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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주인을 잃은 백화점
격변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백화점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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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주인을 잃은 백화점



1950년대 서울 상계지도 세부


1945년 9월 15일, 해방 이후 미스코시백화점은 동화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합니다. 종업원 대표가 관리하던 백화점은 적산으로 편입되고, 6•25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PX로 사용됩니다. 해방 직후, 지금의 미도파는 조지야라는 상호를 중앙백화점으로 바꾸는데요, 이 역시 적산으로 평가되어 미군정청이 접수합니다. 미스코시와 마찬가지로 미군 전용 PX로 사용되던 중앙백화점은 1948년 한국 무역협회에 불하됩니다. 충무로에는 미나카이 백화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요, 해방 후 국유 재산이 되어 해군 본부 건물로 사용하다 훗날 원호처 소유가 됩니다. 종업원과의 갈등으로 우여곡절을 겪던 화신백화점은 1946년 2월 자본금 2천만 원으로 재개점 하지요.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백화점은 제 기능을 잃고 명맥만 겨우 잇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의 직격탄을 맞은 백화점



왼쪽부터 동화백화점 미군 PX 사진엽서(1951), 미국인 앨범에서 발견한 동화백화점 당시 미군 PX사진(1953)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백화점업계는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습니다. 서울이 수복된 후 동화백화점은 1951년 7월 19일에 미군 PX로 사용되죠. 전쟁이 끝난 뒤, 서울에는 몇 개의 백화점만 남게 됩니다. 1954년 10월 1일 무역협회 건물의 지하와 1/3 층을 매장으로 내고 영업을 시작한 미도파가 그중 하나입니다. 신신백화점은 1955년 2월 20일 동화로 재개장합니다. 1955년 11월 15일 화신백화점 옆에 이름만 바꿔 개장한 신신백화점도 전쟁 이후 서울에 남게 됩니다.



신신백화점 외관(1950년대)


백화점은 전쟁으로 생산시설이 붕괴하였고 직영체제를 유지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단일품목 코너를 운영하거나 외래품을 취급하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백화점은 사치의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나머지 매장은 임대를 주어 보증금과 함께 월세를 받아 운용하는 매장 임대업의 장소로 전락해 버립니다. 1954년 11월 29일 관재청에서는 미군으로부터 동화백화점을 정식으로 명도받아 1955년 2월 20일 정식으로 문을 열게 됩니다. 지하매장은 직영으로 운영하고, 나머지 매장은 임대하는 영업방식을 취하게 되죠. 4층에는 이후 동화백화점을 인수하는 동방생명이 임대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임대백화점으로서의 사업방향은 동화백화점이 1962년 동방생명에 인수될 때까지 지속합니다.



왼쪽부터 동화백화점 광고(1955), 동화백화점 상품광고(1955)



급변하는 사회의 축소판이 된 백화점



|왼쪽부터 국산품 판매 매장 입점 광고(1961), 동화백화점 경품권(1962)



1950년대 말, 동화백화점은 임대업자들이 주축이 되어 ‘새나라 자동차 경품대회’를 엽니다. 이 경품대회는 판매촉진의 일환으로 연말에 추진된 것인데요, 특등에 새나라 자동차, 1등 고급 미싱, 2등 오르간, 3등 행운 열쇠(순금)를 주는 경품행사였습니다. 임대업자들은 특등 상품으로 내건 새나라자동차를 각자 돈을 거둬 1층 쇼윈도우에 전시하였는데요, 엄청난 경품인지라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되는데요, 군사정권은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1961년 7월 15일부터 외래품 판매금지를 발표하게 됩니다. 상품 대부분을 부정 외래품으로 취급해온 백화점은 상당한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외래품 판매금지로 백화점의 점포 가격은 폭락하였고 상당수 임대업자는 백화점을 떠나게 됩니다.


백화점업계의 외래품 파동이 있기 석 달 전인 1961년 4월 1일부터 동화백화점에 국산품 매장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외국산이 판치는 백화점에 국산품 직매장이 들어선 것은 신문에 날 만한 일이었죠.


그러나 외래품 판매금지 조치 이후 동화의 2층 매장은 반으로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객 수도 격감했기 때문에 동화의 이 같은 노력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동화는 경영상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1962년 9월 28일 동방생명과 동화백화점 소유권 이전계약을 체결하게 되는데요, 동화백화점 인수 이후 동방생명은 사세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새로운 경영주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때, 삼성은 1963년 7월 15일 동방생명을 인수하게 됩니다. 바로 삼성생명보험의 전신이 된 곳이지요.


해방 이후, 우리나라 현대사의 상징이었던 백화점은 2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그 명맥만을 겨우 유지합니다. 미국의 PX, 임대업장으로 힘든 시기를 겪은 때이죠. 이는 당시 우리 경제와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의 원조로 근근이 유지한 때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시기를 딛고, 국민 경제의 중심을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변화시켰죠. 바로 백화점의 변화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해방 이후 백화점은 당시 상업과 사회상 변화의 축소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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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명절 최고 인기선물은?
명절 선물: 1990~2000년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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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복구에 힘쓰던 50년대의 농·수산물과 60년대의 생필품, 본격적인 산업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7~80년대의 공산품까지. 우리나라의 명절 인기선물은 각 시대의 변화상에 따라 그 맥을 함께해왔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90년대와 00년대 그리고 지금의 10년대까지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1990년대



|1990년대 신세계 명절 선물 카달로그(전인화/고소영)


1990년대는 고가제품과 실용적인 중저가 선물세트가 양극화되어 나타난 것이 주된 특징입니다. 이는 당시의 소비의식과 경제 상황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1980년대 호황이던 경제가 199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X세대의 등장에서도 알 수 있듯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시기이기도 했죠. 당시 소비자들은 알뜰구매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이에 따라, 실용적인 중저가 상품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식품의 경우 햄, 참치 등 규격화된 상품들이 감소하고 지역특산물에 대한 수요가 급속히 증가합니다. 먹어 없어지는 품목보다 두고두고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변 잡화부문이 점차 강세를 띠는 것도 이 시대의 특징으로 분석됩니다.



|건강 식품 매장(왼) / 신세계 상품권 5종(오)


한편, 1990년대에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인삼, 꿀, 영지 등 건강 기호식품이 선물품목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도서상품권이나 상품권이 선물로 등장한 것도 이때입니다. 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과 모든 것이 풍족해진 시대를 반증하는 변화입니다. 상품권이 선물로 등장하면서 선물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비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개인적 성향이 중시되는 사회적 변화와 함께 대중적인 선물품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시기 눈여겨 볼만한 선물로는 골프, 헬스 기구 등 스포츠 레저상품입니다. 또한, 할인점이 급성장하면서 참치나 조미료 세트 등 저가형 규격식품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백화점 선물세트는 선물 증정용으로, 할인점 선물세트는 자기소비나 단체선물로 사용된 것입니다.



급변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2000년대 선물



|2000년대 신세계 명절 선물 카탈로그(김혜수/손태영)



|정육 및 와인 세트(왼) / 상품권 코너(오)


2000년대 선물은 1990년대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양극화 현상이 연장됩니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고가제품은 더욱 고급화되고, 할인점을 중심으로 한 실용적인 중저가 선물세트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강세 선물인 정육 세트 외에 와인과 올리브유 등 이른바 웰빙 상품의 인기가 꾸준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소용량 제품과 간편 조리상품도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등장한 상품권은 이제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이 되었습니다.


2010년 이후에는 자녀가 좋아하고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선물이 인기입니다. 전자완구, 입체서적, 퍼즐, PMP 등 감성과 지능을 높일 수 있는 상품이 선물로 등장한 것입니다. 또한, 재테크를 위한 금융상품을 선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최근 가장 인기 있는 단어인 힐링을 테마로 한 선물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미에 잘게 썬 솔잎을 섞은 효소나 간의 피로를 풀어준다는 구관모 식초 등이 이러한 웰빙 힐링 선물입니다.


지금까지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명절 인기선물 변천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에서 명절은 일 년 중 가장 풍요로운 시기입니다. 이 시기 선물이 등장한 이유도 이러한 풍요로운 마음을 나누기 위함일 것입니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시대상과 함께 선물 풍토도 꾸준히 변화해 왔습니다. 하지만 명절 선물은 그간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대한 마음의 표시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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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시 백화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근대의 아이콘, 한국 최초의 백화점(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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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은 지금으로부터 약 85년 전,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위치해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근대문화의 신세계로 안내하던 한국 근대사의 아이콘,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은 그 곳에서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을까요?



미스코시백화점의 매장 구성



1931년도에서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에서 제작한 ‘경성삼월신관안내’를 보면 지하층에서부터 옥상에 이르기까지 층별 매장 구성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미스코시의 매장구성은 15년간(1930∼1945)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층별 구성 안내




상품과 라벨의 구성


(1) 상품





미스코시는 당시 상류층을 상대로 운영하였습니다. 상류층은 일본 현지 상품의 매입과 한국의 고급 토산품 직매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상품의 경우 매일 매입했으며, 한국 특산품의 활발한 매입과 판매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미스코시 경성점 물산부에서는 각 도의 도지사나 산업국장에게 편지를 띄워 지역별 특산품이나 희귀품을 추천받아 판매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나전칠기나 도자기 등은 당시 미술관에서 전시한 이후에 주력 판매상품으로 개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백화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은 양말, 넥타이, 화장품, 오복이었습니다.




(2) 라벨 및 상표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은 다양한 상품구성과 함께 경영면에서도 철저한 정찰제 및 반품제 실시, 근대적인 판매관리 등을 도입하여 기존의 유통체계와 판매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상품을 진열해 놓고 파는 데 생소했던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쇼케이스와 상품 진열을 위주로 한 미스코시백화점의 영업 방식은 신기하기만 한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쇼윈도와 진열장에 멋지게 진열된 상품들, 선진문화의 전시장 역할을 담당해 온 미술관, 각층을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상류층의 휴식공간으로 이름이 높았던 옥상정원, 오전이면 ‘모닝커피’ 손님으로 가득한 커피숍 등 미스코시의 모든 공간은 당시 사람들이 ‘근대’를 만나는 현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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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백화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근대의 아이콘, 한국 최초의 백화점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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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백화점이 탄생한 날

우리는 근대를 만질 수 있었고 볼 수 있었다.



미스코시백화점의 개점과 외관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신축장면(왼) / 조명으로 장식한 미스코시 경성점 외관 야경(오)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신관 낙성 포스터 및 건축 낙성문(왼) / 조선일보 개점 광고(오)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은 신세계백화점의 전신인 미스코시(三越)백화점 경성점입니다. 1930년 10월 24일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대규모 신관을 만들어 근대적 백화점으로서 첫발을 내디뎠죠. 대지 730평, 건평 435평, 연건평 2,300평, 종업원 360여 명으로 당시 조선과 만주를 통틀어 최고 및 최대 규모의 백화점이었습니다.



백화점 개점 당일 1층 중앙로터리와 중앙 계단에 인산인해를 이룬 고객 모습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외부 쇼윈도우(왼) /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후면 전경(오)


 사진 엽서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당시 미스코시 경성점은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백화점이 아니었습니다. 선진 문화를 흡수, 전파하는 ‘문화 살롱’이자, 근대를 직접 느낄 수 있는 경성 최고의 명물이었죠. 그래서 경성의 근대 문물을 소개하거나 경성 관광 기념엽서에 미스코시 경성점의 외관이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백화점은 어떻게 운영됐을까?



미스코시백화점 동경 본점의 자동차 및 자전거 배달 장면, 경성점도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백화점은 모든 매장이 직영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관리가 어려운 귀금속이나 식품류 정도가 임대였고, 매출의 10% 정도의 수수료를 적용하였습니다. 경영면에서도 철저한 정찰제와 반품제 실시, 영수증 발급 등 근대적인 백화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미스코시 경성점의 또 다른 특징은 철저한 고객 서비스입니다. 매일 개점 시간 전에 전직원을 대상으로 인사부서에서 그날의 교육을 실시한 후 매장을 열었습니다. 판매원들은 한국인에겐 한국말로, 일본인에겐 일어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매장만 둘러보아도 왜 구경만 하느냐’는 눈치를 받지 않는 것도 당시의 고객에게는 생소한 경험이었죠. 그래서 이는 차별화된 고객 응대였습니다. 이와 함께 고객이 매장이 직접 방문하게 어려운 경우에는 전화로 주문을 받아 배달을 해주었습니다. 배달을 위해 한국인 자전거 배달부가 별도로 조직되었고, 지방의 경우 미스코시 배달차가 매일 오전에 상품을 배달하였습니다.



<근대의 아이콘, 한국 최초의 백화점 미스코시 경성점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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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명절 최고 인기선물은? : 1950~1980년대 편
1950~1980년대 최고의 명절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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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야말로 삶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해주는 우리 민족 최소의 정서이죠.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정에 약한 민족도 드뭅니다. 그만큼 우리는 정에 약한 민족이며, 서로 간의 정을 담은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내 식구는 못 먹어도 선물만은 귀한 것을 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달걀 한 꾸러미, 찐 고구마 한 바구니, 참기름 한 병 등 집에서 직접 만들어 수줍게 내밀던 선물에서 상점이나 상인들이 패키지로 만들어놓은 선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선물의 구성은 시대적 환경과 소비자 의식에 따라 변합니다. 그중 명절과 선물시즌에 보내는 선물상품의 변화는 각 시대의 경제수준과 생활관습을 보여줍니다.



1950~60년대 생필품 위주의 선물





6•25 이후 사회복구에 힘쓰는 50년대에는 선물이 상품화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당시에는 매 끼니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밀가루와 쌀, 달걀, 찹쌀, 돼지고기, 참기름 등의 농수산물을 선물로 주고받았습니다.





60년대에는 어느 정도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면서 설탕, 비누, 조미료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이 선물로 인기를 누렸습니다. 당시 선물 종류는 100여 종 정도였습니다. 그중 설탕은 물자가 부족했던 60년대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선물 변화는 당시 우리 경제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이때는 아직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식생활 문제마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였죠. 또한, 규격화되고 편리한 공산품이 희귀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식생활에 도움이 되는 선물을 주고받았습니다. 이외에 아동복, 내의 등의 직물류가 인기선물에 속했습니다. 직물류의 제품은 2~3천 원대였고, 이때부터 백화점이 선물구매 장소로 등장하였습니다. 백화점에서는 1960년대부터 추석 신문광고를 집행하기 시작했고, 한 장짜리 추석 카탈로그를 제작, 배포하는 등 추석을 판촉행사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산업화로 변화하는 1970년대 선물



1970년대 신세계 명절 선물 카탈로그(김희진 /안인숙/이미숙)


1970년대는 산업화가 시작된 시기입니다.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이루면서 국민생활도 보다 풍요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선물풍토도 바뀌어 가고, 선물의 종류도 천 여종 정도로 늘어납니다.





다양한 공산품이 생산되면서 생필품 위주의 선물이 기호품으로 대체되기 시작합니다. 이때의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은 식용유, 럭키 치약, 와이셔츠, 피혁제품, 주류 등입니다. 가격은 3~5천 원 내외였죠. 또한, 커피세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특히, 다양한 과자로 박스를 구성한 종합선물세트는 어린이에게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선보인 동서식품의 맥스웰 커피세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유는 당시 다방과 함께 커피가 확산하였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설탕과 조미료 세트에 이어 인기 있는 백화점 선물 매출 3위를 차지하였습니다.


70년대의 또 하나의 재미있는 현상은 지금과는 달리 화장품과 여성용 속옷, 스타킹 등이 상당히 고급 선물세트이었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텔레비전, 전자보온밥통, 전기밥솥, 가스레인지 등의 가전제품이 선물로 집중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얼마나 빨리 이루어졌고, 이와 함께 전자제품이 급속하게 대중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변화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는 이러한 제품이 완전히 대중화되면서 선물로서의 명성도 잃게 됩니다.



현재 명절선물을 정착한 1980년대



1980년대 신세계 명절 선물 카탈로그(선우용녀/김창숙/윤미라)


우리나라 1980년대는 중산층의 비율이 증가하고 수출이 증가하면서 대중 소비사회가 시작됩니다. 자동차를 보유한 가정이 늘어나는 마이카 시대이기도 하죠. 이러한 경제성장과 함께 선물도 고급화, 다양화됩니다. 획일적인 선물이 아니라 상대방에 알맞은 제품을 선물하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았고, 그 종류도 3천여 종으로 늘어납니다.





지금도 인기선물인 넥타이, 스카프, 지갑, 벨트, 양말세트 등 신변 잡화가 선물로 등장한 것이 이때입니다. 또한, 정육 세트나 고급 과일, 참치, 통조림으로 대변되는 규격화된 식품도 인기 있는 선물로 떠오릅니다. 이처럼 1980년대는 선물문화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시기입니다. 신규 백화점이 출현하고, 다점포화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죠. 백화점에서는 자체적으로 상품을 개발하고, 배달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소득 증가와 함께 두터워진 중산층의 비중은 선물의 양상을 변화토록 하였습니다.



<그때 그 시절, 명절 최고 인기선물은? : 1990~2000년대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