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 이제는 '자소서'라는 말이 더 익숙한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정말 할 말이 없어도 이 말 만은 쓰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던 문장이 하나 있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를 읽은 사람들 중에서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뭉클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한참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이 구절은 큰 위로와 힘이 됐다. 워낙 유명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말은 그 시절에는 더욱 유행처럼 자주 회자됐더랬다. 아마도, '듣고싶은 것 위주로 듣는' 경향이 있는 나라서, 취업이 간절하고 절박했던 처지로 인해 이 말이 더 자주 귀에 콕콕 박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였는지 나와 비슷한 처지의 많은 '취준생(취업준비생)'들은 "당신의 좌우명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질문에 정성들여 이 문장을 한자 한자 적어내려갔다.
이제 10년차에서 조금 모자란 9년차 사회인이 된 나지만 여전히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내 소망을 이뤄줄 것'이라는 말에 매달려 위로받곤 한다. 물론 이제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는 조금 달라졌다. 나는 내집 마련을 위해 열심히 주택 청약을 넣고 있지만 2년이 넘게 족족 떨어지고 있다. 그때 이 말을 되새기며 다음 청약을 기다린다. '언젠간 우주가 나를 도와주겠지, 온 우주의 기를 모아 다시 한번 넣어보자, 한 번은 안 되겠어'. 한참 아기를 갖기 위해 준비를 하면서도 저 말을 되새기곤 했다. '온 우주의 기를 모아서...' 앗! 이 얘기는 자칫하면 19금이 될 수도 있으니 여기까지만 하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책을 읽은 이후 10년이 넘게 이 구절을 붙들고 있으면서 도대체 왜 그때 자기소개서에 절대 이 문장을 넣지 않겠다고 결심했는지를 털어놓겠다. 일단 '뻔해서'였기도 했고, 두번째로는 '없어보이기'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은 없어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 없는거다. 뭐가? 그 간절함을 이루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말이다. 이 문장만 놓고 보면 '간절함=결실 혹은 성취'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나를 뽑아줘야할 사람들에게 '네가 나를 뽑아주게끔 온 우주가 돕고있으니 넌 날 뽑아야해'라는 주문같은 말을 해서 뭐하겠는가. 정말 말 그대로 '어쩌라고' 다. 참, 절대 오해하지 마시라.이 소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굳이 비난을 한다면 그 대상은 한 소년이 순례를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한 권의 긴 소설을 이 한문장으로만 요약하고 기억하는 나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않을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더더욱 느낀 점은 '간절함' 만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우리는 때로 그 간절함이 우리의 세계를 바꿔 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차마 놓지 못한다. 특히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착각'을 통해 위안을 삼는 경우가 있다. '와, 저 사람은 얼마나 운이 좋았으면 저 자리에 섰을까' 하면서 말이다. '나도 아이템만 잘 잡으면 저렇게 사업을 해서 돈을 쓸어담을 수 있을텐데, 누가 나한테도 저런 획기적인 사업아이템 하나만 던져주면 바로 회사를 그만두겠다' 이라는 생각을 해 본 게 나 혼자만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얼마전에 만난 한 젊은 창업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같은 생각을 했다.
'아, 정말 온 우주가 당신을 돕고 있구나. 운이 참 좋은 사람이다. 나한테도 저런 운이 따라줬으면.'
나보다 고작 한 살이 많은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많은 '대표'들과는 조금 달랐다. 어느 인터뷰 날에 약속된 장소에 나가봤더니 머리가 희끗하고 카리스마 있는 눈빛을 가진, 누가봐도 '사장님'인 중년 노신사가 아니라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청바지를 입은 앳된 여성이 앉아있었다. 음식관련 쇼핑몰의 창업자이자 대표인 그녀를 보고 '멋지다'를 연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배가 아파왔다는 사실을 고백하겠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그녀에게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물었다. 대답은 너무도 단순했다. '먹을 것이 좋아서'였단다. 당장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고, 다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식재료를 구입해보고 요리를 하고 틈나는 대로 맛집을 찾고 사진을 찍는 '음식 덕후'였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먹기좋아하는' 다른 여자애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런 그녀를 정말 '온 우주가 돕는' 사건이 하나 생긴다. 마치 '키다리 아저씨' 처럼,한 사내가 눈 앞에 나타나 '원하는 만큼 투자를 해 줄테니 네가 원하는 사업을 마음껏 펼쳐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 온 것이다. 세상에, 이것이야 말로 진짜 우주가 내려준 '굴러온 떡'이 아니냔 말이다. 배가 아플 뿐 아니라 속이 쓰리고 머리까지 띵했다. 아,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일은 왜 그대에게만 일어나고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가.
누군가의 성공 스토리를 다룬 책이나 인터뷰는 이런 '신데렐라' 스토리를 좋아한다. 인터뷰 기사를 쓰는 나 역시도 그녀의 이런 '우연이 가져다준 성공 스토리'를 가장 먼저 부각시켰을 것이다. 그래야 더 주목도가 있을테니 말이다. 수 년간의 인생 스토리를 짧은 글 속에 담으려면 이 중 가장 재미있는 요소를 뽑고 요약하고 요리하는 과정을 거쳐야한다. 특히 요즘같이 단 몇개의 문장과 사진 만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카드뉴스' 같은 글들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조금 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에게 '굴러온 떡'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떡을 굴린 장본인은 우주가 아닌 그녀 자신이다. '먹을것을 좋아하는 여자애'이던 그녀는 꾸준히 식재료를 살피고 좋은 재료를 얻기 위해 전국의 농장을 직접 찾아다닌다. '이 농장 재료를 소비자가 살 수 있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품는다. 신혼여행은 휴양지 대신 프랑스 미식여행을 택했다.직접 클렌즈쥬스 레시피를 개발하고 정리해 만들어보고, 세계의 유명한 식재료 매장을 꼼꼼히 모니터링 했다.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면서 다양한 유통기업을 상대하며 유통시장과 물류시장에 대해 공부하고 주변인들에게는 농반 진반 '언젠가는 음식쪽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말을 던지며 꾸준히 자신의 꿈을 알렸다. 그런 끝없는 관심과 움직임을 눈여겨본 지인이 때마침 식재료와 음식과 관련된 사업을 생각하고 있는 투자자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살짝 전한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엔젤투자자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차 한잔 하자'고 제안해 왔을때 그녀는 처음 보는 한 중년 남성 앞에서 별 다른 준비 없이도 자신의 능력을 솔직하게, 그리고 여지없이 '프레젠테이션' 한 셈이다. 그리고 그 투자금을 수십 수백배로 불려나가서 사업을 키우고 안착 시켜 진짜 결실을 맺기 까지의 과정도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앞으로 이 사업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노력도 계속 되어야만 한다. 그녀의 삶에서 운이 따라줬던 것은 분명하지만, '운'이나 '우연'만으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미국 드라마의 유명 대사처럼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것이다.
이쯤에서 연금술사라는 소설에 담겨있던 '잊고싶었던' 몇개의 문장을 꺼내본다. 밑줄까지 칠 만큼 공감 했지만 결국에는 마음속에 담지 않았던 문장들이다.
"하늘 아래 일어나는 모든 일의 결과를 어찌 그대의 고통과 멀다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들은 하나야"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되고,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 것이네"
성공과 결실은 어려운 고비를 넘어서야만 찾아온다는 사실을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 없이 말하고 있다. 이 문장들은 소설을 수 차례 읽은 내가, 아니 우리가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구절일 지 모른다. 오늘을 살면서 자꾸만 눈을 감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버리면, 우리 인생도 브라질 평론가가 소설 연금술사에 대해 내린 악평처럼 '현실의 복잡한 갈등구조를 마술과 신비주의 같은 달콤한 마취제로 얼버무릴 뿐'인 저급 소설로 전락해버릴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