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사박물관

Home > 상업사박물관
Home > SSG LIFE/COLUMN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아라
사은행사의 역사(1)
상업사박물관
#상업사박물관


우리나라 유통의 역사와 궤를 함께해온 사은행사. 시대별 사은행사의 변화 모습을 살펴보면 경품 및 사은품의 구성이 당시의 시대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사은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는 시대적, 환경적 요인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소비문화 격변의 시대, 1990년대


1980년대 사은행사의 특징은 1970년대와 비슷했습니다. 사회적 화제를 일으킬 수 있는 특별한 경품행사보다는 1970년대처럼 일정 매상금액을 기준으로 정해진 사은품을 증정하거나 감사권을 지급하는 행사가 주류였습니다. 사은품 또한 계절에 맞는 상품 또는 생활용품 위주였습니다.



1987년『신세계 크리스마스 선물대잔치』5,000원 매상마다 감사권 1매(100원) 연속식 증정



하지만 1990년에 들어서면서 사은행사는 시대적 변화를 도드라지게 반영하게 되는데요. 1990년대는 1970년대부터 축적된 경제 성장과 1980년대의 사회운동으로 획득한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빛을 발하게 된 시기입니다. 일명 ‘마이카, 마이홈’ 시대를 열게 되었으며 대중들의 가치 역시 생산에서 소비로 이행되었습니다.



1996년 『미아점 경품 대축제』1등 진도모피 7부코트, 2등 삼성 TV, 3등 다이아 반지 / 『천호점 ‘티코’ 경품 대축제』 그랑프리 : 대우자동차 ‘티코’(5대)



이러한 사회경제적 분위기에 이어 소득 1만불 시대를 맞은 우리나라는 선진국 수준의 삶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따라서 자동차나 모피코트, 해외여행권, 콘도회원권 등이 경품으로 인기를 누렸습니다. 일정금액 이상을 구매하는 고객에게 경품권 등을 발행하여 해당 상품을 증정하는 행사 방식은 예전과 같았지만 구매 금액대가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또한 증정하는 사은상품도 주방세트와 생활잡화, 전자제품 등 당시 시대적 사회상에 맞는 물품이 선정되었습니다.


하지만 1998년 IMF 이후 이와 같은 분위기는 급변합니다. IMF 체제로 표현하는 국가적 위기 이후, 사람들의 소비 심리가 얼어붙게 되는데요. 그 와중에 경품으로 1억 3천 만원이 넘는 아파트가 등장하게 되어 화재를 모았습니다. 이는 당시 미분양 아파트와 마이너스 성장으로 고민하던 건설업체와 유통업체가 공조한 마케팅이었습니다.



1998년 『신세계 굿 뉴스 바겐세일』 신세계백화점이 로얄층의 아파트 한 채를 드립니다.



개인의 취향이 더 중요하다, 2000년대


2000년대에 들어서며 국가적 위기를 각고의 노력으로 극복한 후에는 다시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여가를 선호하고 문화생활을 즐기려는 계층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개인의 건강과 웰빙 라이프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에 따라 해외여행권과 스포츠•레저 및 건강• 웰빙 상품이 경품으로 등장했습니다.



2000년『신세계 새봄 경품 대축제』경품품목 펜티엄Ⅲ(100대)



사은행사 품목에도 MP3플레이어, 컴퓨터, 디지털 카메라등의 최첨단 제품이 라인업에 등장하기 시작했는데요. 트렌드 흐름의 변화가 잦고 개인의 취향이 다양해진 요즘에는 어떤 사은품을 선정해서 증정하는 것보다 고객들이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는 상품권을 지급하는 양상으로 변모했습니다.



2008년 『새봄 사은대축제』100만원 이상 구매시 상품권5만원, 60만원 이상 상품권3만원



사은행사는 고객을 관심을 끌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 그 때문에 당시의 경제적 상황, 시사 이슈, 대중들의 트렌드를 반영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유통업계에서 진행한 사은 행사의 사은품과 경품 목록만으로도 격동적인 한국의 현대사를 확인 할 수 있다는 점. 여러분도 정말 흥미롭지 않나요?



Home > SSG LIFE/COLUMN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아라
사은행사의 역사(1)
상업사박물관
#상업사박물관


“구매 고객께 신세계상품권을 증정합니다!”


백화점 전단이나 DM에서 자주 보았던 문구인데요. 바로 고객을 모우기 위한 마케팅 방법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는 사은행사입니다. 우리나라 사은행사의 역사시작은 유통이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던 1930년대로 거슬러 가는데요. 계절별, 세시풍속별, 기념일 등에 맞춰 당시 고객들이 필요하거나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만한 상품을 사은품이나 경품으로 지급해온 사은행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당시 시대상과 고객의 기호까지 알 수 있습니다.



1930년대, 사은행사의 시작


근대 유통의 개념이 도입되었던 1930년대에도 사은행사가 열렸는데요. 이는 백화점에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일반 상회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진 행사였습니다.



왼쪽부터 태풍상회 우대권(1933년), 평화당 경품권(일제기)


1933년 인천에 소재한 비단가게인 태풍상회는 우대권을 소지한 고객에 한하여 일정 금액 이상을 구입하면 세수비누, 치마, 저고리 등의 옷감과 함께 달력을 사은품으로 증정하였습니다. 한약재를 취급하는 평화당 주식회사에서는 신년 상품권을 발행하여 1등 고객 한명에게 천연 진주조개를 증정했습니다.



화신연쇄점 신문광고(1936.4.19 동아일보)


또한 1936년 화신 연쇄점에서는 일원어치를 사면 10명에게 특등 상품으로 황소 한 마리를 경품으로 내걸어 화제를 모우기도 했는데요. 당시 황소라면 일반 농촌 가정에서는 재산 목록 1호며, 자식과 같이 소중히 여겼던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등 50명에게는 양복장과 자전거, 2등 100명에게는 메리야스 상하 1벌과 화장품 갑 등을 증정하는 등, 당시로서는 큰 규모의 사은 행사였습니다.



1960년대~1970년대, 시대상을 반영한 ‘경품’의 등장


해방 이후 1960년대부터 다시 사은행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사은행사의 상품을 보면 경품의 경우에는 당시 국민들이 갖고 싶어하는 고가의 상품을 내걸었고, 사은품의 경우에는 가정생활에 꼭 필요한 생활용품을 증정하였습니다.



동화백화점 경품권(1963년)


1963년 동아 백화점에서는 일본의 닛산 자동차를 반제품으로 들여와 조립한 새나라 자동차를 특등 상품으로 걸어 세간의 화제를 모았는데요. 새나라 자동차는 현대식 조립방식으로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승용차입니다.



신세계 X마스•연말•연시 행운부 특별대봉사 신문광고(1963년)


마을 전체를 통틀어 한 대 밖에 없을 정도로 귀했던 TV, 냉장고, 전화기 등도 경품으로 등장했습니다. 1963년 신세계백화점은 [X마스•연말•연시 행운부 특별대봉사] 라는 사은행사를 통해 50원 매상에 행운권 1매 증정, 5000원 매상 마다 ‘1년 상해보험증서’를 무상으로 증정하였습니다. 행운권 추첨을 통해서는 특등 현금 300,000원, 1등 고급 냉장고, 2등 고급 TV, 3등 고급 전화기를 증정하였습니다. 당시 방직공장 여공들의 평급 월급이 3,400원, 쇠고기 한근이 129원, 연탄 10장이 76원, 비누 1개가 38원임을 감안할 때 해당 추첨 경품의 높은 가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품 행사와 함께 일정 금액 이상을 구입하는 고객에게 지정된 상품을 주는 사은행사도 등장했습니다. 1965년 9월부터 12월간 진행되었던 신세계 백화점의 [선물부 추석 서비스 대특매] 행사에서는 500원 매상마다 설탕, 미풍 등을 증정하기도 했습니다.



신세계 세모 연속식 선물부 대특매 행사 광고(1976년)



1970년대 이후부터는 이런 일정 구매 금액을 기준으로 정해진 사은품을 증정하거나 서비스권을 지급하여 표기된 상품을 지급하는 행사가 주류를 이루었는데요. 1970년대 신세계 백화점에서 진행된 사은행사를 계절별, 세시풍속별로 자세히 살펴보면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물건들을 한눈에 확인하실 수 있답니다.




Home > SSG LIFE/COLUMN
해방 이후 주인을 잃은 백화점
격변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백화점을 만나다
상업사박물관
#상업사박물관


해방 이후 주인을 잃은 백화점



1950년대 서울 상계지도 세부


1945년 9월 15일, 해방 이후 미스코시백화점은 동화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합니다. 종업원 대표가 관리하던 백화점은 적산으로 편입되고, 6•25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PX로 사용됩니다. 해방 직후, 지금의 미도파는 조지야라는 상호를 중앙백화점으로 바꾸는데요, 이 역시 적산으로 평가되어 미군정청이 접수합니다. 미스코시와 마찬가지로 미군 전용 PX로 사용되던 중앙백화점은 1948년 한국 무역협회에 불하됩니다. 충무로에는 미나카이 백화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요, 해방 후 국유 재산이 되어 해군 본부 건물로 사용하다 훗날 원호처 소유가 됩니다. 종업원과의 갈등으로 우여곡절을 겪던 화신백화점은 1946년 2월 자본금 2천만 원으로 재개점 하지요.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백화점은 제 기능을 잃고 명맥만 겨우 잇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의 직격탄을 맞은 백화점



왼쪽부터 동화백화점 미군 PX 사진엽서(1951), 미국인 앨범에서 발견한 동화백화점 당시 미군 PX사진(1953)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백화점업계는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습니다. 서울이 수복된 후 동화백화점은 1951년 7월 19일에 미군 PX로 사용되죠. 전쟁이 끝난 뒤, 서울에는 몇 개의 백화점만 남게 됩니다. 1954년 10월 1일 무역협회 건물의 지하와 1/3 층을 매장으로 내고 영업을 시작한 미도파가 그중 하나입니다. 신신백화점은 1955년 2월 20일 동화로 재개장합니다. 1955년 11월 15일 화신백화점 옆에 이름만 바꿔 개장한 신신백화점도 전쟁 이후 서울에 남게 됩니다.



신신백화점 외관(1950년대)


백화점은 전쟁으로 생산시설이 붕괴하였고 직영체제를 유지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단일품목 코너를 운영하거나 외래품을 취급하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백화점은 사치의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나머지 매장은 임대를 주어 보증금과 함께 월세를 받아 운용하는 매장 임대업의 장소로 전락해 버립니다. 1954년 11월 29일 관재청에서는 미군으로부터 동화백화점을 정식으로 명도받아 1955년 2월 20일 정식으로 문을 열게 됩니다. 지하매장은 직영으로 운영하고, 나머지 매장은 임대하는 영업방식을 취하게 되죠. 4층에는 이후 동화백화점을 인수하는 동방생명이 임대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임대백화점으로서의 사업방향은 동화백화점이 1962년 동방생명에 인수될 때까지 지속합니다.



왼쪽부터 동화백화점 광고(1955), 동화백화점 상품광고(1955)



급변하는 사회의 축소판이 된 백화점



|왼쪽부터 국산품 판매 매장 입점 광고(1961), 동화백화점 경품권(1962)



1950년대 말, 동화백화점은 임대업자들이 주축이 되어 ‘새나라 자동차 경품대회’를 엽니다. 이 경품대회는 판매촉진의 일환으로 연말에 추진된 것인데요, 특등에 새나라 자동차, 1등 고급 미싱, 2등 오르간, 3등 행운 열쇠(순금)를 주는 경품행사였습니다. 임대업자들은 특등 상품으로 내건 새나라자동차를 각자 돈을 거둬 1층 쇼윈도우에 전시하였는데요, 엄청난 경품인지라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되는데요, 군사정권은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1961년 7월 15일부터 외래품 판매금지를 발표하게 됩니다. 상품 대부분을 부정 외래품으로 취급해온 백화점은 상당한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외래품 판매금지로 백화점의 점포 가격은 폭락하였고 상당수 임대업자는 백화점을 떠나게 됩니다.


백화점업계의 외래품 파동이 있기 석 달 전인 1961년 4월 1일부터 동화백화점에 국산품 매장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외국산이 판치는 백화점에 국산품 직매장이 들어선 것은 신문에 날 만한 일이었죠.


그러나 외래품 판매금지 조치 이후 동화의 2층 매장은 반으로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객 수도 격감했기 때문에 동화의 이 같은 노력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동화는 경영상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1962년 9월 28일 동방생명과 동화백화점 소유권 이전계약을 체결하게 되는데요, 동화백화점 인수 이후 동방생명은 사세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새로운 경영주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때, 삼성은 1963년 7월 15일 동방생명을 인수하게 됩니다. 바로 삼성생명보험의 전신이 된 곳이지요.


해방 이후, 우리나라 현대사의 상징이었던 백화점은 2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그 명맥만을 겨우 유지합니다. 미국의 PX, 임대업장으로 힘든 시기를 겪은 때이죠. 이는 당시 우리 경제와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의 원조로 근근이 유지한 때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시기를 딛고, 국민 경제의 중심을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변화시켰죠. 바로 백화점의 변화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해방 이후 백화점은 당시 상업과 사회상 변화의 축소판이었습니다.


Home > SSG LIFE/COLUMN
한국 최초의 백화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근대의 아이콘, 한국 최초의 백화점 (1편)
상업사박물관
#상업사박물관


한국 최초 백화점이 탄생한 날

우리는 근대를 만질 수 있었고 볼 수 있었다.



미스코시백화점의 개점과 외관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신축장면(왼) / 조명으로 장식한 미스코시 경성점 외관 야경(오)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신관 낙성 포스터 및 건축 낙성문(왼) / 조선일보 개점 광고(오)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은 신세계백화점의 전신인 미스코시(三越)백화점 경성점입니다. 1930년 10월 24일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대규모 신관을 만들어 근대적 백화점으로서 첫발을 내디뎠죠. 대지 730평, 건평 435평, 연건평 2,300평, 종업원 360여 명으로 당시 조선과 만주를 통틀어 최고 및 최대 규모의 백화점이었습니다.



백화점 개점 당일 1층 중앙로터리와 중앙 계단에 인산인해를 이룬 고객 모습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외부 쇼윈도우(왼) /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후면 전경(오)


 사진 엽서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당시 미스코시 경성점은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백화점이 아니었습니다. 선진 문화를 흡수, 전파하는 ‘문화 살롱’이자, 근대를 직접 느낄 수 있는 경성 최고의 명물이었죠. 그래서 경성의 근대 문물을 소개하거나 경성 관광 기념엽서에 미스코시 경성점의 외관이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백화점은 어떻게 운영됐을까?



미스코시백화점 동경 본점의 자동차 및 자전거 배달 장면, 경성점도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백화점은 모든 매장이 직영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관리가 어려운 귀금속이나 식품류 정도가 임대였고, 매출의 10% 정도의 수수료를 적용하였습니다. 경영면에서도 철저한 정찰제와 반품제 실시, 영수증 발급 등 근대적인 백화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미스코시 경성점의 또 다른 특징은 철저한 고객 서비스입니다. 매일 개점 시간 전에 전직원을 대상으로 인사부서에서 그날의 교육을 실시한 후 매장을 열었습니다. 판매원들은 한국인에겐 한국말로, 일본인에겐 일어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매장만 둘러보아도 왜 구경만 하느냐’는 눈치를 받지 않는 것도 당시의 고객에게는 생소한 경험이었죠. 그래서 이는 차별화된 고객 응대였습니다. 이와 함께 고객이 매장이 직접 방문하게 어려운 경우에는 전화로 주문을 받아 배달을 해주었습니다. 배달을 위해 한국인 자전거 배달부가 별도로 조직되었고, 지방의 경우 미스코시 배달차가 매일 오전에 상품을 배달하였습니다.



<근대의 아이콘, 한국 최초의 백화점 미스코시 경성점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