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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지붕 위에 청색을 허하라!”
김 석
#김석기자


경복궁 뒤편 백악산(북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1960년 4·19혁명 이후 윤보선 대통령 시절에 옛 이름인 경무대(景武臺)를 버리고 새로 쓰기 시작한 이름 청와대(靑瓦臺). 중심 건물인 본관은 2층 화강암 석조에 지붕에는 청기와(靑瓦)를 얹었죠. 그래서 청와대라 이름 붙인 겁니다.



이렇게 건물 지붕에 청기와를 쓴 데는 역사적 유래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시대 역사를 서술한 《고려사》입니다. 의종 11년인 1157년 4월 기사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대궐 동쪽에 이궁(離宮)을 완성했다. 또 민가 50여 채를 허물어 태평정(太平亭)을 짓고 태자에게 명하여 현판을 쓰게 했다. 정자 남쪽엔 연못을 파고 관란정(觀瀾亭)을 지었으며, 그 북쪽에는 양이정(養怡亭)을 세우고 청자로 덮었다.


고려는 명실상부 청자(靑瓷)의 나라였죠. 청자 하면 흔히 도자기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겠지만, 고려인들은 정말 온갖 자질구레한 일상용품까지도 청자로 만들어 썼습니다. 그러니 기와를 청자로 만들었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게 없죠. 대표적인 청자 생산지로 꼽히는 전남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청자기와가 그 분명한 증거입니다.


<청자로 만든 기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출토, 고려 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실에서 만날 수 있는 청자기와입니다. 고려시대에 최고급 청자를 생산한 대구소(大口所)가 전남 강진에 있었죠. 바로 그 자리에서 발굴된 귀한 유물입니다. 답사기로 유명한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국보순례》라는 책에서 국보 지정 여부와 상관없이 이 청자기와를 ‘국보’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았던 청자기와 발견 비화


심지어 이 희귀한 유물은 발견된 과정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청자 하면 첫손에 꼽은 곳이 개성박물관입니다. 당시 국보급 청자가 여러 점 소장돼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자 한국 미술사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이 박물관 최고의 보물로 꼽은 유물은 수두룩한 국보 청자가 아니었습니다.


청자기와를 하나하나 만들려면 고도로 숙련된 기술이 필요합니다. 고려시대에 청자기와로 정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청자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청자기와로 덮은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도 청자기와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으로 아주 귀한 유물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깨진 것만 보존돼 있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또 어디서 이것이 생산됐는지 아무도 몰라요.


<청자 기와편>, 고려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유섭 선생이 청자기와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만하죠. 당시 개성박물관에 있던 청자기와 조각은 고려의 왕궁이 있던 개성 만월대 인근에서 발견된 것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못다 이룬 꿈이 못내 안타까웠던 제자가 있었으니 이분이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1916~1984) 선생입니다.


1964년 5월의 어느 날, 전남 강진 사당리 일대를 돌고 있던 최순우 일행에게 한 아주머니가 청자 파편이 가득 담긴 소쿠리를 들고 옵니다. 최순우는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질 뻔했죠. 전대미문의 청자기와 암막새 파편 하나가 눈에 띈 겁니다. 전설처럼 전해오던 청자기와의 실체가 마침내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습니다.


역사기록에 나오는 청자기와의 실물을 보고 가슴이 뛰어 말이 안 나왔다. 당시 조사단에는 지방대학의 실습 학생들도 많이 참가하고 있어 청자기와 발견 사실이 알려지면 조사에도 지장이 있지만, 고가의 귀중한 청자기와가 흩어질 염려가 있어 정양모 씨와 둘이서만 알고 서울 올라올 때까지 비밀로 하고 조사했던 일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유쾌한 추억”이라고 최 관장은 당시를 회고한다...(경향신문, 1975.5.10)


《미술자료》 9호(1964년 12월 발간)에 수록된 당시 발굴 현장 사진


알고 보니 소쿠리를 들고 나타난 아주머니의 집 안팎이 온통 고려청자 파편으로 가득했던 겁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완형에 가까운 청자기와와 파편들이 수습됐습니다. 연구자들의 애를 태운 역사의 수수께끼는 그렇게 풀렸습니다. 이런 사연이 전기 작가 이충렬이 쓴 최순우 전기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에 극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궁궐에 남아 있는 청기와의 흔적들


창덕궁 선정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현재 남아 있는 궁궐 건물 가운데 청기와 지붕 건물이 딱 하나 있습니다.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건물 지붕에 청기와를 사용한 경우가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창덕궁관리소장을 지낸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가 최근에 펴낸 책 《창덕궁, 왕의 마음을 훔치다》를 보면 광해군 때 청기와 재료 공급 문제를 논의한 내용이 소개돼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중초본》 광해 9년(1617) 6월 27일 기사입니다.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일찍이 성상의 분부로 인하여 청기와 30눌(訥)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안에서 내려준 염초(焰硝) 2백 근을 쓰는 외에, 부족한 숫자는 무역해 오면 자연 이를 옮겨 써서 구워낼 수가 있습니다. 다만 이외에 또 때때로 계속해서 구워내고자 하면 미리 마련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성상의 분부대로 도감에 있는 은(銀)을 동지사(冬至使) 편에 보내어서 그로 하여금 사오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청기와를 구워내는 데 필요해서 무역해 오는 물품은 넉넉하게 사오게 하라.”하였다.


영건도감은 건설 공사를 담당하는 임시 기구입니다. 당시에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지붕에 얹을 청기와 재료로 염초(焰硝)를 썼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이죠. 염초는 화약을 만드는 핵심 원료로 쓰였던 것인데, 청기와 안료로도 썼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기록한 사관(史官)은 굳이 수입까지 해야겠냐며 비판적인 논평을 붙여 놓았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중략) 하대(夏代) 말기로 내려와 곤오(昆吾)가 기와를 구운 것에 대해서 검소한 덕을 숭상하는 임금이 이미 사치스럽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 반드시 만 리 바깥에서 회회청(回回靑)을 사와서 정전(正殿)의 기와를 문채 나게 한 다음에야 서울을 우뚝하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더구나 지금 적당한 시기가 아닌데 크게 토목공사를 벌려서 국가의 재정이 탕갈되었는데이겠는가. 그런데도 도감을 맡고 있는 자들은 매번 사치스럽고 크게 하기만을 일삼으면서 일찍이 한 사람도 한마디 말을 하여 폐단에 대해 진달해서 만 분의 일이나마 폐단을 구제하지 않으니, 애석하도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동궐도>에 그려진 경훈각


청기와가 비용이 꽤 많이 드는 사치스러운 재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회회청(回回靑)은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값비싼 수입 안료였습니다. 신희권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후기 창덕궁을 상세하게 그린 〈동궐도〉에서 청기와 지붕 건물은 선정전과 경훈각 두 채입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 국가 재정 때문에 청기와를 거의 쓰지 않았다는 것을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은 조선 궁궐 전체를 통틀어 선정전 하나만 남았고요.


사용하지 않으면 기술에 녹이 스는 법이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다시 지으면서 청기와를 만들어보려 했던 사실이 당시 공사 일지인 《경복궁 영건일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고종 2년(1865) 7월 30일의 기록입니다.


청와(靑瓦)를 구워내도록 한 일을 거두고 와장(瓦匠) 8명을 방송(放送)하였다. 대개 청와는 일반적으로 굽는 기와가 아니라서 그 법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분원점(分院店)에 사기(沙器)를 만드는 흙으로 청와를 조성하게 하였더니, 1개 만드는 데 소비되는 비용이 8냥에 달했다. 다시 흙기와[土瓦]를 만들어 청화(靑花)를 바르고 구워냈더니 물색(物色)이 혼합되어 온전하게 모양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다시 구워진 기와의 표면에 붕사(硼沙)를 바르고 황단(黃丹)을 두 번째로 바르고 미호(米糊)를 세 번째로 바른 뒤 파란(波蘭)을 더해서 구워내었더니 색과 모양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예전 것만 못했다. <와장> 8명이 스스로 잘 만들 수 있다기에 시험해 보았지만, 또 해내지 못했으므로 곧바로 방송하였다.



▍실패 또 실패…맥 끊긴 청기와 제작 기술


국립중앙박물관 앞 연못가에 있는 청자정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얘기입니다. 만드는 것도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드는 데다, 결정적으로는 원하는 품질을 얻지 못한 것이죠. 기와는 만들 수 있어도 제 색깔이 안 나오면 궁궐 지붕에 올릴 수 없었을 테니까요. 이 대목은 대대로 전해지던 전통 청기와 제작 기법이 단절되었음을 선언하는 장면으로 읽힙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서울 홍대 인근에 있었던 청기와 주유소는 이 동네의 랜드마크로 여겨졌습니다.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는 길을 찾아갈 때 누구나 아는 건물을 기준으로 방향을 잡았으니까요. 청기와 주유소는 홍대 인근으로 가는 기준점이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그 명성(?)이 청기와를 얹었다는 특이성 때문에 생겨난 건 아닐까요.


국립중앙박물관 연못가에는 청자로 지붕을 만든 꽤 운치 있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정자는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해 201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으로 옮기면서 새로 지은 겁니다. 안내판을 보면 앞서 소개해드린 《고려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지었다고 돼 있죠. 이 아담하고 근사한 정자는 과거의 유산을 현재로 불러낸 기억의 타임머신입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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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한국에도 괴물이?! 한국 괴물의 역사
김 석
#김석기자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본 ‘괴물’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흔히 괴물이라고 하면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말 그대로 괴상하게 생긴, 그러면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떠올리게 되죠. 영화에서 이미 숱하게 보아온 괴물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작게는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작은 괴물부터 크게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거대 괴수까지 긴 역사 속에서 인간은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괴물들을 지어내고 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괴물이 아니라 물괴(物怪)라고?


영화 <물괴> 포스터


본 영화는 조선왕조실록 중종 22년에 실린 본문을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임을 알려드립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물괴> 보셨습니까.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런 자막이 나옵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근거해서 만들었다는 거죠. 괴수 영화와 사극을 융합한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주목을 받았던 건 우리 역사에 남아 있는 우리 괴물을 소재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실록에는 도대체 뭐라고 적혀 있을까요?


밤에 개 같은 짐승이 문소전(文昭殿) 뒤에서 나와 앞 묘전(廟殿)으로 향하는 것을, 전복(殿僕)이 괴이하게 여겨 쫓으니 서쪽 담을 넘어 달아났다. 명하여 몰아서 찾게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중종실록≫ 1511년 5월 9일 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밤에, 개처럼 보이는 짐승이, 궁궐에 나타났기에, 쫓아갔더니, 달아나서, 찾아봤지만, 못 찾았다는 겁니다. 이 정체 모를 짐승이 개와 비슷하다며 수류견(獸類犬)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짐승은 16년 뒤에 또 나타납니다.


간밤에 소라 부는 갑사(甲士) 한 명이 꿈에 가위눌려 기절하자, 동료들이 놀라 일어나 구료(救療)하느라 떠들썩했습니다. 그래서 제군(諸軍)이 일시에 일어나서 보았는데 생기기는 삽살개 같고 크기는 망아지 같은 것이 취라치(吹螺赤) 방에서 나와 서명문(西明門)으로 향해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서소위 부장(西所衛部長)의 첩보(牒報)에도 ‘군사들이 또한 그것을 보았는데, 충찬위청(忠贊衛廳) 모퉁이에서 큰 소리를 내며 서소위를 향하여 달려왔으므로 모두들 놀라 고함을 질렀다. 취라치 방에는 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라고 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물괴의 모습


≪중종실록≫ 1527년 6월 17일의 기록입니다. 궁궐에 다시 나타난 이 짐승을 생김새가 삽살개(厖狗) 같고 크기는 망아지(兒馬) 같다고 묘사해 놓았습니다. 달리면서 큰 소리를 냈고, 머물던 방에선 비린내가 풍겼다고도 했습니다. 병사들조차 벌벌 떨 정도였다니 이 낯선 존재가 주는 공포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만하죠? 이 괴이한 짐승에 대한 흉흉한 이야기가 궐 밖까지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조정에선 대책 마련에 분주합니다. 꿈에 가위눌린 일을 가지고 경거망동하지 말라! 함부로 떠드는 자가 있으면 엄벌에 처하리라! 6월 25일의 기록은 계속됩니다.


삼가 살피건대 근일 궐내에서 숙직하던 군사가 괴물(怪物)이 있다는 헛소리를 전하자, 한 사람이 부르면 백 사람이 부동하듯이 휩쓸렸습니다. 그래서 심한 자는 놀래 나자빠지기도 하는 등 와언(訛言)이 마구 전파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지만, 유식한 자들 또한 덩달아 날조하여 요설(妖說)을 부연(敷衍), 혹은 형적이 있다고도 하고 혹은 소리와 냄새가 났다고도 하니, 근거 없는 괴설(怪說)이 어쩌면 이렇게 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난리법석을 야기한 최초 괴담 유포자를 잡아다가 처벌해야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임금에게 호소하죠. 바로 여기에서 마침내 영화 제목으로 쓰인 물괴(物怪)란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어지는 실록의 내용을 보면 그 당시 민심이 얼마나 흉흉했는지 잘 알 수 있는데요. 심지어 임금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잠시 창덕궁에 가 있겠다고 말합니다. 신하들은 극구 만류하지만, 임금은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좌) 영화의 물괴 글씨 (우) 실록의 물괴 글씨
옥에 티. 영화에 등장하는 실록의 기록 장면을 보면 물괴의 괴를 ‘怪’로 쓰고 있지만, 실록에는 같은 뜻과 음을 지닌 ‘恠’로 적혀 있습니다.


괴담은 시절이 어지럽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혼란스러운 시대가 괴담을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중종 연간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했던, 한 마디로 나라가 나라답지 못했던 극도의 혼란기였습니다. 물괴, 다시 말해 괴물은 그런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응어리진 하나의 ‘상징’이었던 겁니다. 여러모로 영화의 소재로 딱 그만이죠. 영화가 덧없는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 생각할수록 아쉽기만 합니다.



어느 SF 작가의 ‘이유 있는’ 괴물 탐구


뜬금없이 웬 괴물 타령이냐고요? 제가 최근에 읽은 책 때문입니다. 제목이 무려 《한국 괴물 백과》랍니다. 이름난 SF 작가인 곽재식 씨가 무려 11년 동안 18세기 이전의 문헌에 기록된 괴상한 존재들을 샅샅이 조사해서 만든, 말 그대로 백과사전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일찍이 우리에게 이런 책이 있었던가요? 도대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SF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희한한 책을 썼을까요? 저자의 서문에 그 답이 있습니다.


곽재식 《한국 괴물 백과》(워크룸 프레스, 2018). 표지부터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깁니다.


나는 괴물 백과사전 같은 자료가 그 문화권만의 특색 있는 이야기나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무척 귀중한 바탕이라 생각해왔다.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명쾌하게 설명됩니다. 쓸 만한 이야깃감을 찾기 위해 라는 거죠. 소재가 고갈된 할리우드 영화가 그리스 신화부터 심지어는 북유럽 신화까지 끌어들여 영화의 소재로 삼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화가 그 모든 이야기의 ‘뿌리’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깃거리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 고민에 대한 결과물이 바로 괴물 백과인 겁니다. 실제로 수류견(獸類犬)에 관한 기록은 영화 <물괴>를 탄생시킨 밑천이 된 거고요.


저자가 백과사전에 담은 한국의 괴물이 무려 282종이나 된답니다.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해버리기엔 진지한 기록들이 많죠. 가령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엄청난 독서광이었던 청장관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앙엽기 盎葉記》에 ‘강철(强鐵)’이란 괴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망아지 정도 크기에 얼굴은 사자나 용 같고 사납게 날뛰어 농가에 큰 피해를 끼친다는 괴물인데요. 얼마나 큰 피해를 끼쳤으면 ‘강철이 간 데는 가을도 봄’이란 속담이 있을 정도죠. 흥미로운 건 조선 시대도 아닌 20세기에 강철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신문에까지 실렸다는 사실입니다.


깡철의 마력 / 양산군 금산부락 앞 물 들판에는 홍수가 휘몰아치던 지난 3일 깡철이란 동물 두 마리가 나타나 가산과 가족을 잃은 이재민들은 깡철 구경에 한창 법석댔는데 깡철의 움직임에 따라 그 지대 수면이 약 5미터가량 높았다 얕았다 동요하더라…(동아일보, 1957년 8월 11일)


(좌) 강철 (우) 천록
이 책에는 일러스트 작가 이강훈의 그림이 하나하나 붙어 있어서 괴물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읽는 재미가 남다릅니다.


천록(天祿)이라는 상상 속 동물도 있습니다. 강철과는 반대로 나쁜 사람만 골라 벌을 주는 ‘권선징악’의 존재로 묘사되죠. 크기는 작은 사슴 정도에 얼굴은 호랑이나 사자 같이 사납고 뿔이 하나 있으며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만 있는 강철과 달리 천록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인데,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僻邪)의 의미 덕분에 궁궐 안에도 천록을 새긴 조각상이 남아 있습니다. 2017년 9월에 제가 <경복궁,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글을 통해서 자세하게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요.



간단하게 내용을 정리해드리면,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서면 흥례문이 보이죠? 이 문을 지나면 ‘영제교’ 또는 ‘금천교’라 불리는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냇물이 금천(禁川)이고요. 다리 위에서 양 옆을 보면 돌짐승 네 마리가 물길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녀석들이 바로 천록(天鹿)입니다. 조선 태조 때 경복궁을 창건하면서부터 있었던 이 천록상들은 일제강점기에 다리가 철거되는 와중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옛 모습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니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만하죠.



마음껏 괴물을 상상하라!


책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이 가슴 한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다는 희랑(希郞)입니다. 이 이야기 역시 제가 올해 1월에 <건국 1,100년 고려 예술의 정수를 엿보다>라는 글에서 소개해드린 바 있습니다. 바로 태조 왕건의 스승이었던 불교 승려 희랑대사(希朗大師)가 그 주인공입니다. 실제로 희랑대사상을 보면 가슴 한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흉승(穿胸僧, 가슴에 구멍이 뚫린 승려)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죠.


희랑대사상을 자세히 보면 가슴 한가운데 진짜로 구멍이 보입니다.



일일이 다 소개해드릴 순 없지만, 이 밖에도 재미난 이야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를테면 서양에만 있을 법한 인어(人魚)도 나오고, 흔하게는 도깨비나 구미호 이야기도 있고요. 말이 괴물이지 위에 소개한 희랑처럼 전혀 괴상하게 생기지 않은, 괴물 같지 않은 괴물도 많습니다. 중요한 건 이런 수많은 괴물 이야기가 돌고 돌아 이런저런 문헌에 기록돼서 오늘날까지 전한다는 점이겠죠.


그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합니다. 요는 흔히 말하는 콘텐츠죠. 알맹이 있는 이야기 말입니다. 괴물 백과를 탐독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이야기를 가진 자, 이야기를 만드는 자가 살아남는 법이라고. 이야기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 아니겠느냐고. 그래서 그 풍부한 이야기들을 밑천 삼아 자유롭게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것, 생각만 해도 흥미진진합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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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그림으로 피어난 우리 땅 ‘독도’
김 석

그 섬에 화가가 있었습니다. 하늘은 푸르렀고, 바다의 푸름은 그보다 더 깊었지요. 파도 소리, 새 소리 가득한 섬. 벗인 양, 연인인 양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 짓는 모습이 얼마나 정겨웠던지. 육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외딴 섬은 화가의 가슴을 한없이 요동치게 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두 섬이 그토록 오랜 풍파를 꿋꿋이 견뎌온 어엿한 우리 땅이었으니까요. 동도에서 서도를 바라보는 화가의 붓은 그림 속에서 아련한 메아리를 불러냅니다.


류인선, <독도-동도에서 서도를 바라보다>, 23.3×40.9cm,  캔버스에 아크릴과 오일 파스텔, 2015



언제나 시릴 그 바다와 또 언제나 맑고 신선할 그 공기와 괭이갈매기 소리…! 제가 본 독도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아주 오래 전 울릉도로 갈 때 본 동해는 그 깊이가 얼마나 아득한 건지 검은 돌 같기도 했는데, 하얀 파도와 어울린 독도의 물빛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푸른빛이었습니다. 괭이갈매기(독도의 주인인 듯한)의 배설물이 척박한 환경을 비옥하게 만들어주었는지 소리쟁이와 방가지똥은 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만큼 튼실해 보였습니다. 철 이른 연보랏빛 해국 꽃이 드문드문 보이고 개갓냉이 노란 꽃은 무리를 이뤄 독도에 노란 옷을 입혀주고 있었습니다. 바위채송화와 갯제비쑥도 곱게 연초록 융단을 짜고 있을 즈음, 잊지 못할 2015년 5월 16일이었습니다. 

- 작가의 말


화가가 독도에 첫 발을 내디딘 건 한창 꽃피는 5월이었습니다. 소리쟁이, 방가지똥, 개갓냉이, 갯제비쑥… 정겨워서 더 고마운 꽃들이 뿌리 내리고 번성한 섬. 육지에서 그렇게도 먼 곳에서 어쩌면 그렇게 살뜰하고 의젓하게 뭇 생명들의 싹을 틔워 올렸을까요. 그 대견함에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비단 화가뿐이었을까요. 긴 세월 모진 풍파를 말없이 견뎌낸 저 꽃들이야말로 독도의 어엿한 주인이 아닐는지요.


류인선 <독도-풀꽃 사이로 보다 1, 2, 3>, 116.8×91cm, 면천에 한지와 채색, 2015


이 땅의 온갖 꽃에 남다른 애정을 품은 화가가 독도의 꽃들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겠지요. 동양화가인 류인선 작가가 2015년에 완성한 그림 <독도-풀꽃 사이로 보다>입니다. 세 그림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는데요. 화폭 아래 배꼼 고개를 내민 풀꽃들이 마치 독도를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같지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의 시선이 풀꽃들의 시선과 겹쳐져 있어요. 생명으로서의 꽃을 존중할 줄 아는 화가의 바로 그 ‘눈높이’ 덕분에 이 작품은 독도를 묘사한 그 어떤 그림보다도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류인선 <독도수호바위 풍경>, 91×182cm, 면천에 한지와 채색, 2015



화가들, 독도를 그리다


독도를 그린 화가는 꽤 많습니다. 독도를 주제로 한 미술 전시회 또한 그리 드물지 않고요. 위에 소개한 류인선 작가의 작품들도 2015년 10월 28일부터 12월 13일까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개최된 특별기획전 <독도 오감도>란 전시회에서 대중에 선보였는데요. ‘문화를 통한 독도사랑’을 표방한 예술가들이 뜻을 모아 꾸린 라메르에릴(바다와 섬)이란 이름의 사단법인이 기획한 첫 전시였지요.


우리 화가들에게 독도는 단순한 풍경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잊힐 만하면 불거지는 일본의 도발에 화가들은 붓으로 답했습니다. <독도 오감도>를 시작으로 같은 주제로 전시회가 모두 네 차례 열립니다. 가장 최근 전시는 지난해 11월 29일부터 12월 1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국의 진경 – 독도와 울릉도>였습니다. 일부러 찾아가긴 멀지만 가까이서 독도를 볼 수 있었던 건 화가들의 그림 덕분이었죠.


3,200개가 넘는 우리나라의 섬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려진 섬. 이 땅의 자연지형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려진 대상물. 독도는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겠지요. 그러니 그 많은 독도 그림을 역사라는 틀 안에만 꽁꽁 가둘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림은 무엇보다 그림으로 보면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어떤 그림들은 더 특별한 예술적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김선두 <독도-작은 리조트>, 145×112cm, 장지에 분채, 2017


정일영 <독도>, 97×162cm, 캔버스에 아크릴, 2017


하태임 <독도>, 91×116.8cm, 캔버스에 아크릴, 2017


임만혁 <독도 17-1>, 75×213cm, 한지에 목탄, 2017


김덕기 <원더풀 독도>, 193.9×259.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용의 기운’을 품은 신비의 섬 독도


독도만 그리는 화가가 과연 있을까요. 글쎄요. 과문한 탓인지 아직 그런 화가를 만나보진 못했습니다. 그럼 독도를 주제로 개인 전시회를 연 화가는 있었을까요. 찾아보니 실제로 있더군요. 모르긴 몰라도 처음 만난 독도는 화가에게 말할 수 없이 깊은 예술적 영감을 주었을 겁니다. 그래서 다시는 못 올 것처럼 동도에서 서도까지 독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눈과 가슴에 한가득 담아가는 것도 모자라 붓을 들었겠지요.


2015년 6월, 서울 대학로 혜화아트센터에서 아주 특별한 전시회가 열립니다. 전시 제목은 <조광기 독도 아크릴 드로잉 전>. 엿새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 화가가 독도 그림만을 모아 대중에 선보인 건 아마도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 전시회 포스터를 보면 독도의 두 섬 가운데 동도 그림이 보이고 그 아래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바다에서 본 동도의 모습은 한 마리 용이 꿈틀거리는 듯…”


조광기 <독도의 꿈>, 77×107cm, 메트지에 아크릴 드로잉, 2015


그런데 참 묘하게도 독도의 모습에서 용을 떠올린 화가가 또 있었답니다. 한국화가 소산 박대성 화백의 <독도>입니다. 올해 2월 7일부터 3월 4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된 박 화백의 개인전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에서 공개된 그림인데요. 가로 8미터로 전시장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장대한 규모의 이 작품은 압도적인 힘으로 관람객을 사로잡는 대작입니다. 독도 그림으로 이보다 큰 작품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붉은 여의주를 움켜쥔 신성한 해룡(海龍)의 대갈일성이 그림 밖으로 생생하게 전해져오는 것만 같습니다.


박대성 <독도>, 218×800cm, 종이에 잉크, 2015


예술가들만 감지해낼 수 있는 어떤 강한 에너지가 전해진 걸까요. 2015년의 어느 하루 8시간 동안 독도를 만나고 돌아온 화가는 곧바로 독도를 그리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그림 12점을 대중 앞에 선보입니다. 독도가 아니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그림이었고 전시회였을 겁니다. 독도 그림으로 처음 개인전을 연 서양화가 조광기 화백의 독도 그림은 지금까지 보아온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또 다릅니다. 독특하게 아크릴 물감을 드로잉의 재료로 활용했는데, 바탕 재질에 따라 질감의 차이가 도드라지는 게 특징이지요. 


조광기 <독도의 꿈>, 90×7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좌) 조광기 <독도의 꿈>, 107×77cm, 메트지에 아크릴 드로잉, 2015    (우) 조광기 <독도의 꿈(일출)>, 90×7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조광기 <청산사유(독도)>, 60×50cm, 혼합재료, 2018


시인이 뜨거운 우리 말글로 그려낸 독도. 아마 독도를 노래한 시인 역시 꽤 많겠지요. 그 중에서 독도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시는 아마도 도종환 시인의 <독도>일 겁니다. 때론 감상적이면서도 때론 유장한 시어들이 빚어내는 깊은 울림에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데요. 조광기 화백이 최근에 그려낸 독도 그림 한 점은 마치 도종환의 시를 붓으로 풀어낸 것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하늘이며 땅이며 온통 푸른 빛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된 독도, 푸름 안에 깃든 독도였지요.



그림 속에서 독도가 말을 걸어왔다



김준권 <山韻-0901>, 400×160cm, 수묵목판, 2009


얼마 전 벼르고 별렀던 한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올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 당시 회담 못지않게 화제가 된 미술품이 있었지요. 두 정상의 뒤로 멋들어진 첩첩 산줄기가 장대하게 펼쳐진 이 판화 작품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목판화가 김준권의 <산운(山韻)-0901>입니다. 어떻습니까.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줄기 너머에서 산의 소리가 들리시나요?


하지만 전시장을 가만 돌아보던 제게는 그보다 더 눈에 띄는 작품들이 있었답니다. 바로 독도 그림이었어요. 며칠 동안 독도에 관해 생각하고 자료를 찾고 글을 써오던 차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공간에서 또 다른 독도를 만난 겁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전시장을 돌면서 몇 번이고 독도를 눈에 담았지요. 독도를 그린 꽤 많은 작품을 봐왔어도 ‘독도의 아침’을 담아낸 작품은 처음 만났습니다. 바로 이 작품입니다.


김준권 <독도의 아침>, 30×40cm, 유성목판, 2018


이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잠시 판화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목판으로 찍어냈다는 걸 알고 다시 보면 정말 믿기지 않는 그림입니다.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저토록 미세한 색의 변화를 판화로 표현해냈다는 데 놀랐습니다. 아침 해가 서서히 고개를 내밀면서 자욱했던 해무가 조금씩 걷히는 그 순간의 독도를 참으로 절묘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전시장에는 이 그림 양쪽 옆에 독도의 동도, 서도가 나란히 걸려 있었어요. 작가의 솜씨인지, 전시기획자의 감각인지는 몰라도 색이 입혀진 독도 그림이 그렇게 동쪽과 서쪽에서 독도의 아침을 호위하듯 서 있는 모습마저도 퍽 특별해 보이더군요. 작품을 본 사람들은 판화라는 사실 자체를 믿기 어렵다는 반응이었지요. 붓으로 그렸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섬세한 선과 결의 묘사라든가 색채의 조화가 돋보이는 그림이었습니다.


(좌) 김준권 <독도-서도>, 89×60cm, 채묵목판, 2014    (우) 김준권 <독도-동도>, 89×54cm, 채묵목판, 2014



독도가 전하는 메시지


꽤 많은 독도 그림을 찾아보고 살피는 내내 책 한 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소설가 김탁환의 <독도평전>인데요. 제목이 참 독특하지요? 사람도 아닌 섬의 평전을 쓴다니, 그 발상이 참 남다릅니다. 독도가 품은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은지요. 책이 발간된 2005년까지 독도의 생애를 적어나간 작가는 그 이후의 삶을 여생(餘生)이라는 제목 아래 짧게 기록합니다.


까맣게 모른 채 그냥 지나갈 것 같아 적어둡니다.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입니다. 독도는 멀지만 그림은 가깝잖아요. 그래서 독도 그림을 애써 찾아다니고 수없이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독도를 만나보려 했던 겁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은 유행가 가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독도는 소중한 우리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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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북한산 인수봉은큰 바위 얼굴이었네
김 석
#김석기자


제법 쌀쌀한 겨울날이었습니다. 한 생소한 사진작가의 전시를 보러 2016년 새해 첫 인사동 나들이에 나섰지요. 옷깃을 여미며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또 다른 겨울이 활짝 눈 앞에 펼쳐지더군요. 눈 덮인 설악산은 저리도 거룩하고 아름다웠던가. 분명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수묵화’였어요.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영락없는 한 폭의 수묵화.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사진이라는 걸 알고 찾아온 관객들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답니다.



설악 1626, 107×160cm, 한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6


외설악 산줄기에 병풍처럼 우뚝 솟은 울산바위, 해발 1200미터 신선대에서 내려다본 장엄한 구름바다, 순백의 설원으로 물든 백담계곡까지… 굽이굽이 설악의 진면목이 먹빛으로 피어나고 있더군요. 비결을 알아보니 ‘한지’였습니다. 흔한 사진용 인화지가 아니라 우리 전통 한지였던 겁니다. 바짝 다가서면 한지 특유의 결이 올올이 살아 있었어요. 꿈속을 헤매듯 설악의 겨울 비경 속에 푹 빠져든 느낌이랄까요. 그때 손 하나가 불쑥 다가왔습니다. 사진을 찍은 주인공 임채욱 작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전시 제목을 <인터뷰 설악산>이라 붙인 까닭을 물었어요. “우리가 설악산을 지금까지 너무 관광지로만 인식했던 것 같아요. 이제부터라도 설악산이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듣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이 하는 말을 듣기 위해 8년 동안 쉰 번 넘게 설악산을 오르내렸다고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전시와 맞물려 설악산 케이블카 문제로 뜨거운 공방이 벌어졌지요. 굳게 입을 다문 채 아무 말 없던 설악산이 마침내 입을 엽니다. 임채욱 작가의 사진 속에서 산의 ‘숨결’이 들려왔어요.



산장 1716, 107×16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7



산을 찍은 사진, 산을 닮은 얼굴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2017년 4월, 페이스북에서 본 사진 한 장 때문에 작가에게 연락했습니다. 액자를 지게에 짊어지고 북한산을 오르는 산악인들의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었거든요. 90년 역사를 품은 백운산장에서 전시한다고 했습니다. 산장까지 오르는 수고로움이 미안했던지 전시 소식조차 알려오지 않았어요. 사라질 운명에 놓인 백운산장을 살려보겠다고 산장에서 사진전을 여는 작가. 이번엔 사진 속에 산 대신 ‘사람’이 있었습니다. 산에 깃들어 사는 이들, 산을 닮은 이들의 얼굴 말입니다.


<인터뷰 설악산>과 <백운산장> 사이에 두 차례 전시가 더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지요. 낙산과 인왕산 사진전이었습니다. 역시 먼저 연락해오는 법은 없더군요. 드러내지도 과시하지도 않는 그 소탈함이 좋았습니다. 2017년 여름, 푹푹 찌는 무더위를 뚫고 찾아간 을지로 작업실에서 작가와 오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긴 대화가 끝나갈 무렵 비로소 깨달았지요. 임채욱 작가의 사진에서 결국 중요한 건 기교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요.



마인드 스펙트럼-월천리, 100×10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08


작가 임채욱을 세상에 알린 건 월천리 솔섬 사진입니다. 작가 스스로 고백했듯 솔섬 사진의 미학적 핵심은 동양화의 ‘여백’이었습니다. 사진의 중심에는 섬이 있지만, 그 섬은 더 크고 넉넉한 하늘과 물에 안겨 있지요. 그 근간은 물론 작가가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이력입니다. 실제로 장노출 기법으로 찍은 솔섬 사진을 들여다보면 미세하게 움직이는 물의 흐름이 수묵화처럼 번지듯 표현된 것을 볼 수 있어요. 훗날 설악산 사진을 한지에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붓을 쥐어본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일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동양화 같고 수묵화 같은 기법의 특이성이나 외형적 아름다움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당시 솔섬 앞에선 LNG 생산기지 건설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지요. 임채욱은 거기에 사진으로 맞섭니다. 저명한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Michael Kenna)가 찍은 사진 한 장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섬의 비극적 운명을 세상에 알렸다는 ‘신화’가 덧칠되는 순간에도 그는 묵묵했습니다. 다만 솔섬의 아픔을 끌어안고 같이 흐느꼈을 뿐. 그 진정성과 성실함은 사진 이상으로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좌) 인수봉 1803, 160×107cm, 한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8

(우) 인수봉 1805, 160×107cm, 한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8



그는 왜 인수봉을 찍었을까?


2016년 <인터뷰 설악산> 이후 작가가 근 2년 만에 여는 대규모 개인전의 주제로 선택한 건 북한산 인수봉이었습니다. 왜 인수봉일까. 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인수봉을 아는 이가 대체 얼마나 될까. 설악산도 인왕산도 아닌 북한산, 그것도 벌거벗은 봉우리 하나가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작가에게 처음부터 대놓고 캐물었죠. 인수봉 작업이 자칫 자기만족에 그치는 건 아닌지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거든요.


을지로 작업실을 드나들면서 인수봉에 대한 작가의 생각들이 구체적인 작업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걱정은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어요. 군 복무 시절 수유리 버스터미널에서 빌딩 숲 사이로 배꼼 고개를 내민 인수봉을 본 순간을 임채욱 작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더군요. 그때부터 경북 성주 출신의 시골뜨기 미술학도에게 인수봉은 곧 서울이었고 마음 한구석에 소중하게 간직된 큰 바위 얼굴이었습니다.



인수봉 18109, 107×16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8


누군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군요.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인수봉 사진에서 예술적 감동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이에요.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작가 스스로도 인수봉 작업에선 회화적 사진의 비중보다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지향했다고 하니까요. 결국, 낱낱의 사진이 갖는 예술적 완성도보다는 사진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야 합니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 주목하면 작가가 인수봉에 매달린 까닭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요.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작가가 실험해온 한지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작품들이 망라됐습니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묵화 같은 사진은 물론 한지의 유연성과 질긴 특성을 활용해 손으로 구겨서 완성한 한지 부조 사진도 선보입니다. 특히 더 주목되는 건 한지의 빛 투과성을 활용해 스마트 조명과 결합한 이른바 ‘스마트 인수봉’입니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회심의 역작이에요.


사진에서 입체로 발전시킨 임채욱 작가의 스마트 인수봉



인수봉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


스마트 인수봉은 앞뒤를 서로 다른 사진으로 접합해 완전한 입체 형식으로 완성한 뒤 스마트 조명을 결합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관람객이 스마트폰으로 간단하게 인수봉의 색깔을 바꿀 수도 있어요. 이 똑똑한 인수봉은 외부의 음악과 소리에도 능동적으로 반응합니다. 자칫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낄 수 있는 인수봉에 좀 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다가설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지요. 작가가 인수봉 작업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당당하게 선보일 수 있었던 데는 바로 이 스마트 인수봉이란 숨은 무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인수봉에 관한 풍부한 자료들을 모은 아카이브 전시 공간입니다. 단순히 자료를 한데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아카이브 자체가 작품 못지않은 짜임새를 자랑합니다. 인수봉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등반가이자 세계적인 친환경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설립자인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의 장비에서부터 저서와 영상 아카이브, 한국과의 인연과 파타고니아를 창립한 사연 등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지요.



인수봉 등반에 실제로 사용된 장비들을 이용해서 만든 설치 작품


이 밖에도 인수봉 조난사와 보수 공사의 내력, 인수봉과 관련한 해외 가이드북과 각종 안내서들, 등반 안내 지도에 이르기까지 자료 하나하나에 인수봉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작가가 작업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라고 말하는 인수봉을 대학 시절에 그린 작품 두 점도 처음으로 선보이고요. 여기에 작가의 인수봉 작업과 과거 백운산장 작업, 인수봉의 역사와 함께 호흡해온 산악인들의 땀과 눈물을 담은 귀중한 기록들도 모았습니다. 언제 이 많은 자료를 다 모았나 싶더군요. 인수봉을 향한 작가의 남다른 애정과 야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새로 작업한 인수봉 사진을 보여줄 때마다 작가는 매번 열변을 토하곤 했어요. 실로 무서운 열정이요 집중력이었죠. 처음엔 하루가 멀다 하고 인수봉을 오르더니, 나중엔 서울에서 인수봉이 바라보이는 거의 모든 지점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산은 늘 거기 보이는 곳에 서 있었어요. 미처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을 뿐이죠. 최근 몰라보게 자연생태를 회복한 우이천에서 맨손으로 고기 잡는 소년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이야말로 이번 전시의 백미일 겁니다.



인수봉 18104, 107×16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8



‘생태’의 관점에서 본 사진 미학


산이 있고 물이 있고 사람이 있는 풍경. 임채욱은 이번 개인전에서 사진작가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변함없이 지켜온 ‘생태’에 대한 작가적 의지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생의 절반을 함께 한 인수봉은 작가 임채욱에게 ‘작업의 고향’이었어요. 이따금씩 연락을 해보면 거짓말처럼 그는 늘 산에 있더군요. 그간의 길고도 지난했던 출사 여정에 잠시 쉼표를 찍는 전시회입니다. 하지만 완성된 예술이란 없는 법. 언제고 그는 카메라를 들고 또다시 산에 오를 겁니다. 산이 남몰래 털어놓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 말이죠.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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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김 석
#김석기자


2018년 3월 7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평창동 서울옥션 경매장. 근래 보기 드물게 경매 현장은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국내를 대표하는 미술품 경매회사 서울옥션의 새해 첫 메이저 경매였던 만큼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지요. 올 한 해 미술 시장의 경향과 판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날 경매는 다른 때와 달리 조금 더 특별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그림 한 점이 있었거든요. 8년 만에 경매에 등장한 이중섭의 소 그림입니다.


2018년 3월 경매에 출품된 이중섭의 <소>


우리나라에서 소 그림 하면 대번에 이중섭을 떠올릴 정도로 소는 이중섭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소재입니다. 대부분 종이에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 것들로,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아 희소성도 아주 높지요. 이중섭은 짧은 생애 동안 다양한 소 그림을 남겼는데, 소의 자세를 보면 머리가 화면 왼쪽을 향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위 작품은 드물게 소의 머리가 화면 오른쪽에 놓여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앞으로 돌진할 듯 솟아오른 어깨와 쫙 벌어진 다리, 솟아 말린 꼬리 등을 보면 영락없는 싸움소의 모습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소의 머리와 몸통, 바닥에 채색된 붉은 물감은 바로 격렬한 싸움의 흔적, 다시 말해 피 흘린 자국입니다. 이중섭의 소 그림으로는 이례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가장 최근에 이 작품이 공개된 건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이중섭, 백년의 신화> 특별전이었습니다.


그때 선보인 작품이 경매에 나왔으니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요. 더구나 근 8년 만에 경매에 등장한 이중섭의 주요 작품이었으니까요. 경매 순서는 31번. 경매 현장의 열기가 서서히 고조될 무렵 드디어 이날의 주인공이 경매 현황판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팽팽한 긴장감과 술렁거림이 교차하는 순간, 18억 원에서 경매가 시작됩니다. 모두들 숨을 죽인 채 경매 진행 상황을 예의주시했습니다.



2018년 3월 7일에 진행된 이중섭 <소> 경매 영상 (서울옥션 제공)



이중섭의 <소>가 세운 두 가지 기록


막판까지 예측할 수 없는 치열한 주고받기 끝에 최종 낙찰 가격은 47억 원. 이중섭의 작품 가운데 역대 최고가 기록을 다시 쓴 순간이었습니다. 이옥경 서울옥션 대표는 “한국 근대 미술의 저력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경매로, 근대 작가들의 위상이 다시금 재평가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47억 원 낙찰이라는 기록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됩니다. 8년 전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됐던 이중섭의 <황소>는 35억 6,000만 원에 낙찰되며 당시 작가 최고가 기록을 세웠지요. 이 기록이 8년여 만에 깨졌습니다. 당시보다 12억여 원 높은 가격에 말이에요.


작가의 새로운 기록을 만든다는 것, 그것은 금전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작가와 작품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재조명하는 기회를 만듭니다. 작가의 새로운 가격 기록이 세워지는 데는 5년이 걸릴 수도, 10년이 걸릴 수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중섭의 이번 작품은 2010년 이후 8년 만에 세워진 기록이었고, 아주 오랜만에 이중섭의 좋은 작품을 소개한 좋은 기회였기에 경매 준비부터 기대가 컸습니다.


이번 작품은 추정가가 20억에서 40억 원 사이로 책정되어 있고, 이전 <황소>의 기록이 있었던 터라 추정가 내에서 낙찰될 것으로 예상을 하고 경매를 진행했습니다. 시작가가 높았던 터라 호가를 1억 원씩 진행했는데, 생각보다 치열한 경합에 금액은 순식간에 30억까지 올라갔고, 그 뒤부터 1억씩 올라가면서 정말 새로운 기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올라가는 기분이었습니다. 36억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제가 부르는 호가 하나하나가 새로운 기록을 쓰고 있었습니다.


관객들도 직원들도 모두 숨죽이며 상황을 지켜보았고, 경매를 진행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제 손끝으로 한국 미술시장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설레었습니다. 여러 명의 응찰자가 치열한 경합을 벌이며, 때로는 높은 금액에 고민하고 망설이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다시 패들이 올라갈 때 관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지고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었습니다.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던 시간은 결국 47억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작품, 그 가치를 매기는 것은 결국 그 작품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경매사를 하면서 경매의 순간을 즐기게 되는 이유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작품의 가치는 작가와 작품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번 결과를 통해 이중섭이라는 작가와 작품을 많은 이가 다시금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작가의 새로운 기록을 만든다는 것, 그것은 금전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작가와 작품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재조명하는 기회를 만듭니다. 작가의 새로운 가격 기록이 세워지는 데는 5년이 걸릴 수도, 10년이 걸릴 수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중섭의 이번 작품은 2010년 이후 8년 만에 세워진 기록이었고, 아주 오랜만에 이중섭의 좋은 작품을 소개한 좋은 기회였기에 경매 준비부터 기대가 컸습니다.

이번 작품은 추정가가 20억에서 40억 원 사이로 책정되어 있고, 이전 <황소> 의 기록이 있었던 터라 추정가 내에서 낙찰될 것으로 예상을 하고 경매를 진행 했습니다. 시작가가 높았던 터라 호가를 1억 원씩 진행했는데, 생각보다 치열한 경합에 금액은 순식간에 30억까지 올라 갔고, 그 뒤부터 1억씩 올라가면서 정말 새로운 기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고 올라가는 기분이었습니다. 36억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제가 부르는 호가 하나하나가 새로운 기록을 쓰고 있었습 니다.

관객들도 직원들도 모두 숨죽이며 상황 을 지켜보았고, 경매를 진행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제 손끝으로 한국 미술시장 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설레었습니다. 여러 명의 응찰 자가 치열한 경합을 벌이며, 때로는 높은 금액에 고민하고 망설이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다시 패들이 올라갈 때 관객 석에서는 탄성이 터지고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었습니다.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던 시간 은 결국 47억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작품, 그 가치 를 매기는 것은 결국 그 작품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경매사를 하면서 경매의 순간을 즐기게 되는 이유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작품의 가치는 작가 와 작품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번 결과를 통해 이중섭이라는 작가와 작품을 많은 이가 다시금 돌아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위) 종전에 작가 최고가 작품이었던 이중섭의 <황소>

(아래) 2010년 <황소> 경매 기록



11년 만에 박수근의 <빨래터> 넘어섰다


또 하나는 이중섭의 그림이 이번 경매를 통해 박수근의 기록을 뛰어넘었다는 점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2007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박수근의 <빨래터>가 45억 2,000만 원에 낙찰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나 엄청난 화제가 됐습니다. 당시 유례없는 경기 호황은 미술계에도 큰 호재로 작용했지요. 유명 화가들의 작품 가격이 나날이 치솟으면서 과열 양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 정점을 찍은 ‘사건’이 바로 박수근의 <빨래터>가 경매에서 세운 사상 최고가 낙찰 기록이었고요.


2007년 경매에서 국내 최고가를 기록한 박수근의 <빨래터>


하지만 그때를 정점으로 미술시장은 다시 긴 불황에 빠져듭니다. 2010년 이중섭의 <황소>가 경매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적잖은 기대감을 품었습니다. 이중섭의 <황소>라면 혹시 박수근의 <빨래터>를 넘어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침체에 빠진 미술시장에 반전의 계기가 마련되지 않을까. 하지만 불황의 늪은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황소>는 <빨래터>보다 10억 원 가까이 낮은 금액에 낙찰됐지요. 그 이후로 이중섭의 작품이 박수근의 기록을 넘어서는 데만 무려 1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만약 이중섭의 <황소>가 2010년이 아닌 지금 경매에 나온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이중섭과 박수근. 우리는 이분들을 ‘국민화가’라 부릅니다. 그만큼 두 화가의 그림들은 우리 국민에게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아 왔어요. 예술품의 가치를 무작정 돈으로만 환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림이 ‘국민화가’란 이름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 건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적어도 국내에서는요. 더구나 두 화가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주요 작품들은 이미 미술관이든 어디에든 죄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만한 수준의 새 작품이 나타나길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최근 이중섭의 <소>가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한 요인은 무엇입니까?


이중섭의 걸작인 소 시리즈 중 하나라는 미술사적 가치와 희소성, 2015년부터 17년까지 3년간 경매시장이 1,700억~1,900억 원대로 회복되어 시장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점, 최고가의 기준이 높아졌고 김환기 작품이 65억 원을 넘어 고가 시장이 열려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침체됐던 우리 미술시장이 성장세로 돌아섰다는 신호로 봐도 될까요?


단색화, 김환기에 대한 수요 증가와 포스트 단색화 및 민중미술에 대한 관심까지 커지며 이미 호조세로 전환 되어 있습니다. 미술사적 가치와 투자 가치가 있는 작가의 작품에 대해 시장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것이죠.

올해 우리나라 미술시장 전망, 어떻게 보십니까?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화랑 시장, 아트페어 시장, 경매시장은 2017년과 비슷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장르별, 작가별, 지역별 차이는 클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이중섭의 <소>가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한 요인은
무엇입니까?

이중섭의 걸작인 소 시리즈 중 하나라는 미술사적 가치와 희소성, 2015년부터 17년까지 3년간 경매시장이 1,700억~1,900억 원대로 회복되어 시장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점, 최고가의 기준이 높아졌고 김환기 작품이 65억 원을 넘어 고가 시장이 열려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침체됐던 우리 미술시장이 성장세로 돌아섰다는 신호로 봐도 될까요?

단색화, 김환기에 대한 수요 증가와 포스트 단색화 및 민중미술에 대한 관심까지 커지며 이미 호조세로 전환 되어 있습니다. 미술사적 가치와 투자 가치가 있는 작가의 작품에 대해 시장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것이죠.

올해 우리나라 미술시장 전망, 어떻게 보십니까?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화랑 시장, 아트페어 시장, 경매시장은 2017년과 비슷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장르별, 작가별, 지역별 차이는 클 것으로 보입니다.



2017년 K옥션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의 작품


2017년 K옥션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의 작품 <고요>


2017년 4월 서울 강남구 K옥션 경매에서 단연 화제가 된 그림은 김환기의 <고요(Tranquillity) 5-IV-73 #310>이란 작품이었습니다. 김환기 화백이 세상을 떠나기 꼭 1년 전인 1973년 미국 뉴욕 체류 시절에 그린 이 대형 전면 점화의 낙찰가는 무려 65억 5,000만 원. 역대 한국 미술품 사상 경매 최고가 기록을 다시 쓰는 순간이었습니다. 가로 205㎝, 세로 261㎝ 크기로 밤하늘의 은하수를 연상시키는 푸른 점과 직사각형 흰색 띠가 특징이지요. 더구나 파랑은 김환기를 대표하는 색상이기도 합니다.


2016년 11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역대 최고가에 낙찰된 김환기의 작품 <노랑>


그로부터 불과 6개월 전, 홍콩에서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 등장한 김환기의 작품 역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지요. <12-V-70 #172>란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화면 전체가 노란색으로 가득 채워진 전면 점화입니다. 세로 2.36m, 가로 1.73m에 이르는 대작으로 1970년에 김환기 화백이 뉴욕에서 그린 그림인데요. 유화물감을 썼으면서도 먹이 번진 것 같은 고유의 미감이 살아 있는 작은 점들이 화폭을 빼곡하게 채운 작품입니다. 앞에서도 설명 드렸듯이 파랑을 주조로 하는 김환기의 다른 점화와 달리 노랑은 희소성이 높습니다. 이 작품은 4,150만 홍콩달러, 우리 돈 63억 2,626만 원에 낙찰되며 한국 미술품 역대 최고가 기록을 세웁니다.


(좌) 2016년 6월 K옥션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에 낙찰된 김환기의 작품 <파랑>

(중) 2016년 4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최고가 기록을 세운 김환기의 작품 <무제>

(우) 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사상 첫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의 작품 <최초>


김환기가 김환기를 넘어서는 역전극은 2016년 내내 국내 양대 미술품 경매사인 서울옥션과 K옥션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접전 양상으로 펼쳐집니다. 2016년 6월 K옥션 여름 경매에서 김환기의 전면 점화 <27-VII-72 #228>(왼쪽 그림)이 54억 원에 낙찰되며 국내 경매 사상 최고가 낙찰 기록을 다시 세웁니다. 불과 두 달 전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의 또 다른 전면 점화 <무제>(가운데 그림)가 세운 역대 최고가 48억 6,750만 원(3,300만 홍콩달러)을 가볍게 넘어선 거죠.


돌이켜 보면 김환기 열풍의 출발점은 2015년 10월 서울옥션의 홍콩 경매였습니다. 김환기 화백이 1971년에 제작한 전면 점화 <19-Ⅶ-71 #209>(오른쪽 그림)는 당시 3,100만 홍콩 달러, 우리 돈 47억 2,100만 원에 낙찰되는데요. 이로써 2007년 경매에서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가 세운 역대 최고가 경매 기록이 8년 만에 깨지게 됩니다. 불과 2년 사이에 김환기의 그림이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된 겁니다.



더 중요한 건 해외에서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가던 시기와 맞물려 실로 일찍이 한국 미술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열풍’을 타게 된 거지요. 위의 표를 보면 10위 안에 김환기의 작품이 8점입니다. 이중섭과 박수근이 각 한 점씩이고요. 경매 시기로 보면 박수근의 <빨래터>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2015년 이후에 시장에서 높이 평가받은 것들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국민화가들의 작품 가격은 더 오를 거라는 점, 만약 최초로 100억 원 시대를 여는 작가가 탄생한다면 그 주인공은 김환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합니다.



추상에서 구상으로…김환기 시대가 열렸다


(좌) 2018년 3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40억여 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항아리와 시>


그런 면에서 지난 3월 29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40억여 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위 작품을 더 주목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시장을 지배한 김환기의 작품은 1970년대 초반에 미국 뉴욕에서 그린 ‘전면 점화’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이었지요. 김환기의 ‘추상미술’은 거듭되는 경매를 통해 탄탄한 시장 경쟁력을 입증합니다. 그런 만큼 앞으로 또 다른 작품이 시장에 나온다면 지금보다 더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한 작가의 작품이 시장에서 탄탄한 신뢰를 구축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김환기 추상 예술의 토대요 뿌리가 되는 뉴욕 시절 이전 작품에 대한 관심까지도 자연스럽게 커지고 있는 것이지요. <항아리와 시>는 우리의 토속적 정서를 대변하는 달항아리와 매화가 그려진 ‘구상미술’ 계열의 작품입니다. 게다가 화면 오른쪽에는 서정주의 시가 한글로 쓰여 있고요. 전면 점화와 달리 한국이라는 지역성이 강한 이런 작품까지 해외에서 기대 이상의 좋은 반응을 끌어낸 건 퍽 의미 있는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환기의 구상 작품이 최근 경매에서 전면점화 못지않은
높은 가격에 낙찰될 수 있었던 요인은 뭘까요?

표면적으로는 양질의 전면점화 품귀현상이겠지만, 내면적으로는 다소 시들해진 단색화 열풍을 감안하여 소장가들이 시장에 내놓기를 회피하는 소극성이 더 크게 작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트바젤홍콩에 꾸준한 한국 주요 갤러리의 참여, 서울옥션 홍콩법인 등 국내 현대미술 작가와 작품의 긍정적 측면을 어필하는 계기를 꾸준히 이어온 점이 해외의 주요 컬렉터에게 보이지 않는 신뢰감을 형성한 점도 10년 전인 2007년의 과열 현상과 차별화를 유도했다고 판단됩니다.

김환기의 작품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우선 단색화 열풍과 무관하게 폭넓은 작품의 성향을 구비했기 때문일 겁니다. 더불어 구상 위주의 탄탄한 국내 내수시장의 지지기반과 뉴욕 시절의 감성적 표현주의의 추상적 조형어법까지 겸비하여 글로벌 마켓의 수요층을 동시에 충족시켜주고 있지요. 더욱이 환기미술재단을 비롯해 국내 굴지의 미술관 및 갤러리, 경매사 등의 지속적인 지원 활동이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거로 보입니다.
즉, 미술시장 측면과 동시 미술사적인 비중을 함께 키워나가는 좋은 사례로 볼 수 있겠습니다.

한국 미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앞으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보다 입체적이고 전방위적인 협업이 필요하겠죠. 특정 작가의 작품가격을 높이는 것보다, 그의 작가적 비중을 높여주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상승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미술관과 갤러리, 평론계, 미디어, 기업 및 소장가 등이 동시에 작가에 대한 조명을 병행해야 합니다. 특히 제도적, 행정적 제도 개선으로 건전한 미술품 소비문화 확산과 장려 정책 역시 빼놓을 수 없겠지요. 또한, 원로/중진작가와 젊은 유망작가의 세대 간 간극을 좁히는 연계성 지원 프로그램도 중요하겠습니다.

김환기의 구상 작품이 최근 경매에서
전면점화 못지않은 높은 가격에
낙찰될 수 있었던 요인은 뭘까요?

표면적으로는 양질의 전면점화 품귀현상이겠지만, 내면적으로는 다소 시들해진 단색화 열풍을 감안하여 소장가들이 시장에 내놓기를 회피하는 소극성이 더 크게 작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트바젤홍콩에 꾸준한 한국 주요 갤러리의 참여, 서울옥션 홍콩법인 등 국내 현대미술 작가와 작품의 긍정적 측면을 어필하는 계기를 꾸준히 이어온 점이 해외의 주요 컬렉터에게 보이지 않는 신뢰감을 형성한 점도 10년 전인 2007년의 과열 현상과 차별화를 유도했다고 판단됩니다.

김환기의 작품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우선 단색화 열풍과 무관하게 폭넓은 작품의 성향을 구비했기 때문일 겁니다. 더불어 구상 위주의 탄탄한 국내 내수시장의 지지기반과 뉴욕 시절의 감성적 표현주의의 추상적 조형어법까지 겸비하여 글로벌 마켓의 수요층을 동시에 충족시켜주고 있지요. 더욱이 환기미술재단을 비롯해 국내 굴지의 미술관 및 갤러리, 경매사 등의 지속적인 지원 활동이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거로 보입니다.
즉, 미술시장 측면과 동시 미술사적인 비중을 함께 키워나가는 좋은 사례로 볼 수 있겠습니다.

한국 미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앞으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보다 입체적이고 전방위적인 협업이 필요하겠죠. 특정 작가의 작품가격을 높이는 것보다, 그의 작가적 비중을 높여주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상승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미술관과 갤러리, 평론계, 미디어, 기업 및 소장가 등이 동시에 작가에 대한 조명을 병행해야 합니다. 특히 제도적, 행정적 제도 개선으로 건전한 미술품 소비문화 확산과 장려 정책 역시 빼놓을 수 없겠지요. 또한, 원로/중진작가와 젊은 유망작가의 세대 간 간극을 좁히는 연계성 지원 프로그램도 중요하겠습니다.



어느 유명 화가의 그림이 수백억, 수천억 원에 팔렸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해외토픽을 장식하고는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럼 우리는?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에요. 한국에서 태어난 게 불행이자 원죄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하지만 이제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으로 시작한 이 글의 제목은 잘못 붙인 것이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미술도 이제는 세계무대에서 얼마든지 통할 수 있고, 또 실제로도 통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했으니까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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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화가들의 핫 플레이스 ‘인왕산’
2편. 역사와 예술을 품은 인왕산
김 석
#김석기자


500년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이었던 경복궁 위로 고개를 내민 작지만 늠름하기 이를 데 없는 산. 한양의 주산(主山)인 백악산(북악산)입니다. 해발고도가 342m에 불과해도 동쪽의 낙산(타락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남산(목멱산)과 함께 한양을 감싸 안은 내사산(內四山) 가운데 가장 높답니다.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한양을 대표하는 산의 지위를 누린 건 백악산이었지요.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송두리째 불에 타 폐허가 되자 상황이 달라집니다. 주인 없이 터만 남은 궁궐 뒤에 쓸쓸히 서 있던 백악 대신 인왕산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한 겁니다.


(좌) 정황, <청풍계>, 18~19세기, 모시에 엷은 채색, 22.7×16.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장시흥, <창의문>, 18세기 후반, 종이에 엷은 채색, 19×15.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런 시대 분위기에 정점을 찍은 인물이 바로 화성(畫聖 : 그림의 성인, 즉 매우 뛰어난 화가를 높여 이르는 말)으로 추앙받는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었고요. 인왕산을 한양의 ‘랜드 마크’로 만든 것은 전적으로 겸재의 유산이었습니다. 인왕산 구석구석을 그림으로 남긴 것은 물론 인왕산 전경을 최초로 화폭에 아로새긴 화가 또한 겸재였으니까요. <인왕제색도> 덕분에 인왕산은 국보에 그려진 최초의 산이라는 영예를 누리게 되지요. ‘인왕산 화가’ 하면 겸재를 꼽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겁니다. 생전에도 그랬고 사후에도 겸재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풍이 크게 유행하면서 그를 따르고 본받은 화가들이 ‘겸재 화파’를 이룹니다. 겸재의 그림 솜씨를 물려받은 손자 정황(鄭榥, 1735∼?)의 <청풍계>는 겸재의 그림과 구별이 안 될 만큼 꼭 닮았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장시흥(張始興, ?~?)이라는 화가가 그린 <창의문>입니다. 청와대를 지나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을 지금은 자하문 고개라고 많이들 부르지요. 자하문은 창의문의 별칭이었습니다. 인왕산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 능선은 창의문을 기점으로 백악산으로 다시 솟구쳐 오릅니다. 역시 낙관만 가리면 영락없는 겸재의 그림입니다.



인왕산 전경을 담은 또 하나의 그림


강희언, <인왕산도>, 종이에 엷은 채색, 36.6×53.7㎝, 개인 소장


겸재 이후 인왕산 전경을 그린 화가가 또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중인 화가인 담졸 강희언(姜熙彦, 1738~?)입니다. 위 그림이 강희언의 <인왕산도>인데요. 한눈에 봐도 겸재의 <인왕제색도>와는 확연히 다른 화풍이 눈에 띄지요.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역시 인왕산의 당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일 겁니다. 겸재의 인왕산은 실제 경치와 분명히 다릅니다. 실제와 똑같이 묘사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해 가장 인왕산다운 인왕산을 그렸으니까요. 반면 강희언의 그림을 보면 산세는 물론 인왕산을 끼고 이어진 한양도성과 산 아랫마을까지 꼼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 위에서 사선으로 물결치듯 죽죽 뻗어 내려간 골짜기의 묘사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전통 한국화에선 볼 수 없었던 원근법을 적용했다는 점일 겁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 글씨에 “늦은 봄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며(暮春登桃花洞 望仁王山)” 그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직접 찾아 나선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지금의 창의문 쪽 백악산 중턱에서 그린 것으로 봤어요. 500~6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볼 때 인왕산의 전모가 한눈에도 적절하게 포착된다는 겁니다. 이태호 교수는 “강희언 그림에서 현대적인 기품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라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화면 아래 흰 안개도 그렇지만 하늘을 마치 수채화 그리듯 시원하게 채색했다는 점이에요. 이 부분은 강희언의 직업과 연결해서 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강희언은 열일곱 나이에 천문 지리 분야인 음양과에 급제한 뒤 관상감에서 관원으로 일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기상청 직원 출신 화가라고 할까요. 자신보다 63살이나 많은 겸재와 이웃에 살며 그림을 배웠지만, 제자는 스승의 유산에 서양화풍을 과감하게 접목합니다. 그림 왼쪽 상단에 당시 예술계의 큰 어른이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평가가 적혀 있습니다.



寫眞境者 每患而使乎也圖 而此幅 旣得十分逼眞 且不失畵家諸法
(진경을 그리는 자는 그림이 지도와 같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충분히 사실적이고 또한 화가들의 여러 화법을 잃지 않았다.)



겸재가 좋아 인왕산을 그리게 한 시인


겸재 정선과 같은 시대를 산 인물 가운데 권섭(權燮, 1671~1759)이란 분이 있습니다. 명문세가 출신임에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 이름은 덜 알려졌지만, 우리 문학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시인이지요. 지금까지 전해오는 한시만 3,000수가 넘는다고 하는데요. 권섭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삼연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문하에서 화가인 겸재 정선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나이 차도 5살밖에 안 됐고요. 두 사람의 돈독한 친분을 보여주는 시 한 편이 남아 있습니다. 제목은 ‘정선에게(寄鄭元伯)’입니다.



2002년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 출품된 《옥소북악십경》 (사진제공: 서울옥션)


권섭은 생전에 겸재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꼭 갖고 싶은 겸재의 그림이 있으면 손자에게 같은 구도로 다시 그리게 해서 화첩으로 묶어 간직했을 정도니까요. 그 손자가 권신응(權信應, 1728~1786)이란 화가입니다. 2002년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권섭의 작품으로 소개된 《옥소북악십경》이란 8폭짜리 화첩이 출품돼 관심을 모았는데요. 당연히 권섭이 직접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손자를 시켜서 그린 게 아닐까 합니다. 《옥소북악십경》을 자세히 검토한 미술평론가 최열 선생은 화풍으로 볼 때 권신응의 그림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인왕산이 등장합니다.


권신응, <청풍계>,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화면 맨 위에 가는 먹선 두어 개로 쓱쓱 그어나간 능선 위에 한자로 인왕산(仁王山) 세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습니다. 산수화에다가 구체적인 지명을 써넣은 대표적인 화가가 겸재 정선이었지요. 다분히 겸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도에 지명을 써넣은 당시의 경향을 흡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지도가 아닌 그림에 인왕산 이름이 적혀 있는 사례로는 극히 이례적이지요. 그 왼쪽 아래 커다란 바위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적혀 있습니다. 지금도 인왕산에 가면 볼 수 있는 백세청풍 바위의 글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글씨를 가져와 새겼습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더 유명한 인왕산 청풍계는 당시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안동 김씨 장동파, 즉 장동김씨의 땅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백세청풍 각자를 새긴 김상용은 인왕산 쪽에, 형보다 더 유명했던 동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인왕산이 바라다보이는 백악산 쪽에 살았습니다.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김상헌은 고달픈 타향살이 속에서 인왕산을 그리워하는 시를 씁니다.



필운산(弼雲山)은 인왕산의 옛 이름입니다. 떠나온 집을 그리는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아무튼,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가 깃든 터전이었으니 도성 안에서 얼마나 풍광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알만하지요. 기왕 김상헌의 형 김상용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보다 앞선 시기에 청풍계를 그린 작품을 한 점 더 볼까요.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성호기념관에 <청풍계첩(靑楓契帖)>이란 주목할 만한 시화첩이 소장돼 있습니다. 광해군 12년인 1620년 봄에 인왕산 청풍계(靑楓溪) 태고정(太古亭)에서 이름난 문인 7명이 모여 봄을 즐기고 시를 지어 책으로 묶습니다. 이런 모임을 계회(契會)라고 하는데, 계회를 기념하는 그림 한 점이 함께 수록돼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인왕산 그림을 만나다


성호기념관 소장 《청풍계첩》에 수록된 인왕산 청풍계 그림


왼쪽으로 인왕산 아래 개울이 흐르고 그 옆에 초가집이 한 채 고고하게 서 있지요. 김상용의 집 태고정(太古亭)입니다. 이곳에서 모임을 연 겁니다. 정작 집주인인 김상용은 다른 지방에서 벼슬을 살고 있어 모임에는 함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모임에 참석한 인물은 모두 7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병조판서 이상의(李尙毅, 1560~1624)라는 분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계회를 연 뒤 시와 그림을 두루마리에 묶어 참석자들이 한 부씩 나눠 가졌습니다. 이런 두루마리를 계축(契軸)이라고 합니다. 다른 두루마리는 모두 사라지고 이상의 소장본만 집안에 대대로 전해집니다.


(좌)백세청풍 각자 (우) 김상용 집터 표석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상의의 증손자가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입니다. 이익은 ‘경서청풍계첩후(敬書淸楓溪帖後)’라는 글에서 두루마리의 그림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1736년에 원본을 똑같이 그리게 한 뒤 원래 두루마리였던 것을 첩(帖), 그러니까 책의 형태로 바꿨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결국 <청풍계첩>에 수록된 위의 그림은 17세기에 그려진 원본을 18세기에 다시 그린 거지요. 그렇다고 해도 이 그림의 가치가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인왕산 청풍계를 그린 유일한 작품일 뿐 아니라, 겸재 정선보다 시기적으로 무려 120년이나 앞서기 때문입니다. 청풍계 역시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김상용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을 뿐이지요.


권신응, <옥류동>,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다시 권신응의 그림을 더 볼까요. 《옥소북악십경》 가운데 <옥류동>이란 작품에도 인왕산(仁王山) 세 글자가 선명합니다. 그 아래로 죽 내려오면 또 다른 세 글자가 보이는군요. 수성동(水聲洞)입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 덕분에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된 바로 그 수성동 계곡입니다.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진 것만 봐도 당시에 얼마나 이름난 명승지였는지 알 수 있지요.


(좌)권신응, <삼계동>,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우)권신응, <수문루>,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이 밖에도 《옥소북악십경》에는 크든 작든 인왕산이 등장하는 그림이 더 있습니다. 왼쪽 그림의 삼계동(三溪洞)은 지금의 부암동, 그러니까 서울미술관과 석파정이 있는 그 일대 땅의 옛 이름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수문루(水門樓)>입니다. 오른쪽 아래로 보이는 문은 홍지문(弘智門)이고, 그 왼편에 수문 다섯 개가 나란한 구조물은 오간수문(五間水門)입니다. 문루 위에 적힌 세 글자는 한북문(漢北門)으로 홍지문의 다른 이름이고요. 조선시대에는 인왕산 능선을 타고 뻗은 한양도성이 부암동으로 내려와 홍지문까지 이어졌지요. 멀리 북한산 문수봉이 우람하고, 가깝게는 홍제천이 굽이굽이 흐르는 이곳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었던 모양입니다. 화면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인왕산 바위가 흔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옥계시사와 임득명의 인왕산 그림


인왕산 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살며 서당 훈장 노릇을 하던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이란 분이 있습니다.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으로 가난했지만 글 좋아하고 시를 무척 잘 썼다고 하지요. 조선의 문예군주로 불리는 정조가 서얼과 중인 출신 인재들을 대거 등용해 규장각에서 일하게 한 사실은 유명합니다. 조선 중앙관청의 하급관리인 경아전(京衙前), 특히 규장각 서리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 바로 인왕산 기슭의 옥계(玉溪), 즉 옥류동(玉流洞) 일대였어요. 천수경을 중심으로 시 짓고 풍류 즐기는 이들 13명이 의기투합해 1786년 7월 16일 시 모임을 결성합니다. 옥계시사(玉溪詩社)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임득명, <등고상화>, 《옥계사수계첩》, 종이에 엷은 채색, 24.2×18.9㎝,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그 해에 옥계시사 동인들은 자신들의 시와 그림을 엮어 책을 꾸밉니다. 현재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옥계사수계첩(玉溪社修禊帖)》인데요. 여기에 옥계시사 동인이었던 화가 임득명(林得明, 1767~?)의 그림 4점이 전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그림이 12폭이었다고 하는데 8점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전해지는 그림 4점 가운데 인왕산 그림 한 점은 각별하게 주목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임득명의 <등고상화(登高賞華)>는 인왕산에서 즐기는 봄꽃놀이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요. 갈지자(之)로 흘러내리는 능선을 따라 붉은 꽃이 활짝 피어나 보기 드문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지요. 인왕산의 봄을 대표하는 그림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임득명이라는 화가가 남긴 흔적은 더 있습니다. 옥계시사 결성 5년 뒤인 1791년에 꾸며진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에 임득명의 그림 11점이 수록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지요. 이 시첩은 현재 영국 국립도서관(The British Library)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빛을 못 보다가 한국사학자 정옥자 교수가 《조선후기 중인문화연구》라는 책에 자세한 내용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인왕산의 야경을 그린 단원 김홍도


김홍도, <송석원시사 야연도>, 1791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6×31.8cm,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이 만들어진 그해에 모임에 초청받은 전문 화가들이 또 다른 그림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그중 하나가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송석원시사 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입니다. 난데없이 왜 송석원시사로 이름이 바뀌었냐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옥계시사 결성을 주도한 천수경은 나중에 자신의 호를 송석원(松石園), 송석도인(松石道人)으로 바꿉니다. 옥계시사와 송석원시사는 결국 같은 모임으로 시기에 따라 명칭이 달리 불린 것뿐입니다.


제목에서 보듯 이 작품은 밤 그림입니다. 조선 정조 때인 1791년 6월 15일 유두날 밤,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서 열린 시 모임을 그린 작품이지요. 달빛 그윽한 밤에 당대의 시인과 문사 9명이 초가집 앞의 너른 뜨락에 앉아 풍류를 즐기고 있습니다. 문인들의 고상한 모임을 그린 이런 그림을 아회도(雅會圖), 또는 아집도(雅集圖)라고 부릅니다. 이 모임에 초청받은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고, 당대의 서예가였던 미산 마성린(1727~1798)이 시를 썼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 모임을 그리게 할 정도로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마성린이 쓴 시의 내용처럼 여름밤의 아스라한 분위기가 깊은 운치를 자아내지요. 김홍도가 46세에 그린 이 작품은 한껏 무르익은 그 시대의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인문, <송석원시회도>, 《송석원시사첩》, 1791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6×31.8cm, 개인 소장


여기에 김홍도의 그림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 한 점 더 있습니다. 김홍도와 동갑내기 화가인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의 <송석원시회도(松石園詩會圖)>입니다. 김홍도의 그림과 달리 이 작품은 낮 그림이에요. 화면 왼쪽 너럭바위 위에 두 무리가 옹기종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지요. 뒤로는 왼쪽에 인왕산, 오른쪽에 백악산이 솟아 있고 멀리 뒤로 삼각산이 보입니다. 김홍도와 단짝 친구였던 이인문 역시 모임에 초빙돼 그림을 그렸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낮과 밤에 모인 장소가 달랐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화폭을 잔잔하게 물들이고 있는 인왕산 자락의 그윽한 풍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배경에 치솟은 커다란 바위에는 송석원(松石園) 세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좌)1950년대에 김영상이 찍은 송석원 각자 바위 (우)송석원 터 표석


송석원이 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많은 이가 궁금증을 품고 찾아다녔지요. 하지만 어렴풋하게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에 서울연구가 김영상 선생이 찍은 사진으로 남아 있는 ‘송석원’이란 바위 글자는 저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32세 때 글씨라고 합니다. 이 바위 역시 지금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연구자들은 아마도 지금의 박노수미술관 근처 어딘가에 바위가 묻혀 있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인왕산 일대 답사에 나선 이들은 보통 박노수미술관 근처에서 송석원시사의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더듬어보곤 하지요. 과거의 자취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 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품은 산


박제신, <서교전별>, 1826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3×31.8cm


옛 그림에서 인왕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여행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지난해 말, 국내의 한 고미술품 경매에 인왕산 그림이 한 점 나왔습니다. 소향관 박제신(朴齊臣, 1792~?)이란 생소한 화가가 그렸다는 <서교전별(西郊餞別)>이란 작품인데요. 경매사 측이 소개한 그림 내력을 보니,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담헌 홍대용의 손자인 홍양후(洪良厚, 1800~1879)가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갈 때 서대문 밖에서 배웅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림 좌우 여백에 적혀 있는 글씨가 그런 내용을 알려주지요. 박제신은 정조 때 우의정을 지낸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의 손자였으니, 아버지 대에서 맺은 인연이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져 이런 그림이 탄생하지 않았나 하고 경매사 측은 설명합니다.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면 역시나 겸재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겸재의 그림이 시대의 전범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던 겁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 인왕산 그림을 더는 보기 어렵게 됩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조와 정조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인왕산도 차츰 그 빛을 잃어갔습니다. 이 시점에서 옛 화가들이 그림 속에 남긴 인왕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까닭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토록 가까운 곳에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있었으니 한양 최고의 명승으로 각광받았을 수밖에요. 500년 조선 역사에 그렇게도 많은 이야기와 사연을 품은 채 그림의 소재로, 배경으로 널리 사랑받은 산이 달리 또 있을까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