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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도 하고, 기부도 하고 … 이번 주말에 ‘퍼네이션’ 어때요?”
SSG닷컴, ‘쓱퍼마켓’ 열고 나눔 바자회 실시
 
#SSG닷컴




“이번 주말에는 즐겁게 쇼핑하면서 좋은 일도 할 수 있는, ‘쓱퍼마켓’으로 놀러오세요”


SSG닷컴은 오는 26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서울 가로수길 가로골목에서 ‘쓱퍼마켓’ 일일 나눔 바자회를 실시한다고 24일 밝혔다. 


SSG닷컴은 최근 트렌드를 반영해 쉽고 재미있게 기부에 동참할 수 있도록 ‘퍼네이션(Fun + Donation)’을 컨셉트로 잡았다. 소비자 단순 변심 등 실사용에는 문제가 없는 리퍼 제품 2천종을 선정해 최대 70%까지 할인판매하며, 수익금은 전액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한다.


‘쓱퍼마켓’은 ‘SSG(쓱)’와 ‘슈퍼마켓’의 합성어다. 마치 ‘집 앞 슈퍼마켓’을 들르듯 부담스럽지 않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최근 유행하는 레트로(복고풍) 감성을 담았다. 행사 포스터도 과거 영수증에서 볼 수 있던 ‘도트(Dot)’ 이미지로 꾸며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끈다는 계획이다.



오후 2시부터는 가로골목 옥상 루프탑에서 ‘SSG 옥션 이벤트’도 함께 열릴 예정이다. 주요 경매 물품은 SSG닷컴 전속모델인 ‘공유’, ‘공효진’이 이번 쓱세권 광고 촬영 시 착용했던 의상이다. 이 외에도 명품 브랜드 백화점 상품도 경매에 나올 예정이다. 


행사장에 들린 고객이라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최재웅 SSG닷컴 홍보브랜딩팀 과장은 “고객과 소통하면서 재미있는 기부 행사를 만들기 위해 경매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됐다”고 밝혔다.


한편, SSG닷컴은 기부행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SNS 인증 이벤트도 실시한다. ‘쓱퍼마켓’ 방문 혹은 상품 구입 사진을 찍어 #SSG, #쓱퍼마켓 등 지정된 해시태그를 사용해 SNS에 공유하면 현장에서 ‘보성 유기농 말차’ 음료를 증정할 계획이다.


SSG닷컴 관계자는 “흔히 떠올리는 바자회 느낌이 아닌 참여자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며 “이번 주말에는 가족, 친구와 함께 ‘쓱퍼마켓’에서 좋은 물건도 얻고 기부도 하는 일석이조의 기쁨을 누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2019년 10월 2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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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덕온공주의 인장이 60년 만에 귀환한 사연은?
김 석
#김석기자


2016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군 화제의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기억하시나요? 다른 건 몰라도 박보검이란 배우만큼은 강렬하게 기억에 남지요. 이 드라마에서 박보검이 맡은 역할은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였습니다. 스물둘이란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뜬 바로 그 비운의 왕위계승자 말입니다. 효명세자의 아버지는 순조입니다. 순조는 조선 최고의 문예군주로 불리는 정조의 아들이지요. 그러니까 효명세자는 정조의 손자인 겁니다.



2016년 KBS 2TV에서 방영돼 큰 화제를 모은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순조와 순원왕후는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습니다. 효명세자가 장남이었고, 둘째 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요. 그리고 세 딸 명온, 복온, 덕온공주가 있습니다. 드라마에는 세 공주 가운데 명온공주만 등장하더군요. 아쉽게도 드라마에선 만나볼 수 없었지만, 이 자리에서 소개할 우리의 주인공은 다섯 남매의 막내딸이자 효명세자의 막내 여동생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입니다.


덕온공주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입니다. 덕혜옹주가 있는데 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공주와 옹주는 엄밀히 말해서 출생 신분이 다릅니다. 정실 왕후가 낳은 딸이 ‘공주’, 그 외에 다른 부인이 낳은 딸을 ‘옹주’라 했습니다. 그래서 고종의 딸인 덕혜는 ‘조선의 마지막 옹주’로 불리는 겁니다. 덕온공주는 일반인에게 시집을 가 궁궐 밖에 나가 살다가 효명세자와 마찬가지로 스물셋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뱃속에 있던 둘째 아이와 함께 말이에요.



<덕온공주 당의>, 1837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중요민속문화재 제1호


요행히도 덕온공주가 입었던 옷 가운데 원삼, 당의, 장옷, 삼회장저고리, 누비저고리 등 6점이 지금까지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유물로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일괄 지정됐지요. 그중에서도 특히 덕온공주의 당의(唐衣)는 우리나라 중요민속문화재 제1호입니다. 그나마 이만큼 어엿하게 유물들이 남았으니 고인의 삶을 어렴풋이나마 더듬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 마지막 공주의 인장, 뉴욕 경매에 등장하다



<덕온공주 인장>


그런데 최근 바다 건너 미국 뉴욕에서 범상치 않은 도장 하나가 경매에 나옵니다. 해태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것만 봐도 상당히 지체 높은 이의 물건임을 단박에 알 수 있지요. 영어 해설을 자세히 읽어보니 놀랍게도 덕온공주(Princess Deokon)의 인장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바닥에 ‘덕온공주지인’ 여섯 자가 새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경매사인 크리스티 측에 물어보니 미국의 한 소장자가 갖고 있다가 내놓은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만일 진품이라면 그것 자체로 ‘사건’이었습니다.


덕온공주의 도장은 어보(御寶), 즉 왕실 도장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격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2011년 6월, 조선 왕실 도장인 어보(御寶)가 국내에서 경매에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1496년에 만들어진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비(妃) 공혜왕후의 도장이었는데요. 실제로 사용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의례용으로 만든 어보는 왕실을 상징하는 유물이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모두 국보급입니다. 당연히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거고요.



2011년 국내 경매를 통해 존재가 확인된 <공혜왕후 어보>


이런 유물이 경매에 나왔으니 논란이 될 수밖에요. 그럼 도대체 어떤 경로로 이 귀중한 왕실 유물이 경매에 나오게 됐을까요. 추적을 해보니까 6•25 때 미군이 불법으로 몰래 반출을 했고, 그 뒤로 어디를 어떻게 떠돌았는지 무려 60년 동안이나 자취를 감춘 채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그러다 1987년에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우리나라 수집가가 낙찰받아 보관해 오다가 2011년에 국내 경매에 내놓은 겁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경매를 통해 국내로 가져온 건 정말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경매라는 것이 가진 자들의 한가한 돈 놀음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만, 어디에 있는지 행방조차 알 수 없었던 귀중한 문화재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분명한 순기능이 있습니다. 만약 소장자가 이 유물을 다시 경매에 내놓지 않았다면 국내에 이런 귀중한 왕실 유물이 있는지조차 몰랐겠지요.


다행히 경매에서 어보를 낙찰받은 건 ‘문화유산국민신탁’이었습니다. 함부로 처분할 수 없는 소중한 공동체의 문화유산을 국민의 힘으로 지켜내고 우리 모두의 자산으로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공적 성격의 기구입니다. 4억 6천만 원에 낙찰된 조선왕실 어보는 국가에 무상으로 양도됐고, 이제 어엿한 우리 모두의 자산이 됐습니다.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고이 모셔져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호조태환권'이 장물이 되다



2010년 5월 미국에서 경매에 나와 논란이 된 <호조태환권 원판>


왕실 유물이 경매에 나온 또 하나의 기억할 만한 사례를 소개할까요? 2010년 5월, 미국 미시건 주의 한 작은 도시에서 소리소문없이 경매에 나온 유물 하나가 논란에 불을 지폈습니다. 1893년 대한제국이 ‘호조태환권’이란 지폐를 찍어내기 위해 만든 인쇄용 원판입니다. 결과적으로 지폐를 실제로 발행해서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화폐 개혁을 향한 대한제국 황실의 굳은 의지가 담긴 소중한 유물입니다. 그런데 이 유물이 미국의 자그마한 지방 소도시 경매에 나온 겁니다.


왕실 어보와 마찬가지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라이오넬 헤이즈라는 미군이 1951년 덕수궁에서 반출한 겁니다. 당시 미군이 전리품 삼아 챙겨간 왕실 유물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전쟁이란 비극이 초래한 또 다른 비극입니다. 호조태환권 원판은 당시에 액수에 따라 모두 네 종류가 만들어졌는데, 국내에는 50냥짜리와 10냥짜리 뒷면만 남아 한국은행의 화폐박물관에 보관돼 있었습니다.


불법으로 반출된 유물은 ‘장물’, 즉 ‘훔친 물건’입니다.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이후 미국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경매사와 낙찰자를 장물 거래 혐의로 처벌했고, 마침내 호조태환권 원판은 고향 땅을 떠난 지 60여 년 만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유물 역시 경매에 나오지 않았다면 그 존재조차 몰랐을 테고, 돌려받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왕실 유물은 일반에 유통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외에 나가 있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장물입니다. 그래서 왕실 유물은 소재만 확인되면 언제든 되찾아올 기회가 있는 거죠.


하지만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 가운데 상당수는 반출 과정을 추적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훔친 건지, 아니면 선물로 준 건지, 돈을 주고 사 간 건지, 어떤 경로를 거쳐 해외로 빠져나갔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문화재가 수두룩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건 왕실문화재가 아닌 다음에야 불법으로 반출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나서서 입증해내지 못하면 돌려받을 수가 없다는 거죠. 그걸 가진 사람이 어서 가져가시오, 하고 알아서 선뜻 내놓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다시, 덕온공주의 인장은 어떻게 됐을까요?



누군가 조선 왕가의 인장을 경매에 내놓고 있다?



인장 경매결과


4월 18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크리스티의 <일본과 한국 미술> 경매에 143번째로 나온 <덕온공주 인장>은 23만 7,500달러, 우리 돈으로 3억 원에 낙찰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확인된 낙찰자는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 조사와 환수를 맡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었습니다. 이렇게 또 귀중한 유물 한 점이 경매라는 절차를 통해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겁니다. 국내에 남아 있는 공주와 옹주의 인장이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더구나 조선의 마지막 공주의 유품이라는 상징성 때문에라도 <덕온공주 인장>의 가치는 오롯합니다.



2017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숙선옹주 인장>


비슷한 다른 사례가 없을까 하고 과거 크리스티 경매 기록을 찾아보니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더 나오더군요. 꼭 1년 전인 2017년 5월에 해태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또 다른 인장이 경매에 출품됐던 겁니다. 이 인장은 정조가 후궁 수빈 박 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숙선옹주(淑善翁主, 1793~1836)가 쓰던 겁니다. 정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의 여동생이지요. 덕온공주에게는 고모가 되는 셈입니다.


숙선옹주 인장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된 한국 고미술품 53점 가운데 가장 높은 가격인 34만 3,500달러에 낙찰됩니다. 당시 환율로 계산해보면 우리 돈으로 3억 8,500만 원 정도 됩니다. 덕온공주 인장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팔린 거죠. 그런데도 이 소식은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언론 보도도 거의 없었고요. 숙선옹주 인장은 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걸까요. 이후 인장의 종적을 알려주는 정보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1년 간격으로 숙선옹주와 덕온공주의 인장이 똑같은 경매에 나왔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요? 누군가 조선의 인장을 여럿 소장한 사람이 일정한 시간을 두고 하나씩 조심스럽게 물건을 경매에 내놓는 건 아닐까요? 공주와 옹주의 도장은 왕가의 유물이긴 해도 왕실 문화재는 아니기 때문에 증거가 명백한 도난품이 아닌 한 돌려달라고 강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경매에도 나올 수 있는 거고요.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우리 문화재 당국은 과연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걸까요.



다시 고국의 품에 안긴 조선백자의 꽃, 달 항아리


(좌) 2015년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국내로 환수된 백자 달항아리

(우)2018년 5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백자 달항아리


2015년 11월, 국보급으로 평가되는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 한 점이 경매에 나옵니다. 일본인 소장자가 50년도 넘게 애지중지 아껴온 귀한 물건이라 처음엔 경매에 내놓지 않으려 했다는군요. 경매 주관사인 서울옥션이 무려 3년 넘게 공을 들여 설득했답니다. 조선 백자의 꽃으로 불리는 달항아리는 현재 온전하게 남아 전하는 것이 10여 점에 불과할 정도로 귀하디귀한 유물이지요. 이 달항아리는 어느 한국인이 21억여 원에 최종 낙찰을 받아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굉장히 의미 있는 문화재 환수의 사례였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보다 예술성이 더 뛰어난 백자 달항아리가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 나왔습니다. 역시 일본 도쿄의 한 소장자에게서 나온 물건이라 했습니다. 이 경매에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 화백의 그림이 85억 3,000만 원에 낙찰되며 한국 미술품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워낙 화제가 된 터라 달항아리는 사실 뒷전이었습니다. 경매가 끝난 뒤에 확인해보니 다행히 한국인이 낙찰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답니다. 크기로 보나 형태로 보나 빛깔로 보나 근래 보기 드문 이 명품 달항아리의 최종 낙찰가는 우리 돈 25억여 원, 경매에 나온 달항아리로는 역대 최고가 기록을 썼습니다.


우리 문화재가 반드시 우리 땅에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문화재를 되찾아 와야 한다는 발상은 쉽게 말하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좁은 생각일 뿐이지요. 우리의 귀중한 유물이 해외 유수의 미술관, 박물관에서 한국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숱한 외세의 침략과 기나긴 식민지 시절 동안 워낙에 많은 문화재를 잃어버리고 빼앗겼기 때문에, 이제라도 정말 귀중한 것들은 우리 손으로 되찾아 와야겠다는 열망이 솟아나는 것 또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문화재를 해외 경매에서 낙찰받아 되찾아오는 사례들이 심심찮게 언론 보도를 통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문화재 반환에 대한 생각과 여건이 성숙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합법적으로 문화재를 되찾아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걸 이제는 모두가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이제 긴 타향살이를 마치고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온 <덕온공주 인장>을 우리 박물관에서 곧 만날 수 있겠지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보기로 합니다.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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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김 석
#김석기자


2018년 3월 7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평창동 서울옥션 경매장. 근래 보기 드물게 경매 현장은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국내를 대표하는 미술품 경매회사 서울옥션의 새해 첫 메이저 경매였던 만큼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지요. 올 한 해 미술 시장의 경향과 판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날 경매는 다른 때와 달리 조금 더 특별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그림 한 점이 있었거든요. 8년 만에 경매에 등장한 이중섭의 소 그림입니다.


2018년 3월 경매에 출품된 이중섭의 <소>


우리나라에서 소 그림 하면 대번에 이중섭을 떠올릴 정도로 소는 이중섭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소재입니다. 대부분 종이에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 것들로,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아 희소성도 아주 높지요. 이중섭은 짧은 생애 동안 다양한 소 그림을 남겼는데, 소의 자세를 보면 머리가 화면 왼쪽을 향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위 작품은 드물게 소의 머리가 화면 오른쪽에 놓여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앞으로 돌진할 듯 솟아오른 어깨와 쫙 벌어진 다리, 솟아 말린 꼬리 등을 보면 영락없는 싸움소의 모습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소의 머리와 몸통, 바닥에 채색된 붉은 물감은 바로 격렬한 싸움의 흔적, 다시 말해 피 흘린 자국입니다. 이중섭의 소 그림으로는 이례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가장 최근에 이 작품이 공개된 건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이중섭, 백년의 신화> 특별전이었습니다.


그때 선보인 작품이 경매에 나왔으니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요. 더구나 근 8년 만에 경매에 등장한 이중섭의 주요 작품이었으니까요. 경매 순서는 31번. 경매 현장의 열기가 서서히 고조될 무렵 드디어 이날의 주인공이 경매 현황판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팽팽한 긴장감과 술렁거림이 교차하는 순간, 18억 원에서 경매가 시작됩니다. 모두들 숨을 죽인 채 경매 진행 상황을 예의주시했습니다.



2018년 3월 7일에 진행된 이중섭 <소> 경매 영상 (서울옥션 제공)



이중섭의 <소>가 세운 두 가지 기록


막판까지 예측할 수 없는 치열한 주고받기 끝에 최종 낙찰 가격은 47억 원. 이중섭의 작품 가운데 역대 최고가 기록을 다시 쓴 순간이었습니다. 이옥경 서울옥션 대표는 “한국 근대 미술의 저력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경매로, 근대 작가들의 위상이 다시금 재평가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47억 원 낙찰이라는 기록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됩니다. 8년 전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됐던 이중섭의 <황소>는 35억 6,000만 원에 낙찰되며 당시 작가 최고가 기록을 세웠지요. 이 기록이 8년여 만에 깨졌습니다. 당시보다 12억여 원 높은 가격에 말이에요.


작가의 새로운 기록을 만든다는 것, 그것은 금전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작가와 작품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재조명하는 기회를 만듭니다. 작가의 새로운 가격 기록이 세워지는 데는 5년이 걸릴 수도, 10년이 걸릴 수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중섭의 이번 작품은 2010년 이후 8년 만에 세워진 기록이었고, 아주 오랜만에 이중섭의 좋은 작품을 소개한 좋은 기회였기에 경매 준비부터 기대가 컸습니다.


이번 작품은 추정가가 20억에서 40억 원 사이로 책정되어 있고, 이전 <황소>의 기록이 있었던 터라 추정가 내에서 낙찰될 것으로 예상을 하고 경매를 진행했습니다. 시작가가 높았던 터라 호가를 1억 원씩 진행했는데, 생각보다 치열한 경합에 금액은 순식간에 30억까지 올라갔고, 그 뒤부터 1억씩 올라가면서 정말 새로운 기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올라가는 기분이었습니다. 36억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제가 부르는 호가 하나하나가 새로운 기록을 쓰고 있었습니다.


관객들도 직원들도 모두 숨죽이며 상황을 지켜보았고, 경매를 진행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제 손끝으로 한국 미술시장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설레었습니다. 여러 명의 응찰자가 치열한 경합을 벌이며, 때로는 높은 금액에 고민하고 망설이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다시 패들이 올라갈 때 관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지고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었습니다.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던 시간은 결국 47억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작품, 그 가치를 매기는 것은 결국 그 작품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경매사를 하면서 경매의 순간을 즐기게 되는 이유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작품의 가치는 작가와 작품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번 결과를 통해 이중섭이라는 작가와 작품을 많은 이가 다시금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작가의 새로운 기록을 만든다는 것, 그것은 금전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작가와 작품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재조명하는 기회를 만듭니다. 작가의 새로운 가격 기록이 세워지는 데는 5년이 걸릴 수도, 10년이 걸릴 수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중섭의 이번 작품은 2010년 이후 8년 만에 세워진 기록이었고, 아주 오랜만에 이중섭의 좋은 작품을 소개한 좋은 기회였기에 경매 준비부터 기대가 컸습니다.

이번 작품은 추정가가 20억에서 40억 원 사이로 책정되어 있고, 이전 <황소> 의 기록이 있었던 터라 추정가 내에서 낙찰될 것으로 예상을 하고 경매를 진행 했습니다. 시작가가 높았던 터라 호가를 1억 원씩 진행했는데, 생각보다 치열한 경합에 금액은 순식간에 30억까지 올라 갔고, 그 뒤부터 1억씩 올라가면서 정말 새로운 기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고 올라가는 기분이었습니다. 36억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제가 부르는 호가 하나하나가 새로운 기록을 쓰고 있었습 니다.

관객들도 직원들도 모두 숨죽이며 상황 을 지켜보았고, 경매를 진행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제 손끝으로 한국 미술시장 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설레었습니다. 여러 명의 응찰 자가 치열한 경합을 벌이며, 때로는 높은 금액에 고민하고 망설이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다시 패들이 올라갈 때 관객 석에서는 탄성이 터지고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었습니다.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던 시간 은 결국 47억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작품, 그 가치 를 매기는 것은 결국 그 작품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경매사를 하면서 경매의 순간을 즐기게 되는 이유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작품의 가치는 작가 와 작품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번 결과를 통해 이중섭이라는 작가와 작품을 많은 이가 다시금 돌아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위) 종전에 작가 최고가 작품이었던 이중섭의 <황소>

(아래) 2010년 <황소> 경매 기록



11년 만에 박수근의 <빨래터> 넘어섰다


또 하나는 이중섭의 그림이 이번 경매를 통해 박수근의 기록을 뛰어넘었다는 점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2007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박수근의 <빨래터>가 45억 2,000만 원에 낙찰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나 엄청난 화제가 됐습니다. 당시 유례없는 경기 호황은 미술계에도 큰 호재로 작용했지요. 유명 화가들의 작품 가격이 나날이 치솟으면서 과열 양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 정점을 찍은 ‘사건’이 바로 박수근의 <빨래터>가 경매에서 세운 사상 최고가 낙찰 기록이었고요.


2007년 경매에서 국내 최고가를 기록한 박수근의 <빨래터>


하지만 그때를 정점으로 미술시장은 다시 긴 불황에 빠져듭니다. 2010년 이중섭의 <황소>가 경매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적잖은 기대감을 품었습니다. 이중섭의 <황소>라면 혹시 박수근의 <빨래터>를 넘어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침체에 빠진 미술시장에 반전의 계기가 마련되지 않을까. 하지만 불황의 늪은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황소>는 <빨래터>보다 10억 원 가까이 낮은 금액에 낙찰됐지요. 그 이후로 이중섭의 작품이 박수근의 기록을 넘어서는 데만 무려 1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만약 이중섭의 <황소>가 2010년이 아닌 지금 경매에 나온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이중섭과 박수근. 우리는 이분들을 ‘국민화가’라 부릅니다. 그만큼 두 화가의 그림들은 우리 국민에게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아 왔어요. 예술품의 가치를 무작정 돈으로만 환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림이 ‘국민화가’란 이름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 건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적어도 국내에서는요. 더구나 두 화가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주요 작품들은 이미 미술관이든 어디에든 죄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만한 수준의 새 작품이 나타나길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최근 이중섭의 <소>가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한 요인은 무엇입니까?


이중섭의 걸작인 소 시리즈 중 하나라는 미술사적 가치와 희소성, 2015년부터 17년까지 3년간 경매시장이 1,700억~1,900억 원대로 회복되어 시장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점, 최고가의 기준이 높아졌고 김환기 작품이 65억 원을 넘어 고가 시장이 열려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침체됐던 우리 미술시장이 성장세로 돌아섰다는 신호로 봐도 될까요?


단색화, 김환기에 대한 수요 증가와 포스트 단색화 및 민중미술에 대한 관심까지 커지며 이미 호조세로 전환 되어 있습니다. 미술사적 가치와 투자 가치가 있는 작가의 작품에 대해 시장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것이죠.

올해 우리나라 미술시장 전망, 어떻게 보십니까?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화랑 시장, 아트페어 시장, 경매시장은 2017년과 비슷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장르별, 작가별, 지역별 차이는 클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이중섭의 <소>가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한 요인은
무엇입니까?

이중섭의 걸작인 소 시리즈 중 하나라는 미술사적 가치와 희소성, 2015년부터 17년까지 3년간 경매시장이 1,700억~1,900억 원대로 회복되어 시장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점, 최고가의 기준이 높아졌고 김환기 작품이 65억 원을 넘어 고가 시장이 열려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침체됐던 우리 미술시장이 성장세로 돌아섰다는 신호로 봐도 될까요?

단색화, 김환기에 대한 수요 증가와 포스트 단색화 및 민중미술에 대한 관심까지 커지며 이미 호조세로 전환 되어 있습니다. 미술사적 가치와 투자 가치가 있는 작가의 작품에 대해 시장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것이죠.

올해 우리나라 미술시장 전망, 어떻게 보십니까?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화랑 시장, 아트페어 시장, 경매시장은 2017년과 비슷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장르별, 작가별, 지역별 차이는 클 것으로 보입니다.



2017년 K옥션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의 작품


2017년 K옥션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의 작품 <고요>


2017년 4월 서울 강남구 K옥션 경매에서 단연 화제가 된 그림은 김환기의 <고요(Tranquillity) 5-IV-73 #310>이란 작품이었습니다. 김환기 화백이 세상을 떠나기 꼭 1년 전인 1973년 미국 뉴욕 체류 시절에 그린 이 대형 전면 점화의 낙찰가는 무려 65억 5,000만 원. 역대 한국 미술품 사상 경매 최고가 기록을 다시 쓰는 순간이었습니다. 가로 205㎝, 세로 261㎝ 크기로 밤하늘의 은하수를 연상시키는 푸른 점과 직사각형 흰색 띠가 특징이지요. 더구나 파랑은 김환기를 대표하는 색상이기도 합니다.


2016년 11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역대 최고가에 낙찰된 김환기의 작품 <노랑>


그로부터 불과 6개월 전, 홍콩에서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 등장한 김환기의 작품 역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지요. <12-V-70 #172>란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화면 전체가 노란색으로 가득 채워진 전면 점화입니다. 세로 2.36m, 가로 1.73m에 이르는 대작으로 1970년에 김환기 화백이 뉴욕에서 그린 그림인데요. 유화물감을 썼으면서도 먹이 번진 것 같은 고유의 미감이 살아 있는 작은 점들이 화폭을 빼곡하게 채운 작품입니다. 앞에서도 설명 드렸듯이 파랑을 주조로 하는 김환기의 다른 점화와 달리 노랑은 희소성이 높습니다. 이 작품은 4,150만 홍콩달러, 우리 돈 63억 2,626만 원에 낙찰되며 한국 미술품 역대 최고가 기록을 세웁니다.


(좌) 2016년 6월 K옥션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에 낙찰된 김환기의 작품 <파랑>

(중) 2016년 4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최고가 기록을 세운 김환기의 작품 <무제>

(우) 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사상 첫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의 작품 <최초>


김환기가 김환기를 넘어서는 역전극은 2016년 내내 국내 양대 미술품 경매사인 서울옥션과 K옥션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접전 양상으로 펼쳐집니다. 2016년 6월 K옥션 여름 경매에서 김환기의 전면 점화 <27-VII-72 #228>(왼쪽 그림)이 54억 원에 낙찰되며 국내 경매 사상 최고가 낙찰 기록을 다시 세웁니다. 불과 두 달 전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의 또 다른 전면 점화 <무제>(가운데 그림)가 세운 역대 최고가 48억 6,750만 원(3,300만 홍콩달러)을 가볍게 넘어선 거죠.


돌이켜 보면 김환기 열풍의 출발점은 2015년 10월 서울옥션의 홍콩 경매였습니다. 김환기 화백이 1971년에 제작한 전면 점화 <19-Ⅶ-71 #209>(오른쪽 그림)는 당시 3,100만 홍콩 달러, 우리 돈 47억 2,100만 원에 낙찰되는데요. 이로써 2007년 경매에서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가 세운 역대 최고가 경매 기록이 8년 만에 깨지게 됩니다. 불과 2년 사이에 김환기의 그림이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된 겁니다.



더 중요한 건 해외에서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가던 시기와 맞물려 실로 일찍이 한국 미술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열풍’을 타게 된 거지요. 위의 표를 보면 10위 안에 김환기의 작품이 8점입니다. 이중섭과 박수근이 각 한 점씩이고요. 경매 시기로 보면 박수근의 <빨래터>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2015년 이후에 시장에서 높이 평가받은 것들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국민화가들의 작품 가격은 더 오를 거라는 점, 만약 최초로 100억 원 시대를 여는 작가가 탄생한다면 그 주인공은 김환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합니다.



추상에서 구상으로…김환기 시대가 열렸다


(좌) 2018년 3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40억여 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항아리와 시>


그런 면에서 지난 3월 29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40억여 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위 작품을 더 주목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시장을 지배한 김환기의 작품은 1970년대 초반에 미국 뉴욕에서 그린 ‘전면 점화’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이었지요. 김환기의 ‘추상미술’은 거듭되는 경매를 통해 탄탄한 시장 경쟁력을 입증합니다. 그런 만큼 앞으로 또 다른 작품이 시장에 나온다면 지금보다 더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한 작가의 작품이 시장에서 탄탄한 신뢰를 구축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김환기 추상 예술의 토대요 뿌리가 되는 뉴욕 시절 이전 작품에 대한 관심까지도 자연스럽게 커지고 있는 것이지요. <항아리와 시>는 우리의 토속적 정서를 대변하는 달항아리와 매화가 그려진 ‘구상미술’ 계열의 작품입니다. 게다가 화면 오른쪽에는 서정주의 시가 한글로 쓰여 있고요. 전면 점화와 달리 한국이라는 지역성이 강한 이런 작품까지 해외에서 기대 이상의 좋은 반응을 끌어낸 건 퍽 의미 있는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환기의 구상 작품이 최근 경매에서 전면점화 못지않은
높은 가격에 낙찰될 수 있었던 요인은 뭘까요?

표면적으로는 양질의 전면점화 품귀현상이겠지만, 내면적으로는 다소 시들해진 단색화 열풍을 감안하여 소장가들이 시장에 내놓기를 회피하는 소극성이 더 크게 작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트바젤홍콩에 꾸준한 한국 주요 갤러리의 참여, 서울옥션 홍콩법인 등 국내 현대미술 작가와 작품의 긍정적 측면을 어필하는 계기를 꾸준히 이어온 점이 해외의 주요 컬렉터에게 보이지 않는 신뢰감을 형성한 점도 10년 전인 2007년의 과열 현상과 차별화를 유도했다고 판단됩니다.

김환기의 작품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우선 단색화 열풍과 무관하게 폭넓은 작품의 성향을 구비했기 때문일 겁니다. 더불어 구상 위주의 탄탄한 국내 내수시장의 지지기반과 뉴욕 시절의 감성적 표현주의의 추상적 조형어법까지 겸비하여 글로벌 마켓의 수요층을 동시에 충족시켜주고 있지요. 더욱이 환기미술재단을 비롯해 국내 굴지의 미술관 및 갤러리, 경매사 등의 지속적인 지원 활동이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거로 보입니다.
즉, 미술시장 측면과 동시 미술사적인 비중을 함께 키워나가는 좋은 사례로 볼 수 있겠습니다.

한국 미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앞으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보다 입체적이고 전방위적인 협업이 필요하겠죠. 특정 작가의 작품가격을 높이는 것보다, 그의 작가적 비중을 높여주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상승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미술관과 갤러리, 평론계, 미디어, 기업 및 소장가 등이 동시에 작가에 대한 조명을 병행해야 합니다. 특히 제도적, 행정적 제도 개선으로 건전한 미술품 소비문화 확산과 장려 정책 역시 빼놓을 수 없겠지요. 또한, 원로/중진작가와 젊은 유망작가의 세대 간 간극을 좁히는 연계성 지원 프로그램도 중요하겠습니다.

김환기의 구상 작품이 최근 경매에서
전면점화 못지않은 높은 가격에
낙찰될 수 있었던 요인은 뭘까요?

표면적으로는 양질의 전면점화 품귀현상이겠지만, 내면적으로는 다소 시들해진 단색화 열풍을 감안하여 소장가들이 시장에 내놓기를 회피하는 소극성이 더 크게 작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트바젤홍콩에 꾸준한 한국 주요 갤러리의 참여, 서울옥션 홍콩법인 등 국내 현대미술 작가와 작품의 긍정적 측면을 어필하는 계기를 꾸준히 이어온 점이 해외의 주요 컬렉터에게 보이지 않는 신뢰감을 형성한 점도 10년 전인 2007년의 과열 현상과 차별화를 유도했다고 판단됩니다.

김환기의 작품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우선 단색화 열풍과 무관하게 폭넓은 작품의 성향을 구비했기 때문일 겁니다. 더불어 구상 위주의 탄탄한 국내 내수시장의 지지기반과 뉴욕 시절의 감성적 표현주의의 추상적 조형어법까지 겸비하여 글로벌 마켓의 수요층을 동시에 충족시켜주고 있지요. 더욱이 환기미술재단을 비롯해 국내 굴지의 미술관 및 갤러리, 경매사 등의 지속적인 지원 활동이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거로 보입니다.
즉, 미술시장 측면과 동시 미술사적인 비중을 함께 키워나가는 좋은 사례로 볼 수 있겠습니다.

한국 미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앞으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보다 입체적이고 전방위적인 협업이 필요하겠죠. 특정 작가의 작품가격을 높이는 것보다, 그의 작가적 비중을 높여주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상승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미술관과 갤러리, 평론계, 미디어, 기업 및 소장가 등이 동시에 작가에 대한 조명을 병행해야 합니다. 특히 제도적, 행정적 제도 개선으로 건전한 미술품 소비문화 확산과 장려 정책 역시 빼놓을 수 없겠지요. 또한, 원로/중진작가와 젊은 유망작가의 세대 간 간극을 좁히는 연계성 지원 프로그램도 중요하겠습니다.



어느 유명 화가의 그림이 수백억, 수천억 원에 팔렸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해외토픽을 장식하고는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럼 우리는?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에요. 한국에서 태어난 게 불행이자 원죄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하지만 이제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으로 시작한 이 글의 제목은 잘못 붙인 것이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미술도 이제는 세계무대에서 얼마든지 통할 수 있고, 또 실제로도 통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했으니까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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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보름달 품은 조선백자의 꽃 ‘달항아리’
김 석
#김석기자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봅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 눈이 시려옵니다. 까닭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요. 가만히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저리도 세상을 환히 비춰주시는 달님. 그 순결한 빛으로, 신이 빚어낸 완벽한 곡선의 아름다움으로 나를 뜨겁게 하는 달님. 창덕궁 후원 연못에 그 달뜬 얼굴을 살포시 비추는 수줍은 당신의 모습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궁극의 아름다움. 절대미의 화신. 그 어떤 표현으로도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순정한 아름다움을 지닌 당신, 보름달.


곁에 두고 아끼는 항아리 한 점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화가가 있었지요. 그분의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보름달을 품은 항아리라니. 그것도 순결한 조선백자 안에서 다소곳이, 그러면서도 뜨겁게 광채를 내뿜는 그 빛이라니 말입니다. 그래서 화가는 하늘 위에 보름달 같은 항아리를 넉넉하게 그려냈지요. 그리고 어루만지고 또 그리고 어루만지고… 그렇게 화가의 그림 속에서 달을 닮은 달항아리는 주연으로, 조연으로, 엑스트라로 소품으로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수화 김환기(1913∼1974)의 그림 이야기입니다.



항아리와 매화가지, 1958, 캔버스에 유채, 58×80cm



파란 하늘을 빼닮은 배경에 봄의 전령사로 불리는 매화 가지가 하나가 화면 왼쪽에서 가로로 길게 뻗어 나왔습니다. 화면 중심에는 마치 보름달이 뜬 것처럼 눈부시게 하얀 달항아리 한 점이 떠 있어요. 화가의 마음 안에서 달과 항아리는 분명 하나였을 겁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영락없이 밤하늘에 뜬 보름달이 매화 가지에 걸린 모습이니까요. 김환기의 달항아리 예찬은 끝이 없었습니다. 화가의 눈에 비친 백자 달항아리는 가장 한국적인 멋이 살아 있는 소재였으니까요.




내 뜰에는 한 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몸이 둥글고 굽이 아가리보다 좁기 때문에 놓여 있는 것 같지가 않고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희고 맑은 살에 구름이 떠가도 그늘이 지고 시시각각 태양의 농도에 따라 청백자 항아리는 미묘한 변화를 창조한다.
칠야삼경에도 뜰에 나서면 허연 항아리가 엄연하여 마음이 든든하고
더욱이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인해 온통 내 뜰에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중략)
어쩌면 사람이 이러한 백자항아리를 만들었을꼬……
한 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촉감이 동한다.
싸늘한 사기로되 따사로운 김이 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


- 김환기 1955.5




백자와 꽃, 1949, 캔버스에 유채, 40.5×60cm, 환기미술관 소장



김환기의 달항아리 그림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자와 꽃>입니다. 달항아리와 꽃이 어울린 간결한 화폭에서도 어김없이 주인공은 화면 가운데를 차지한 달덩이 같은 항아리에요. 항아리 아래 굽 받침이 있으니 달항아리를 그린 것이겠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주는 그 형상은 밤하늘을 환히 밝혀주는 둥글 보름달입니다. 김환기의 그림에 달항아리가 처음 등장한 건 1949년입니다. 그 뒤 6.25 전쟁으로 몇 년의 공백을 거쳐 1956년부터 집중적으로 달항아리 그림이 쏟아집니다. 2012년 초에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전에 맞춰 발간된 두툼한 도록을 확인해보니 달항아리가 등장하는 작품이 모두 스무 점입니다. 화풍에 변화가 생기는 1959년까지 김환기 그림의 주제는 줄곧 달항아리였어요.



(좌) 항아리, 1956, 캔버스에 유채, 100×81cm

(우) 항아리와 매화, 1954, 캔버스에 유채, 45.5×53cm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모두가 흰 빛깔이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고요하기만 한 우리 항아리엔 움직임이 있고 속력이 있다. 싸늘한 사기지만 그 살결에는 다사로운 온도가 있다.
실로 조형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과장이 아니라 나로선 미에 대한 개안(開眼)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둥근 항아리, 품에 넘치는 희고 둥근 항아리는 아직도 조형의 전위에 서 있지 않을까.


- 김환기 1963.4




한국적인 것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을 절절하게 토로한 구절입니다. 달항아리 화가 하면 김환기를 첫손에 꼽듯 우리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뼛속까지 느끼고 상찬해마지 않았던 또 한 분의 이름을 떠올립니다. 혜곡 최순우(1916∼1984). 누군가 하시겠지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을 쓴 분이라고 하면 아, 하고 무릎을 치실 거예요. 사실 지금 달항아리가 이만한 대접을 받게 된 건 전적으로 최순우 선생의 공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으니 선생의 글을 다시 찬찬히 음미해 봅니다.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들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중략)
아무런 장식도 고운 색깔도 아랑곳할 것 없이
구워 낸 백자 항아리의 흰빛의 변화나 그 어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을
우리는 어느 나라 항아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대견함을 느낀다.



백자 달항아리, 조선시대, 높이 46.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달항아리는 18세기, 즉 영조와 정조 임금 시기에 조선 왕실 도자기를 구웠던 관요(官窯)인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와 분원리 가마에서 만들어진 보름달처럼 둥근 항아리를 일컫습니다. 크기에 상관없이 형태와 제작 방식이 같으면 ‘달항아리’로 부르지요. 하지만 우리가 흔히 달항아리 하면 보게 되는 것들은 대체로 높이 40센티미터가 넘는 큰 항아리(大壺)입니다. 위 사진 속 달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데요, 유물 이름이 그냥 백자호(白磁壺)라고 되어 있지만 높이가 46센티미터이니 정확히는 백자대호(白磁大壺)가 맞습니다. 우리야 이런 것 저런 것 따질 것 없이 달항아리라 부르면 그만이겠지만요.


겉모습만 보면 달항아리는 비대칭입니다. 매끈한 균형과 흠잡을 데 없는 좌우 비례를 갖춘 게 아니라 좌우가 엇박자입니다. 그래서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조금씩 다 다르지요. 천의 얼굴을 지녔다고 해야 할까요. 왜 이렇게 됐냐면 달항아리를 한 번에 가마에서 구워낸 게 아니라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든 뒤에 둘을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제아무리 노련한 도공도 당시의 기술로는 한 번에 구워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 결과 달항아리의 몸통 가운데 볼록한 부분에 이런저런 흔적이 남습니다.





이 달항아리를 한 번 보세요. 몸통의 가운데 좌우가 어색할 정도로 비대칭이지요. 이 사진은 한 각도에서만 본 모습이라, 실제로 빙 돌아가면서 보면 360도 전부 다르답니다. 그런데 달항아리는 이게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한 매력으로 여겨지거든요. 기술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만든 것인데 무슨 장점이고 매력이냐고요? 왜 못생긴 도자기를 달항아리라고 부르면서 조선백자의 최고봉으로 다들 칭송하느냐고요? 색채도 문양도 없이 그냥 희끄무레한 빛깔에 성의라고는 도통 없어 보이는 항아리가 무엇이 그리 대단하냐고요?




이웃나라 중국 자기나 일본 자기들이 그렇게 다채로운 빛깔로 온통 사기그릇을 뒤덮던 시대에
우리는 마치 산 배꽃이나 젖 빛깔에도 비길 수 있는 순정 어린 흰빛의 조화를 유유하게 즐겨왔으니
과연 한국 사람은 백의민족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이 어리숙하면서도 순진한 아름다움에
정이 간다 하면 혹시 심미에 대한 건강한 태도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조선 자기의 아름다움은 계산을 초월한 이러한 설명이 필요하리만큼
신기롭고도 천연스러운 아름다움에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 최순우






그렇다면 달항아리는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었을까요? 저도 그게 궁금해서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소장품 검색을 해보니 ‘용도’ 란에 ‘음식기’라고 돼 있습니다. 음식을 담는 그릇이었단 얘긴데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은 도자기 전문가로 유명한 윤용이 선생의 책 <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달항아리의 정확한 용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조선 항아리를 수집하던 일본인들이
양반가의 뒤주 위에 이 달항아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 구전되기도 합니다.
또한, 가끔 표면에 간장 얼룩 같은 이 배어 나온 예도 있어 장류를 담는 데도 일부 사용된 듯 싶습니다.




(좌) 백자 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44.5cm, 국보 제309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우) 백자 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41cm, 보물 제143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왼쪽은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국보 달항아리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국보급 달항아리 가운데 가장 완벽한 형태미를 자랑하는 최고의 명품이지요. 그런데 항아리 표면을 자세히 보시면 짙은 색으로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색깔로 보자면 아마도 간장을 담아 사용하지 않았는가 여겨집니다. 최근 <조선 예술에 미치다>란 책을 낸 고미술 수집가 전기열 씨에 따르면, 우리 도자기는 쓰면 쓸수록 표면에 ‘땟물’이 배는 성질이 있다고 하더군요. 항아리 표면에 바른 유약이 갈라진 틈으로 장이 스며들어 얼룩이 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또 달항아리의 또 다른 매력을 이룹니다. 전기열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월의 땟물에 의해 그릇에 얼룩이 지면서 더욱 자연스럽고 고풍스러운 정취가 물씬 풍겨 나온다.
그 풍취는 조선 도자기가 지닌 매력 중에 가히 최고 매력으로 손꼽을 만하다.




만약 이 얼룩이 단점으로 치부됐다면 이 달항아리가 감히 국보 자리를 넘볼 수 있었을까요.


오른쪽의 달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보물입니다. 입 주둥이 부분을 확대해서 보면 역시 얼룩이 져 있지요. 마치 맛있는 음식을 실컷 다 먹고 나서 입가에 슬쩍 묻은 걸 미처 닦아내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역시 색깔로 봐선 간장 같은 장류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사실 아깝습니다. 이 멋진 항아리에 장을 담다니요. 그런데 사실 지금 우리가 고미술품으로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그 시대에는 뭔가 다 실생활에 쓰려고 만든 것들이란 점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후손들이 달항아리를 신줏단지 모시듯 박물관에 귀하게 모셔 놓고 감상하는 시대가 됐으니 조상님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김환기 화백과 최순우 선생은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깨우쳐준 선각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달항아리가 대중적으로 이만한 대접을 받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에요. 지금 경복궁 광화문 왼쪽에 자리 잡은 국립고궁박물관은 2005년에 문을 열었는데요.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왕실 유물을 제치고 박물관 개관 기념 특별 전시회의 주인공이 된 유물이 다름 아닌 ‘달항아리’였다는 점입니다. 이 전시에 엄청난 관심이 쏠리면서 달항아리는 일약 스타급 유물로 떠오르게 되지요.



(좌) 백자 달항아리, 조선 18세기, 높이 45.0cm, 일본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우) 백자 달항아리, 조선 18세기, 높이 45cm, 영국박물관 소장



바로 그 달항아리 특별전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게 바로 왼쪽에 있는 달항아리입니다. 일본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에 소장된 이 달항아리엔 실로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의 이토 이쿠타로 관장은 특별전 도록에 실은 글에서 이 달항아리에 얽힌 놀라운 사연을 소개했는데요. 내용인즉슨 이렇습니다. 원래 이 항아리는 일본의 한 사찰에 귀하게 소장돼 있었는데 1995년에 도둑이 들어 항아리를 들고 도망가다가 경비원들에게 쫓기자 그만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답니다. 당연히 산산조각이 났지요.


깨진 파편만 300여 개. 사찰 측에서 이걸 가루까지 모조리 쓸어 담아서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을 했고, 미술관 측이 2년 동안 조각 맞추기를 해본 뒤 복원이 가능할 걸로 판단해 전문 복원기술자에게 맡겼답니다. 그랬더니 위의 사진으로 보시는 것처럼 6개월 만에 완벽하게 복원을 해냈다는 거예요. 그런데 달항아리를 감쪽같이 되살려낸 복원 전문가의 그다음 말이 더 압권이었답니다.




여기까지가 수리 중간단계입니다. 앞으로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디서 어떻게 보더라도 파손되었던 것을 알 수 없도록 복원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자세히 보면 복원했음을 알 수 있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양쪽 다 가능합니다만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이 상처투성이 달항아리는 가까이서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손때 묻었던 자국에다 조각을 이어붙인 자국까지도 미세하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정도로 복원해낸 솜씨였으니 그런 흠집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었지만 박물관 측은 그냥 남겨두기로 했다지요. 그것마저 그 도자기가 걸어온 역사니까요. 이런 기구한 사연 덕분에 유홍준 선생 말마따나 이 항아리는 미술품 복원의 기적이라는 칭송과 함께 전설적인 조선백자 달항아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일본의 놀라운 문화재 복원 기술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네요.


특별전에 출품된 달항아리는 모두 9점이었습니다. 출품작이 모자란 것 아닌가 싶지만 이만큼 모으기도 쉽지가 않지요. 국내외를 통틀어도 온전하게 남아 있는 달항아리는 스무 점 정도라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일본에서 온 달항아리 못지않게 관심을 끈 건 영국에서 건너온 또 다른 달항아리입니다. 저 유명한 영국박물관 한국실 전시품으로 우리 도자기에 흠뻑 매료된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Howell Leach, 1887~1979)가 1935년 한국에서 구입해 가져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며 좋아했다는 일화로 유명하지요. 이걸 1997년에 영국박물관이 구입해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 오른쪽의 백자 달항아리입니다.


흔히 달항아리를 두고 백자의 제왕이니, 한국미의 극치니 칭찬을 아끼지 않은 건 비단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아니었어요. 외국인들의 달항아리 예찬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저명한 동양미술사 학자인 마이클 R. 커닝햄(Michael R. Cunningham)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달항아리는 도자기라는 외형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한국적인 ‘목소리’의 영예로운 표상이 될 수 있다.
아니 진실로 그렇게 여겨져야 한다.
감상자의 시선에 일순간 비치는 곡선 하나에도 비범한 힘이나 또는 미묘한 굴곡의 변화가 담겨 있는,
천성적으로 인공이나 자의식이라고는 전혀 찾아보기 어렵고 꾸밈없고, 확고한,
그리고 비할 데 없이 한국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뿐인가요. 앞서 소개해드린 특별전에 달항아리를 출품한 일본인 미술관장은 중국의 화려한 채색자기와 독일의 마이센 자기 등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때까지 규범으로 내려온 중국적인 조형 이념의 주술에서 해방되어
민족의 가슴속 깊은 혼의 형태가 출현한 것 같다고 해석할 수 있다.
조선 중기 백자대호의 형태는 바로 한민족이 가진 가장 뛰어난 자질이 생성해낸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좌) 백자 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45cm, 국보 제310호, 남화진 소장

(우) 백자 달항아리, 조선 18세기, 47.8×54.5cm, 개인 소장??



그래서 <청출어람의 한국미술>의 저자 안휘준 선생은 중국에서 영향을 받았으되 우리 고유의 색깔과 독창성을 발휘해 한 차원 높은 예술성을 보여준 대표작의 하나로 주저 없이 왼쪽 사진의 18세기 달항아리를 꼽았습니다. 위 사진 속 달항아리는 앞서 소개해드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과 함께 2007년에 나란히 국보로 지정되며 달항아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지요. 앞에서도 잠깐 인용한 바 있는 도자기 전문가 윤용이 선생도 “이 달항아리가 갖는 고유의 순정성은 세계의 그 어떤 그릇과도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미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상찬해 마지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달항아리는 모두 7점입니다. 우학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백자 달항아리가 가장 이른 1991년에 국보 제262호로 지정됐고, 이후 리움 소장품과 남화진 씨 소장품이 나란히 2007년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됐습니다. 보물은 4점입니다. 아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과 김영무 씨 소장품, 최상무 씨 소장품, 디아모레 뮤지엄 소장품이 나란히 보물 제1437~9, 1441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지정문화재가 아닌 것까지 다 모아도 스무 점이 조금 넘을 정도여서 달항아리는 한 점 한 점이 모두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최근에 이따금씩 일본인 소장자에게서 나온 달항아리가 미술품 경매에 나오곤 하는데요. 일본인들이 우리보다 먼저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직도 어느 일본인의 집에 잘 생긴 달항아리가 떡 하니 놓여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실제로 2015년 12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 출품된 달항아리는 한국인 소장자에게 21억여 원에 낙찰돼 국내로 돌아옵니다. 이 유물은 한 일본인 소장자가 50년 넘게 보관해오던 것인데, 워낙 아끼는 물건이라 선뜻 경매에 내놓지 않으려 했다는군요. 경매 주관사인 서울옥션이 무려 3년 넘게 공을 들여 설득했다고 하지요. 그렇게 경매에 나왔으니 우리가 그 존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고, 한국인이 낙찰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지난 5월 28일(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 일본인 소장자에게서 나온 또 한 점의 달항아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위 사진 오른쪽 달항아리인데요. 높이가 무려 54.5센티미터로 지금까지 나온 달항아리 가운데 최대 크기를 자랑할 뿐 아니라 보존 상태도 매우 좋습니다. 그런데 사진으로만 봐도 항아리 모양이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과는 조금 달라요. 대체로 달항아리는 가로 세로 비율이 비슷해서 완연하게 둥근 형태를 띤 것을 최고로 치는데, 이 달항아리는 몸통 지름보다 키가 더 커서 세로로 길쭉한 모습이거든요. 게다가 항아리 표면에 유약이 흘러내린 자국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지요. 전성기를 지난 시기에 만들어진 달항아리가 아닐까 싶은데요. 추정가 10~20억 원에 경매에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새 주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시,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위에서 인용한 연구자들은 한결같이 달항아리를 조선백자의 절정이자 희대의 도자 명품으로 꼽습니다. 그분들의 의견을 모두 모아서 간결하게 정리를 해본다면 결국 달항아리는 가장 우리다운 멋을 품은 그릇이 아닌가 싶어요. 어찌 보면 참 특징 없고 밋밋하고 싱겁기까지 한 항아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조선 예술에 미치다>의 저자 전기열 씨는 바로 그 ‘지극한 평범함’에서 답을 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달항아리는 지극히 평범하게 생겼다. 우리는 이 사실을 솔직하게 시인해야 한다.
선이든 때깔이든 평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평범함’의 가치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달항아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달항아리는 도공이 ‘하나의 마음’을 표현한 형상이다. 분별심 없는 세계, 집착심 없는 세계가 평범한 세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새삼 우리 자신들의 삶을 재확인하게 된다.




달항아리 특유의 담백한 순정의 미는 서양인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첩보영화 007 시리즈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직장 상사 마담 엠 역으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낸 관록의 배우 주디 덴치(Judi Dench)를 기억하시는지요. 2009년 영국의 저 유명한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은 주디 덴치를 포함한 명사 다섯 명에게 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골라보라는 과제를 던지는데요. 그때 주디 덴치가 다른 모든 작품을 제치고 선택한 것이 바로 한국의 현대 도예가 박영숙의 달항아리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이 항아리는 심미적으로 매우 아름답고 정교한 세공품입니다.
세상의 근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저는 이것을 하루종일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내가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소장품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것을 택하겠습니다.




강익중 <삼라만상>, 1984-2014, 패널에 혼합재료, 동에 크롬도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후대의 예술가들의 눈에도 달항아리가 예사롭게만 보이진 않았겠지요. 구본창 작가는 사진으로, 고영훈 작가는 극사실회화로 달항아리의 세계를 각별하게 탐구했습니다. 특히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강익중 작가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작품에 달항아리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아로새겨왔는데요. 국립현대미술관이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새로 수집한 미술품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이는 전시회에 강익중 작가의 <삼라만상>이 소개돼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된 별도의 전시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 만여 개에 이르는 작은 캔버스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마치 거대한 우주공간에 서 있는 느낌을 줍니다. 1984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30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인데요. 개개의 캔버스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만사 온갖 것들이 깨알같이 모여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를 구성하고 있지요. 그 가운데는 역시 강익중 작가가 그동안 지속적으로 그려온 달항아리가 군데군데 알알이 박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달항아리의 특별한 아름다움은 오롯합니다. 보름달처럼 넉넉한 한국인의 마음을 한가득 껴안은 채 말입니다.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