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왈종 선생님의 그림에 대한 생각(출처:왈종미술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이왈종이 어떤 화가인지.
“나는 1945년 해방 전에 태어났어요. 그래서 잘 먹지도 못하고 병약했고, 우리 부모님이 내 작은 손을 보시면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거라 했어요. 그래서 난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예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그는 천상 타고난 화가였습니다. 늘상 타고난 천재화가들이 그러하듯.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미제 구호물품을 받을 때도 초콜릿이나 과자가 걸리면 나는 친구들과 크레파스로 바꾸어 쓰곤 했어요”
먹을 것이 목마르게 그리운 시절에도 그는 입에 풀칠보다 그림이 더 행복했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그가 살고 있는 제주의 매주 물감을 대주며 황금 같은 7순의 연세에도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디다 눈을 맞추어도 꿈같고 정말 아름다운 풍경, 제주 서귀포시 정방폭포 옆, 영국의 유명한 조각가 안토니 곰리의 조각이 왈종의 나라에 온 것을 환영하는 이왈종 미술관 정원에는 사시사철 이름 모를 꽃들이 앞 다투어 미치도록 피어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 ‘제주왕국의 화가’가 되다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제주왕국의 화가’ 이왈종(출처:왈종미술관)
그가 서울을 버리고 제주 서귀포에 마음을 놓은 지 어언 24년,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이지만 더 이상 서울의 화가가 아닌 ‘제주 왕국의 화가’입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이우종(李禹鍾). 아주 오래 전 그는 한 점만 출품해야 하는 국전에 욕심을 내어 작품을 한 점 더 내기 위해 스승의 달콤한 조언을 듣고 ‘이왈종’과 ‘이우종’으로 두 점을 출품했고, 묘하게도 ‘이왈종’으로 출품한 작품만 입상을 하여 하루아침에 그의 이름 우종은 왈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예술의 신은 우종을 버리고 왈종으로 그의 화가의 운명을 바꿔 놓았습니다. 이렇게 생애의 기막힌 개명의 변신을 그는 거부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아마도 그가 평생의 운명적인 ‘제주 생활 속의 중도’를 그대로 받아 들였던 것처럼 그의 심경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의 화가로서의 전성기는 1979년부터 90년까지 재직했던 대학교수를 그만두면서부터일 것입니다. 추계예술대학에 갈 때 만 해도 교수는 5년만하고 그만 두겠다던 약속을 그는 11년이나 하고 나서야 평생 화가로서 그리고 싶은 그림이나 실컷 그리다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이루 수 있었습니다.
그가 길도 낯설고 물도 낯선 제주에 간 이유는 이렇게 아주 분명했고 아주 단호했습니다. 서울에서 훈장 노릇을 하면서 수 없이 열리는 제자들 전시와 애경사, 그리고 이런 저런 모임과 회의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교수도 버리고, 서울도 버리고… 마치 고갱이 파리의 화단을 버리고 타이티로 간 그 심정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진정 욕심 부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그림만 그리기를 간절하게 목말라했고 갈망했습니다. 일찍이 가정에 무관심 했던 부친의 삶에 힘들어 했던 어린 시절, 그에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오로지 작품을 위해 불확실한 전업 작가로서 그가 선택한 제주행은 죽기 살기를 건 인생 최고의 불량배 같은 모험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스스로를 고립시켜 승부를 걸고 싶었어. 뭐든지 몰입하지 않으면 안 돼. 치열해야 해. 그때 판단이 옳았던 거야.” 라고 그는 그 순간을 종종 회상하곤 합니다. 제주라고 서울서 갓 내려온 그에게 흔쾌히 텃세 없이 서귀포를 내어주지는 않았습니다.
노력하는 화가의 ‘노력에 대한 신념’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 2010 (출처:왈종미술관)
그는 한국의 잘나가는 인기 작가이지만 결코 천재화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말 죽을힘을 다하여 그림을 그렸고 화가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작품 제작에만 몰입 했던 제주에서의 초기 이방인 생활은 그에게 오히려 쓸데없는 잡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는 서울 생각이 너무나 간절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의 긴 날을 그림이라는 가혹한 노동으로 몸을 혹사시켜 잡념들을 피해야만 겨우 단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 수 없는 불면증의 시간들이 이왈종을 서서히 화가로 길들였습니다. 이제 20년이 넘어가니 이곳 제주 생활이 겨우 조금 편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서울에서 살았나 싶을 정도로. 그는 철학자 칸트처럼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어김없이 저녁 9시에 잠을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 삼경에 붓을 들고 화폭에 빠져듭니다. 한결같이 수십 년을. 그런 제주도를, 서귀포를 그는 자연경관이 참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제주도를 알려면 태풍이나 일몰을 꼭 봐야 하는데 10월은 일몰이 정말 아름다울 때라고 했습니다. 일몰을 보면 가끔은 자살충동이 일어날 정도라고 합니다.
“난 일몰을 보려고 오후 4시쯤 나가서 일부러 서쪽해변을 따라 걸어갑니다. 태풍이나 일몰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작업화하기 위해서 머릿속에 입력을 시켜둔답니다. 사물을 보고 그것을 그대로 스케치 하는 것보다 머리 속에 일단 입력했다 재구성해 가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죠.”
그는 이렇게 모든 스쳐가는 풍경들을 눈에 담아 스케치북 없이 눈으로 스케치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적으로 스케치하는 것보다 상상이나 확대의 공간이 훨씬 커지기 때문입니다.
“난 일몰, 벼락, 태풍 칠 때면 잠을 안 자요. 항상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고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의해 충격요법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태풍이 몰아 닥칠 때는 긴장감도 있고, 어떤 뜨거움이 일어나는 것을 느껴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채운 서귀포에서의 24년
|이왈종 선생님의 도자기 작품 (출처:왈종미술관)
그는 이렇게 지천명의 나이를 넘은 지금도 예술가로서의 천형 같은 긴장감을 갖고 살기를 자청했습니다. 처음 서귀포로 내려올 90년대 초, 서울 생활을 접을 때 열이면 열 사람이 다 만류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이 2채 있었는데 그것을 팔면 5년은 먹고 살 것이라 생각하고 작업실을 제주도에 마련해 놓은 상태에서 5년만 실컷 그림 그리다 죽자는 이판사판식 극단적인 생각으로 낙향을 한 것입니다.
|이왈종 선생님의 아트 상품 분꽃원형접시(좌), 물고기 수저 받침대(우) (출처:왈종미술관)
그런데 사실은 제주도에 내려와 너무나 외로웠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작업실에서 파리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만 봐도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는 제주생활 초기 붓을 꺾고 장지로 부조 작업을 하거나 다시 환조로 입체 작품에 탐닉하는 등 조각부터 목판, 향로, 대형 입체 조각, 판화, 도판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전방위적 예술 작업을 펼쳤는데요. 이 결과물은 바로 이런 외로움의 끝에 가져다 준 피캍의 눈물과 맞바꾼 선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열정은 결코 파블로 피카소에 뒤지지 않습니다. 회화는 물론, 조각, 판화, 또한 흙으로 만든 둥글고 네모난 도판, 아트 상품, 모자, 넥타이, 시계, 컵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미술관 입구 드롭 탑의 아트 콜라보레이션은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열정의 눈물방울 같은 것입니다.
너무나 귀엽고 아름답고 장식적인 멋, 금판에 새긴 춘화와 골프공까지 그의 작품들은 마치 모든 예술의 결정판 같습니다. 샤갈이나 피카소가 마치 말년에 프랑스 남불 마두라에 내려가 도자기를 구운 것과 이왈종의 서귀포 24년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가 해놓은 10여 년 전의 돌 조각과 엄청난 양의 미공개 대작들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 작업들을 혼자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채 <왈종 후연 미술문화재단>에 공개되지 않은 주옥같은 작품들의 숫자를 보면 그의 방대한 작업량에 사실 악소리가 날 정도입니다.
이왈종 작가는 삶에 있어서도 정말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화가입니다. 전시를 열 때마다 번거로워 하지 않고 손수 도록 앞에 드로잉을 그려주는 친절함과 배려를 지닌 작가를 난 본 화가가 없습니다. 그렇게 10만 원짜리 화집 앞면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이 100만원이 넘게 경매에 거래된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삼십여 년을 매일 9시경에 잠들어 새벽 2~3시면 일어나서 구상하고 스케치하고 작업을 하는 그것이 이왈종의 감추어진 참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