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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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옛 그림에서 찾은 무술년 개 이야기
김 석
#김석기자


오수개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고려 시대에 전라북도 임실에 살던 김개인(金盖仁)이라는 사람이 개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어느 날 외출을 하는데 개도 함께 따라나섰지요. 주인이 술에 취해 길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불이 나서 점점 가까이 다가왔어요. 개가 아무리 짖어도 주인은 안 일어났고요. 그래서 개는 냇물에 몸을 담근 뒤 풀밭을 이리저리 굴러 불이 못 번지게 막습니다. 그러고는 기운이 다해 그만 죽고 말지요.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 그 사실을 알고는 노래를 지어 기리고 고이 묻어줍니다. 그때 무덤에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서 그 땅을 오수(獒樹)라고 했다지요. 이 이야기는 고려 후기의 문신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 補閑集>에 실려 후대에 널리 알려집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제 한 몸 바쳐 주인을 구한 충직한 개의 이야기는 그 뒤에도 조금씩 내용만 달리해서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집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개만큼 인간과 가까운 동물이 또 있을까요. 개와 인간이 함께한 역사만도 2만 년이나 됐다고 하니까요. 고구려 고분 벽화인 무용총 수렵도는 사냥 장면을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입니다. 화면 맨 아래에 검은 사냥개가 말 탄 사냥꾼과 함께 역동적인 모습으로 먹잇감을 쫓고 있지요. 삼국시대에 이미 사냥을 위해 개를 길들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좌) 김유신묘 십이지신상 부조

(중) 삼국시대 굽다리접시 (호림박물관 소장)

(우) 경복궁 근정전 월대 석견


2018년은 무술년(戊戌年) 개띠 해입니다. 무(戊)는 오방색 가운데 황색을 뜻하고, 술(戌)은 개를 의미하지요. 그래서 2018년을 황색 개띠 해라고 합니다. 개는 열두 가지 띠 동물 가운데 열한 번째 동물입니다. 방위로는 서북서 방향을 지키는 신이고, 시간으로는 오후 7~9시, 달로는 음력 9월을 담당하는 시간의 수호신이기도 하고요. 잘 짖는 본성으로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존재로서의 상징성이 오래전부터 옛 풍습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음을 알 수 있지요. 경복궁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 석견(石犬)을 새긴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기행문 <춘성유기 春城遊記>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는 암수 석견이 있는데, 암컷은 새끼 한 마리를 안고 있다. 무학대사는 이 석견은 남쪽 왜구를 향해 짖고 있는 것이고, 개가 늙으면 대를 이어 가라고 새끼를 표현해 넣었다고 했다.



이암, <화조구자도>, 16세기 중반, 종이에 채색, 86×44.9㎝, 보물 제1392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강아지 그림이 있습니다. 볕이 따사로운 봄날, 화면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검둥이 녀석이 하얀 꽃망울을 피워 올린 배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돌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어딘가를 쳐다봅니다. 저 눈동자 표현 좀 보세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뒤로 누렁이 한 마리가 두 발을 앙증맞게 모은 채 쿨쿨 낮잠을 자고 있군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평화롭게 잠든 저 표정, 참 귀엽습니다. 그런가 하면 호기심 가득한 흰둥이 녀석은 땅바닥에 철퍼덕 엎드린 채 앞발로 꾹 누른 방아깨비와 노느라 여념이 없네요.


그냥 보기만 좋은 그림이 아닙니다. 개는 털을 가진 동물이죠. 그런데 그림 속 강아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털이 하나도 없습니다. 털을 묘사하는 대신 몸통을 먹으로 채웠어요. 이 그림은 조선 초기에 개와 매 그림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왕족 출신 화가 이암(李巖, 1507~1566)이란 분의 작품인데요. 먹을 이렇게 쓴 그림은 당시 중국에도 없었답니다. 전문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에요. <화조구자도>란 제목이 붙은 이 대단한 그림은 현재까지 확인된 걸로는 조선시대 최초의 개 그림으로 전합니다.


일본화가 소다츠의 개 그림


더 대단한 건 이암의 그림이 국내는 물론 당시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줬다는 사실입니다. 위의 두 작품은 이암보다 100년쯤 뒤에 교토에서 활동한 일본화가 다와라야 소다츠(俵屋宗達)의 그림인데요. 털을 그리지 않고 먹으로 물들이듯 그렸지요. 일본에서 다라시고미(滲し込み)라 불리는 이 기법의 뿌리가 바로 조선의 이암이었던 겁니다. 그만큼 이암의 그림이 일찌감치 일본에 건너갔다는 뜻이고요. 심지어 17세기 일본에서 나온 <본조화사 本朝畵史>란 책에는 이암을 아예 일본 화가로 소개하기도 했답니다.



(좌) 이암, <모견도>, 16세기 중반, 종이에 옅은 채색, 73.5×42.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우) 이암, <화조묘구도>, 16세기, 종이에 채색, 폭당 87×44.2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개의 변함없는 충직함은 때론 배신을 밥 먹듯 해대는 인간들의 반면교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황해도 강령에서 전승되는 탈놀이인 <강령탈춤>의 한 대목에는 개도 사람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 윤리, 즉 오륜(五倫)을 두루 갖췄다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그럼에도 툭하면 욕설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인간들이 야속할 만도 합니다. 게다가 위 그림에서도 보듯 전통적으로 개는 고양이와 앙숙이지요. 그런데 이것 때문에도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아야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조선 후기 문장가 이옥(李鈺, 1760~1815)의 ‘고양이를 탄핵한다(劾猫)’는 재미있는 글에서 개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다음과 같이 토로합니다.


신은 비록 미천하고 용렬하오나 그 지키는 바가 도둑입니다. 밥을 물에 말아 국을 타고, 한 노구솥 밥에 태반이 콩인 것으로 하루 두 번 배고픔을 면하는 것은 오로지 주인의 은혜입니다. 그리하며 밤이면 감히 눈을 붙이지 못하고 구멍마다 돌면서 경계하여 오로지 도둑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저 울타리 밖의 도둑도 몰아 쫓아내고자 하는데 하물며 집안의 도둑이겠습니까? ... 이것이 신이 저것을 보면 반드시 쫓아 버리고 마주치면 물어뜯는 이유입니다. ... 어찌 주인께서는 무슨 사심이 그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십니까? ... 장차 고양이는 배가 불러 죽고 신은 가마솥에서 죽게 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좌) 김두량, <긁는 개>,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23.1×26.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이경윤, <화하소구>, 비단에 옅은 채색, 17.7×15.5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전기에 이암이 있었다면 후기에도 개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또 한 명의 화가가 등장하는데요. 영조 때 직업 화가로 활약한 남리 김두량(金斗樑, 1696~1763)입니다. 위에 소개해드리는 <긁는 개>는 김두량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명품입니다. 나무 아래에서 개가 어디가 그렇게 간지러운지 몸을 잔뜩 구부린 채 몸을 긁적이고 있습니다. 털을 정말 한 올 한 올 정성 들여 사실적으로 그렸지요. 알쏭달쏭한 눈빛이며 입 모양까지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특히 개의 몸체에서 보이는 생생한 입체감은 서양 화법을 수용한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긁는 개라는 소재는 그 전에도 그려졌습니다. 오른쪽 작품은 조선 중기 문인화가 낙파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그림인데요. 역시 몸을 외로 꼰 채 몸을 긁고 있는 개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지요. 덥수룩한 털을 한 올 한 올 정성껏 묘사해 현장에서 보고 그린 듯 사실감이 도드라집니다. ‘나무 아래에서 가려운 곳을 긁고 있는 개’라는 구도는 김두량의 그림과 같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그냥 보기 좋아서 그린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숨어 있거든요.


한자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개는 戌(술), 나무는 樹(수)이지요. 戌은 지킬 무(戍)와 글자 모양이 비슷합니다. 지킬 무(戍)는 지킬 수(守)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나무 수(樹)와도 음이 같습니다. 결국 나무 밑 개 그림에는 “지킨다”는 뜻이 담기게 됩니다. 긁는 개는 복을 긁어 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둘을 종합하면 나무 밑 긁는 개는 집안을 지키고 복을 들여오는 좋은 의미의 그림인 거지요. 비슷한 구도의 그림이 반복해서 그려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김두량, <삽살개>, 1743년, 종이에 옅은 채색, 35×45cm, 개인 소장


김두량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삽살개>입니다. 삽살개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이게 무슨 삽살개인가 싶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삽살개와는 생김새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요. 이 그림이 중국, 일본을 거쳐서 1995년 7월 부산의 진화랑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도 논란이 엄청나게 뜨거웠다고 합니다. 급기야 MBC <PD수첩>에서까지 보도됐을 정도였다니까요. 논란의 출발점은 이 그림의 옛 소장자가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 함께 묶은 화첩에다가 “내가 방(尨) 그림 한 본을 구했더니 필세가 발랄하고 묘하다”고 적어놓은 대목입니다. 방(尨)이 삽살개를 뜻하기 때문이었지요.


삽살개든 아니든 이 개는 처음부터 유명해질 팔자를 타고 난 것 같습니다. 그림 위쪽의 글씨를 쓴 이가 바로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였으니까요. 실제로 영조는 김두량을 무척이나 아낀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남리(南里)라는 호를 직접 지어주고, 도화서 화원 최고위직인 별제까지 내려줍니다. 게다가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지 직접 글씨까지 써줬지요.




(좌) 전(傳) 장조, <견도 犬圖>, 51.8×86.5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우) 전(傳) 장조, <견도 犬圖>, 51.7×75.5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기왕 영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혹시 왕이나 왕세자가 그린 개 그림은 없을까 궁금해집니다. 실제로 있어요. 우리가 흔히 사도세자로 알고 있는 장조(莊祖, 1735∼1762)가 그린 걸로 전해지는 개 그림 두 점입니다. 전문 화가의 솜씨는 아니지만,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거침없이 쓱쓱 그려낸 것이 꽤나 매력적이지요. 어찌 보면 굉장히 현대적인 드로잉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최대의 문예 군주로 불리는 아들 정조의 재능은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좌)작가 미상, <삽살개>,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30.9×29.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장승업, <쌍구도>,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68×68㎝,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우)어유봉, <삽살개>,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63.5×37cm, 개인 소장


다시 삽살개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삽살개는 우리나라 토종으로 유명하지요. 순우리말로 ‘삽’은 쫓는다는 뜻이고 ‘살’은 귀신, 액운이란 뜻입니다. 이름 자체가 귀신 쫓는 개란 뜻이니, 그리 이름 지은 까닭도 자연스레 짐작이 됩니다. 삽살개 그림도 여러 폭이 남아 있는데요. 화가에 따라 삽살개를 어쩌면 저렇게 다르게 그릴 수 있을까요. 특히 어유봉의 <삽살개>는 과연 저 동물이 삽살개는커녕 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상상 속의 동물로 그려졌습니다. 귀신 물리치는 개의 특성을 부각시키려다 보니 닮게 그리기보다는 표현을 일부러 과장한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좌)김홍도, <경작도>, 1796년, 종이에 옅은 채색, 26.7×31.6cm, 보물 제782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우)김홍도, <점심>, 《단원풍속도첩》, 종이에 옅은 채색, 28×23.9cm, 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럼에도 최고의 삽살개 그림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좌측의 작품을 고르겠습니다. 저 유명한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그림인데요. 삽살개가 아주 작게 그려져 있지요. 여기서 중요한 건 개의 뒷모습을 그렸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개 그림은 모두 앞모습이나 옆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김홍도는 풍속화에다가 지금껏 본 적 없는 개의 뒷모습을 그려놓았어요. 주인이 밭 가는 모습을 멀뚱히 서서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자세가 예술이에요. 저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그림 전체가 확 살아나는 느낌이랄까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 선생도 이 그림에 반했던지 “밭갈이하는 주인의 얼굴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설멍한 삽살개의 뒷맵시”라는 기가 막힌 표현을 남깁니다.


김홍도의 유명한 그림 한 점을 더 볼까요. 보물로 지정된 《단원풍속도첩》 안에 있는 오른쪽 그림은 점심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개 한 마리가 앉아서 사람들 밥 먹는 걸 지켜보고 있습니다. 실로 절묘한 위치에 개를 그려 넣었어요.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인간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개의 모습이 그림을 더욱 박진감 있게 한다.”는 유홍준 교수의 평가가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 그림에 개가 없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저렇게 참 작게 그렸는데도 시각적인 효과는 정말 대단하지요. 역시 대가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봅니다.



김홍도, <모구양자도>, 18세기, 비단에 옅은 채색, 90.7×39.6cm,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는 개를 등장시킨 그림을 여러 점 남겼는데요. 그중에서도 대표작이라 할 것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모구양자도>입니다. 어미와 새끼가 다정하게 어울려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지요. 여기서 다시 한번 김홍도라는 화가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저 어미개의 당당하고 우아한 자태에서 보게 되는 건 바로 고결한 선비의 모습이에요. 개의 모습에다가 사람의 온기,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어느 연구자는 김홍도만큼 세상을 따스한 시선으로 본 화가는 없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보신 이암의 <모견도>와 함께 개 가족을 묘사한 가장 따스한 옛 그림으로 꼽을 만합니다.



작가 미상, <맹견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44.2×98.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편 꽤 오랫동안 김홍도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그림도 한 점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맹견도>인데요. 1910년대에 서울 북촌의 어느 가정집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당시 미술계의 권위자였던 본 고희동, 안중식 등 화가들이 김홍도의 작품으로 결론을 냈어요. 그러곤 김홍도의 도장을 임의로 파서 찍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졌지요. 하지만 나중에 가짜 도장이란 사실이 밝혀져 누가 그렸는지 확인되지 않은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나라 화가의 그림이 맞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일단 쇠사슬에 묶인 채 어눌한 표정으로 엎드려 있는 저 개는 우리 토종개가 아닙니다. 게다가 개를 묘사한 방식이나 바닥을 포함한 배경에 표현된 원근법과 명암법 등은 우리 전통 기법이 아니라 전형적인 서양화법이거든요. 만일 이 그림이 우리 화가의 솜씨라면 조선 후기에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화법을 수용한 작품일 테고, 그게 아니면 서양화법을 익힌 청나라 화가의 그림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맹견이라기엔 너무도 해맑고 순하게 보이는 저 눈동자 때문에라도 오래 기억에 남을 그림이에요.


(좌) 신윤복, <나월불폐도>, 비단에 수묵, 25.3×16.0cm, 간송미술관 소장

(중) 김득신, <성하직구>, 종이에 옅은 채색, 22.4×27.0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신광현, <초구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35.1×29.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름난 화가들의 개 그림 몇 점을 더 소개해 드립니다. 왼쪽은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로 이름을 날린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의 그림입니다. 상념에 잠긴 개의 자세와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작품이에요. 그 옆에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그림은 한여름에 삼대가 모여 짚신 삼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표정만 봐서는 한 여름 무더위가 그다지 실감 나지 않지요. 그런데 개의 표정을 한 번 보세요. 혀를 쭉 내민 채 헉헉대는 모습입니다. 표정이 정말 예술이에요. 이것 하나로 그림이 확 살아나지요.


애완견을 사람 못지않게 끔찍하게 아끼고 보살피는 반려동물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개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힘겹지요. 주인으로부터 버림받고 떠돌이개 신세가 되거나 먹을거리로 제 한 몸 바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최근에는 대형견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사례까지 잇따르기도 했고요.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건 여전히 개는 인간과 살 부비며 함께 살아가는 고마운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사람과 개가 교감하는 따뜻한 모습을 담은 마지막 그림, 신광현의 <초구도>에 더 눈길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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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모나리자를 능가하는 한국의 미소
김 석
#김석기자



이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진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데도 실제로 본 것 마냥 너무도 익숙하고 친숙한 이미지. 수없이 다양하게 복제되고 일상 속에 찬연하게 퍼져 있는 바로 그 얼굴. ‘신비로운 미소’의 대명사로 불리는 모나리자.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대표하는 희대의 명작. 알 듯 모를 듯 수수께끼 같은 미소로 지금까지도 구구한 억측과 궁금증을 낳고 있는 그림이지요.


운 좋게도 두 번이나 직접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실은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에요. 크기도 작을뿐더러 워낙에 관람객들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어서 가까이서 그 신비로운 미소를 대면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니까요. 차라리 복제된 이미지로 감상하는 편이 훨씬 더 낫지요. 뭐 사정이야 어떻든 수천 년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미소’ 하면 첫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겁니다.



금동반가사유상, 삼국시대 <6세기 후반>, 높이 83.2cm, 국보 7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렇다면 우리 문화재 속에는 어떤 미소가 담겼을까요. ‘한국의 미소’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불세출의 명작 금동반가사유상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의 불상이 각각 국보 78호와 83호로 지정돼 있는데, 아무래도 인간적인 매력은 78호 쪽이 좀 더 돋보이지 않나 싶어요. 만면 가득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저 천상의 미소. 보면 볼수록 마음이 푸근해지는 한국의 미소입니다.


불상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지요. 특히 반가부좌를 한 채 미소 짓고 있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은 모진 억압에 고통 받고 신음했던 백성들에게 구세주 같은 존재였습니다. 기댈 곳 없는 막막한 현실에 한 줄기 빛과 같은 구원자. 그래서 미륵보살은 늘 변함없이 온화하고 넉넉한 미소로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 그래, 그래, 모든 게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다 잘 될 거라고, 말이에요.



‘신라의 미소’ 얼굴무늬 수막새에 얽힌 사연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 6월호에 ‘신라의 가면와’란 제목의 글이 실립니다. 내용인즉슨 당시 경주의 야마구치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던 27살의 젊은 의사 다나카 다카노부가 경주 읍내 일본인 골동품상에게서 유물 한 점을 구입했는데, 특이하게도 사람 얼굴 모양을 한 기와장식이었습니다. 당시에도 큰 화제가 됐는지 잡지에까지 소개되지요. 글쓴이 역시 당시 경주고적보존회에서 활동하던 오사카 긴타로라는 일본 사람입니다.


유물의 소유자인 다나카 다카노부는 1940년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영영 이별할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20여 년 세월이 흐른 뒤 용케도 유물의 존재를 기억해낸 분이 있었어요.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장이었던 박일훈 선생입니다. 끈질기게 유물의 소재를 추적한 끝에 1972년, 마침내 유물의 주인인 바로 그 의사 다나카 다카노부와 연락이 닿게 됩니다. 박 선생은 유물을 기증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고, 결국 마음이 움직인 다나카는 그해 10월 직접 경주박물관을 찾아 유물을 기증합니다.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 현재길이 11.5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그렇게 한 뜻있는 분의 간절함이 결실을 맺어 되찾아온 귀중한 유물이 바로 지금 우리가 ‘신라의 미소’라 부르는 얼굴무늬 수막새입니다. 1932년, 지금의 경주시 사정동 영묘사 터에서 출토된 이 유물은 지붕에 얹는 기와 중에서 하늘을 향해 볼록한 수키와(목조건축의 지붕을 덮는 반원통형의 기와)의 끝에 장식하는 유물이에요. 다른 말로 와당(瓦當)이라고도 합니다. 기와의 뒷면에 수키와를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어 실제로 지붕 장식에 쓰였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보면 볼수록 끌리는 이 느낌은 대체 뭘까요? 서글서글하고 한없이 정다운 저 눈매와 두툼하게 아래로 흐르는 콧대, 그 아래로 한가득 머금은 자애로운 미소. 저토록 향기로운 웃음을 흙으로 빚어 구워낼 줄 알았던 신라 도공의 마음에도 따뜻한 미소가 흘러 넘쳤을 겁니다. 더욱이 틀에다 찍어낸 게 아니라 도공이 손으로 직접 빚은 것이라니 말이에요. 이런 기와장식을 실제로 사용할 줄 알았던 옛 사람들의 ‘파격’은 또 어떻고요.





그래서 신라의 미소는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당시 ‘새천년의 미소’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됐고, 저 유명한 경주 빵의 상표에까지 등장하며 ‘신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으뜸 이미지가 됐지요. 그 미소에 매료된 시인들이 앞 다퉈 노래로 화답했으니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는 이봉직 시인의 동시 ‘웃는 기와’ 한 대목이 참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시대의 간극을 넘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까지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합니다. 명품의 가치는 그래서 현재진행형이라고 했다지요. 신라의 미소에서 깊은 감흥을 얻은 또 다른 시인이 있습니다. 천 년을 훌쩍 뛰어넘는 유구한 세월에도 전혀 빛 바라지 않은 그 소탈하고 후덕한 미소. 시인의 마음은 그 고운 웃음의 결을 따라 시간을 초극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유영합니다.





깎아지른 벼랑에 새겨진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백제 <7세기 초>, 국보 84호



먼 옛날 백제 사람들이 터를 닦고 살았던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대대로 강댕이골이라 했던 용현계곡 한 쪽 벼랑에 새겨진 부처의 존재를 이곳 주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부처가 찬란한 백제 불교의 유산이라는 사실은 1959년에야 재발견됩니다. 지금 우리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라 부르며 국보로 귀하게 여기는 바로 그 마애불입니다.


유물 안내판의 설명에 따르면 가운데가 석가여래입상, 왼쪽이 제화갈라보살 입상, 오른쪽이 미륵반가사유상입니다. 세 부처를 나란히 새겼다 해서 이런 배치를 ‘삼존불 형식’이라 하는데요. 왼쪽에 보주(寶珠)를 든 보살이 과연 누구냐를 놓고 지금까지도 해석이 분분하답니다. 중국이나 일본, 심지어 같은 한반도 내에서도 신라나 고구려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성이라 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학술적인 부분은 전문가들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아무 편견 없이 돌에 새겨진 부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합니다.





세 분이 모두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지요. 따로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참 좋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가운데 본존상의 얼굴을 한 번 볼까요. 영락없는 뭇사람의 얼굴입니다. 국보 금동반가사유상에서 보던 그 거룩하고 우아한 부처님이 아니라 친근한 옆 집 아저씨의 딱 그 모습이에요. 부리부리한 눈매, 뭉툭한 코, 두툼한 입술, 둥그런 형태에 살집 넉넉한 얼굴이지요. 하늘의 사람이 아니라 땅의 사람, 다시 말해 서민의 얼굴인 겁니다.


그래서 서산마애불은 서민 불상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답니다.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서산마애불에 얽힌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일화들이 소개돼 있는데요. 서산마애불이 발견된 직후에 우리나라 고고학의 선구자인 김원용 선생이 이런 유명한 제안을 했다고 해요.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런 미소는 마음 좋은 친구가 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창한다.”


그래서 백제의 미소가 된 거였어요. 2012년 서산마애불을 직접 답사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그 사람 좋은 미소 앞에서 그때 저는 무엇을 생각하고 소망했을까요. 저 바위 위에서 1400여 년을 한 결 같은 미소로 살아낸 부처님은 그 모든 시름도 잊고 팍팍한 세상사도 잠시 내려놓고 여기서 잠시나마 편히 머물다 가시게, 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먼먼 옛날의 백제인은 까마득한 후손들에게 한없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남겼지요.



흙으로 만든 부처와 보살, 고구려 <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라의 미소, 백제의 미소도 있는데 혹시 고구려의 미소라 부를 수 있는 건 없을까? 궁금해서 이리저리 자료를 뒤져보니 아주 흥미로운 유물이 등장하더군요.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 실에 가면 한 쪽에 흙으로 빚은 작은 부처와 보살들이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있지요. 1937년 평안남도 원오리(元五里) 옛 절터에서 한꺼번에 발굴된 이 소조불(흙을 빚어 만든 불상)은 6세기 중엽 이후에 만들어진 출토지가 분명한 고구려 불상이라 합니다.


온전한 불상과 보살상에 파편까지 하면 312개나 한자리에서 출토됐다 하는데요. 그 중에서도 앉아서 가지런히 두 손 모으고 있는 보살상 두 점에 유독 마음이 끌립니다. 순전히 흙으로 빚은 것들이 자그마치 1500년 세월에도 저토록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니 놀랍지요. 게다가 단정하게 앉아 예를 갖춘 보살들의 저 생생한 표정은 또 어떤가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한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바짝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그 환한 미소가 한결 도드라져 보이지요.





수월관음도에서 찾은 고려의 미소


눈치 채셨겠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유물들은 대부분 불교 문화재입니다. 그리고 이 전통은 불교국가인 고려로 이어지게 되지요. 고려가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 가운데 특별히 세 가지를 꼽을 만합니다. 청자와 나전칠기, 그리고 불화(佛畫)입니다. 2010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려불화대전>이란 기념비적인 전시가 열립니다. 전 세계 각지에 흩어진 고려불화 108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실로 역사적인 전시였어요.


이 전시가 그토록 중요했던 까닭은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불화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가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어서 한자리에 모으는 것 자체가 대단히 힘든 일이거든요. 한 달하고도 열흘 남짓한 전시 기간 동안 전국의 승려들이 몇 번이고 전시장에 다시 찾아와 그림 속 부처님 앞에서 기도하고 불공을 드리는 보기 드문 장면도 연출됐습니다. 평생에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처럼 말이에요.



수월관음도, 고려 후기, 비단에 색, 106.2×54.8cm, 보물 1426호,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고려불화 최고의 미소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수월관음도입니다. 수월관음(水月觀音)이란 말 그대로 물에 비친 달을 내려다보는 관음보살을 가리킵니다. 수월관음도는 남인도의 바닷가에 있는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의 연못가 바위에 앉아 선재동자(善財童子)의 방문을 받고 있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그린 겁니다. 그림 속 관음보살은 선재동자를 내려다보고 있지요. 후덕한 얼굴에 은은하게 번지는 저 미소를 한 번 보세요. 가히 압권입니다.





그런데 관음보살의 표정만 그런 게 아니에요. 선재동자를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저 천진난만하고 앙증맞은 입술에 머금은 미소를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요. 숱한 수월관음도를 보았어도 이렇게 자애롭고 우아한 미소로 보는 이를 따뜻하게 해주는 명품은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고려불화 최고의 명작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을 언젠가 꼭 한 번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리도 곱고 아름다운 고려의 미소를 말입니다.



서민적인 해학이 빚어낸 조선의 미소


유교 국가인 조선 시대에 이르면 그 전까지 문화 전반을 지배했던 불교의 영향력이 몰라보게 위축됩니다. 굳이 빗대어 설명하자면 줄곧 신의 영역을 지향했던 문화예술이 그제야 비로소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왔다고 할까요. 조선의 미소를 딱 지칭해서 이거다, 못 박은 글을 보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하면 역시 풍속화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단원 김홍도의 그림 속엔 ‘조선의 미소’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풋풋하고 건강한 서민들의 웃음이 한가득 담겨 있습니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27.8×23.8cm, 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당 훈장 선생님께 혼이 났는지 울음을 참지 못해 훌쩍거리는 아이, 그 모습을 아이고 고소해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참 정겹지요. 시끌벅적한 장터 한가운데서 펼쳐지는 한 판 씨름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천차만별 다양한 표정은 또 어떤가요. 누구는 웃고 누구는 자못 심각한 표정인데, 다들 판돈 두둑하게 걸었다면 마지막에 웃는 이는 과연 누가 될까요.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아이의 저 환한 미소 역시 참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김홍도의 그림은 보는 이를 한없이 따뜻하게 해줍니다. 더도 덜도 보탤 것 없는 서민들의 수수하고 꾸밈없는 삶을 화폭에 그려낼 줄 알았던 화가의 따뜻하기 그지없는 시선, 그 마음의 결이 느껴지니까요. 넉넉함과는 거리가 멀었을 팍팍한 삶의 현장 속에서도 늘 웃음과 미소를 잃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 바로 그 미소가 그저 벗어나고만 싶은 고통에 불과했을 고단한 일상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이었을 겁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단원 풍속도첩>에 수록된 풍속화 24점 하나하나가 모두 조선의 미소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 기억하시나요. 광대들의 삶과 사랑, 시련과 애환을 그린 이 영화에는 조선시대 전문 연예인이었던 광대들이 펼쳐 보이는 갖가지 예능이 선보이는데요. 그 중에서도 얼굴에 탈을 쓰고 노는 탈놀이 장면은 보는 이를 짜릿하고 조마조마한 긴장감 속으로 몰고 갑니다. 우리 문화재 가운데 탈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아요. 경북 안동의 유서 깊은 하회마을과 이웃 병산마을에 전해지는 탈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회탈이라 부르는 것들이지요.



(좌) 중탈,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국보 제121호, 하회병산동민 소유, 국립중앙박물관 위탁 보관

 (우)-(상) 이매탈, (중) 부네탈, (하) 선비탈, 


하회탈 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익숙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게 바로 ‘중탈’입니다. 입 주위를 중심으로 얼굴 부분과 턱 부분이 따로 만들어져 줄로 이어놓은 걸 볼 수 있지요. 초승달 모양을 닮아 여지없이 환한 웃음을 떠올리게 하는 눈과 눈썹, 콧구멍이 잔뜩 커진 듯 뭉툭한 코와 불룩 솟아오른 광대뼈, 마치 허허허 웃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쩍 벌린 입모양까지 영락없는 박장대소의 표정입니다.


국보로 지정된 탈은 모두 13점입니다. 이 가운데 하회탈이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까지 해서 11점이고, 병산 탈은 2점이 남아 있습니다. 탈은 원래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별신굿을 할 때 쓰던 물건이에요. 보통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었기 때문에 굿이 끝나고 나면 태워버리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요행히 13점이 남아 국보가 될 수 있었던 건 이례적으로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그 유래가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탈은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진 걸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셈이지요. 오리나무를 깎은 뒤 옻칠을 여러 겹 해서 반들반들하고 운치 있는 색을 냈다고 합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는 이런 탈을 쓰고 정월대보름에 한바탕 흥겨운 굿판을 벌였을 옛 사람들의 흥취가 탈에 담긴 각양각색의 표정에 생생하게 담겨 있는 듯합니다. 탈 하나하나에 새겨진 저 웃음, 저 미소야말로 조선의 미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웃을 일이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요즘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일까요. 하지만 그 옛날이라 해서 다르진 않았겠지요. 육신의 병을 이겨내는 최고의 묘약이 바로 웃음이라 말하듯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는 것도 다름 아닌 웃음입니다. 누천 년 조상들의 손때 묻은 소중한 유물에서 찾아낸 한국의 미소. 그 미소에서 삶의 희망과 활력을 얻었던 옛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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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옛 그림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네…
김 석
#김석



점잖게 생긴 선비가 가만히 앉아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당비파(唐琵琶)란 이름을 가진 네 줄짜리 현악기인데요. 그 역사가 제법 깊어서 이미 신라 시대부터 널리 연주되었다고 합니다. 왼손가락으로 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뜯는 모습이 요즘으로 치면 기타 치는 모습과 참 비슷하지요. 맨발인 걸 보면 누구 눈치 볼 것도, 스스럼도 없이 혼자서 조용히 음악을 연주하며 한가로운 멋을 즐기고 있습니다. 마침 그림 왼쪽에 이런 내용의 시구가 적혀 있군요.



| <포의풍류도>, 김홍도, 종이에 수묵 담채, 27.9×37cm, 개인 소장





이런 멋스런 시구를 붙인 걸 보면 그림 속 인물은 그 시절에 한 풍류 했던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포의풍류도>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작품입니다. 실제로 김홍도는 그림 뿐 아니라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해요. 본인 스스로 음악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여러 악기를 능숙하게 다뤘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요. 우리 미술의 역사를 통틀어 음악과 악기에 관한 그림을 가장 많이 남긴 화가가 바로 김홍도였습니다.



| 당비파 모양, 연주모습



김홍도의 음악 사랑

그림을 본 사람들은 당비파를 연주하는 주인공이 바로 김홍도였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일종의 자화상으로 본 거지요. 연주자 앞에 또 하나의 악기가 있는데요. 입으로 불어서 소리를 내는 관악기인 생황(笙簧)입니다. 가느다란 대나무 관 17개가 둥그렇게 박혀 있는 악기로, 화음을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우리 악기여서 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해요. 김홍도 역시 생황을 잘 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생황 연주자를 따로 묘사한 그림이 어엿하게 남아 있습니다.



| <월하취생도>, 김홍도, 종이에 수묵 담채, 23.2×27.8cm, 간송미술관 소장


달빛 아래에서 맨발 차림으로 유유자적 생황을 부는 모습을 그렸지요. 그림 오른쪽에 이런 시구가 적혀 있습니다. “달빛이 비쳐드는 방 안에서 생황소리는 용의 울음보다 더 처절하다.” 중인 출신의 화가였던 김홍도의 울분이 담겨 있다고도 해석되는 구절입니다. 김홍도는 이 밖에도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가 생황 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한 점 더 남겼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의 그림 중에도 생황을 들고 있는 기생을 그린 작품이 남아 있어요.



| (좌) <송하선인취생도>, 김홍도, 비단에 수묵 담채, 109×55cm, 고려대박물관 (우) <연당의 여인>, 신윤복, 비단에 채색, 29.7×24.5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음악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김홍도의 진짜 장기는 거문고와 퉁소라고 전하는데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란 분이 자신의 문집 <청성집>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찰방 김씨(김홍도)가 퉁소를 잘하므로 한번 놀아볼 것을 권하였다. 그 곡조는 소리가 맑고 가락이 높아 위로 숲의 꼭대기까지 울렸는데 뭇 자연의 소리가 모두 숨죽이고 여운이 날아오를 듯해서, 멀리서 이를 들으면 반드시 신선이 학을 타고 생황 불며 내려오는 것이라 할 만하였다.”



| (좌) <단원도>, 김홍도, 1784년, 종이에 수묵 담채, 135.3×78.5cm, 개인 소장 (우) <선동취적도>, 김홍도, 비단에 채색, 130.7×57.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얼마나 퉁소를 잘 불었으면 이렇게까지 극찬을 했을까요. 오른쪽 그림에는 작지만 거문고 타는 김홍도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이는 한 결 같이 김홍도 자신입니다. 이쯤 되면 김홍도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이지요. 그래서 뛰어난 김홍도 연구자였던 오주석 선생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단원은 화가이면서 취미로 음악을 즐긴 아마추어 정도가 아니라 당당한 음악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조선 최고 연예인(?)을 화폭에 담은 신윤복



| (좌) <주유청강>, 신윤복, 비단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청루소일>, 신윤복, 비단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당시 최고의 연예인이었던 기생이 생황을 들고 있거나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림들이 더 있습니다. 국보 제135호로 지정된 신윤복의 풍속화 모음집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청루소일’과 ‘주유청강’이란 작품인데요. 기녀가 생황을 든 장면은 위에서도 보았고, 양반 댁 자제들의 럭셔리한 뱃놀이를 묘사한 오른 쪽 그림에선 한 기생이 뱃머리에 앉아 생황을 불고 있습니다. 그 자태를 어쩜 저리도 매력적으로 그렸는지요. 자고로 예로부터 먹고 노는 데 가무가 빠질 수 있나요. 악사 한 명을 더 태웠습니다. 한 젊은이가 배 한 가운데 서서 불고 있는 저 악기는 바로 대금(大笒)입니다.



| 이생강 - 대금 <이생강류 대금 산조>



| (좌) <무동>, 김홍도, 종이에 엷은 채색, 26.8×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쌍검대무>, 신윤복, 비단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의 그림에는 조선 후기의 소비 향락 문화와 남녀 간의 사랑이 실로 적나라하게 담겨 있지요. 음주가무가 주를 이루는 그림에 음악이 빠질 수 없었으니, 신윤복 역시 김홍도 못지않게 음악가들의 모습을 많이 그린 화가였습니다. 기생 둘이 칼춤을 추는 그림 ‘쌍검대무’에는 악공이 여섯 명이나 동원됐네요. 춤추는 기생들을 돋보이게 하려고 아래 악공들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그렸지만, 북 치고 장구 치고 대금 부는 이들의 활기 넘치는 움직임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전해져 옵니다.


그런데 김홍도의 그림에도 여러 악공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보물 제527호로 지정된 <단원풍속도첩>에 수록된 이 그림은 ‘무동’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합니다. 춤추는 소년을 중심으로 여섯 악사가 빙 둘러 앉아 한 판 신명나게 노는 모습을 보면 절로 흥이 나지요. 피리 둘에 대금, 해금, 장구, 앉아서 연주할 수 있도록 북을 틀에 넣어 만든 좌고(座鼓)까지 동원된 춤판에 밝고 건강한 기운이 가득합니다.



| (좌) <청금상련>, 신윤복, 비단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노상탁발>, 신윤복, 비단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승려들이 민가를 돌며 탁발(구걸)하는 데 절에서 쓰는 북인 법고(法鼓)가 동원됐는가 하면, 청중들을 음악의 매력 속에 흠뻑 빠지게 한 거문고 가락이 금방이라도 울려나올 듯합니다.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30점을 일일이 확인해보니 악공이나 악기가 등장하는 그림은 모두 8점이더군요. 앞에서 소개해 드린 김홍도의 작품과는 정신도 내용도 확연히 다르지만, 조선 후기의 유흥과 향락 문화 속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참으로 소중한 그림들입니다. 그래서 조선 회화로는 드물게 당당히 국보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이고요.




먼 옛날 귀하디 귀한 대접을 받은 음악



  

| (좌) 반구대 암각화 (우) 반구대 암각화 세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형상을 그리고 새긴 역사는 실로 유구합니다. 선사시대부터 전해오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예를 보여주는 것은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입니다. 울산의 젖줄인 태화강 상류 반구대 일대의 인공 호수 서쪽 기슭 암벽 위에 놀라운 그림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로 약 8미터, 세로 약 2미터 바위 위에 사람부터 동물까지 갖가지 형상이 새겨진 희대의 보물이지요. 한반도의 먼 조상이 그 옛날에 이런 그림을 남겼다는 것도 경이롭지만, 그 속에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바로 선사시대의 음악가들입니다. 오른쪽 아래에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한 부분을 자세히 보세요. 길쭉한 무언가를 입에 대고 부는 사람의 형상이 새겨져 있지요. 이걸 확대해서 좀 더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이 피리 부는 사람입니다.



|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 6세기, 금동, 높이 62.5cm,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국가가 어느 정도 틀을 갖추는 삼국 시대에 이르면 악기의 제작과 구성도 한층 세분화되고 정교해집니다.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의 백제 고분에서 출토된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는 교과서에도 실린 기념비적인 유물입니다. 하지만 이 유물을 자세하게 뜯어본 일은 아마 없으실 거예요.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은 바로 향로의 뚜껑 윗부분입니다. 여기에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 5명이 새겨져 있거든요.



| 시계방향으로 배소, 북, 피리, 완함, 현금 (출처: 위례백제연구원 블로그)


왼쪽부터 첫 번째는 대나무를 옆으로 나란히 묶어서 만든 배소(排簫)라는 관악기입니다. 두 손으로 양 옆을 잡고 불었을 겁니다. 다음은 북이지요.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으로 잡은 채 오른손으로 두드리는 모습입니다. 가운데 보이는 현악기는 완함(阮咸)이라 부릅니다. 앞에서 소개한 비파의 일종인데, 여기엔 줄이 세 가닥만 그려져 있군요. 네 번째는 피리, 마지막 것은 현금(玄琴)이라는 악기입니다. 흔히 거문고라고 불리는 바로 그 악기이지요. 금동대향로에 새겨진 다섯 악사는 백제의 귀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 먼 옛날에 이토록 귀하디귀한 대접을 받았던 걸 보면 음악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품격 높은 예술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기나긴 잠에 빠져버린 옛 악기ᆢ그러나 죽은것은 아니다



| (좌) <목양취소>, 이인문, 비단에 채색, 30.8×41.5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여동빈도>, 김득신, 종이에 수묵담채, 115.5×55.5cm


왼쪽은 양들이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가적 풍경을 담은 그림입니다. 양치기 소년은 커다란 너럭바위에 올라 앉아 단소를 불고 있군요. 참으로 평화롭고 고요한 정경이지요. 조용한 숲속에 가만히 울려 퍼져 메아리를 이루는 피리 소리를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 때 묻지 않은 동심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따뜻한 그림이지요. 오른쪽은 조선 후기의 화가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여동빈도>란 작품입니다. 2013년 6월 KBS의 TV쇼 <진품명품>에 등장해서 감정가가 2,000만 원으로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림의 주인공 여동빈은 중국 도교의 여덟 신선 중 한 명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신선이라 해서 가장 인기가 많았다고 해요. 옆에서 한 명은 퉁소를, 다른 한 아이는 생황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 <사계풍속도 8폭>, 김득신, 1815년, 비단에 수묵담채


김득신의 그림을 한 점 더 만나볼까요?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일상의 풍속을 여덟 폭 연작으로 그린 병풍 그림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갓 쓴 선비가 거문고를 뜯고 있군요. 기생 둘에 술병까지 놓인 걸 보면 양반들이 야외로 나들이를 나간 모양입니다. 거문고 역시 옛 그림에 참 많이도 등장하는 악기인데요. 위에서 소개해 드렸던 신윤복의 그림도 그렇고 거문고는 꼭 기생과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풍류 하면 거문고를 빼놓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 국립국악원 목요풍류: 오경자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 전바탕



| <탄금야흥>, 백은배, 비단에 수묵담채, 23.0×30.3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말기의 화가 임당 백은배(白殷培, 1820~1901)의 그림에도 곰방대를 문 남자 옆에서 기생이 거문고를 뜯는 모습이 보입니다. 김홍도와 신윤복에서 활짝 꽃을 피운 풍속화의 전통은 이렇게 조선 말기까지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졌지요. 그런 풍속화들이 남아 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음악 소리 들리는 옛 그림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것이고요. 물론 지금은 그림으로만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악기들도 있습니다. 이 글의 첫머리에 소개해드린 ‘당비파’가 대표적이지요. 이제는 박제가 되어버린 악기의 운명에 대해 소설가 김훈은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단지 진열되어 있는 악기들도 인간에게 안겨서 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그 운명만으로도 아름답다. (…) 이미 연주법이 전승되지 않은 현악기들도 있다. 당비파가 그러하다. 악기는 남아 있지만 그 연주법이 전하지 않아서, 악기는 더 이상 인간에게 안기지 못하고 더 이상 소리도 내지 않는다. 이런 악기들도 그 속에 소리의 잠재 태와 소리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한 죽은 악기는 아니다. 악기는 살아서, 기나긴 잠에 빠져 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니다.”


그림에서 노랫소리가 들리고 아름다운 곡조가 흘러나와 우리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 줍니다. 옛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 음악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요.



| <아악의 리듬>, 김기창, 1967, 비단에 수묵채색, 86×9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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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조선시대부터 #먹스타그램이 있었다!
김석
#김석기자



옛말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지요.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금강산 여행은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가운데서도 첫 손에 꼽힐 정도였어요. 그래서 수많은 시인과 화가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주옥같은 시와 그림들을 남겼습니다. 그런 금강산인데도 허기 앞에선 장사 없나 봅니다. 일단 좋은 구경도 밥 먹고 하자는 속담이 전해져올 정도니까요. 삶이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일입니다.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음식을 해먹는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화가들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얼마 전 <풍미 갤러리>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서양의 명화 중에서 음식과 관련된 그림만을 골라 묶은 미술책입니다. 다 읽고 나니 궁금해졌어요. 우리 조상이 남긴 옛 그림 속에는 어떤 음식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아이스타그램, 아이의 첫 음식 모유를 담은 자모육아



|신한평 <자모육아>, 종이에 담채, 23.5×31.0cm, 간송미술관 소장



올해 놓쳐서는 안 될 미술 전시회가 있습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8월 28일까지 이어지는 <간송문화전 6부: 풍속인물화 - 일상, 꿈 그리고 풍류>입니다. 저 유명한 신윤복의 <미인도>를 비롯해 보석처럼 빛나는 우리 옛 그림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지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풍속인물화에는 음식과 관련된 그림들이 제법 많은데요. 위의 그림은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申漢枰, 1735~1809)이란 분이 그린 자모육아(慈母育兒)란 작품입니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이를 기른다는 뜻이지요. 자녀 셋을 둔 어머니가 막내인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습니다. 엄마 품에 폭 안겨 젖을 빠는 아기, 그 모습을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어쩜 저리도 사랑스럽게 그렸을까요. 모유(母乳)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먹는 음식입니다. 젖을 떼고 나면 다시는 맛볼 수 없는 귀하디귀한 음식이기도 하고요.




#술스타그램, 신윤복이 화폭에 담은 주막의 풍경



|신윤복 <주사거배>, 종이에 담채, 28.2×35.6cm, 국보 제135호, 간송미술관 소장



기왕 말 나온 김에 신윤복의 그림도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국보 제135호로 지정된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 실린 그림 30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술집 풍경이군요. 신윤복이 즐겨 그린 기생은 보이지 않고 가마솥 뒤 부뚜막에 앉은 주모가 국자로 술을 떠서 잔에 따르고 있습니다. 갓 쓴 손님네들이 다들 서 있는 걸 보면 요즘 말로 딱 선술집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술은 어쩔 수 없이 술인 모양입니다. 오른쪽 위에 한자로 된 글귀 내용이 또 절묘합니다. “술잔 들어 밝은 달 맞아들이고, 술항아리 안은 채 맑은 바람 대하네.” 화가의 풍류가 이랬습니다.




#회식스타그램, 강가에서 즐기는 풍류 넘치는 회식



|김득신 <강상회음>, 종이에 담채, 22.4×27.0cm, 간송미술관 소장



이번엔 강가에 조촐한 밥자리가 마련됐군요. 조선 후기에 풍속화가로 이름을 날린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작품입니다. 옛날 옛적엔 뜻 맞는 사람끼리 강에 나가 고기도 잡고, 잡은 고기를 요리해서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주로 삼복에 일손 없는 날을 골라 이른바 천렵(川獵)을 즐기는 것도 옛 사람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놀이였다고 합니다. 가운데 생선 요리를 놓고 둘러앉은 네 사람이 밥을 먹고 있는데, 한 명은 그 뒤에서 혼자 술병을 독차지하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네요. 한 소년이 나무 뒤에서 지켜보며 뭐라도 좀 얻어먹을 수 있을라나, 기회를 엿보는 것만 같아 웃음을 줍니다.




#일상스타그램, 김홍도가 담은 일상의 풍경들



아주 오래 전부터 정물화를 그려온 서양과 달리 우리 옛 그림에는 정물화의 전통이 없습니다. 먹거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이 없다는 뜻이지요. 음식을 먹거나 요리를 준비하는 모습, 더 넓게 잡아도 고기 잡고 농사짓는 풍습 정도를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회화사를 대표하는 풍속 화가를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단연 김홍도가 되겠지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조선시대의 이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김홍도의 풍속화 25점을 수록한 기념비적인 화첩 <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7호)에도 어김없이 음식과 관련된 그림들이 있습니다.



|왼쪽부터 김홍도 <점심> <주막>, 종이에 엷은 채색, 28.0×23.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너무나도 유명한 그림들이지요. <점심>은 말 그대로 점심 식사 장면을 그린 겁니다. 화면 한가운데 숟갈로 밥을 떠먹는 인물을 중심으로 조촐한 서민들의 야외 식사 모습이 정감 있게 묘사돼 있습니다. 하루하루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을 백성들의 먹고 사는 일상을 참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어요. 위에서 술집 그림을 잠시 보았지만 사실 백성들이 밥 먹고 술 마시던 곳은 <주막>이지요. 평상도 아닌 댓돌에 걸터앉아 밥그릇을 한쪽으로 기울여 숟갈로 음식을 뜨는 모습을 보세요. 그릇에 음식을 담는 주모의 표정은 또 어떤가요. 이런 백성들의 소박한 건강함이야말로 김홍도의 풍속화가 갖는 진정성의 힘이 아닐까요.




#요리스타그램, 세계에서 사랑받는 김준근이 담은 우리의 풍속



|<국수 누르는 모양> 김준근b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화가로 김준근(金俊根, ?~?)이란 분이 있습니다. 원산 지역 토박이 출신의 지방 화가인데, 놀라운 건 김준근의 작품이 해외 미술관과 박물관에 꽤 많이 소장돼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 캐나다,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 오스트리아, 영국, 일본까지 전 세계 각지에 퍼져 있거든요. 189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 가운데는 한국의 풍속을 잘 보여주는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해요. 김준근의 그림은 그런 외국인 고객들의 취향을 만족시킨 겁니다. 오죽했으면 ‘수출 풍속화’로 불렸을까요.



|왼쪽부터 <떡매질> <두부 짜기>, 김준근


|왼쪽부터 <밥 푸고 상차리기>, <방아찧는 모양>, <엿 만들기>, 김준근



당시의 풍속과 생활상 치고 ‘없는 게 없는’ 김준근의 풍속화는 지금까지 파악된 수량만 자그마치 1600점이 넘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김준근의 작품에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들이 제법 많습니다. 위의 그림 여섯 점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국수 누르는 모양>, <두부짜기>, <떡매질>, <밥 푸고 상차리기>, <방아찧는 모양>, <엿 만들기>입니다. 정말 다채롭지 않나요? 조선시대 어떤 풍속화가도 이토록 세세한 것까지 그림으로 남기진 않았습니다. 가히 살아 있는 생활사 교과서라 할 만하지요.





#여행스타그램, 외국인의 시선에 비친 우리의 모습


|엘리자베스 키스 <맷돌 돌리는 여인들 Women at Work>, 종이에 구아슈, 1919년



그렇다면 낯선 이방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여행하며 다양한 풍속을 그림으로 남긴 영국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의 그림 중에도 음식과 관련된 작품이 두 점 있습니다. <맷돌 돌리는 여인들>이란 제목의 수채화는 두 여인이 마당 한가운데서 맷돌로 뭔가를 갈고 있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이런 모습이 외국인 화가의 눈에는 분명 이국적으로 다가왔겠지요.



|엘리자베스 키스 <금강산 절 부엌 A Temple Kitchen, Diamond Mountains>, 채색 목판화, 1920년



이번에는 <금강산 절 부엌>이란 제목이 붙은 채색 목판화인데요. 아주 깔끔하게 정돈된 어느 절 부엌에서 한 남자가 부뚜막에 올라앉아 아궁이 밥을 짓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수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장면까지 정말 생생하게 그려놓았네요. 그러고 보니 금강산 이야기로 시작한 우리의 그림 여행은 묘하게도 이렇게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옛 그림에서는 결코 본 적 없었던 ‘밥 짓는 남자’와 함께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