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를 기준으로 꼭 지구 반대편. 비행기를 12시간 이상 타고 가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그곳. 반도네온의 슬픈 선율과 역설적으로 격정적인 탱고에 관능 서린 삶미 역동적으로 춤추는 곳, 장국영의 우수 어린 눈빛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곳이자 태양의 발자국이 남아 사람들의 심장을 데우는 곳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입니다. 글 이수호 / 여행작가



익숙한 일상으로부터의 ‘탈피’
세상의 땅끝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만나보세요


찬란하게 비극적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체성, 탱고

19세기 서글픈 이민선에 실려 부에노스아이레스 보카 항구로 들어온 악기 반도네온. 반도네온 연주곡은 고된 타향살이에 지친 이민자들의 향수와 슬픔을 달래는 음악이 됐고, 그 우수는 TANGO라는 음악이자, 춤의 한 장르로 발전했습니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떠도는 삶의 설움을 담아 시작된 TANGO는 이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체성이자 정신적 산물로 자리잡았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거리 곳곳에서 여행객의 눈을 사로잡는 탱고쇼가 펼쳐집니다. 공연장이 아닌 거리에서 즉석으로 펼쳐지는 관능적인 탱고쇼를 관람하고 나서야 비로소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왔다는 것이 실감납니다.

한편 192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끈 탱고는 1970년대에 이르러 침체기를 맞이하는데요. 이 때 아스트로 피아졸라라는 반도네온 연주자가 전통 탱고에 클래식과 재즈를 가미한 누에보 탱고를 개척해 다시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누에보 탱고의 낭만에 빠진 사람들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하네요.
놀랍고도 아름다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매력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탱고만 있다고 생각하면 섭섭합니다. 역사는 그리 길지 않지만 어메이징한 볼거리들이 곳곳에 놓여있거든요. 우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네오가 있습니다. 20세기 초의 극장을 개조한 곳인데요. 최초의 유성영화가 상영된 곳이자, 20세기 초 위대한 탱고CD들이 녹음된 곳이기도 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본명은 ‘탱고의 도시’, 애칭은 ‘책의 도시’랍니다. 엘 아테네오 덕분에 붙은 애칭이죠.


한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가 있습니다. ‘7월 9일대로’라 불리는 곳인데요. 아르헨티나의 독립과 통일을 기념하며 지어진 공간입니다. 폭이 140m에 육박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대로로 통한다네요. 건널목을 건너는 데만 5분이 넘는답니다. 길을 건너다 지루해지면 도로중앙에 우뚝 솟은 오벨리스크를 바라보세요. 19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 400주년을 기념하며 만들어진 기념물입니다.

햇살 닮은 색을 거리에 담은 공간, 보카


BOCA지구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소개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옛 항구였던 이곳은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 이민자들이 번뇌와 외로움을 춤과, 노래와, 그림으로 풀어냈던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보카의 카미니토(Caminito) 거리는 이탈리아계 항구 노동자들이 알루미늄벽에 칠해놓은 색으로 화사하게 빛납니다. 카미니토 거리뿐만 아니라 보카 지구 곳곳은 햇살을 닮은 색으로 칠해져 밝게 빛납니다. 탱고의 황금기에는 자유분방한 연주자들의 터전이었다가, 지금은 여행객들의 핫스팟으로 시대에 따라 그 위상과 역할을 달리하는 곳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길거리 연주자와 댄서, 오래된 카페 등 사람들을 매혹시킬 보석 같은 공간들이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풍미로 남미의 자존심을 지킨다, 와인과 소고기


아르헨티나에 왔으면 소고기를 먹어봐야죠. 팜파스 대평원을 자유롭게 뛰노는 소들의 육질은 가히 일품입니다. 아르헨티나의 번화가를 걷다 보면 쇠고기를 굽는 냄새를 심심찮게 맡을 수 있습니다. 달콤한 육즙이 줄줄 흐르는 고기 한 점을 먹으면 왜 아르헨티나 쇠고기가 세계 최고인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소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주는 아사도(Asado) 요리가 유명한데요. 등심, 안심, 꼬치구이 등 부위 별로 기호에 맞게 드시면 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와인 한 잔도 잊지 마세요.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크고 작은 와이너리가 맛있는 와인을 품고 있습니다. 유명한 와인들이 정말 많지만 아르헨티나에 왔다면 말벡(Malbec)을 꼭 마셔보세요. 아르헨티나의 국가대표급 레드 와인입니다.






예술적 영감을 주는 몽환의 도시
예술적 영감을 주는
몽환의 도시
“
당신이 탱고를 추는 오후는
잠 속의 내가 리듬을 잃는 시간
손끝이 천천히 지워지는 당신의 자정은
내가 오늘의 사건 사고란을 읽는 시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오에는 그림자의 목이 사라지고
그늘 속의 눈 코 입이 자정의 내 얼굴을 닮아가고
우리는 서로 발바닥을 맞댄 채
지구를 움직였다. (…)
”
이장욱 시인의 ‘아르헨티나의 태양’이라는 시 일부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 때문에 다양한 예술작품의 공간이나 소재로 활용되곤 합니다. 우선 구스타보 타레토 감독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2013)은 고독하고 삭막한 삶을 이어가던 남자 마틴과 여자 마리아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결국 연인으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영화,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대한 오마주’라는 감독의 말이 인상 깊습니다. 장국영(보영)과 양조위(아휘)의 불안한 사랑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독특한 풍경과 함께 표현되고 있죠.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느꼈다.
내 과거라고 믿었던 이 도시는 나의 미래이고, 또 나의 현재이다.
유럽에서 산 날들은 하나의 신기루였고, 나는 항상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었고,
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을 것이다.
”
낯선 경험, 새로운 가치, 그리고 잊지 못할 기억,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