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극적인 음악
음악 칼럼니스트 하종욱이 추천하는 ‘천재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 편.
2016년 3월 16일 88회 아카데미 시상식. 마침내 트로피를 손에 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만큼이나 많은 박수를 받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시네마 천국, 미션 등 20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음악 작곡가 엔니오 모리꼬네. 사실 국내에서는 한 예능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넬라 판타지아’의 작곡가 정도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는데요.
엔니오 모리꼬네는 영화와 음악이라는 독립된 공간을 온전하게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준 ‘영화 음악’의 장인입니다. 그는 50여 년 동안 400여 편의 영화 음악 작곡을 남기며, 영화 음악을 보면서 듣는 것이 아니라, 들으면서 절로 볼 수 있게끔 일러주었습니다.
무명의 작곡가, 세르지오 레오네를 만나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1928년 11월 1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나이트클럽의 트럼펫 연주자였습니다. 유년기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했지만 그가 현대음악 작곡가를 꿈꾼 이유도 아마 아버지가 물려준 음악적 유산 때문이 아닐까요?
음악에 대한 꿈이 생계의 수단으로 바뀐 계기는 세계 2차대전입니다. 패전국 이탈리아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었고, 학교를 졸업한 엔니오 모레꼬네는 이탈리아 국영방송의 경음악단에 취업합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현재를 만들어낸 영화음악 작곡가로서 첫 데뷔는 31살. 그때는 주로 B급 액션 영화나 드라마의 주제곡을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포르노 영화를 위한 곡을 만들기도 했지요. 그러는 동안 그는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 ‘황야의 무법자(1965년)’를 만났을 때도 그는 레오 니콜스라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허밍과 휘파람 소리를 중심으로 도발적이고 유머러스함이 함께하는 실험적인 음악은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영화 ‘황야의 무법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음악적 스타일은 고스란히 영화사에 새겨져 하나의 트렌드를 만들었습니다. ‘황야의 무법자’ 이후 세르지오 레오네와 엔니오 모리꼬네는 20년간 협력하며 ‘석양의 건맨’,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웨스트’, ‘석양의 갱들’, ‘무숙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함께 작업했습니다.
|Cockey’s Song – Once Upon a Time In America (Sergio Leone)
헐리우드는 엔니오 모리꼬네 특유의 섬세한 악곡이 그들 시장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습니다. 그 속에서 엔리오 모리코네는 세로지오 레오네 감독과 함께 영화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년)’을 만들어 냅니다.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은 4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오롯이 지배하며 인물들의 감정을 증폭시킵니다. 건조하고 격정적인 팬 플루트의 음색, 드라마틱한 전개의 ‘Cockey’s Song’, 현악기의 선율미가 인상을 넘어 영상으로 번졌던 ‘Amapola’가 그랬습니다.
‘Gabriel’s Oboe’ 혹은 ‘Nella Fantasia’
|Gabriel’s Oboe – The Mission
프랑스 영화 감독 롤랑 조페와의 만남은 엔니오 모리꼬네 음악 연대기에 가장 빛나는 시간을 선사합니다. 롤랑 조페가 의뢰한 영화는 ‘미션(1986년)’이었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중세의 종교 음악, 고음악, 성가에 대한 관심과 클래식 목관 악기를 재해석하여 완성한 음악으로 영화의 극적 서사를 고조시킵니다. 그 중 하프시코드의 리드미컬한 움직임과 오보에의 아름다운 선율로 완성한 ‘Gabriel’s Oboe’은 20세기 가작 빛나는 관현악 협주곡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팝페라의 여왕 사라 브라이트만은 이 곡에 매료되어 이 곡에 가사를 붙여 노래하기를 간절히 원하기도 했습니다. 사라 브라이트만은 엔니오 모리꼬네의 승낙을 받기 위해 2년 동안 두 달에 한 번씩 진심어린 편지를 보냈고,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Nella Fantasia’입니다. 이제는 인류의 아리아로 자리잡은 곡이죠.
20세기 클래식의 거장, 제88회 아카데미 음악상의 주인공이 되다
|Love Theme – Cinema Paradiso
수많은 대표작 속에서도 엔니오 모리꼬네를 가장 대표하는 영화음악은 바로 ‘시네마 천국(1988년)’입니다. 한 번만 들어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인상적인 멜로디 속에서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 가진 고유의 미덕이 느껴집니다. 노스탤지어와 사랑의 감정을 자극하는 주제곡을 듣고 있자면, 이것은 오히려 잘 만들어진 뮤직비디오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소년 토토와 늙은 영화기사 알프레도의 우정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애잔함, 풋풋함은 그의 음악 없이는 결코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은 평범한 영화 장면에 비범함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영화 ‘러브어페어(1993년)’는 엔니오 모리꼬네가 만든 ‘Piano Solo’를 만나 두고두고 가슴에 맺히는 명화의 한 장면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1995년)’, ‘말레나(2000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곡 놓치기 아쉬운 곡들이지요.
|L’Ultima Diligenza per Red Rock (versione integrale) – Abbey Road
재미있는 것은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엔니오 모리꼬네가 상과는 인연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카데미에서 처음 음악상을 수상한 것이 바로 올해 있었던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88세의 노장이 되어 ‘헤이트풀8(2015년)’으로 음악상을 수상했습니다. ‘말레나’, ‘벅시’, ‘언터쳐블’, ‘미션’, ‘천국의 나날’로 그가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로 오른 것만도 다섯 번이었습니다. 2007년 평생공로상을 받긴 했지만, 너무 늦은 수상이었는데요. 무대에 오른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 음악의 마법
엔니오 모리꼬네는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간 오랫동안 영화 음악계에 종사하며 만들어온 음악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야의 무법자’ 속 휘파람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자연스레 망토를 걸치고, 시가를 문 서부의 카우보이를 떠올리게 됩니다. 영화 ‘미션’의 삽입곡인 ‘Gabriel’s Oboe’ 선율을 들으면 오보에를 연주하는 선교사 곁으로 조심스레 모여주는 인디언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Amapola’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속 소년이 벽장 사이로 소녀의 춤을 엿보는 감정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Love Theme’은 그 어떤 설명도 불필요합니다. 토토를 태운 알프레도의 자전거와 애틋한 첫 키스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영상으로 펼쳐지기 때문이죠.
그 어떤 영화 음악이 이토록 강렬할 수 있을까요? 음악이 시작되는 순간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난 듯 분위기를 압도하는 엔니오 모리꼬네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그의 음악 여정에 더 아름다움이 깃들길 기대합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대표 영화 포스터, 좌측에서부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시네마천국
엔니오 모리꼬네 영화 음악 대표작 5선
1. 황야의 무법자(Per un pugno di dollari, 1965)
2.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1984)
3. 미션(Mission, 1986)
4.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1988)
5. 러브 어페어(Love Affair,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