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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속 백화점
내 일상의 공간이 되다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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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백화점은 어떤 의미의 공간인가요? 과거와 비교하면 지금의 백화점은 훨씬 크고 화려한 모습인데요. 하지만 변함없는 것은 백화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화를 만나고, 조금 더 특별한 일상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서 문학은 백화점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만나보시죠.



박완서, 자전적 공간을 묘사하다 (1970년)


박완서는 남성 중심의 문학사에서 여성 문학의 시대를 처음으로 연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그녀가 문학계에 처음 등단한 작품이 바로 『나목』입니다. 다음은 작품 속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PX 아래층은 서쪽으로 삼분의 일쯤이 한국물산 매장으로 되어있다. 환한 조명 속에 펼쳐진 건너편 미국 물품 매장 쪽을 나는 마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듯 설레는, 좀 황홀하기조차 한 기분으로 바라봤다.”


-박완서, ‘나목’ 中


|6•25 전쟁시 미군 PX로 사용된 동화백화점(1950년대)


PX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인데요, 원래 국내 최초 백화점인 미스코시 백화점이 있던 자리이죠. 해방 이후에는 동화백화점으로 개칭되었고, 6•25 당시에는 미8군 PX로 사용되었습니다. 서울이 수복된 후 민영화되었고, PX는 스무 살의 예민한 문학가 박완서의 직장이었습니다. PX의 초상화 부에는 염색한 미군 잠바를 입은 화가 박수근이 일하고 있기도 했죠. 스물한 살 처녀 박완서가 미군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가던 화가 박수근을 만난 곳. <나목>의 배경인 바로 신세계백화점입니다.



호랑이와 5층석탑, 모란 등 한국을 배경으로 한 보자기에 미군 병사 애인사진을 보고 보자기 가운데 빈 곳에 해당 인물을 그려 넣었다. 

박수근화백이 그린 그림은 아니며, 당시 이런 풍으로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경란, 현실적인 시대의 상징을 담다(2011년)





조경란의 『백화점 그리고 사물 • 세계 • 사람』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백화점의 공간적 특징 속에 자신의 경험을 담아내고 있는데요, 풍부한 상품 지식을 통해 백화점에서 겪는 심리 상태와 함께 조명하기도 합니다. 도서관에 머물던 작가는 자신의 집인 서울대입구역으로 갈까 하다 잠시 고민에 빠집니다.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약간의 서비스를 받고 싶은 욕구를 느낀 것이죠. 그리고 그녀가 향한 곳은 눈에 익은 일곱 개의 꽃잎 모양 로고(신세계 강남점)를 지나 에스컬레이터에 오릅니다. 작가는 자신이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중요한 사건과 공간을 백화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펼치는데요, 백화점의 각 층에서 사람들의 모습과 특징을 포착하여 사람과 물질이 어떻게 만나고 갈등하고, 화해하는지 묘사하는 것입니다.



1층: 시계 향수 명품매장/백화점의 동선계획 – 타인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

2층: 여성복 매장/에스컬레이터/봉마르셰 백화점/빨간 원피스 – 나는 입는다, 나는 존재한다

3층: 구두와 가방 매장

4층: 패션 매장/폐점 후의 백화점/물품보관소 – 소유와 욕망의 상관관계

5층: 남성복 매장

6층 아웃도어 스포츠 매장 – 백화점의 역사와 조건

7층: 아동매장/키즈카페/메이시 퍼레이드 – 감정노동과 크리스마스 마케팅

8층: 리빙 매장/수집가들/스마일 라인 – 수집과 잉여의 가치

9층: 특별매장/쇼핑의 일곱 가지 법칙/문화홀 콘서트 – 우리나라 백화점의 역사

10층: 식당가와 옥상정원/VIP라운지/직원전용식당 – 디스플레이의 힘

지하1층: 엘리베이터/쇼핑백/슈퍼마켓과 시장 –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지금까지 문학작품 속 백화점의 모습을 만나보았습니다. 백화점은 시대의 모습을 담으며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의 문학 작품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죠. 지금 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인 백화점은 한때 특별한 날 방문하는 일상과 분리된 공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시대의 변화 속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백화점도 계속 달라질 것입니다. 변함없는 것은 백화점이 언제나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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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속 백화점
근대 자유와 낭만의 상징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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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1편을 통해 근대 문학 속 백화점을 만나보았는데요, 이를 통해 백화점은 근대 유통 산업의 중심, 모던보이와 신여성 사이의 낭만, 자유를 향한 비상의 공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근대의 우리에게 백화점은 또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요? 우리 근대문학 세 편을 더 살펴보며 일상에서 백화점이 어떠한 의미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는지 그 변화를 알아보겠습니다.



이효석, 모던보이의 일상을 묘사하다 (1938년)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알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 中




지난 시간 이효석의 작품 ‘수난’을 소개했는데요. 그가 1938년 12월 『조선문학독본』에 발표한 <낙엽을 태우면서>의 한 구절에서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문물이 어떻게 일상인들에게 비쳐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효석은 경성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모던보이였죠. 빵과 버터, 커피, 모차르트와 쇼팽의 연주곡, 프랑스 영화를 즐기던 그는 서양 화초가 가득한 붉은 벽돌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이 벽돌집에 사는 동안 그는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욕실과 지하실이 있고, 거실에는 피아노가, 방에는 침대가 놓인 산장 같은 집이었죠. 이효석은 당시 1935년 12월에 개관한 화신 평양지점에서 커피를 사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채만식, 근대를 만나는 상징적 공간을 그리다 (1938년)



|백화점 옥상공원 전경



기자로 일하던 채만식이 기자직을 버리고 발표한 중편소설 『태평천하』와 장편 『탁류』는 그의 대표작입니다. 그중 『태평천하』는 역설적인 풍자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소설 속 등장하는 속물적인 만석꾼 부자 윤직원 영감은 그의 애첩 열다섯 살 기녀 춘심이와 혼마치의 진고개(현재 충무로) 번화가를 오가며 이런 수작을 나눕니다.



“저어 참, 영감님?” “왜야?” “우리 저기 미쓰꼬시 가서, 난찌(런치) 먹구 가요?”

“난찌? 난찌란 건 또 무어다냐.”

“난찌라구, 서양 즘심(점심) 말이에요.”

“서양 즘심?”

”내애, 퍽 맛이 있어요!”

“아서라! 그놈의 서양밥, 말두 내지 마라!”

“왜요?”

“내가 그년의 것이 좋다구 히여서, 그놈의 디 무어라더냐 허넌 디를 가서, 한번 사먹다가 돈만 내버리구 죽을 뻔히였다!”

“하하하, 어떡허다가?”

“아, 그놈의 것 꼭 소시랑을 피여 논 것치름 생긴 것을 주먼서 밥을 먹으라넌구나! 허 참…….” 

-채만식, ‘태평천하’ 中



이 대목을 통해 무엇을 느끼셨나요? 당시의 백화점은 일반 백성이 근대를 눈과 손으로 느끼는 생생한 현장이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진오, 변화하는 근대 여성의 일상을 서술하다 (1939년)

 


유진오의 『화상보』는 1939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인 시영의 누이인 보순은 당시 여학교를 졸업한 후에 백화점에 취직하게 되죠. 당시 백화점 종업원의 7할은 일본인, 3할은 조선인이었습니다. 보일러공, 전기공 등 일부 기술직을 제외하고 조선인 종업원의 대부분은 청소부나 배달부 등 하층 잡부로 일했다고 해요, 하지만 소설 속 보순은 매장에서 물건을 파는 판매사원으로 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누이 보순은 여학교를 졸업한 후 삼월백화점 점원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취직을 하는 것 보다 시집을 가라고 시영은 말했으나 「여태 오빠 장등이에 매달려 공부를 해왔으니까 인제 나두 좀 오빠 힘을 도아 들여야지 안허요」 그것도 그것이어니와 여학교를 졸업했다고 바로 시집을 가라는 것도 너무 젊은 처녀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어서 시영은 보순이가 하는대로 내버려둔 것이다”

-유진오, ‘화상보’ 中



흥미로운 변화 아닌가요? 새로운 문물의 상징이던 백화점이 이제 일상속 공간이 되어 가는 변화가 느껴지는데요, 문화작품 속의 백화점 3편을 통해 현대의 백화점을 만나볼까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백화점과 가장 가까운 시각일 텐데요, 여러분이 바라보는 백화점과 문학의 시선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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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속 백화점
근대 자유와 낭만의 상징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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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의 공간은 그 시대를 담는 세계로 이야기됩니다. 때로는 작품 속 인물의 성격을 대변하기도 하죠. 1930년 10월 24일 우리나라 최초의 미스코시 백화점 경성점. 일제시대에 등장한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당시 생활사적 면에서 일대 전환점이 될 만큼 새로운 공간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문학작품의 좋은 소재가 된 곳인데요, 우리 민족에게 있어 격변의 시기인 20세기 초의 문학에서는 백화점을 어떻게 그리고 있었을까요? 오늘부터 3편에 걸쳐 우리 근대 문학 속 백화점을 모습을 시대순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서춘(徐椿), 미스코시 백화점의 유통혁명을 논하다 (1931년)


“상업을 하더라도 가령 미스코시 같은 데를 가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많은 돈을 들여서 상품을 여러 가지로 또 많이 사다 놓고 팝니다. 그러니 상품 한 두 가지나 조금씩 내놓고 파는 상점보다 손님이 많이 옵니다. 또 파는 물건뿐 아니라 설비에도 많은 돈을 들였습니다.”

-서춘, ‘조선사람 빈궁의 실지적 7대 원인’ 中


서춘은 일제와 운명을 같이한 경제평론가입니다. 그는 1931년 4월 발간한 잡지 『혜성(彗星)』에 ‘조선사람 빈궁의 실지적 7대 원인’이라는 글을 게재하였죠. 이 글에는 미스코시 백화점이 일으킨 유통 혁명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국내 최초 백화점인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전경 칼라엽서


미스코시 백화점은 전근대적인 상품판매 방식의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이와 함께, 진열장 판매, 정찰제 및 자유관람제, 철저한 교환환불제, 다량 구매에 따른 가격 책정, 갤러리와 옥상공원 운영 등을 시행하죠. 이렇게 미스코시 백화점이란 이름은 우리 근대 유통사뿐 아니라 식민지 일제기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각문화와 근대 인식을 뒤바꾼 전환기적인 상징어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



이효석, 근대의 낭만을 표현하다(1934년)


“검은 빛깔에 붉은 줄이 은은히 섞인 사치하면서도 결코 속되지 않은, 몸에 조화되고 취미에 맞는 넥타이”

-이효석, ‘수난’ 中


우리나라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 이효석은 우리 근대의 작가이자, 언론인, 수필가, 시인입니다. 그의 작품 『수난』(1934년)에서도 백화점은 중요한 배경이죠. 여자 주인공이 백화점에서 넥타이를 골라주자 남자 주인공은 그녀의 예민한 미적 감각과 세련된 안목을 칭찬합니다.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넥타이라는 근대 문물을 통해 모던 보이와 신여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3층에 위치한 넥타이(네쿠다이라 표기) 코너





이상, 근원을 향한 자유를 담다 (1936년)


“나는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스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 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 ‘날개’ 中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옥상에서 본 충무로, 좌측에는 한국은행, 정면에는 구 상업은행 본점, 우측에는 중앙우체국이 보인다.


박제된 천재라 불리는 이상. 그의 수많은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날개』 후반부에 등장하는 독백이 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일상에서 외출과 귀환, 자유와 억압의 수평적 왕복 운동을 계속하죠. 그러다 집으로의 귀환을 접고 미스코시 백화점 옥상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억압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미스코시 백화점의 옥상은 본질을 추구하는 자유와 해방의 세계를 향한 비상 의지가 담긴 공간인 것이죠.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옥상 및 전망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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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주인을 잃은 백화점
격변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백화점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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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주인을 잃은 백화점



1950년대 서울 상계지도 세부


1945년 9월 15일, 해방 이후 미스코시백화점은 동화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합니다. 종업원 대표가 관리하던 백화점은 적산으로 편입되고, 6•25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PX로 사용됩니다. 해방 직후, 지금의 미도파는 조지야라는 상호를 중앙백화점으로 바꾸는데요, 이 역시 적산으로 평가되어 미군정청이 접수합니다. 미스코시와 마찬가지로 미군 전용 PX로 사용되던 중앙백화점은 1948년 한국 무역협회에 불하됩니다. 충무로에는 미나카이 백화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요, 해방 후 국유 재산이 되어 해군 본부 건물로 사용하다 훗날 원호처 소유가 됩니다. 종업원과의 갈등으로 우여곡절을 겪던 화신백화점은 1946년 2월 자본금 2천만 원으로 재개점 하지요.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백화점은 제 기능을 잃고 명맥만 겨우 잇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의 직격탄을 맞은 백화점



왼쪽부터 동화백화점 미군 PX 사진엽서(1951), 미국인 앨범에서 발견한 동화백화점 당시 미군 PX사진(1953)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백화점업계는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습니다. 서울이 수복된 후 동화백화점은 1951년 7월 19일에 미군 PX로 사용되죠. 전쟁이 끝난 뒤, 서울에는 몇 개의 백화점만 남게 됩니다. 1954년 10월 1일 무역협회 건물의 지하와 1/3 층을 매장으로 내고 영업을 시작한 미도파가 그중 하나입니다. 신신백화점은 1955년 2월 20일 동화로 재개장합니다. 1955년 11월 15일 화신백화점 옆에 이름만 바꿔 개장한 신신백화점도 전쟁 이후 서울에 남게 됩니다.



신신백화점 외관(1950년대)


백화점은 전쟁으로 생산시설이 붕괴하였고 직영체제를 유지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단일품목 코너를 운영하거나 외래품을 취급하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백화점은 사치의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나머지 매장은 임대를 주어 보증금과 함께 월세를 받아 운용하는 매장 임대업의 장소로 전락해 버립니다. 1954년 11월 29일 관재청에서는 미군으로부터 동화백화점을 정식으로 명도받아 1955년 2월 20일 정식으로 문을 열게 됩니다. 지하매장은 직영으로 운영하고, 나머지 매장은 임대하는 영업방식을 취하게 되죠. 4층에는 이후 동화백화점을 인수하는 동방생명이 임대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임대백화점으로서의 사업방향은 동화백화점이 1962년 동방생명에 인수될 때까지 지속합니다.



왼쪽부터 동화백화점 광고(1955), 동화백화점 상품광고(1955)



급변하는 사회의 축소판이 된 백화점



|왼쪽부터 국산품 판매 매장 입점 광고(1961), 동화백화점 경품권(1962)



1950년대 말, 동화백화점은 임대업자들이 주축이 되어 ‘새나라 자동차 경품대회’를 엽니다. 이 경품대회는 판매촉진의 일환으로 연말에 추진된 것인데요, 특등에 새나라 자동차, 1등 고급 미싱, 2등 오르간, 3등 행운 열쇠(순금)를 주는 경품행사였습니다. 임대업자들은 특등 상품으로 내건 새나라자동차를 각자 돈을 거둬 1층 쇼윈도우에 전시하였는데요, 엄청난 경품인지라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되는데요, 군사정권은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1961년 7월 15일부터 외래품 판매금지를 발표하게 됩니다. 상품 대부분을 부정 외래품으로 취급해온 백화점은 상당한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외래품 판매금지로 백화점의 점포 가격은 폭락하였고 상당수 임대업자는 백화점을 떠나게 됩니다.


백화점업계의 외래품 파동이 있기 석 달 전인 1961년 4월 1일부터 동화백화점에 국산품 매장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외국산이 판치는 백화점에 국산품 직매장이 들어선 것은 신문에 날 만한 일이었죠.


그러나 외래품 판매금지 조치 이후 동화의 2층 매장은 반으로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객 수도 격감했기 때문에 동화의 이 같은 노력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동화는 경영상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1962년 9월 28일 동방생명과 동화백화점 소유권 이전계약을 체결하게 되는데요, 동화백화점 인수 이후 동방생명은 사세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새로운 경영주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때, 삼성은 1963년 7월 15일 동방생명을 인수하게 됩니다. 바로 삼성생명보험의 전신이 된 곳이지요.


해방 이후, 우리나라 현대사의 상징이었던 백화점은 2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그 명맥만을 겨우 유지합니다. 미국의 PX, 임대업장으로 힘든 시기를 겪은 때이죠. 이는 당시 우리 경제와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의 원조로 근근이 유지한 때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시기를 딛고, 국민 경제의 중심을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변화시켰죠. 바로 백화점의 변화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해방 이후 백화점은 당시 상업과 사회상 변화의 축소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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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명절 최고 인기선물은?
명절 선물: 1990~2000년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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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복구에 힘쓰던 50년대의 농·수산물과 60년대의 생필품, 본격적인 산업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7~80년대의 공산품까지. 우리나라의 명절 인기선물은 각 시대의 변화상에 따라 그 맥을 함께해왔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90년대와 00년대 그리고 지금의 10년대까지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1990년대



|1990년대 신세계 명절 선물 카달로그(전인화/고소영)


1990년대는 고가제품과 실용적인 중저가 선물세트가 양극화되어 나타난 것이 주된 특징입니다. 이는 당시의 소비의식과 경제 상황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1980년대 호황이던 경제가 199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X세대의 등장에서도 알 수 있듯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시기이기도 했죠. 당시 소비자들은 알뜰구매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이에 따라, 실용적인 중저가 상품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식품의 경우 햄, 참치 등 규격화된 상품들이 감소하고 지역특산물에 대한 수요가 급속히 증가합니다. 먹어 없어지는 품목보다 두고두고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변 잡화부문이 점차 강세를 띠는 것도 이 시대의 특징으로 분석됩니다.



|건강 식품 매장(왼) / 신세계 상품권 5종(오)


한편, 1990년대에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인삼, 꿀, 영지 등 건강 기호식품이 선물품목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도서상품권이나 상품권이 선물로 등장한 것도 이때입니다. 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과 모든 것이 풍족해진 시대를 반증하는 변화입니다. 상품권이 선물로 등장하면서 선물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비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개인적 성향이 중시되는 사회적 변화와 함께 대중적인 선물품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시기 눈여겨 볼만한 선물로는 골프, 헬스 기구 등 스포츠 레저상품입니다. 또한, 할인점이 급성장하면서 참치나 조미료 세트 등 저가형 규격식품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백화점 선물세트는 선물 증정용으로, 할인점 선물세트는 자기소비나 단체선물로 사용된 것입니다.



급변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2000년대 선물



|2000년대 신세계 명절 선물 카탈로그(김혜수/손태영)



|정육 및 와인 세트(왼) / 상품권 코너(오)


2000년대 선물은 1990년대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양극화 현상이 연장됩니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고가제품은 더욱 고급화되고, 할인점을 중심으로 한 실용적인 중저가 선물세트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강세 선물인 정육 세트 외에 와인과 올리브유 등 이른바 웰빙 상품의 인기가 꾸준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소용량 제품과 간편 조리상품도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등장한 상품권은 이제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이 되었습니다.


2010년 이후에는 자녀가 좋아하고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선물이 인기입니다. 전자완구, 입체서적, 퍼즐, PMP 등 감성과 지능을 높일 수 있는 상품이 선물로 등장한 것입니다. 또한, 재테크를 위한 금융상품을 선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최근 가장 인기 있는 단어인 힐링을 테마로 한 선물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미에 잘게 썬 솔잎을 섞은 효소나 간의 피로를 풀어준다는 구관모 식초 등이 이러한 웰빙 힐링 선물입니다.


지금까지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명절 인기선물 변천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에서 명절은 일 년 중 가장 풍요로운 시기입니다. 이 시기 선물이 등장한 이유도 이러한 풍요로운 마음을 나누기 위함일 것입니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시대상과 함께 선물 풍토도 꾸준히 변화해 왔습니다. 하지만 명절 선물은 그간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대한 마음의 표시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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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명절 최고 인기선물은? : 1950~1980년대 편
1950~1980년대 최고의 명절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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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야말로 삶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해주는 우리 민족 최소의 정서이죠.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정에 약한 민족도 드뭅니다. 그만큼 우리는 정에 약한 민족이며, 서로 간의 정을 담은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내 식구는 못 먹어도 선물만은 귀한 것을 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달걀 한 꾸러미, 찐 고구마 한 바구니, 참기름 한 병 등 집에서 직접 만들어 수줍게 내밀던 선물에서 상점이나 상인들이 패키지로 만들어놓은 선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선물의 구성은 시대적 환경과 소비자 의식에 따라 변합니다. 그중 명절과 선물시즌에 보내는 선물상품의 변화는 각 시대의 경제수준과 생활관습을 보여줍니다.



1950~60년대 생필품 위주의 선물





6•25 이후 사회복구에 힘쓰는 50년대에는 선물이 상품화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당시에는 매 끼니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밀가루와 쌀, 달걀, 찹쌀, 돼지고기, 참기름 등의 농수산물을 선물로 주고받았습니다.





60년대에는 어느 정도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면서 설탕, 비누, 조미료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이 선물로 인기를 누렸습니다. 당시 선물 종류는 100여 종 정도였습니다. 그중 설탕은 물자가 부족했던 60년대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선물 변화는 당시 우리 경제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이때는 아직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식생활 문제마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였죠. 또한, 규격화되고 편리한 공산품이 희귀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식생활에 도움이 되는 선물을 주고받았습니다. 이외에 아동복, 내의 등의 직물류가 인기선물에 속했습니다. 직물류의 제품은 2~3천 원대였고, 이때부터 백화점이 선물구매 장소로 등장하였습니다. 백화점에서는 1960년대부터 추석 신문광고를 집행하기 시작했고, 한 장짜리 추석 카탈로그를 제작, 배포하는 등 추석을 판촉행사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산업화로 변화하는 1970년대 선물



1970년대 신세계 명절 선물 카탈로그(김희진 /안인숙/이미숙)


1970년대는 산업화가 시작된 시기입니다.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이루면서 국민생활도 보다 풍요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선물풍토도 바뀌어 가고, 선물의 종류도 천 여종 정도로 늘어납니다.





다양한 공산품이 생산되면서 생필품 위주의 선물이 기호품으로 대체되기 시작합니다. 이때의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은 식용유, 럭키 치약, 와이셔츠, 피혁제품, 주류 등입니다. 가격은 3~5천 원 내외였죠. 또한, 커피세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특히, 다양한 과자로 박스를 구성한 종합선물세트는 어린이에게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선보인 동서식품의 맥스웰 커피세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유는 당시 다방과 함께 커피가 확산하였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설탕과 조미료 세트에 이어 인기 있는 백화점 선물 매출 3위를 차지하였습니다.


70년대의 또 하나의 재미있는 현상은 지금과는 달리 화장품과 여성용 속옷, 스타킹 등이 상당히 고급 선물세트이었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텔레비전, 전자보온밥통, 전기밥솥, 가스레인지 등의 가전제품이 선물로 집중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얼마나 빨리 이루어졌고, 이와 함께 전자제품이 급속하게 대중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변화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는 이러한 제품이 완전히 대중화되면서 선물로서의 명성도 잃게 됩니다.



현재 명절선물을 정착한 1980년대



1980년대 신세계 명절 선물 카탈로그(선우용녀/김창숙/윤미라)


우리나라 1980년대는 중산층의 비율이 증가하고 수출이 증가하면서 대중 소비사회가 시작됩니다. 자동차를 보유한 가정이 늘어나는 마이카 시대이기도 하죠. 이러한 경제성장과 함께 선물도 고급화, 다양화됩니다. 획일적인 선물이 아니라 상대방에 알맞은 제품을 선물하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았고, 그 종류도 3천여 종으로 늘어납니다.





지금도 인기선물인 넥타이, 스카프, 지갑, 벨트, 양말세트 등 신변 잡화가 선물로 등장한 것이 이때입니다. 또한, 정육 세트나 고급 과일, 참치, 통조림으로 대변되는 규격화된 식품도 인기 있는 선물로 떠오릅니다. 이처럼 1980년대는 선물문화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시기입니다. 신규 백화점이 출현하고, 다점포화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죠. 백화점에서는 자체적으로 상품을 개발하고, 배달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소득 증가와 함께 두터워진 중산층의 비중은 선물의 양상을 변화토록 하였습니다.



<그때 그 시절, 명절 최고 인기선물은? : 1990~2000년대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