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 스파이시!”
요리사들의 식사 시간, 같이 일하던 한국 요리사가 한국 특산품이라며 뭔가를 끓여 솥째 냈다. 한눈에 봐도 시뻘건 그 무엇, 호기심 많은 몇몇이 젓가락 대신 포크를 대보았지만 다 나가떨어졌다. 오마이갓!
“왓 이즈 잇?”
“잇츠 코리안 누들, 라면.”
득이양양한 미소를 짓던 그 한국 요리사의 얼굴, 반면 입안에 라면을 넣었던 하얀 얼굴의 요리사들은 얼굴이 삶은 랍스타처럼 시뻘개졌다. 한국에서 술 마신 다음 날이면 꼭 끓여먹던 그 빨간 포장의 라면, 외국인들에겐 도저히 입도 못댈 음식이었다. 하긴 나도 외국에 있다 한국에 오면 꼭 며칠을 고생했다. 위가 맵고 뒤가 매워서 말이다.
한국인의 ‘매운맛’
그 고생을 하면서도 외국에 있으면 빨갛게 매운 것들이 자주 당겼다. 지금도 날이 쌀쌀하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속이 허전하면 방법이 없다. 그런 날은 무교동으로 향한다. 낙지 반 양념 반, 고추장, 고춧가루를 아낌 없이 털어넣어서, 한 입 넣으면 입 안이 타들어가고 속이 쓰린 낙지 볶음을 파는 그곳, 단무지나 조개탕이 없으면 도저히 하나를 다 해치울 수가 없기에, ‘이것은 조개탕을 팔기 위한 수작인가’, 라는 음모론을 품기도 하고, ‘왜 이렇게 고생을 하며 이런 것을 먹어야 하나?’라는 자조 섞인 불평을 하지만, 이게 잊을만 하면 나타나는 구남친의 문자처럼, 불현듯 생각이 난다. 그러면 나는 기어코 무교동까지 찾아가 낙지 볶음을 시켜 먹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좀 과하다. 매운 음식 앞에 빼지 않는 대한의 남아이지만, 매운 음식 가지고 외국 친구들 여러번 골려먹었지만, 정도가 지나치다. 조금만 둘러보면 사방천지에 매운맛이다. 동네 뒷골목에도, 명동 사거리에도, 매운 맛을 빼놓고는 식당 장사가 되지 않는다. 흔한 것이 불닭이요, 먹다 보면 화가 나는 그 음식을 사람들은 많이도 사먹는다. 그것뿐인가? 거의 서커스 수준으로 매운 짬뽕에, 매운 짜장면, 매운 떡볶이 등등, 한국 음식은 매운 것 투성이다. 매운 게 문제일까? 문제다. 취향은 존중해주세요, 라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것은 문화현상이고 더구나 좋지 않은 종류다. 간단하다. 너무 매우면 다른 맛들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혹자는 우리 민족은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화끈하게 매운 민족이라고.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며, 이 매운 맛이야 말로 널리 알려야 할 한국의 맛이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한국 사람이 매운 맛을 즐긴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이 정도는 누구나 알지만 고추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후였다. 남미에서 자라던 고추가 세계를 절반이나 돌아 일본에 왔고 그것이 한국까지 전래된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 조상들은 매운맛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백김치만 있던 김치가 시뻘개지고 방방곡곡 고추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얼마전 방송에 이런 내용도 나왔더랬다. 1924년 조리책에 보면 맨드라미로 붉은색을 내라고 할 정도로 고춧가루가 귀해 배추 한 포기에 밥숟가락 하나 정도만 넣었다는 것이다. 멀지 않은 과거인 70년대에는 28그램 정도로 늘었으나 여전히 적은 양이었던 것이 2000년 이후에는 포기당 71그램으로 늘어 80여 년 만에 김치가 12배 매워졌다는 기사였다(2015.4.21. MBC). 매운 맛으로 신문을 검색해봐도 그 추세를 알 수 있다. 1900년대에는 거의 검색되지 않던 ‘매운’이란 키워드는 2000년 대로 향할수록 꾸준히 증가한다. 인기 상품도 그렇다. 아직까지 건재한 ‘불닭’이 처음 선보인 것도 1990년대 후반이었다.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1999년 히트 상품 중 하나가 ‘매운콩라면’이었다.
우리만 맵게 먹는게 아니라며, 중국의 사천음식, 똠양꿍으로 대표되는 태국 음식, 그리고 빈달루(vindaloo) 커리를 먹는 인도처럼 매운 음식 먹는 나라가 많다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맵다고 소문난 그것들도 한국 음식의 맵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먼저 스타일이 다르다. 사천, 타이 음식의 매운맛은 아웃복서의 날카로운 잽 같다. 특히 사천의 매운맛은 사천 후추, 외국에선 시쯔완 페퍼라고 부르는 ‘초피’가 주인공이다(흔히 산초로 아는데 초피와 산초는 엄연히 다르다. 추어탕어 넣어먹는 그것은 초피가 맞다). 고추가 들어오기 전 한국에서도 매운맛을 담당했던 이 초피는 날아갈듯 가볍게 맵다. 뒤로는 시트러스류의 경쾌한 향을 남기는데 그래서 빨래비누 맛이 난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는 그 맛과 향이다. 태국의 매운맛도 비슷하다. 향은 덜하지만 매운맛을 쓰는 방법은 여자들이 반짝이는 악세서리를 하듯 맛에 악센트를 주기 위함이 보통이다. 인도 고아 지방 원산의 빈달루 커리는 한국의 매운맛과 비슷하다면 가장 비슷하다. 밑에서부터 천천히 달아오르는 매운맛이다. 무게감은 글쎄, 제대로 맞아 본 적은 없지만 중량급 복서 정도 될 것 같다. 게다가 시큼하고 향신료의 향도 복잡다양해 마치 기교파 선수를 보는 것 같다. 반면 한국의 매운맛이란 헤비급 복서가 내민 묵직한 펀치 같다. 맞으면 퍽하고 날아갈 것 같은. 근래에는 태반이 공장표 고추장으로 매운맛을 내는데, 그 맛이란 고추장의 물성처럼 무겁고 질척인다. 고추장만으로는 날카롭고 짜릿한 매운맛을 낼 수가 없으니 이름부터가 화학약품스러운 ‘캡사이신’을 따로 넣는다. 비타민 C처럼 자체로는 향과 맛이 없는 이 캡사이신이 매운맛의 근원이다. 매운맛으로는 맛이 비는 듯하니 설탕 물엿을 팍팍 집어넣는다. 달고 맵고, 아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고 서서히 중독되어 도저히 끊을 수 없는, 널리 알리고 알려야 하는 한국의 매운맛이 이렇게 탄생한다.
왜 우리는 매운맛에 중독될까?
여기서 매운맛이란 무엇인지 한번 집고 넘어가야겠다. 매운맛이란 맛이 아니다. 통증이다. 혀를 얼얼하게 하고 귀까지 멍멍하게 하는 이유는 매운맛이란 통증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리 사람들은 매운맛에 ‘홀릭’할까? 왜냐면 매운맛이 가져온 통증을 이겨내고자 뇌에서 ‘엔드로핀’을 내뿜어서 그렇다. 행복 호르몬이라고 알려진 그 엔도르핀이 맞다. 이 천연 마약 엔드로핀 때문에, 사람들은 매운맛에 ‘중독’ 된다. 그럼 왜 하필 우리는 매운맛에 중독되었을까?
앞서 적었듯 매운 음식을 먹으면 엔도르핀이 나와 스트레스가 풀린다. 내가 생각한 답은 간단히 이렇다. 한국 사회는 스트레스가 심하다. 스트레스가 쌓인 사람들이 해소 방법을 찾는다. 한국에는 매운 음식 전통이 있다. 되먹임 과정을 통해 매운 음식이 붐을 일으킨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간단한 고리다. 소득격차는 커지고 물가는 오르나 가처분소득은 그만큼 증가하지 못했다.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많은 우리나라는 집에서 요리할 시간도 많지 않다. 돈은 없고 스트레스는 받고 시간은 없으니, 싸고 매운 식당 음식을 찾는다. IMF 직후 급격히 대학가를 점령하던 불닭집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매워지던 음식들, 심지어 요리사들도 겁이나 만지지 못하는 그 독하게 매운 것을 입에 넣고는 우는지 웃는지 모를 그로테스크한 표정을 짓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더구나 매운맛이 재료의 질은 두꺼운 화장을 칠한 것처럼 감쪽같이 감춰 버리니 원재료 값을 낮추는데 이만한 효자가 없다. 어딜 가나 똑같이 십 킬로 단위 담은 덕용 고추장을 쓰니 조선 팔도 음식 맛이 비슷해졌다. 매운맛의 악순환이다.
나도 이 악순환의 고리 안에 있다. ‘미쳐야 미친다’며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외치는 이 땅에서, 독하지 않고는 ‘열정’이 없고 ‘패기’가 없다며 핀잔이나 듣는다. 매번 이를 악물고 파이팅을 외치다보니 몸에 순한 것이 맞지 않는다. 국산에 태국산 종자를 교배해 만든 청양고추를 공장표 고추장에 찍어 아삭 깨물고, 알콜에 조미료를 타고 물을 섞은 희석식 소주를 마셔야만 이 독하디 독한 하루가 끝이 난다. 어쩌겠나, 어젯밤 마신 술에 위장은 또 매운 것을 부르고, 어느덧 그 독한 것들에 인이 박혀버렸으며, 버텨야할 하루가 또 찾아오는데.
“여기 고추 짬뽕이요!”
오늘도 나는 고추장 먹는 싸움닭처럼 그 독한 것을 들이키며,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을 흘려보낸다. 먹고 살기 참 매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