.


얼마 전 시민단체가 국무총리실에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광화문 현판을 교체한다면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년이 되는 올해가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겁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올해 광복절 기념식에서 새로운 현판을 공개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정부도 분명 적절한 시점을 조율하고 있겠죠. 경복궁의 얼굴이자 조선 왕실 문화의 상징으로 오늘도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광화문에 제대로 된 현판이 걸리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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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이순신 신화’와 ‘이순신 리더십’
김 석
#김석


“이순신 장군은 인격이나 장수의 그릇, 모든 면에서 한 오라기의 비난도 가하기 어려운 명장이다.”


“조선을 지켜 국운의 쇠락을 만회한 것은 실로 조선의 넬슨, 이순신의 웅대한 지략이었다.”


“이순신은 담대하고 활달함과 동시에 정밀하고 치밀한 수학적 두뇌를 지녔다. (…) 조선의 안녕은 이 사람의 힘 덕분이었다.”



이순신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로 찬양한 문구들입니다. 누가 한 말일까요? 조선시대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우리 시대의 군인이나 역사학자?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그럼 누굴까? 놀랍게도 일본인들입니다. 첫 문장은 메이지 시대(1868~1912) 일본 해군의 대표 이론가였던 사토 데쓰타로, 둘째 문장은 같은 시대의 일본 작가 세키코세이, 마지막 문장은 동시대 일본 해군을 대표하는 문필가 오가사와라 나가나리가 쓴 겁니다.




세계 최초의 이순신 전기를 쓴 일본인


몰랐던 사실 하나. 세계 최초의 이순신 전기를 쓴 사람은 일본인이었습니다. 위에 소개한 일본 작가 세키코세이는 1892년에 《조선 이순신전》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표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일본 수군의 활동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조선 수군의 지휘관 이순신의 업적을 조명한 글인데요. 이 소책자가 중요한 건 메이지시대 일본에서 이순신 신화가 만들어지는 기폭제가 됐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이 쓴 최초의 이순신 전기인 단재 신채호의 《수군제일위인 이충무공전》(1908)이 나오기까지는 16년을 더 기다려야 했죠. 《조선 이순신전》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순신을 영국의 해군 영웅 넬슨 제독과 비교한 최초의 기록이란 점입니다. 일본인들은 왜 이렇게 이순신 연구에 열을 올렸을까요.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대동아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선 군사력 강화, 특히 해군력 증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본 겁니다.


결국 이순신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더 나아가 신(神)으로까지 받든 데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던 거죠. 그렇다고 이런 평가와 기록들을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재평가하고 민족의 영웅으로 존숭하기까지 일본인들의 연구가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인정할 필요가 있고요. 그런다고 해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조금이라도 퇴색되는 건 결코 아니니까요.


《충무공이순신전서》(1795)에 수록된 통제영 거북선의 모습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거북선’


일본인들의 기록에서 흥미로운 것 가운데 하나는 ‘거북선’에 대한 언급이 꽤 많다는 점입니다. 사토 데쓰타로는 이순신 장군이 “독창적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라며 그 대표적인 근거로 “거북선이라고 일컫는 신식 전함을 건조”한 점을 꼽았습니다. “오늘의 전투함의 효시”라면서 거북선의 제원과 운용 원리를 설명한 뒤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지금부터 4백 년 전에 장갑전함을 만든 것은 세계의 누구라도 놀랄 일이다.”


《조선 이순신전》에도 거북선에 관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순신은 임지로 부임하자마자 필생의 생각을 응축하여 거북선을 창제하였다.” 앞의 글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거북선의 외형과 운용 방식을 소개하면서 “앞으로 뒤로 옆으로 움직이는 신속함이 나는 새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 패배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거북선을 꼽았습니다. “거북선을 창제하여 공격의 이기(利器)를 교묘히 활용하였다.”


이순신에 관한 일본인들의 글을 묶은 책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가갸날, 2019)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도 거북선을 언급했습니다. “그(이순신)가 일찍이 창조해 만든 거북선을 선두에 세우고 좌우에서 협공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 함대는 사분오열해 다시 결집할 틈도 없이 크게 격파당하였다.” 지금은 거북선을 이순신 장군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게 정설이죠.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거북선 창제’라는 업적이 ‘이순신 신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겁니다.


일본인이 쓴 글 세 편을 묶은 책이 얼마 전 국내에서 출간됐습니다.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의 번역자 김해경 씨는 여러 경로로 자료를 찾고 모으는 우여곡절 끝에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이 쓴 이순신에 관한 글 세 편을 찾아냅니다. 이 글들이 우리 독자들에게 온전한 번역으로 선보이는 건 처음이 아닌가 싶군요. 그런 만큼 책을 읽는 내내 왜 진작 이런 글들이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죠.


     

(좌)월전 장우성 화백의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 (현충사 소장)

(우)《증정 중등조선역사》(1946)에 실린 이순신 장군 초상화 (서울교육박물관 소장)


혹시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본 적 있으신가요? 아마 이순신 초상 하면 바로 이 모습을 대번에 떠올리실 겁니다. 월전 장우성 화백이 1952년에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입니다. 충남 아산 현충사에 가면 사당 안에 바로 이 영정이 걸려 있죠. 우리의 기억에 자리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장우성 화백의 과거 친일 행적 때문에 표준영정을 교체하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진짜 얼굴은 어디에?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찾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연구자가 혹시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죠. 2013년에 한 언론이 이순신의 진짜 얼굴을 찾았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한 적도 있습니다. 서울교육박물관이 소장한 《증정 중등조선역사》라는 책에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가 흑백사진으로 실려 있다는 거였죠. 중요한 사료이긴 하지만 워낙 사진이 흐릿해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한 <충무공이순신상>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로 전하는 그림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충무공이순신상>입니다. 이 그림은 동아대학교 정재환 초대총장이 1958년 4월 16일에 구입했다고 합니다. 정 총장으로부터 구입 경위를 들었다는 당시 대학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을 따라다니던 어느 승려가 처음 그렸고 이후에 여러 번 다시 그렸다는 겁니다. 이 그림은 후대에 다시 베껴 그린 것으로 그 시기는 조선 말기로 추정된다는 내용입니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북관유적도첩》에 수록된 <수책거적(守柵拒敵)>


궁금증이 또 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은 없을까? 놀랍게도 그런 그림이 딱 한 점 있습니다.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입니다. 이 책은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 즉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그린 역사화 여덟 폭을 묶은 화첩인데요. 이 중에서 수책거적(守柵拒敵)이란 이름의 일곱 번째 그림에 바로 이순신의 무훈이 그려져 있습니다.


선조 20년인 1587년, 함경도 지방의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해 노략질을 하자 당시 이곳을 지키는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이 전투에 나섰습니다. 병사들이 들에 나가 있는 틈을 타 여진족이 목책을 공격합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목책 안으로 들어오려는 여진족을 활로 쏘아 죽이고 달아나는 여진족을 추격해 붙잡혀간 농민을 데려왔다는 것이 이 그림의 내용입니다. 이순신에 관해 지금까지 확인된 유일한 조선시대 역사기록화입니다.


영화 <명량>(2014)


‘이순신 신화“는 끝없이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2000년 이후만 보더라도 텔레비전 드라마로 KBS의 역사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2004년부터 이듬해까지 104부작으로 방송됐죠. 소설가 김탁환이 8권으로 집필한 동명의 소설이 같은 해에 출간됐습니다. 앞서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2001년에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명량>은 관객 1761만 명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 역사상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웁니다.




소설가 김훈이 말하는 이순신의 ‘리더십’


시간이 흐를수록 ‘이순신 신화’는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리더십을 이 시대가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얼마 전에 출간된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 ‘내 마음의 이순신’이란 글 두 편이 실려 있더군요. 이순신에 관한 소설을 쓴 작가로서 분명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리더십’을 면밀하게 들여다봤습니다. 여러 대목 가운데 하나를 인용해 봅니다.


“그가 받아들이고 긍정했던 ‘사실’들은 압도적으로 열세인 군사력, 물량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부하들의 이탈과 명령 불복종, 전쟁을 지원해야 할 행정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짓밟혀야 하는 자신의 정치적 불운과 같은 시련과 역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지도자 된 자질은 이 절망적인 역경을 희망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었다. 전 생애를 통해서 그의 리더십에 가장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대목은 이 전환의 국면 속에서 작동되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이순신의 탈정치적인 생애와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하는 지휘 스타일은 리더십의 본질이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리더십’에 대한 시대적 요구나 갈망이 아니라면 ‘이순신 신화’가 갈수록 더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죠.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입니다. 최근에 우연히 읽은 두 권의 책에서 다시 만난 이순신. 새삼 의문이 들더군요. 우리는 이순신을 안다고 철석 같이 믿어 왔지만, 사실 우리는 이순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아닐까. 그래서 다시 《난중일기》를 펼쳐듭니다. 474년 전에 이 땅에 온 한 위대한 영혼이 써내려간 그 숱한 나날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말이죠.


김훈의 새 산문집 《연필로 쓰기》(문학동네, 2019)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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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의 음식을 쓰다
아날로그 감성 소환, 을지로 가봤니?
정동현
#정동현




을지로는 곧 사라진다. 이름은 남지만 최소한 알고 지내던 을지로 거리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사라진 곳도 있다. 새롭게 높은 빌딩도 많이 들어섰다. 오래된 거리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건물이 노후되면, 도시에 새로운 쓰임이 생겨나면 세월에 산이 깎이듯 새로운 건물, 새로운 거리가 생긴다. 그럼에도 잊혀지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그리워지고 그리움은 슬픔을 남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을지로로 가는 이유는 곧 떠나보내야 하는 오랜 친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름처럼 옛스런

사랑방 칼국수


을지로1가에서 5가 너머까지 가야 할 곳은 많다. 하지만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듯한 의무감을 떨친다면 또 마음에 담아둔 곳은 몇 되지 않는다. 그중 을지로3가 ‘사랑방칼국수’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의 집에 가는 듯한 곳이다. 인쇄소가 펼쳐진 좁은 골목 사이, 인부들이 인쇄물이 잔뜩 올라간 카트를 밀고 퀵 오토바이가 곡예 운전을 하며 빠져나가는 곳에 ‘사랑방칼국수’가 있다. 



을지로3가에서 충무로 쪽으로 걸어 올라오다 보면 1968년에 문을 열었다는 문구가 맨 앞, 그 옆에 쓰인 ‘어머니의 손맛을 전수재현’했다는 문구가 적힌 간판이 보이면 제대로 찾은 것이다. 옛날 길바닥에 나붙던 대자보처럼 글자가 잔뜩 써 있는 간판은 정신 사납기보단 옛 자취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간다. 



문을 열면 나무로 짠 의자와 테이블이 빼곡하다. 여기저기 초록빛 식물이 자란 화분도 놓였다. 삐걱거리는 의자에 엉덩이를 올리면 ‘보신과 보양에 으뜸 통닭 백숙’, ‘내용있는 음식, 실속있는 식사 백숙 백반’ 같은 옛투에 옛글자체로 쓴 메뉴판이 보인다. 



가게 이름에 ‘칼국수’가 붙은 만큼 멸치육수 향이 진득한 칼국수 한 그릇에 점심을 때우는 이들도 적지 않다. 달걀 투하 여부에 따라 값은 200원 정도 차이가 난다. 김가루와 송송 썬 파, 통깨를 국물에 훌훌 풀고 미끈한 면발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폼새만 봐도 단골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지 않고 빠르게 면을 먹고 냄비째 들고 국물을 마시는 이는 100퍼센트 단골이다. 무채색의 점퍼를 입었다면 확률은 120퍼센트로 치솟는다. 몸에 낀 먼지를 저 밑으로 쓸어내릴 듯 시원한 국물과 배가 부른 칼국수 면을 마시듯 먹는 이들은 점심 나절에 붐빈다. 



닭 반 마리를 국물, 공깃밥과 내놓는 백숙 백반도 점심 메뉴로 빼놓을 수 없다. 절반으로 잘라 스테인레스 접시 위에 척하고 올려 내놓는 백숙 백반은 ‘단백질 한 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영양이 충분하다. 



이 골목에서 온종일 무거운 것을 어깨 위에 지고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수십 년간 먹어왔을 음식이다. 피보다 진한 땀을 흘리고 허기가 졌을 때 기름이 동동 뜬 닭 국물에 흰밥을 말고 뼈에서 살결대로 떨어지는 닭고기를 먹으며 다시 이어질 한나절을 준비했을 것이다.



야들야들 부드러운 닭고기는 평범하게 소금 후추에 찍어도 좋지만 따로 준비된 초고추장에 살짝 찍어도 별미다. 시큼한 산미가 닭고기의 기름진 맛과 어우러져 풍미를 끌어올린다. 칠이 군데 군데 벗겨진 탁자 위에 한 상 차려 먹어도 값은 크게 나가지 않는다. 대신 빨간 김치, 양파 같은 것을 우적우적 씹고 닭다리를 뜯어야 한다. 그래서 배가 부르지 않으면 이 집에 온 기분이 나지 않는다. 또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산업역군’이란 말을 들으며 먼지를 밥처럼 마시고 땀을 물처럼 흘렸던 이들을 추억하노라면 더욱 그렇다. 



           

술 잔 기울이기 좋은

황평집


‘사랑방칼국수’를 나와 을지로4가 쪽으로 걸어가면 역시 닭으로 유명한 ‘황평집'이 있다. ‘사랑방칼국수’에 비해서 유명세는 더 하다. 유명세 때문에 일찍 가서 자리를 잡지 않으면 짧지 않은 줄이 선다. 점심에는 역시 닭곰탕 한 그릇에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닭을 수십 마리 한꺼번에 삶아 낸 국물은 논리적으로 한 마리 넣은 육수와 다를 게 없지만, 또 ‘역시 많이 해야 맛이나’라는 말을 주억거리게 하는 맛이 있다. 



마늘을 듬뿍 넣어 마늘 향이 깊게 벤 육수는 감칠맛이 짝짝 달라붙어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도 입맛을 다시게 된다. 밥 한 그릇 뚝딱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일터로 나가는 이들은 뒷모습을 바라보면 괜히 애잔해진다. 저 이들도 어느 집의 생계를 책임질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그들은 저녁 무렵이 되면 다시 이 집으로 몰려든다. 고개를 탁자에 처박고 숟가락질만 하던 점심 풍경은 없다. 대신 어깨를 쫙 펴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느긋이 술잔을 주고받는다. 냄비에 부르스타를 받쳐 놓고 끓여가며 먹는 닭 전골과 닭 내장탕은 여럿이 어울리기 좋은 메뉴다. 닭 내장탕은 수량이 얼마 되지 않아 금방 매진이 되니 부지런한 사람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집의 대표 메뉴라면 역시 닭찜과 닭 무침이다. 삶았다가 한 소금 식힌 뒤 손으로 쭉쭉 찢어 가지런히 쌓아 손님에게 내는 닭찜은 별 것 아닌 메뉴인데도 계속 손이 간다. 



이유는 먹기 좋게 찢어놓은 정성이 첫째요, 살짝 식혀 쫄깃한 식감을 살린 노하우 덕이 둘째다. 무엇보다 이에 찰싹 감겨 씹히는 닭 껍질을 먹어야 한다. 기름기가 뽀얗게 올라오는 껍질 한 조각이면 앞에 앉은 이와 떠드는 웃음이 한 소쿠리 늘어난다. 



사과를 썰어 넣은 닭 무침은 새콤달콤하다는 수식어가 브랜드 라벨처럼 딱 달라붙어 있는 음식이다. 살짝 강하다 싶은 양념도 이 거리 풍경과 가게 안에 가득 찬 사람들의 열기와 밀도를 보면 또 감내할 만 하다. 여기에 인당 한 그릇씩 퍼주는 닭 육수를 마셔가며 먹으면 그 양념도 역시 계산된 수였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마성의 보양식 초계탕

평래옥



다시 을지로3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역시 닭 무침이 메뉴에 올라간 ‘평래옥’이 있다. 오이를 어슷어슷 썰어 고추가루 양념에 닭고기를 버무린 닭 무침은 반찬으로도 나온다. 하지만 리필은 안 되고 그러다 보니 맛이 그리워 단품을 시키게 되는 게 순서다. 



이 집은 닭으로 하는 초계탕이 또 유명한 집이다. 얼갈이배추를 어슷어슷 썰고 메밀면에 새콤한 동치미 국물을 말아 먹는 초계탕은 아무래도 여름에 먹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날씨가 따뜻해지는 이즈음 미리 초계탕을 먹으며 여름을 예비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아삭한 배가 큼직하게 썰려 들어가 있고 겨자를 살짝 풀어 코를 뻥 뚫리게 하는 매운맛이 감도는 국물을 들이켜면 빨리 여름이 오기를 바라게 된다. 노릇하게 부친 빈대떡도 웬만한 전문점보다 나은 솜씨다. 




담백한 맛이 입안에 감돌고 익숙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좋은 시간은 늘 그렇듯 빠르게 흐른다. 넓게 폈던 한 상도 또 치우고 거둬야 하는 때가 찾아온다. 이 거리도 그럴 것이다. 이 거리를 걷던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