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회사는 누군가는 항상 주말이나 휴일에 일해야 한다. 월요일에 두툼한 신문이 나오려면, 누군가는 주말에 기사를 준비하고 지면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주말이나 휴일에 근무하면 특근수당을 받는다. 이 수당은 꽤 오랫동안 인상된 적이 없어서 친한 회사 선후배들끼리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은’돈도 아니므로, 의외로 많은 사람은 이 수당을 위해 자발적으로 주말 근무를 택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회사 규정에는 주말 출근을 하면 ‘특근수당’과 ‘대체휴무’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있지만, 주말에 나온 대신 평일에 하루를 쉴 수 있는 대체휴무를 선택할 ‘용자(용기 있는 사람)’는 거의 없다. 회사 분위기도 분위기이지만 대체휴무를 쓸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쉬면 내 일을 누군가가 떠맡아야 하는데 각자의 업무량이 많아 다른 사람의 일을 대신 해 줄 여유가 없다. 그리고 인수인계를 하기가 어려워 ‘무조건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이럴 경우 휴일이라도 호출되는 경우가 상당수이다.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로, 괜히 대체휴무를 선택했다가는 돈도 날리고 휴가도 날리는 상황이 생기고 만다.
‘휴무’에 자유롭지 못한 서글픈 우리 존재들
회사는 나에게 돈과 휴무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직장인은 주말을 비롯해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할애한다. 주말 근무수당은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다고 해도 야근수당은 초과근무를 넘어서지 않는 이상은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럴 경우는 그야말로 무료봉사를 해야 한다. 그래서 대기업에 다니는 내 친구는 잔업이 남아 퇴근 시간인 6시를 넘기게 되면 아예 밤 10시까지 사무실에 둥지를 틀고 있다. 9시에 일이 끝나고 퇴근하면 수당이 없으니 다음날 할 일을 당겨 하더라도 한 시간을 더 버티는 것이다. 그가 4시간을 더 일하고 버텨서 버는 돈은 고작 2만 원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있다고 해도 월급 받는 입장에서 회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도무지 바뀌지 않는다. 또 다른 나의 가까운 친구는 어떤 아침에 갑작스러운 허리 통증으로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결국, 그는 출근하는 대신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에 갔다. 응급 처치를 하고 겨우 몸을 추스르고는 바로 회사 상사에게 전화했는데, 상사가 그에게 한 말은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그래서, 출근을 언제하겠다고?”
물론 모든 상사가 이만큼 비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좋게 해석해 보기로 했다. 얼마나 내 지인이 ‘능력자’였으면 상사가 그의 아픔과 처지 보다 그의 빈자리부터 걱정했을까. 아이고 장하다, 수술 날짜를 잡으면서도 눈치를 봐야 하는 내 친구!
이토록 서글픈 ‘우리 존재들’에 대해 떠올리며 나 역시 결국 겉보기에는 자발적으로, 사실은 매우 비자발적으로 ‘대체휴무’대신 ‘특근수당’란에 체크를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제발 수당을 한 푼도 받지 않더라도 내가 일한 주말을 휴무일로 보상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직은 돈 대신 시간을 귀하다고 여기는 내가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앞으로도 그런 선택을 원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말이다.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런 선택을 원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 구체적으로는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주저 없이 돈보다 시간을 택할 수 있는, 그런 처지의 중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는 상관없이 처지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할 테니까.
나를 위한 주말의 가치가 인정받는 그날까지!
여기에 조금 더 보태자면 나는 금요일 저녁에 회사 동료를 포함해 일과 관련된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거기에 금요일 오후 6시까지 충분히 우린 함께 하고 있잖아? 이미 그 시간만 다 합쳐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길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는 나와 가족을 위해 쓰고 싶다.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엔 이 생각을 원칙으로 삼겠다고 다짐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런 다짐을 호기롭게 하고 있는 사이 회사 선배가 불금에 잡힌 본인의 약속에 동참하라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취재와 관련된 꽤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자리였다. 물론 나는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선배에게 충성스러운 답변을 보내고는 원칙주의자가 되기는 글렀구나, 하며 자리에 앉아 웃었다. 역시 허세는 일기장에서나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그래도 작은 기대는 해본다. 내가 계속 사회생활을 해 나간다면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 가치를 나중에도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면 말이다.
내 선배들이 치열하게 직장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민을 한 세대라면 나는 치열하게 내 삶과 하루를 지켜내기 위한 고민을 하는 세대이니까, 일만큼 시간의 가치를 귀중히 여기는 내가 매일, 매달, 매년 이 가치를 부여잡고 있다면 언젠가는 바뀌겠지.
그래, 이럴때 쓰는 말은 아니지만 시간이 정말 약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