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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해링(Keith Haring) 편
장우진

키스 해링(1958~1990)의 작품은 단순하고 뚜렷한 외곽선, 강렬한 원색의 생동감,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화면 구성으로 누구라도 한 번 본다면 잊을 수 없습니다. ‘키스 해링’이라는 화가의 이름을 모른다 해도 여러분은 이미 거리의 벽면이나 장난감, 티셔츠나 가방, 다양한 대중문화 속에서 그의 작품을 만나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키스 해링은 왜 캔버스가 아닌 거리와 전철역, 클럽이나 병원의 벽면에 그림을 그린 것일까요?



거리, 캔버스가 되다



(이미지 출처 ullstein bild via Getty Images / 이매진스)


키스 해링은 펜실베이니아 레딩에서 태어나 근처 소도시인 구츠타운에서 자랐습니다. 격변하는 60~70년대 미국 사회 속에서 소년 키스 해링은 <룩>과 <라이프> 지를 통해 동시대의 정치적 사건들을 접했고, TV로 닥터 수스와 월트 디즈니의 만화를 보며 드로잉의 감각을 키웠으며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과 원자폭탄의 위험성, 베트남 전쟁을 목격했습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사회는 급변하고, 반전과 성에 대한 자유를 부르짖는 운동이 한창일 때 십대를 보낸 그는 유독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의 예술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1978년 스무 살에 뉴욕 시각예술학교에 입학한 해링은 행위예술, 비디오아트, 설치미술 및 콜라주기법 등을 시도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발전시켜나갔고 다양한 대안 예술 공동체와도 교류합니다. 1980년 해링은 더 많은 사람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고 싶은 열망으로 거리로 나섭니다. 뉴욕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주변 환경에 관심을 기울인 그는 지하철 안팎에서 눈에 띄는 낙서와 광고판에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는 검은 종이로 가려놓은 빈 광고판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해링은 사람들 속에서 그림을 그렸고, 거리는 그의 캔버스이자 ‘실험실’이 되었습니다. 단순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그의 그림은 우중충한 뉴욕 지하철의 분위기를 바꾸며 단번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때부터 ‘빛나는 아기’는 해링의 태그(거리의 화가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서명 같은 것)가 되었고 해링은 그 이유를 “인간 존재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긍적적인 경험이 바로 아기이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팝아트의 슈퍼스타



 (이미지 출처 Getty Images / 이매진스)


지하철 그림으로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된 해링은 1982년 자신만의 전시회를 여는 기회를 가집니다. 이때에도 키스 해링은 전통적인 캔버스가 아닌 공업용 비닐 방수포에 그림을 그리며 기존의 미술에 도전했습니다. 방수포는 가격이 쌌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이즈로도 제작 가능했고 또한 반짝거리는 색의 표현도 뛰어났습니다. 전시 이후 해링은 예술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있는 대형 광고판에 해링의 작품들이 30초짜리 애니메이션으로 상영되는가 하면 세계 곳곳에서 해링의 작품에 관심을 보여 작품 제의가 쇄도했습니다. 단시간에 해링의 이름과 예술은 널리 알려졌고, 해링은 앤디 워홀, 바스키아와 같은 미술가뿐만 아니라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 당대 최고의 대중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영감을 주고받았습니다. 이런 그에게 <뉴욕 타임즈>는 “팝아트의 아버지가 앤디 워홀이라면 팝아트의 슈퍼스타는 키스해링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해링이 단번에 아티스트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해링이 자신의 작품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대중에게도 예술을 즐길 권리가 있다. 예술은 만인을 위한 것,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예술을 고집스레 추구하는 건 자기를 과시하는 허튼 수작일 뿐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뉴욕의 소호 거리에 자신의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를 파는 가게 ‘팝 숍’을 열어 소비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적절한 가격에 살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해링은 자신의 작품이 문화의 한 부분이 되기를 바랐고 그것은 예술과 예술가의 개념을 넓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아동 건강, 마약과 에이즈 퇴치 운동, 반전과 반핵, 인종 차별 반대 등 사회문제에도 적극 참여하는 정열적인 사회운동가였습니다. 그가 공공장소에서 작업 할 때면 언제나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담긴 스티커, 배지, 색칠용 그림책 등을 무료로 나눠주며 즐거이 사람들과 소통하며 작업했습니다.



거리의 춤, 작품이 되다



| 뉴욕 휴스턴 스트리트에 있는 해링의 벽화, 1982년 (이미지 출처 Getty Images / 이매진스)


해링에게 벽화 작업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또 해링의 그림에는 브레이크 댄스의 헤드 스핀, 한 손을 바닥에 대고 회전하는 동작, 프레첼처럼 매듭진 두 다리, 둘이서 짝지어 균형을 잡는 모습, 바닥에 두 손과 두 발을 댄 채 허리를 활처럼 휘어 만든 브리지 자세 등 춤추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담겼습니다.


해링의 작품에 사회비판적인 내용만 담긴 것은 아닙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그림 속 인물들이 튀어나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함께 춤을 추자고 할 것만 같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리듬과 춤이 있습니다. 해링은 힙합의 볼륨을 최대한 높이고 작업하곤 했고 주말이면 클럽 파라다이스 개라지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열정적인 춤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관찰력으로 지하철역과 클럽에서 만난 춤꾼들의 힙합, 브레이크 댄스, 로봇 춤, 카포에라의 움직임들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그는 특히 춤꾼들 간의 끈끈한 동료애에 주목했습니다. 해링은 춤의 많은 부분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밀접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춤을 추면서 위에 올라선 사람의 안전은 밑에 있는 사람의 체력과 민첩성에 달려 있습니다.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될 수 있는 춤의 끈끈하고 온유한 협동정신에서 해링은 사회적 진실과 영적인 초월성까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해링은 이 춤들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만인을 사랑한 예술가, 키스 해링


해링은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 이미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낸 그는 10년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갤러리와 길거리의 벽을 무너뜨리고,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허문 팝아트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예술은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사람들에게 한 걸은 더 나아가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이어야 한다. 예술은 인간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박수를 보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던 해링은 아이 같이 편견 없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따듯하고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예술가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작품은 시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가슴에 깊게 파고들어 짙은 여운을 남기며 사랑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