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복구에 힘쓰던 50년대의 농·수산물과 60년대의 생필품, 본격적인 산업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7~80년대의 공산품까지. 우리나라의 명절 인기선물은 각 시대의 변화상에 따라 그 맥을 함께해왔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90년대와 00년대 그리고 지금의 10년대까지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1990년대
|1990년대 신세계 명절 선물 카달로그(전인화/고소영)
1990년대는 고가제품과 실용적인 중저가 선물세트가 양극화되어 나타난 것이 주된 특징입니다. 이는 당시의 소비의식과 경제 상황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1980년대 호황이던 경제가 199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X세대의 등장에서도 알 수 있듯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시기이기도 했죠. 당시 소비자들은 알뜰구매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이에 따라, 실용적인 중저가 상품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식품의 경우 햄, 참치 등 규격화된 상품들이 감소하고 지역특산물에 대한 수요가 급속히 증가합니다. 먹어 없어지는 품목보다 두고두고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변 잡화부문이 점차 강세를 띠는 것도 이 시대의 특징으로 분석됩니다.
|건강 식품 매장(왼) / 신세계 상품권 5종(오)
한편, 1990년대에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인삼, 꿀, 영지 등 건강 기호식품이 선물품목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도서상품권이나 상품권이 선물로 등장한 것도 이때입니다. 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과 모든 것이 풍족해진 시대를 반증하는 변화입니다. 상품권이 선물로 등장하면서 선물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비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개인적 성향이 중시되는 사회적 변화와 함께 대중적인 선물품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시기 눈여겨 볼만한 선물로는 골프, 헬스 기구 등 스포츠 레저상품입니다. 또한, 할인점이 급성장하면서 참치나 조미료 세트 등 저가형 규격식품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백화점 선물세트는 선물 증정용으로, 할인점 선물세트는 자기소비나 단체선물로 사용된 것입니다.
급변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2000년대 선물
|2000년대 신세계 명절 선물 카탈로그(김혜수/손태영)
|정육 및 와인 세트(왼) / 상품권 코너(오)
2000년대 선물은 1990년대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양극화 현상이 연장됩니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고가제품은 더욱 고급화되고, 할인점을 중심으로 한 실용적인 중저가 선물세트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강세 선물인 정육 세트 외에 와인과 올리브유 등 이른바 웰빙 상품의 인기가 꾸준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소용량 제품과 간편 조리상품도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등장한 상품권은 이제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이 되었습니다.
2010년 이후에는 자녀가 좋아하고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선물이 인기입니다. 전자완구, 입체서적, 퍼즐, PMP 등 감성과 지능을 높일 수 있는 상품이 선물로 등장한 것입니다. 또한, 재테크를 위한 금융상품을 선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최근 가장 인기 있는 단어인 힐링을 테마로 한 선물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미에 잘게 썬 솔잎을 섞은 효소나 간의 피로를 풀어준다는 구관모 식초 등이 이러한 웰빙 힐링 선물입니다.
지금까지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명절 인기선물 변천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에서 명절은 일 년 중 가장 풍요로운 시기입니다. 이 시기 선물이 등장한 이유도 이러한 풍요로운 마음을 나누기 위함일 것입니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시대상과 함께 선물 풍토도 꾸준히 변화해 왔습니다. 하지만 명절 선물은 그간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대한 마음의 표시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뜨거웠던 여름철 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이 다가오는 9월, 나들이 가기에 좋은 계절이지만 일교차가 심해 건강관리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여름철 무더위에 지친 몸에 활력을 불어 넣고 환절기 질환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가을 ‘제철 음식’이 제격인데요, 여기에 제철 음식의 특성에 어울리는 와인을 곁들이면 풍미는 살려주고 음식의 맛은 더욱 좋아집니다. 9월에는 제철음식과 잘 어울리는 와인으로 맛과 건강을 동시에 챙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향긋한 송이버섯을 곁들인 한우구이와 묵직한 이태리 레드 와인
향긋한 향의 송이버섯이 곁들여진 한우구이에는 레드 와인을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당한 바디감이 탄력 넘치는 송이버섯과 한우의 씹히는 질감을 살려 잘 어울립니다. 네비올로 품종 100%로 양조한 지디 바이라 바롤로 알베는 부드럽고 잘 무르익은 탄닌이 입안을 감싸는 질감이 매우 인상적으로 한우구이의 맛을 더욱 돋워 줍니다.
바롤로는 미식의 고장 이태리 피에몬테에서 나는 최고급 명품 와인인데요.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바롤로 와인이 오랜 기간 두고 숙성해야 맛이 부드러워지지만 신세계 L&B의 지디 바이라 바롤로 알베는 지금 바로 마셔도 좋습니다. 과일 향이 풍부하고 매콤한 향신료 향, 꽃 향기가 어우러져 우아한 이태리 와인의 스타일을 그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영양 만점 대하구이와 감칠맛 돋우는 칠레산 화이트 와인
가을에 더욱 맛과 영양이 깊어지는 대하는 기분 좋은 신맛을 지닌 소비뇽 블랑 화이트 와인과 잘 어울립니다. 캠핑장이나 야외에서 바비큐로 먹어도 좋고 집에서 간단하게 즐기려면 굵은 소금을 깔아 둔 팬에 고소하고 짭짤한 대하를 올려 살짝 익혀내면 근사한 와인 안주가 됩니다.
1800년대부터 가문 대대로 와인을 만드는 칠레의 유서 깊은 와인생산자 ‘운두라가’에서 만드는 대표 와인입니다. 파인애플, 구아바, 레몬 등 상큼한 열대과일 향과 더불어 달콤한 꽃 향기, 허브 향이 매력적인 와인인데요. 새콤한 산미가 식욕을 돋우고 입안에서 느껴지는 진한 과일 캐릭터와 생동감 있는 산미가 좋은 여운을 선사합니다.
담백한 전어구이와 깔끔한 프랑스 화이트 와인
애주가들과 미식가들이 가을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신선한 제철 해산물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가을의 최고 별미로 불리는 전어구이에는 담백한 맛을 살려줄 수 있는 상큼하고 시원한 느낌의 화이트 와인이 잘 어울립니다.
프랑스 론 최고의 생산자로 꼽히는 와인명가 이기갈에서 만드는 코트 뒤 론 화이트 와인은 새콤달콤한 과일 향과 향긋한 꽃 향 넘치는 비오니에를 주 포도품종으로 해 루산느, 마르산느, 끌레레뜨, 부르불랑 등 론 지방의 전통적인 화이트 품종을 한데 섞어 양조한 독특한 풍미의 와인입니다. 살구, 복숭아 향과 향긋한 아카시아 꽃 향이 풍부하고 부드러우며 산뜻한 산미를 지녀 차갑게 보관 후 전어구이와 함께 곁들이면 비린 맛은 잡아주고 깔끔한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맹자는 공자와 더불어 유학이라는 사상체계를 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유학사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맹자 철학의 핵심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명제였던 동시에 이후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의 정치와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일대 선언이었습니다.
2천년 유학사의 정통 이념, 맹자의 성선설
사람의 본성은 과연 선할까요? 굳이 맹자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이런 의문을 품어보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 만연한 폭력과 막말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현실에서 모든 인간의 착한 본성을 긍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겸허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러 남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때로 이기심과 욕망이 앞서 타인을 도외시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나쁜 사람은 아닐지언정 딱히 착하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따금 시기나 질투, 교만 같은 못난 감정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일까요? 거기에도 선뜻 동조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흉악한 소식 말고도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세상에 적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재해로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는가 하면 주변의 선행을 목격했을 때 설사 남의 일이라도 행복감을 느끼곤 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남에게 나쁜 말을 하고나면 기분이 언짢아지고 선의와 호의를 베풀었을 때 뿌듯함과 기쁨을 느낍니다. 이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일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사람의 본성이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는 절충적인 답이야말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 아닐까요? 그러한 결론이야말로 우리의 현실인식과 경험에 가장 잘 부합하니까 말이죠. 실제로 그와 유사한 견해를 주장한 이들은 맹자 당시에도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맹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 맞서 맹자는 모든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성선설을 이천 년이 넘는 유학사의 정통이념으로 확립시켰습니다.
본능처럼 내제된 인간의 ‘선함’
맹자는 대략 기원전 372년에 태어나 기원전 297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부르는 시기를 살았습니다. 전국시대는 이른바 ‘천자의 나라’였던 주(周)나라가 권위를 완전히 상실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자들이 저마다 세상의 주인이 되겠노라 각축을 벌이던 시기였습니다. 말하자면 서로 속이고 죽이는 전쟁과 정복이 일상이 된 시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당연시되던 비정한 시대였습니다. 그처럼 힘의 논리로 점철된 혼란의 시기에 맹자는 대체 무슨 근거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암흑과 절망의 시대를 위로하려는 마음에서 발로한 터무니없는 망상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맹자의 믿음은 근거 없는 희망사항이나 억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선의 근거를 가까운 일상적 체험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눈앞에서 어떤 아기가 엉금엉금 기어가 우물에 빠지려는 순간을 목격했다고 합시다. 그 아기가 누구의 아이인지 알아보려 하기 전에,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재빨리 팔을 뻗어 아기를 구하려 할 것입니다. 그 찰나의 순간에는 “아기를 구해서 부모에게 보상을 받아야지!”라는 보상심리나 “아기를 구하지 않으면 남들이 욕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 같은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우리는 아무 사심 없이 순수하게 드러나는 자연스런 도덕 감정을 느낍니다. 그 순간 아기를 구해야겠다는 자발적인 마음은 마치 우리가 레몬을 보는 순간 입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맹자는 그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인간의 선한 본질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에는 어떤 인위적인 사심이나 이해타산이 개입하기 전에 원초적으로 작동하는 도덕적 씨앗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착한 행동은 어떤 외적인 강제나 이해득실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잠재한 자연스런 본성의 발현입니다. 즉, 우리에겐 타인의 고통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공감의 능력이 본능처럼 내재해 있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이었습니다.
모든인간은 선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착한 마음의 씨앗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악한 행동을 저지르곤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인간의 선한 자질이 그 자체로 완전태가 아니라 아직은 작고 여린 싹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질이 매우 작고 미약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물에 빠지려는 아기를 보고 철렁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음 순간 모른 척 외면한다든지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맹자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일 뿐 인간의 본질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맹자는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어떤 외적인 장애요인 때문에 마음의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태라고 여겼습니다. 우리가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은 천성이 고약해서가 아니라 천성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만 인간의 착한 본성은 아직 작은 싹에 불과하므로 잘 보호하고 길러내는 후천적인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면에서 맹자가 말한 성선이란 모든 인간이 천사처럼 착하기만 할 뿐 악한 구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서 그의 주장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선하다”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선하게 될 수 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즉 자신이 타고난 자질을 잘 따르고 개발한다면 누구라도 선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본성의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요인들을 제거하고 착한 마음의 싹이 잘 배양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공감과 배려라는 인지상정 – 맹자와 제나라 선왕의 대화
맹자가 당시 강대국이었던 제나라의 선왕과 나누었던 대화는 맹자 성선설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일례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제선왕은 대청에 앉아 있다가 제사의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끌려가는 소를 보게 됩니다. 그는 죽음을 직감해 발버둥 치며 끌려가는 소를 보고 딱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견딜 수 없어진 왕은 마침내 소를 살려주고 대신 양을 잡아 제물로 쓰라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전해지자 백성들 사이에는 왕이 인색하게도 소가 아까워 양을 대신 쓰게 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에 왕은 “내가 일국의 왕이거늘 소 한 마리가 아까워 양을 썼겠는가? 단지 소가 불쌍해서 그랬을 뿐”이라고 해명하지만, “그럼 소만 불쌍하고 양은 불쌍하지 않은가?”라는 반문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왕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이유에서 나온 것인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토로합니다.
그러자 이에 대해 맹자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즉 소의 경우 왕이 그 두려워하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에 측은한 마음이 일어났지만 양의 경우는 직접 보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이를 통해 맹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앞에서 고통받는 존재를 외면하지 못하는 선한 마음이 있음을 논증합니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살아 있는 짐승을 보고서는 차마 그것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며, 그 애처로운 소리를 듣고서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선한 마음의 출발점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연민과 공감을 바탕으로 그 마음을 멀리 있는 존재들에게까지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위의 대화에 이어서 맹자는 짐승에게조차 미치는 왕의 은혜로운 마음이 어째서 백성에게는 미치지 않는지를 질책합니다. “왕께서는 가련한 소 한 마리에게조차 연민을 느끼시는데, 어찌하여 도탄에 빠져 죽어가는 백성들에게는 그 마음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집채만한 무게를 들 수 있는 사람이 그보다 가벼운 깃털 하나를 들지 못한다고 하면 말이 되겠는가? 짐승에게도 미치는 왕의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지 않는 것일 따름이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맹자의 주장은 강력한 감정적 호소력을 발휘합니다. 운전 중 도로변에 죽어 있는 야생짐승만 봐도 그 고통이 느껴져 마음이 철렁한 것이 우리의 인지상정 아닐까요? 하물며 살아있는 짐승은 물론이요, 그보다 존귀한 사람의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 또는 타자의 고통에 공명하고 그것을 줄여주고자 하는 마음의 싹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감의 능력, 배려의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선한 본성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훌륭한 인격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하지만 본성의 역할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마음의 싹을 외면하지 않고 잘 키워나가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어떤 외적 압박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항상 선한 행동을 실천할 수 있는 튼튼한 인격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입니다. 선한 본성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훌륭한 인격은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본성을 외면해 자신을 부도덕의 나락에 빠지도록 방치하는 것을 맹자는 자포자기(自暴自棄)라고 불렀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거스르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고 내다버리는 짓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선한 마음의 싹을 가지고 태어나 스스로의 결단과 노력을 통해 그것을 키워나가는 존재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타인의 행복에 함께 기뻐하는 마음, 그것이 맹자가 말한 인간의 본질이며 다른 짐승과 달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바탕입니다. 도덕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없던 것을 새로 창조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있는 배려와 공감의 마음을 잘 확충하고 예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